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쿄에서 플라스틱 렌즈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에게는 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인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에 대해 아버지는 “일본인 중에는 찾을 수 없는 인격자”라고 감탄했다. 아버지 회사와 협력관계에 있던 일본 기업의 사장도 귀화한 한국인이었는데, 그 집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잔치 중 한국 여성들이 나와 부채춤을 추었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프로 레슬러 역도산이나 가수 미야코 하루미 등 스타 중에 재일교포들이 많아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우수한가 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이 본격화한 것은 대학 시절부터였다. 한 모임에서 만난 재일교포 친구들이 외국인 등록증을 보여 주는데, 거기에 한국 이름이 적혀 있었다. 평소에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러 한국인인지도 몰랐던 친구들이었다. 그들로부터 에도시대 때 조선통신사 이야기나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들었다.
에도시대 때 일본이 정식 국교를 맺고 있던 나라는 조선 하나뿐인데, 교과서에는 왜 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을까? 왜 네덜란드, 중국과 무역을 했다는 내용만 있을까? 의문은 커져만 갔다. 잡지에서 우연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 천황비가 외국인에게 살해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후대에 알리지 않는 게 더 의문스러웠다.
도쿄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는 197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 회사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려고 했다. 장남이 경영을 맡고, 차남인 호사카 유지가 기술 쪽을 책임져 주길 바랐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를 좋아했지만, 공대에 진학한 것도 회사를 물려주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 때문이었다. 10년간 아버지 회사에서 일한 그는 1988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 회사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굳이 그 회사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으로 향하기 2년 전인 1986년 한국인 아내와 결혼을 했다. 한국어 동호회의 시 낭송회에서 만난 아내와는 처음부터 뜻이 통했다.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 잠시 일본에 왔던 아내가 한국으로 간 다음에도 계속 편지, 전화를 나누다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된 것.
“처음 만나자마자 대화에 빠져들었어요. 서너 시간 이야기했을까? ‘옛날 한국과 일본은 형제였다’며 열띤 토론을 벌이는데, 서로 생각이 통한다고 느꼈죠. ‘기생파티’니 ‘현지처’니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의 만남을 이상하게 보던 시절이니, 저랑 결혼하기 위해 아내에게 많은 용기가 필요했겠죠.”
두 사람은 “우리가 힘을 합하면 한국과 일본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면서 의기투합했다. 그래서 전공을 바꿔 한일관계를 연구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 30대 가장이었던 그는 한국어학당을 거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1995년 <일본의 한국 침략 배경연구>로 석사, 2000년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는 《일본에 절대 당하지 마라》는 책도 펴냈다.
처음 한일관계를 연구할 때 그의 의문은 “왜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해야 했을까?”였다. 이제 그는 답을 갖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서 침략, 영토확장은 악(惡)이 아니라 당연하고 선한 일입니다. 평화와 선비정신을 중시하는 한국은 먹힐 수밖에 없는 거지요.”
답답한 점은 이런 관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도 영유권 문제가 그 예다. 사무라이 문화는 정보전을 중시한다. 상대에 대해 엄청나게 정보를 모은 후 철저히 준비해 싸움에 임한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실도 왜곡한다. 그런데 선비문화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상대를 무시해 버린다.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답답한 심정을 가슴에 안고 살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 지도 17점을 찾아내 지난 4월 초 《일본 고지도에는 독도 없다》라는 책을 펴냈다. 학계에서는 이 책이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 가장 결정적인 내용이라고 평한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한 호사카 유지 교수. |
그의 꿈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사라지고, 진정한 우호관계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문제들이 일단락되어야 하는데, 그가 ‘역사 바로잡기’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의 귀화를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1995년 석사학위를 받은 후부터였다. 그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계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국적을 바꾼다기보다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는 100%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같이 흥분하다가도 “저 사람은 일본인”이라며 이방인으로 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진짜 한국인이 돼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싶었다. 2003년 8월 귀화하면서 형제들의 이해는 구했지만, 부모님한테는 올해 초에서야 알렸다. 부모님은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다시 국적을 바꿀 수도 있지 않느냐”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는 이제 일본 우익들의 표적이 됐다. 일본 우익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의 사진과 함께 ‘배신자’ ‘원래 한국 사람인데 일본 사람으로 행세했었다’ 등 살벌한 내용이 올라 있다. 그러나 1대 1로 일본 지식인들을 만나 한일관계에 관해 설명하면 “아, 이제껏 몰랐네요”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그는 요즘 자신이 한국인이 됐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