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코프 신부와 의사 랜디스는 한국 선교를 위해 처음으로 인천에 발을 내딛는다.
1891년 7월 인천지역 의료선교의 효시가 된 ‘성루가병원’을 개원해 병자와 함께하고, 9월 30일에는 한국 성공회 최초의 성당을 완공해 그들의 영혼도 함께 구한다.
6·25로 인해 성직자가 순교하고 성당이 무너지는 아픔도 겪었지만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선교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인천내동교회는 지금도 ‘작은’ 교회를 지향하며 이웃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로, 지역에 꼭 필요한 맞춤 복지사업을 통해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인천시 중구 응봉산 자락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작은 터널이 나타난다.
무지개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홍예문(虹霓門). 홍예문을 지나면 내리막이다.
시야에 펼쳐진 나지막한 지붕의 주택들.
그 주택가 한켠에 대한성공회 최초의 한국 교회인 인천내동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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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의사 랜디스를 기념해 만든 소성당 내부 |
한국 성공회 최초의 성당 축성
1889년 11월, 영국 성공회는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신부를 한국 초대교구장 주교로 서품한다.
많은 이들의 반대 속에서 시작한 일이라 경제적인 지원도 빈약했고, 한국 선교를 위한 동역자를 찾는 일도 어려웠다.
다음해 코프 주교는 미국 방문 때 만난 젊은 의사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명 남득시)와 함께 1890년, 한국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다.
육로나 항공로가 발달해 있지 않았던 당시 제물포는 부산포, 원산포 등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오려면 거쳐야 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제물포에는 외국인과의 무역이 활발했기에 조계(租界 주로 개항장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가 설정돼 있었고 외국인 거주지역도 곳곳에 있었다.
1891년 봄, 코프 주교는 외국인 거주지가 있는 북동쪽 인천시 중구 송학동 3가 3번지를 구입, 착공에 들어갔다.
성공회가 한국에 처음으로 건축한 성전인 제물포 송학동성당(지금의 인천내동교회)은 ‘성 미카엘과 모든 천신(St. Michael and All Angels)’의 이름으로 1891년 9월 30일 축성되었다.
인천 최초의 병원을 시작한 랜디스 의사
코프 주교는 성당 건축을 하던 중 내동 3번지에 두 번째로 토지를 구입하고 랜디스의 의료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병원을 건립했다.
랜디스는 공사가 완공되자 1891년 10월 성 루가를 기념하는 침례일에 새 병원에 입주했다.
병원의 이름은 그 날에 맞춰 ‘성 루가 병원(St. Lukes Hospital)'이라고 명명했다.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던 랜디스는 한국인에게 별 의미가 없는 성 루가 병원이라는 이름 대신 ‘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라는 뜻의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는 간판을 달고 병원 선교에 전념했다.
‘낙선시의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한국인 환자들은 1/3 정도가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머지는 인근의 강화도를 비롯한 섬지방과 충청도, 황해도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전라도에서도 소문을 듣고 배편을 이용해 병원을 찾았다.
또 청일전쟁 때에는 인천 앞바다에 침몰하는 중국 군함에 탄 군인들을 정성으로 치료해준 공로를 인정한 중국황제가 쌍용(雙龍) 훈장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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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제단 전경 |
랜디스의 죽음과 성루가병원 폐원
랜디스는 ‘성루가병원’에서 1892년 3,594명, 1894년에는 4,464명의 신규 외래 환자를 진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랜디스는 당시 어떤 중한 병도 신통하게 잘 다스리는 명의로 소문나 명성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랜디스는 1897년 좀더 조용한 곳을 골라 순한국식 생활을 하고 싶어서 인천 송림동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 살면서 장질부사에 걸려 1898년 4월 16일 32세의 나이로 소천한다.
장례식은 그가 사랑했던 한국식으로 치러졌다.
제일 좋은 두루마기를 입혀 제물포 외국인묘지(지금의 인천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안장했다.
그 후로도 카덴(Carden)과 와이어(Weir)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의료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해오던 성루가병원은 세계1차대전 발발로 말미암은 영국선교부의 지원금 부족으로 1917년 6월, 설립 26년 만에 영원히 문을 닫고 말았다.
격동의 한국역사와 함께한 교회
코프 주교의 사임 후 여러 명의 주교와 관할사제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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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 |
1950년에는 6·25동란이 발발하고 한국 성공회 최초의 교회인 성미카엘성당도 폭격으로 인해 폐허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군에 의해 조용호 신부가 납치되고 순교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후 주일미사는 내동3번지에 있던 옛날 성루가병원 자리의 허름한 공간에서 드려야했다. 1952년 관할사제로 부임한 전세창(스테반) 신부는 1955년 8월 28일 내동3번지에 현재의 성당 건물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고 1956년 6월 23일 축성식을 가졌다.
1966년 4월 문상윤(사가리아) 신부가 부임하면서 인천내동교회는 선교 75년만에 교회자립을 일궈 새로운 선교적 도전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운다.
1965년에는 ‘성미카엘유치원’을 설립, 부모들이 직장 때문에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교회가 함께 감당하게 된다.
이후 후임으로 1966년 김성수(시몬, 현 성공회대학교 총장) 신부가 부임했다.
김성수 신부는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발전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다져나갔다.
교회위원회 선출 방식 등 제도를 정비하고, 어머니회를 비롯한 각 활동단체들을 활성화시켰다. 청년회의 활동도 격려했다.
1969년 여름에는 두 달 동안 매주, 청년 전도와 수재민들을 위한 ‘음악의 밤’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당시 유명한 가수였던 조영남, 트윈폴리오 등이 출연했다.
김성수 신부의 평신도 지도력 함양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인화력에 초첨을 맞춘 목회를 1971년 부임한 차인환(맛디아) 신부가 이어받아 꽃을 피웠다.
차인환 신부는 탁월한 인간관계와 열성적인 목회활동을 펼쳐 교회를 성장시켰다.
유치원을 새롭게 정비하고 운영에 있어 투명성을 확보했다.
또 교회 안에 ‘자유회관’을 건립하고 유치원과 성당 증축 등을 이끌었다.
어려운 이웃의 필요에 민감한 복지선교
인천내동교회는 1989년 6월 25일 ‘나눔의 집’을 열어 맞벌이나 편부모 슬하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어려운 지역주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역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선교 100주년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다각적인 측면에서 선교 100주년 행사를 준비했다.
그 결실로 1992년 3월, 김성수 주교의 집전으로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 기공식을 갖고, 프로그램을 준비해 그 다음해 본격적으로 개관하게 된다.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은 장애아동조기교실과 언어치료실을 열고, 재가복지봉사센터, 무료경로식당 등의 프로그램을 주민의 필요에 맞춰 순차적으로 개설했다.
98년에는 아동복지관을 개설하는 등 기다리는 복지가 아니라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복지사업을 벌이고 있다.
한편, 2005년에는 인천광역시가 인천내동성당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인정해 ‘유형문화재 51호’로 지정했다.
1956년 건축 당시 한국 교회 건축 양식으로는 유일하게 바실리카 양식을 따른 건물이면서 지붕은 한국 고유의 맞배지붕을 본 따 기와를 얹어 동서양의 미를 살렸다.
인천내동교회는 1890년대 초창기 성루가병원을 중심으로 병자와 고아를 돌보기 시작해 116년째를 맞는 올해까지 한 세기가 넘도록 인천지역주민의 필요에 민감한 복지를 실천하고 있다.
교회의 사명은 낮아지는 것. 한없이 낮아져서 예수님이 하신 섬김을 이어가는 것이라 믿기에 116년 동안 한결같이 섬김과 나눔의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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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지역간의 문화적 교류 시도하고파
김영일(안토니오) 신부
인천내동교회가 한국 성공회 최초의 교회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 당시는 육로나 항공로 등이 발달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뱃길이 중요했다.
인천이나 강화도가 중요했던 이유도 서울로 들어가는 진입로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단들의 선교도 항구가 있는 도시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공회도 예외는 아니라서 선교초기 인천 선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선교초기 인천내동교회는 ‘성루가병원’의 의료선교 덕택에 명맥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의사 랜디스의 역할이 컸다.
당시 ‘성루가병원’은 ‘낙선시의원’말고도 ‘약대인병원’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했다. 랜디스를 외국인을 지칭하는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랜디스는 한국민속에도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다. 가례(家禮), 동화, 한국의 귀신, 한의학, 동학사상, 속담연구, 불경연구 등에 있어서는 학자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당시 연구를 위해 수집했던 많은 서적들과 집필들 약 300여 권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랜디스 문고’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다.
랜디스의 한국 사랑은 대단했다.
1892년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기르기까지 했다. 이것이 인천고아원의 효시가 되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양자 바나바와 고아 5명에게 영세성사를 주었다고 나와 있다.
인천이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자리한 내동 지역은 발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지금부터 4년 전 송림동을 비롯한 이 지역이 도시개발로 공동화가 된다.
이곳 중구가 인천의 중심이었다가 인천시청이 간석쪽으로 옮겨가면서 연수구나 서인천 쪽에 신도시가 생기고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이 지역을 떠나면서 성미카엘 유치원도 폐원하게 되었다.
사람이 없는데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은 어떻게 운영하나.
교인수도 많이 줄었다.
천여 명에서 지금은 400여 명이다. 물론 인구가 빠져나간 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다.
성공회는 지역민과 함께하는 ‘작은’ 교회를 선호한다. 교회에 인원이 어느 정도 늘면 분립해서 나간다.
인천내동교회에서도 다섯 교회를 분립했다. 눈에 보이는 양적인 교회 성장이 교회의 본질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부터 도시빈민과 함께 해온 ‘나눔의집’ 등을 통해 교회 주변의 이웃을 돌본다.
아무리 작은 교회도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나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은 당연히 실천한다.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은 여전히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진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든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곳곳에 공부방을 22곳 정도 운영하고 노인 무료급식과 미용 봉사, 장년들이나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서예 등 취미교실도 운영한다.
외출이 힘든 분들을 직접 찾아가는 등 다양하고 유기적으로 지역주민을 돕는다.
‘성루가병원’에서 시작해 ‘성미가엘종합사회복지관’까지 지역주민을 위한 의료, 교육, 복지 사업을 그때그때 맞게 잘 실천해왔다.
앞으로의 계획은.
인천지역 사람들이 문화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던 60년대 당시 김성수 신부님이 공연을 기획하셨던 것처럼 이웃들과 함께 하는 음악회 등의 공연을 열고 싶다.
다시 교회와 지역의 문화적인 교류를 시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