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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병철 날짜 : 11-09-22 14:42 조회 : 252 |
로망이여, 함께 가는 벗들이여
강병철(kbc5701@hanmail.net) 어제 보았던 파란 토마토 오늘은 빨갛게 익었을까 궁금해 이슬 함뿍 내린 이른 아침. 눈 비비며 찾아 간 토마토 밭엔 새순 냄새 어지럽게 코를 찌르고 어제는 볼 수 없던 붉은 얼굴들 함초롬히 이슬로 세수하 고 여기저기서 이슬로 세수를 하네. 밤사이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아무도 모르네. - 그의 시 ‘토마토’에서 - 81년 복학생 시절. 처음 만난 그를 조금은 기피했다. 그는 칭찬 받을 외모는 아니었으나 헤어스타일이나 옷맵시에서 깔끔한 도회풍과 시인의 서정성을 동시에 혼재시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맨정신에서 그럭저럭 반골적 낭만주의자 풍을 견지하다가도 숙취에 쩔었을 때는 완죠니 샘물에 떨어진 밥풀떼기로 부유하기도 했다. 그즈음 꽃미남 동기생 권영주와 가끔 도보로 등교하는 게 눈에 띄기도 했으나 기실 나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두며 살았고, 나중 얘기지만 그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동갑내기였지만 3년 후배였기 때문에(6수한 79학번) 예비군복 복학생 무리들이 조금씩 거리를 두었던 것도 이유가 된다. 그즈음 나의 화두는 공간 확보였다. 복학생이란 중압감 탓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울 수 있는 공간’이 점차 좁혀짐을 인식하면서 나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이 촘촘한 세상에서 톱밥처럼 낙오될지 모른다는 압박감으로 밤마다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꿈’으로 식은 땀 흘리면서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글자 맞추기에 돌입했다. ‘인생의 시계’로 아마 오전 10시쯤으로 가늠하면서. 그해 겨울 방학, 그가 (지금은 망자가 된) 벗 권태환과 내 고향 땅을 방문했다. 그 밤 어머니는 캡틴큐와 간월도 생굴을 내놓았고 뜻밖의 정담을 푸짐히 나누면서 불시의 틈입자와 밀도있는 친밀어를 나누었던 것 같다. 이튿날 저수지 옆 여자 동창생네 집을 방문하여 술상을 받고 황재학의 노래까지 곁들여 넉넉한 추억을 만들었던가. 그 사연은 그때까지 내 고향을 찾아준 극소수의 방문객이 되어 오래도록 되씹게 만든다. 그와 가까워졌던 결정적 이유는. 같은 지역구인 논산에서 분필을 잡으면서부터였다. 나는 동향인이신 조재훈 교수님의 추천으로 논산 쌘뽈여고로 첫 발령을 받았고 그는 한 달쯤 늦게 같은 소도시 권역인 기민중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수시로 만났다. 새내기 교사의 부푼 꿈과 봄꽃 흐드러지는 햇살이 어우러지는 계절이었다. 목련꽃 터지는 4월이었던가. 그가 ‘대화’와 ‘씨의 소리’ 등 지나간 책들을 한 보따리 안고 내 하숙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나는 도서관 문학주의에서 소위 현실 참여의 눈을 뜨게 된다. 그 책을 읽으며 함석헌과 전태일을 만났고 하숙집 책상에 웅크려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읽으면서 펑펑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때 나중에 해직동지가 된 류도혁 선배와 카리스마 강한 강성렬 화백 그리고 탈춤반 강승구나 소설가 지망생 김진국을 만나 먼동이 트도록 시국과 문장을 토로했다. 언제부터였나, 그와 나는 퇴근 후 소도시 다방에서 서로의 시를 합평했고 쏘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고 불콰한 몸으로 목욕탕을 방문하면서 그렇게 기우는 청춘을 아까워하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목욕탕 저울 앞에서 알몸의 그가. - 이상하다. 분명히 50킬로가 넘었었는데. 저울추 49.5 킬로 눈금을 보면서 나는 ‘마른 제비’를 떠올리기도 했다. 논산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강경평야 가로수를 빨갛게 덮던 노을이 유리창 너머 부엌까지 완전히 단풍바다로 덮어버리는 쓰나미 노을이었다. 그리고 저무는 하숙집 문을 두들기는 황재학과 강경 ‘욕쟁이 할머니집’을 찾아 박용래의 흔적을 더듬던 그런 로망의 세월이 있었다. 취중의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고 부여의 총각 선생 권태환의 집을 급습하곤 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마지막 그를 보내었던 백마강가에 서성거렸다 가랑잎으로 남은 사내가 나루터 쪽으로 떠밀려가면서 이따금 물거품을 햇살 위로 올려보냈고 나머지 사람들은 초가을빛으로 바랜 풀밭에 앉아 그 사내 이름을 불러대며 소주잔을 비웠다 - 나의 졸시 ‘그리고 노을 앞에서’에서 - 벗의 이름은 권태환이었고. 내가 도서관에 몰입할 때 ‘강군 파이팅, 개발에 땀 나라’ 어깨를 두들기던 곰 같이 든든한 후광이다. 어느 늦가을 이슥한 밤 황재학과 함께 내 자취방 문고리 흔들면서 ‘밤차로 한없이 내려가자’며 기어이 대전역까지 끌고 나가기도 했다. 나는 이런 돌출 상황이 내키지 않아서 벗들과 싱갱이하다가 역전앞 노숙자로 날을 새웠고 황재학은 옆에서 ‘아침이슬’이나 ‘라구요’ 같은 콧노래를 불렀다. 신새벽 눈을 뜨자 수십 명의 노숙 동지들이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권태환 선생도 어느 출근길 세상을 떠났다. 통근버스가 모래트럭과 부딪쳤고 고요한 통학길에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던가. 권태환은 부상당한 제자들을 들쳐메고 이리저리 나르다가 어느 순간 ‘이상하게 아프다’며 가슴을 쓸어안고 쓰러진 다음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작별 이후 나는 오랜 회한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이 만났다가 떠나는 일이 이토록 순간인데 살아있는 우리들은 무엇이 아까워 놓지 않고 있을까? 그는 꿈속에 알몸으로 나타나 나를 집어던지기도 하다가, 어느 날은, 강 건너 버드나무 위로 펼쳐진 그니의 흰 이빨로 ‘너는 살아있다고 우느냐’며 껄껄대기도 했다. 황재학은 진보적 목회 집안의 막둥이로 성장했다. 아버지 황용만 님은 함석헌 옹을 초청하여 강연을 열기도 했던 진보적 목사였다. 그 바람에 황재학 역시 대학에 입학하기 전 목회 활동을 통하여 몇 차례 불법 집회에 참석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따금 4.19 행사를 진압하던 경찰의 발길질을 그대로 재연시켜 나를 불안하게 했었다. 그리고 월남가족이었다. 스무 살 후반쯤 나는 논산 모퉁이 그의 형네 집에서 찹쌀과 김치와 당면을 넣은 함경도식 ‘아바이 순대’를 대접받기도 했다. 황목사님은 체격처럼 품이 넓었고 아들 친구의 수더분한 품새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수줍음 체질답게 눈길도 맞추지 못했지만 해직교사 시절 일박 후 떠나가는 나에게 군고구마를 싸주시던 부친의 손길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지난해 마련한 집터에 자두나무 한 그루 봄볕에 순한 연분홍 꽃잎을 마구 토해내더니 가지가 찢어질 만큼 자두가 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나무는 자신을 흔들어 많은 열매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우리 엄니 얼굴 같은, 그래그래 돌아가신 우리 엄니 얼굴 같은 -‘자두나무’에서- 문장의 파편이 낙엽처럼 팔락거린다. 얼마나 욕망이 컸으면 가장이가 찢어지게 열매를 매달아야 하느냐. 땅바닥에 쏟아진 과실의 실체가 엄니 모습으로 겹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두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몸이 전봇대처럼 길어졌다. 그는 어느새 자두나무의 신산고초를 죄다 읽어버린 것일까?. 팔남매 늦둥이였던 그가 불효자의 표상처럼 하늘나라 엄니에게 목덜미를 잡히더니 아득한 실루엣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기도 한다. 옥수수를 깨물다가 가운데가 ‘딱’ 부러졌던 엄니는 그 틀니를 하얀 손수건에 그리도 조심스레 싸셨다. 치과에 고치러가면서 아버님 등 뒤에서 밥풀꽃마냥 희미한 웃음 짓던 엄니가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는 음영이다. 이번에는 은행나무 그늘로 나타난 엄니의 실루엣이 더욱 진하게 떠오른다. 언덕 위 과수원에는 상처 난 햇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뒹굴고 탱자나무 울타리엔 폐비닐이 허리를 흔들며 휘파람을 불었다. 바람과 살을 섞은 은행나무는 지붕 위로 노오란 정액을 쏟아내고 대낮인데도 사람들은 발을 헛디디거나 자기 자리에서 맴돌았다. 더 이상 삶은 무의미하다고 중얼거리는 입 속으로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발 아래 세상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파란 하늘이 무서워져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를 부른다’ 부분- 6남매의 늦둥이로 성장했던 철부지 감성 시인은 불혹 이후 노부모를 모시는 효자가 되었다. 그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 깨어 아흔 살 아버님의 변기통 오줌방울 소리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상념에 빠지곤 했다. 그랬다. 이따금 놀러갔다가 그가 구순이 넘은 노부모를 동시에 수발하면서 밝은 표정을 놓치지 않는 장면을 보고 나는 화들짝 놀라곤 했다. 아마도 수발 와중에 아바이 순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린 날,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깨면 샛노란 배추 속이나 겉저리를 입에 넣어주고 싱그레 미소 짓던 그 엄니의 기억이다. 꼬부라진 허리로 거실 바닥을 쓸거나 보푸라기를 떼던 그 음영이 아리고 시리다. 이제는 노인방 특유의 역한 냄새까지 그리운 초가을이다. 그가 대학 3학년 때 당시 유아교육과에 다니던 용모 훤칠하고 성격 시원한 아가씨 김정화를 만나 사랑을 나누며 마침내 둥지를 틀었던 순탄한 시절 즈음이다. 첫째 은권이를 낳았고 맞벌이로 아파트 평수를 늘이면서 행복의 둥지를 그려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졌고 우리들은 신새벽 초인종 소리와 함께 우르르 호송차에 실렸다. 아프고 두려웠다. 시국의 철퇴를 맞으며 학교를 쫓겨났으나 아내 김정화는 한동안 벗 강병철과 그 일당들에 대하여 무던히도 관대했었다. 문제는 폭폭함을 달래기 위한 우리들의 행각이 더욱 대담해졌고 그 집 현관을 걷어차는 횟수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아내 김정화는 수컷들의 거칠 줄 모르는 주사 행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마침내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도대체 매일 술을?” 이맛살 주름에 이는 파문을 보며 나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한시적으로 경계를 보이던 그니가 다시 술꾼 문청에게 자애를 베푼 것은 그의 아들내미 돌잔치에 시 한 편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졸시 ‘황은권군의 탄생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를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민망하게 지켜보며 애증의 고비를 넘겼던 것 같다. 그 ‘사랑과 전쟁’의 해직교사 4년 기간이 내 인생의 드라마틱한 시기였고. “요즘 어떻게 살지.” 구경꾼들의 질문에는, 가차없이 ‘깡다구로 살지’ 너스레 떨었지만 기실 술만 마시면 취하고 토했다. 쫓겨난 선생들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경제적 벼랑끝을 실감하면서 진짜로 겨울을 지내야 할 연탄 값 바닥치기를 지켜보아야 했다. 아무튼 무서웠던 벗의 아내가 ‘시의 감동’으로 펑펑 우는 상황을 접하면서 나는 문학의 위력을 실감했었다. 충청도 교육운동은 최교진 선배가 주축이 되었다. 최교진은 공주사대에 다니던 70년대 수요문학회의 시낭송회에서 첫 징계가 시작되었다. 유신 시국, 당시 시낭송회 하기 전에 강당의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 사진에 인사를 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그의 순서에서. “독재자에게 경례를 표할 수 없다.” 그 돌발 영상을 필두로 긴 세월 감옥과 해직 그리고 출옥과 복직을 시계추처럼 반복했고, 초로의 지금도 담장 바깥에서 활동 중이다. 아무튼 최교진 선배가 빈들교회 지하에 사무실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차려서 송대헌, 조재도, 전인순, 전무용, 황재학 등이 회원이 되어 숱한 애환과 흔적을 남기곤 했다. 87년 대선 직후까지 그 사무실이 유효했었고 복직 소식을 접하면서 하나씩 시계추를 내렸다. 그렇다고 해직교사가 늘상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분기탱천, 태양처럼 태양처럼 젊었으므로 세상의 진리를 날마다 깨우치는 ‘우일신(又日新)’의 경외감이 있었고 또 벗들을 만나는 설렘이 있었다. 삶의 문학 류도혁 이은식 이재무 이은봉 임우기 등을 만났고 민중교육의 최교진 정영상 조재도를 만났고 또 봉천동 자취방의 동거인인 허정, 김성균, 김학용과 자취방 나그네 유광해, 박찬익 같은 대전고 동문들을 꾸러미로 접하기도 한다. 그 공학 수재팀과의 자취 생활도 이색 경험이었다. 그의 아내 김정화와 셋이서 술을 마시던 주공아파트 새벽 세 시. 황재학과 나는 서울행 택시를 잡아타고 봉천동 서울공대 박사팀 자취방에 단숨에 날아가기도 했다. 신새벽 자취방 옆구리 걷어차자 후배인 허정 교수는 우리에게 오리고기와 소주 댓병을 밀어넣어 주고 출근했고 그때부터 황재학은 금속공학도 김성균과 아랫목에서 해장 술타령을 벌였다. 그들은 노밸을 꿈꾸는 과학 수재였지만 수시로 초딩 수준의 장난으로 히히낙낙하는 양면 수준을 보였다. 양복 등허리에 ‘바보’라고 써붙인 채 출근시키거나 거리에서 후닥탁 바지를 벗기는 60년대 악동 유형의 장난이다. 또 있다. 쓰레기를 모아서 반지르르하게 포장한 다음 오가는 길거리에 올려놓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어느 행인이 두리번두리번 눈치 보다가 주워가는 짜릿함을 맛보며 도망치는 것이다. 나는 타고난 ‘길치’였는데 어느 퇴근길 골목에서 또 자취방을 잊어버렸다. 우물쭈물 헤매다가 자취방에 ‘우리 집이 어디지?’ 전화를 걸었고 그러고도 15분 가량 헤매다가 자취방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무심히 가방을 내려놓는데 책상 아래에서 갑자기 ‘아우웅’ 소리와 함께 두 공학도가 일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보다 나는 그들이 나를 놀래게 하기 위해 책상 밑에서 15분을 기다렸다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 허정과 김성균의 운동권에 얽힌 야화 한 토막. 시퍼런 5공화국 절정의 시국. 어느 날 서울대에서 전대협 집회가 열렸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공학도들은 ‘수은 없는 형광등’이나 ‘맹물로 가는 자동차’로 인류 행복을 이루기 위해 초읽기 연구에 몰입 중이었다. 그 순간 최루탄 냄새와 함께 구두 발자국 소리. 그리고 다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시 전대협 회장이던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오수진이 쫓기는 사슴처럼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무꾼들은 정의파 초식동물을 거두어 연구실 천장 뚜껑을 열고 1주일 정도 밥 수발을 했단다. 그네들의 운동권 잠수함 태워주기 장면은 90년대 말誌에 짧게 소개되기도 했다. 그 두 공학자들이 황재학의 노래 팬이어서 우리는 때때로 만나 미래에 대한 예단없이 아예 젖어버리곤 한다. 너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또 나는 너에게 무슨 의미지. 사람들은 언제나 그럴듯한 의미를 만 들지. 오, 내버려 둬 모든 인생이 장미 밭처럼 화려하지 않잖아. 궁금해 하지 마. 살아 있는 것에 감사 해. 이제 모든 의미를 기억에서 지워버려. 오, 사랑하는 여인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잖아. 만일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서전을 쓰고 싶어.‘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으나 단 한 사람으로부터 사랑받 지 못했다.’고 - 그의 시 ‘자서전’에서 - 그는 음악가 핏줄을 받아 열세 살 때부터 기타를 쳤고 곧바로 노래 선수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때 포크송을 통달했고 박인희 이필원의 ‘뚜아에 무아’나 ‘라나의 로스포’류의 모창을 벗어나는 체화된 목소리를 생산하였다. 고등학교 때는 뚜엣을 만들어 하마터면 정식 노래꾼으로 입문할 뻔하기도 했다. 찬송가도 부르고 가곡도 애용했지만 양희은과 김민기와 한대수의 노래를 가장 많이 토로했으니 아마도 록가수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일 따위는 개나 물어 가라지. 목로에는 그날도 돼지 비개 굽는 냄새 위로 비가 찔끔찔끔 내리고. 오 늘도 일자리 없어 공친 사람들 잡담을 주고받으며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지. 이런 날 낮술이라도 한 잔 하지 않으면 인생은 쓸 데 없는 거라네. 괜히 동정하는 척 하지 말게나. 누구에게나 쥐뿔같은 자존 심은 있지. 이젠 절망도 내 형제라네. 자, 모두들 한 잔 들지. 미래의 분노를 위하여. - 그의 시‘톰 웨이츠’에서- 톰에이츠는 누구인가. 프랑크자파 갭틴 비프하프와 함께 가장 다양한 곡을 믹스해서 풍로처럼 돌리는 진짜 가수다. 비 맞은 개는 누구인가. 소외됨의 실체인 신용불량자, 용역깡패, 시인, 노숙자, 해고자와 외판원 그리고 전쟁터에서 식량을 찾아 헤매는 소녀의 모습이 스크린에 합쳐진다. 그들이 자신을 ‘거리를 헤매는 비 맞은 개’로 노래하지만 때로는 그런 체념조차 고통스럽다. ‘우린 결코 집에 돌아갈 수 없어’ 라고 방어막 치지만 아무래도 노동의 하루가 너무 길다. 양희은, 송창식, 서유석, 어니언스, 사월과 오월의 노래를 즐겼지만 목소리 흉내에 급급한 아류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가수다’의 주인공들처럼 스스로의 몸에서 새롭게 변조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무튼 그는 닐 다이아몬드건 CCR(크리덴스크레오트 리바이벌)이건 두어 번 들으면 즉각 음을 체화시킨다. 대학 시절 대전 홍도동 자취방에서 그가 기타를 치며 ‘찔레꽃’이나 ‘기지촌’을 부르면 내 여동생 강병선이나 습작 시인 이재무는 기타줄 여운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는 노래방에서 과도하게 마이크를 점령하고 기차 화통을 터치지만 정작 청중들은 새처럼 웅크린 채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다. 그래도 아쉽다. 아프게 울지만 우는 얼굴 닦아주지 못하는 한계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워 울음을 터뜨리는것은 시인의 감성이지만 그 뿌리털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시인의 직관이요, 소명이다. 혼자 우는 울음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껴안는 울음이 그래서 더 비극적 지속성을 보인다. 또 망자 윤중호가 앞을 막는다. 황재학의 무한성대를 감당할 만한 가객으로는 윤중호가 유일했다. 그들은 무예의 고수처럼 서로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젓가락 장단에서만큼은 윤중호가 한 수 위였다. 황재학이 정갈한 성악가라면 윤중호는 저자거리 각설이패다. 놀이판 끝물에서 황재학이 기염을 토하듯 김민기의 ‘강변에서’나 신경림의 ‘돌아가리라’로 요동을 치면 마지막으로 윤중호가 등장하여 ‘흑인영가’나 ‘빈산’으로 휘날레를 장식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벗들은 윤중호의 카리스마 속으로 수시로 투항했다.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비 오는 밤이었던가. 논산에 놀러온 윤중호를 끌고 나는 황재학이 숙직 중이던 기민중학교에 놀러갔다. 그때만 해도 학교 아저씨와 교사가 짝을 지어 두 명씩 숙직을 하던 시대인지라 우리는 황재학을 끌고 나왔고 관촉사 가는 구멍가게에서 생두부와 막걸리를 마셨고 비 오는 밤길을 노래 부르며 새도록 걸었다. 노래 선수 틈에 끼어 귀곡성을 내면서 문득 내 노래 실력이 늘어간다는 느낌을 쬐끔씩 받기도 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형 황명학 선배도 딱 한번 합석했었다. 명학 선배는 술꾼 서넛 정도는 거뜬히 평정할 주선(酒仙)의 경지였지만 마땅한 술친구가 없었다. 기독교 학교에서 근무했던 그는 퇴근길에 자전거 페달로 30분쯤 이동하여 부창동 쌘뽈여고 앞 ‘맛나집’에서 ‘나홀로 막걸리’ 시간을 가지곤 했다. 우리들은 서로 눈인사나 손 흔들기는 했지만 즉흥적 합석의 기억은 없고 그냥 술청 건너편 표정에 비친 고독의 흔적을 재빨리 읽고 지나쳤던 것 같다. 해직교사 시절 어느 날. 명학이형은 -지금은 도혁이형네 형수가 된- 김효영, 윤중호와 늦은 밤 선술집 음주가무의 시간을 가졌다. 윤중호는 곱사춤을 추었고 나는 밀리지 않기 위해 귀곡성을 내뿜었는데 명학이 형은 굵직한 인상답지 않게 수줍게 눈꼬리를 내리깔았다. 나중에는 주인장까지 신이 나서 젓가락을 두들겼던 망중한의 밤이었던가. 아, 흘러간 추억은 모두가 아름답다. 유월의 보리밭이나 겨울 포구의 갈매기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뜨거운 헤어짐이나 연상하면서 아, 모처럼 아, 하는 한가한 감탄사를 흘려보았지 불빛은 끔먹대며 그림자를 휘젓고 길 따라 게걸음치는 그 사내 가슴 가까이 가까이 - 나의 졸시 ‘해직교사 황재학과 술을 마시며’에서 - 이번에는 그의 무용담. 우리들은 나이 삼십 해직교사였고 맏선배 이은식은 도마동 골목길 어디쯤에 있는 사또집에 아예 두 달치 술값을 통째로 맡기고 ‘부어라, 마셔라, 해결해보자’의 물주 역할을 진행 중이었다. 만취한 황재학이 김지하의 ‘새’를 기차 화통 삶듯 터치는 바람에 이은식 형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는데 문제는 ‘우리끼리만의 감동’이었다는 점이다. 순식간에 옆 테이블 덩치 큰 트럭 기사들과 싸움이 붙었고 불쌍한 강병철만 이리저리 뜯어말리느라 죽상이 되었다. 은식이형에게 끌려 바깥에 나온 황재학은 그때까지 분이 안 풀려 우산대로 죄없는 셔터를 내리찍었는데 거기까진 봐줄만 했다. 이번에는 혼자 괴성과 함께 허공을 향해 이단옆차기를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의 몸이 돌고래처럼 허공에 일직선으로 떠 있는 모습과 1초 후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는 몰골을. 벗들이 상재한 글들을 씹어돌리는 매력과 질타의 혼재 기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는 술판의 분위기가 ‘엎’되면 앞자리 취객을 당겨놓고 일단 ‘무엇을 위한 문학인가’라는 주제로 좌충우돌의 첫물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시계 방향 순서로 하나씩 잡고 문학 행위를 분석한다. 이정록 시인의 초창기 시절, 밤 두 시에 전화벨 울려놓고. “너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느냐?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쓰느냐.” 홍두깨를 던지기도 했다. 이정록은 이를 ‘심야에 맞은 싸대기’라고 표현하며 입맛을 다신다. 조재도건 박수연이건 망자 윤중호건 최은숙이건 닥치는 대로 공략의 틈 찾기에 몰두하면서 독특함과 난감함을 번갈아 제공했다. 사람들은 황재학에게 ‘벗들과 문장에 대해 후덕함’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미 폭발적으로 넘치는 에너지는 즐겁게 관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중과 속’을 넘나든지 어언 50년, 그렇게 ‘미운 정 고운 정’ 30년이다.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고. 반백의 턱수염을 트레이드마크로 변형시킨 그는 요즘 수시로 호남선을 탄다. 현재 그의 거주지인 엄사역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익산과 목포를 번갈아가면서 ‘늙은 새 벗’들을 만나는 것이다. 남행열차 동반자의 효시는 원광대 심호택 교수님부터다. 그들은 작가회의 주최 신동엽 추모제에서 조우하여 술잔을 돌렸고 이후 ‘황’과 ‘심’은 충청도와 전라도 텃밭을 오가면서 우정을 쌓았다. 덕분에 나도 몇 차례 합석했고 그들끼리의 관계만큼 돈독해졌다. 아들 강등현이 그 대학 의대에 입학한 직후 호택이형의 밥상에 내 아내까지 합석하여 삼겹살 대접을 받았다. 내가 술값을 낼까봐 호택이 형이 먼저. “강형, 이따가 또 촌스럽게 티격태격하면 안 되는 거요.” 덕분에 우리 가족 세 명의 저녁값이 굳었었지만 그 정 많은 선배 심호택 시인도 세상을 떠났다. 전날 그는 동직원인 원광대 젊은 某교수의 장례식장 문상객으로 참여했단다. 그리고 침통하게 소주잔도 기울였다는데, 돌아가는 샛길에서 불의의 사고를 만나 다시 망자가 되어 그 장례식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흔히 말하는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이’ 교통사고를 만나 세상을 떠났다. 목이 멘다. 예전에 익산에서 술자리를 가지며 내가 어떻게 운전하실 거냐고 물으면. “여기 유지인데 몸 간수 못하겠오. 샛길도 알고 검문소 소장도 내 후배요.” 그렇게 운전대 잡던 목소리 떠올리며 황재학과 나는 상갓집에서 날밤을 새웠다. 귀때기 얼어붙은 겨울 아침 마당 한쪽에 땔나무를 부리던 아저씨의 푹 패인 볼가와 제멋대로 자란 수염 사이로 보이는 두툼하고 검붉은 입술. 커다란 두 눈을 꿈먹거리며 연신 뿌우연 김을 내뿜는 당나귀의 둥그렇게 뚫린 코와 약간은 벌어진 주둥이와 삐쭉이 내밀은 두 귀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때문일 것이다. - 그의 시 ‘겨울 아침’에서 - 나는 스스로 착한 남자라는 자기최면에 빠지지만 맛이 갔던 술자리를 떠올리는 것만큼은 두려워한다. 그런 주사(酒邪)가 사라진 지는 15년쯤 지났지만 아직도 이튿날 눈길 맞추기를 젛어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스냅에 대한 기억력이다. 그는 술이 취할 때 대중들 앞에서 지우고 싶은 화면들을 끄집어내어 민망하게 한다. 상관없다. 불편을 주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자가 진짜 자유인이다. 그 분망함이 벗들의 설렘과 서스펜스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게 시의 캐릭터이다. 예전에는 김지하 박노해 같은 민중시를 선호했지만, 언제부터였나, 그의 체질은 백석이면서, 박용래의 문장 가까이 다가서려 하며 가끔 가수 백창우의 문장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로망스 시인들은 진짜 노망이 들 때까지는 늘 떠날 채비로 마음 가짐이 새롭다. 해바라기 담장 아래건 신촌이나 수색 어디쯤 신호등 아래건 그들이 눕는 곳이 안식처이다. 세상은 더 많은 아픔이 필요하단다. 사랑은 아픔이 없는 곳에서는 자라지 않지. 울음이 없는 곳에서는 희망도 찾을 수 없단다. 그렇다고 아픔이 사랑은 아니지. 시간이 흘러도 너의 아픔은 너의 아픔. 누구도 너의 슬픔을 대신해 줄 수 없단다. 사람들은 모르지 아픔이 곧 세상이라는 것. 그러니 너의 울음은 세상의 울음이야. 네가 세상에 올 때 터뜨린 울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 모든 울음은 세상의 가장 슬픈 울음이란다. - 그의 시 ‘세상의 가장 슬픈 울음’에서 - 아마도 그는 교단의 길을 마지막까지 갈 것 같다. 동기생들이 관료를 선택할 때 평교사의 길을 고수하며 술과 시와 노래를 부를 것이다.칠판은 고뇌와 질곡의 연속이었지만 우렁각시처럼 살림도구를 챙겨주었고 벗과 통장과 연륜을 부풀려주었다. 이미 폭풍을 경험했으므로 작은 햇살의 소중함도 깊이 느낀다. 겨울 햇살이 창가로 들어와 가만히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풍선처럼 가벼워진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다. 야트막한 산들과 시내가 보이고 작은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닌다. 시간은 바람 에 날리는 꽃잎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이제 내일은 다시 오지 않는 것. 오직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슬픈 속눈썹을 생각할 뿐. 나 이제 여기 없네. - 그의 시 ‘겨울 햇살’에서 - 그의 시는 ‘취중 언어’와 반대로 짧고 간결하며 자기 고유명사인 담백성을 무기로 한다. 그래서 적어도 그의 시는 짧아야 한다. 행간이 많아야 눈길이 오랴 머물며 더디게 써야 진국이 나오는 것 같다. 물론 그의 장시를 확인한 다음 짧은 시를 평하고 싶지만 아직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러면 그 중 어느 하나의 돌 밑에서 물살에 투명한 몸을 맡기고 가만히 흔들리고 있는 아, 당신은 거기에 그렇게 있습니다 - 그의 시 ‘당신의 물가에서’-에서 관념과 현실이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섬뜩함이다. 사내는 물속의 지느러미 분신을 찾는 중이다. 상류에서 밀려오던 모래가 쌓이면서 수심(水深)이 점차 얕아져가던 그해 여름 물가다. 마침내 물풀을 헤치며 질기게 쫓아다니던 물고기를 발견한다. 돌멩이를 들면 꼭 그만큼의 흙탕물이 바닥을 가렸고 그 사이에 물고기를 지느러미 떨치며 도망쳤을 거라고 일찌감치 마음을 비웠다. 그래도 숨을 조이며 흙탕물이 빠져나가기를 천천히 기다린다. 뿌옇던 오수가 가라앉으면서 마침내 맑은 물 속에 그 자세 그대로 남아있던 송사리 등줄기를 고스란히 만난다. 아찔하다. 앙금이 쓸려간 이후의 당신을 잡아낸 것이다. 계룡산 가는 길 동학사 조금 못 미처 학봉리 버스정류장 수정슈퍼 앞 평상에 젊었을 때부터 약으로 산다 는 눈꼬리가 귓불까지 내려와 보살 같은 가게 주인 할머니와 어릴 적부터 이적까지 병원 한 번 가 본 적 없다는 입가에 주름도 별로 없고 대전에서 이사 온 지 일 년 정도 된다는 할머니가 사이좋게 앉아 꽃망울 오무려뜨리고 떨어지는 분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자락 넘어가던 햇님도 눈시울 붉혔습니다. 밤이 오려면 아직 조금은 남았습니다. - 그의 시 ‘학봉리’에서 - 그는 아내와 대학생이 된 아들 딸까지 네 식구가 살아가고 있다. 아들 황은권은 미루나무처럼 쭉쭉 커서 어느새 국기봉 스타일의 운동권 대학생이 되어있고 딸 은비는 고고미술학을 공부하는 새내기 대학생이므로 기실 세 집 살림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신새벽마다 조깅을 마치고 주방에서 감자나 두부를 썰어 찌개를 끓인 다음 아내를 깨운다. 미래의 ‘교육 공동체’를 꿈꾸며 쓸고 닦고 만나는 실습 중이다. 그러나 모든 근면의 자세가 벗들을 만나면서 깡그리 깨진다. ‘이후 모든 것 생각 안 하기’로 작정하고 신발끈 조으며 음주 자세에 돌입하면 나는 바싹 긴장 모드에 빠진다 지금 우리의 인생 시계추는 ‘오후 세 시’쯤 된 것 같다. 그와 함께 고락을 함께 했고 숱한 사람들을 만났다. 윤중호도 떠났고 심호택 정영상 황명학 강성렬도 망자가 되어 구천을 떠도는 세월이니 필시 저물녘이 다가오리라. 한때 나의 흠이 곧바로 황재학에게 연결될 정도로 가까웠고 지금도 진행 중인 우이들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어쩌면 우리들의 길을 묻거나 흔적을 따지는 것도 이제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던 그 청량한 가을 햇살의 계절이다. |
첫댓글 장려하고도 무상하여라 젊음이여 인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