나의 고향은 경북 상주시 화남면 평온1리 247번지이다. 이곳에서 십리를 서쪽으로 가면 충북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이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시절을 보냈다. 70명 정도가 함께 공부했다. 전학을 가고 오는 친구들도 있었고 70명이 한 반으로 하기에는 너무 많고 두 반으로 하기에는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작아서 2반인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는 한 반인 경우도 있었다. 6년 동안을 함께 했으니까 얼마나 정이 들었을까 초등학교 동창생들 중에서 나는 가방 끈이 가장 긴 편이다. 동창들중에 많은 친구들은 초등학교만을 공부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만을 졸업해도 충분했던 것으로 생각했던 부모들도 많이 있었던 것같았다.
가장 소풍을 많이 갔던 곳이 경북과 충북의 경계지역에 있는 상주바위 보은 바위가 있는 냇가이다. 그리고 종종 마을 마다 조금 알려진 곳으로 소풍을 갔던 적이 있었다. 삶은 계란과 밤을 사갔던 적이 있었고 사이다와 콜라를 맛있게 먹은 기억도 난다. 옥수수와 고구마를 싸가지고 갔던 기억도 많다. 용돈을 넉넉하게 받아온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적도 많았다. 운동회는 모든 마을의 축제였다. 달리기를 하면 늘 6명 중에서 2등, 3등을 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친구 중에 한 명이 우리 반에 대표선수일 정도로 잘 뛰는 친구가 있어서 늘 2, 3등에 머물고 말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친구보다 앞서가려고 트랙안으로 돌기도 했지만 친구(김부들)를 따라가기는 역부족이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재원이 친구는 나를 사회박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 친구 기억으로는 내가 선생님보다 사회를 잘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선생님보다 잘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옛날을 기억하면서 사회를 잘 했던 친구로 나를 기억하는 것같았다.
가방 끈이 길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나는 별로 그렇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보면 친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와는 달리 목사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지면서 살아가니까 친구들과는 조금은 다른 길을 걸어왔던 것같았다. 그런데도 초등학교친구들이 그렇게 좋고 행복하다. 그 동안 교회담임목사로 활동했으니까 특별히 시간을 내는 것은 힘들었다. 특별히 친구들이 주로 모임을 가졌던 8월 15일은 교회에서 늘 행사가 있는 날이었고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새벽기도회를 늘 인도해야 하겠기에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늘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주로 신학교 교수사역을 하고 있으니까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어서 작년 여름에 처음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앞으로는 개근을 하려고 하는데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이제 남은 생애를 셈해보면서 살아야 할 시간이 되어서 그런 모양인 것같기도 하다. 50대 중반을 지내면서 이제는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그렇게 기다려졌다. 마치 소풍을 가기 전에 잠못이루면서 소풍날을 마냥 기다렸던 것처럼 초등학교 동창들의 만남을 기다렸다. 작년(2008년) 8월 15일에 처음으로 40년만에 동창모임에 처음 참석했다. 1968년 2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모른다.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달랐지만 반가웠고 기뻤다. 나이가 들어서 만나면 이런 비교 저런 비교를 하면서 저 사람과의 만남은 얼마나 유익이 될 것인가를 따지면서 이해관계의 만남이 계속되는데 초등학교 동창들의 만남은 그렇지 않은 것같다.
올해 모임은 친구 박명화가 수고를 많이 했다. 금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삼가리라는 곳에는 모임을 가졌다. 옆에는 시원한 냇가가 흐르고 산과 수목이 잘 우거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고기도 잡고 멱도 감고 골뱅이도 잡으면서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다. 70명 중에서 벌써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종백이, 영환이, 대성이, 진철이, 행불자가 된 흥자, 그리고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들도 여러 명이 되었는데 연락이 가능한 60명 정도 중에서 40명 정도가 참석했으니 모임이 너무나 행복한 만남이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 사고로, 지병으로 떠난 친구들이 저 세상의 생활이 행복하기를 빌어보았다. 몇몇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다.
명화가 준비를 너무나 잘 해서 참으로 좋은 시간을 가졌다. 목사라서 친구들처럼 가무(?)를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친구들과 만나는 만남이 재미있었고 얼굴만 쳐다보아도 재미있었다. 보신탕 수육도 많이 있었고 준비한 야외 삽결살 파티는 정말 꿀맛이었다. 친구 일수는 본인은 먹지를 않으면서 서빙을 너무나 잘했고 적절하게 삼겹살을 꿉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여자 동창생이 준비해온 떡도 너무나 맛이 있었다. 이번에도 41년만에 처음보는 친구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각자가 있는 처소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감사했다. 어느 누군가가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50이 넘어가면 사람들이 평준화가 시작이 되어 60이 되면 거의 평준화가 되고 70세가 되면 완전 평준화가 이루어져 이제는 처음에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인생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얼굴수준도, 교육수준도, 재정수준도 차이가 있지만 비슷하게 닮아가는 것같다. 돈이 많아도 밥세끼로 만족해야 하는 인생이고 교육수준을 차이가 있을지라도 가는 세월과 함께 하나 둘씩 배웠던 것을 잊어버리는 시기가 되어 가니까 그 차이도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할아버지도 되고 할머니가 된 친구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가 있겠는가? 어릴 때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했었고 어떤 동창생들의 옛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연결해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이름은 분명히 기억하지만 옛날 얼굴 모습은 떠오르지를 않았다. 함께 담소를 하다보니까 조금씩은 더 생각이 나는 것 같다. 1박 2일을 보내면서 주일날(일요일)에는 교회를 다니는 동창생 2명과 함께 부모님이 출석하는 금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나도 조금 졸았지만 동창 집사들은 매우 졸았던 모양이다. 아마 그 전날 밤에 이야기하느라고 잠을 거의 자지 못했던 모양이다. 피곤한 육체가 교회당에서 잠을 자면서 졸 수 있다면 그것도 역시 주님의 평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50대 중반을 지나면서 우리들의 남은 생애는 그렇게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인생이 70 이고 강건하면 80 이라고 했으니까 우리도 이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이제는 흙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간 친구들도 여러 명 있다. 점심을 먹고서 선약이 있어서 조금은 일찍 동창회모임을 빠져나왔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를 깰 것 같아서 몇몇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고향집으로 향했다. 충북 진천에서 온돌연구로 세계적인 건축학자로 알려진 김준봉박사를 만나서 식사하고 교제한 뒤에 남양주시 금곡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너무나 풍족했다. 옛친구들을 만나니까 그냥 마음이 넉넉했다. 엔돌핀이 많이 흘러나왔던 시간이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중부고속도로를 통해서 서울로 향하는 운전길이 그렇게 기뻤다. 그러면서 이제는 친구들의 영혼과 가정과 남은 생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했다. 벌써 부터 어린 아이처럼 다음의 만남이 그리워진다.
"나의 초등학교 친구들아 고맙다, 사랑한다, 행복하거라."
"주님, 나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주님안에서 예수님을 알아가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과 행복 속에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