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년 사월, 우리집 앞과 뒤뜰 언덕에 심어놓은 아이스플랜트가 아름다운 분홍빛 융단으로 화사함을 뽐내며 누군가의 칭찬을 기다리고 있던 봄날 아침 이었다. 숭산스님을 모시고 있는 무심스님(미국인)으로부터 손님 몇 분과 함께 샌디에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다. 나는 간단한 점심을 부랴부랴 준비해 화계사의 주지스님과 손님들을 맞이 하였다. 그들은 점심을 드시고 우리집 뜰의 꽃을 보시며 감탄도 하셨다. 집안을 둘러 보시다가 복도 벽에 걸린 공군 장교복을 입은 남편의 사진을 보신 손님 한 분이 지금 공군 참모총장님이 불자라며 자랑을 하셨다. 나는 "남편과 공군사관학교 동기생이랍니다. "라고 신바람이 나서 곧장 대꾸를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달 전 신문을 통해 이억수 동기생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보며 남편은 마음으로만 축하를 보냈었다. 워낙 누구 한테나(마누라 빼놓고) 편지나 전화를 하지 않는 남편의 독특한 성격이라서... 나는 계룡산 무상사에서 이장군 부부를 종종 뵙는다는 우리 집에 오신 거사님 편에 짧은 축하메세지와 우리의 소식을 카드에 적어 전해 달라며 부탁을 드렸다. 얼마후 나의 카드를 받은 이장군으로부터 친구 소식을 들어 정말 반갑다며 당장 한 통화의 전화가 걸려왔다. 백발의 노신사가 된 남편은 옛 친구의 겸손함에 가슴이 찡- 하는 눈치였다. 이런 뜻밖의 귀한 인연으로 글을 쓰게 된 나는 이 모두가 불법을 만난 덕택이라고 합장을 올린다.
이 장군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며 원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 당시 육해공군 사관학교는 그야말로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였다. 공부는 하고 싶고 부모님들은 가난하고... 더구나 그 까다로운 신체검사는 소문이 퍼져 나가 불합격한 응모자들에 대한 우스운 뒷이야기들을 나도 오빠들로부터 종종 들으며 놀라기도 하였다.
작은 키에 야무진 모습과 공부를 열심히 하고 비행기 타는데 도움이 된다며 기계체조를 잘하던 친구로 기억이 난다고 남편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또 내무반생활도 모범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성격이 원만하여 누구한테나 잘해준 친구였다고 한다. 남편은 우리집 서재에서 뽑은 앨범속의 검도부반 사진을 보며 “ 이 장군은 무술을 통해 집중력과 인내심을 기르며 벌써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의 자질을 학창시절부터 기르며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친구같다”며 옛날을 회상하였다.
나는 남편의 보라매 앨범속에서 이억수 생도의 사진 곁에 써진 메모를 호기심을 갖고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다.
‘그를 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그의 성실과 진실성이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음식과 같이 사귀면 사귈수록 더욱 접근하고 싶은 그다. .....중략... 한편 그의 인자하고 부드러운면은 동기생과 후배들에게 많은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특히 여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어느 누가 이 주인공을 모실는지, 행복한 여인은 지금 어데? 말이 없으면서 실천에 앞장서고 전우를 위해 생사를 돌보지 않는 그의 전우애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기억 하게 한다.’
내가 전화 인터뷰를 졸라서 듣게된 33년을 내조해온 부인 남계순(불명 법연월) 보살과의 만난 사연도 각별하다. 사관생도 3학년때 그는 독서와 영화감상, 노래들을 좋아하는 그녀를 소개받아 교제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남보살이 마음에 쏘옥 들어 장인(당시 교육자)될 어른께 하루는 이생도가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보통 부모들처럼 조종사직업은 위험하니 결혼은 안된다고 하셔서 그냥 친구로만 지냈다고 한다. 세상에 원- 오년이 지난 어느 날에야, 같은 교육자로 서로의 집안을 알게 된 이억수대위 숙부님의 중개역 도움으로 허락이 내려져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을 한 후 절에서 사위 생일 불공을 정성껏 올리는 장인 장모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며 그는 불자가 되기를 발심 하였다고 한다. 대위때 수원의 군법당에서 혜산스님으로부터 부인과 함께 수계를 받고, 법공이라는 불명도 받았다. 한때 나도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공군 부대 안에 살며 전투기 훈련을 할 때마다 가슴 조이며 비행기 소음에 새벽 잠을 설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뜻밖의 사고로 젊은 조종사 수재들의 죽음도 보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우리들을 지혜의 길로 안내해 주는 등불이기에 잘 따르고 실천하면 결코 손해볼 일이 하나도 없다고 나는 세상을 살아오며 배운다. 삼세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어온 짖궂은 운명도 우리 스스로의 선행과 덕행으로 비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운아인 그는 온가족들의 깊은 불심으로 가득한 기도와 호신불의 가피속에서 자랑스럽게도 오랜동안의 무사고 비행을 마쳤는지도 모른다.
이 장군이 16, 19 전투비행단장직을 역임하며 불교회장직을 할때는 타종교와도 타협하며, 법당불사 추진 등 좋은 일을 했던 봉사자로 주위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의 탁월한 지도력은 상부의 인정을 받아 대령때부터 시작된 삼일장, 천수장, 국선장의 빛나는 훈장들을 진급과 함께 받기도 하였다. 한미연합사령부에 근무하며 밤으로 틈틈히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다녔던 그의 향학열은 변함없이 뜨겁기만 하다. 지난 해 총장직무로 유럽과 동남아를 다녀온 날들이 그는 퍽 감회롭다고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훈련기를 소개하며 세일즈도 하였기 때문이다. 장차 학생들을 교환하여 상호기술을 배우자는 제안도 내놓았다고 한다.
힘이 들 때마다 그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살아간다.
틈이 나면 부부가 함께 대전에 있는 자혜원으로 가서 불우 아동들을 돕고 후원도 하고 있다. 이 장군의 두 아들들도 아버지와 함께 공군 장교와 사병으로 군복무를 얼마전에 마쳤다. 두 며느리들은 경전을 사경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불자로 이젠 정말 스윗 홈의 할아버지 할머니이시다.
나는 앨범을 덮으며 남편에게 뮤직할 배우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 생김-, 매-서-운 그-눈-매가 어쩐지 나는 알겠네.... 어쩐지...’남편도 나도 한바탕 마주보고 웃었다. “그는 우리 공사 14기를 빛내준 자랑스러운 친구야.” 라며 남편이 중얼거렸다. 관상중에도 무엇보다 심상이 최고라던가! 틀림없이 전생부터 지은 선인연으로 만난 복 많은 이억수장군 부부, 그들의 삶을 엿보며 존경과 부러움이 내 마음 속에 교차를 한다. 삼월에 퇴임하면 불법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장군님의 또 하나의 목표가 계속해서 우리 중생과 인류를 위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해본다. [2002년 3월 1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