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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인물설교]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헌신
사도행전 18:1~4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앙 인물은 사도 바울의 평신도 동역자로서 귀하게 헌신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아굴라는 아굴라는 지금의 터어키 북쪽 지방인 당시의 본도 지역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본명이 브리스가이고 브리스길라는 애칭입니다. 브리스길라의 가문은 로마의 유명한 브리스가 가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빈부의 차이와 민족의 차이와 사회적 지위 가문의 차이를 뛰어넘어 맺어진 부부라고 추정합니다. 이 두 부부의 이름이 성경에 여섯 번 등장하는데, 4번에 걸쳐서 아내 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먼저 기록되는 것을 보면, 브리스가가 신분적으로 당시 높은 지체의 가문 출신인 것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말들합니다. 그래서 추정하기는, 아굴라가 로마에서 살다가 신앙 생활을 하던 중에 교회에서 두 사람이 만나 신앙과 사랑을 키우고 집안의 반대로 무릅쓰고 결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당시에 기독교 신앙은 이미 로마에까지 퍼졌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의 배경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 시에서 추방한 이유가 유대인들끼리 ‘크레스투스’라는 사람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서 유대인들을 싫어하는 로마 사람들의 원성 때문에 추방령을 내렸다고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그리스도를 두고 유대인들과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간의 분쟁이 일어나서 로마에서 추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추방령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추방되어 그리스의 고린도로 내려온 것이니,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귀족의 딸과 당시 로마인들의 천대와 미움의 대상이었던 유대인 청년이 결혼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라는 크나큰 변수가 없다면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서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상태에서 추방을 받아 고린도로 갓 내려왔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만남으로써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고 아름다운 헌신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발걸음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시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변덕스럽기 그지 없던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을 때에 내일 일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 막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발걸음을 고린도로 인도하시고, 2차 선교 여행 중에 홀로 외롭게 고린도로 흘러 들어온 사도 바울을 만나 서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남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실 줄 믿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더욱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다른 동역자들을 멀리 둔 채 매우 힘든 심리 상태에서 이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고린도 도시는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 특히 방탕 문화가 극성한 대도시였습니다. 어떻게 혼자서 이 거대한 세속 도시의 우상 숭배와 세속주의와 맞서 복음을 전할까 엄두가 전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같은 업종인 천막 만드는 일과 동시에 같은 동족 유대인이자 또 같은 기독교 신앙을 미리 가지고 로마에서 내려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을 때 사도 바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쁘고 힘이 났을 것입니다. 성경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고 말씀하였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진 주의 성도들이 힘을 합해서 일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님의 나라 확장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서로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요 함께가는교회의 주의 군사로 성령께서 한 자리에 불러주신 것을 기억하고 서로 귀히 여기고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다해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1년 6개월을 함께 천막도 만들면서 복음을 함께 전하다 보니, 고린도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이제 어엿이 교회가 고린도지역에 선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모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돌아가고자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가 부부가 함께 떠나고자 따라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 대하여 악한 유대인들이 여행 도중에 폭력이라도 행사할까봐 동행하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그들 부부는 이제 사도 바울을 통하여 1년 6개월 동안 지내면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지냈기 때문에, 한 가족 같았고 사도 바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에 그냥 남을 수 없고 사도 바울과 어디라도 함께 가고자 작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는 중에 소아시아 지역의 에베소 도시에 잠시 들러서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만나 잠깐 변론하고 작별하면서 붙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말한 후 배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배타고 떠나는 사도 바울은 함께 따라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머물고 있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사도 바울 심령 속에 성령께서 어떤 생각과 음성을 들려주신 것 같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과 함께 모처럼 모국인 유대 지역도 가보고 싶고 사도 바울 곁에 있고 싶었지만, 사도 바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여 에베소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순종하는 가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도 바울 곁에 함께 있고 싶지만, 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는 미래에 다시 만날 기약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사도 바울의 권고를 따라 순종하여 에베소에 주저앉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를 단지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성령의 권고로 알아듣고 비록 자기 앞길이 불확실하지만 자기들의 삶을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이 헛되지 않고 귀한 열매로 곧 나타나게 됩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사도 바울이 이곳 에베소 도시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미리 이곳에 도착하여 미리 기도의 밑거름, 전도의 밑거름을 기름지게 해놓았고 사도 바울이 도착했을 때 그를 영접하여 거처나 사역이나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도와서 3년 동안 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큰 부흥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과 합리적 판단, 혹은 개인적인 감정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성령의 소원, 성령의 계획과 뜻에 언제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귀한 일꾼으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의 삶을 어디에 초점을 두고 나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브리스길라 부부를 생각하면서 생각합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세상적으로 안일하고 평안하기만을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추구한다면, 진정 가치있는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 부르실 그날까지, 좀 더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든든하고 활기차게 세우기 위한 길로 선택해서 살아갈 때 머잖아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에 “참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복된 칭찬과 더불어 영원히 시들지 않는 금면류관을 받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안디옥으로 배타고 내려간 사이에 에베소에 머물면서 토요일 안식일이면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면서 사도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젊은 주의 종이 에베소 회당에 나타나서 열심히 주의 도를 전하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는 아볼로라 하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설교자였는데, 일찍부터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이를 전하였으나, 세례에 대하여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 삼위 이름 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하여도 미진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그를 데려다가 정확하게 풀어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그 두 사람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사도 바울에게 복음 진리에 대하여 장시간 동안 깊이 듣고 깨달아 진리에 대한 분명하고 체계적인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미 훌륭한 주의 종이었던 아볼로를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할 정도로 복음에 대하여 깊이 아는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평신도들이었지만, 주의 종과 대등할 정도의 깊은 지식을 가졌으니 이는 그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가르칠 때 열심히 듣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의 귀한 점은 잘 듣는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잘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진리의 부요함에 이른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것이 신앙의 지식의 첫걸음입니다. 에베소의 회당에서 아볼로가 담대히 설교할 때에도 그 두 사람은 자세히 잘 듣기를 먼저 했습니다. 그런 후에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히 풀어서 가르쳐주었습니다. 잘 듣는 것이 이 두 사람이 보여준 귀한 장점입니다. 우리도 항상 잘 귀담아 주의 가르침을 듣는 자가 되어서 지식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시다.
또한 아굴라 부부가 회당에서 아볼로에게 공적으로 가르쳐 그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를 데려와서 사적으로 자세히 풀어 준 것은 주의 종의 권위를 지켜준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주의 종보다 더 많은 자기의 지식을 뽐내지 않고 조용히 진리의 도를 가르쳐 알려주어 그 종으로 더욱 바르고 충실한 진리의 선포자가 되도록 도와준 점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복된 인품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도 주의 종의 부족함을 보거든 지혜롭게 권면해줌으로써 더 성숙한 주의 종의 사역이 될 수 있도록 조언과 협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3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는 중에 쓴 편지인 고린도교회 편지에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한다”(고전 16:19)고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쓴 이 편지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의 자기 집을 성도들의 예배 모임 장소인 교회로 사용하도록 내어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로마서 16장 5절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쓴 것을 보면, 그들이 에베소에서 떠나 로마 시로 이사를 갔음을 알 수 있는데, 거기서도 그 집을 기독교 신자들의 예배 장소인 교회로 내놓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공식적인 교회 모임을 가질 만한 넓은 공적 장소가 많지 않아서 성도의 가정 집을 모임 장소로 종종 사용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성도들이 종종 모였던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의 집을 기꺼이 성도들의 모임 장소, 예배 장소, 회합 장소로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 장소가 별로 없는 그 때에 평신도 사역자인 이들은 자기들의 사적인 생활도 기쁨으로 희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자기들의 소유도 아낌없이 함께 공유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희생 때문에, 그 부부가 가는 곳마다 복음의 진보가 있고 교회가 부흥되고 사도 바울의 사역이 힘이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가 가진 것들 물질이나 재능이나 시간들을 기꺼이 드리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가정을 기꺼이 개방하고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그들의 신앙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같이 오늘날도 헌신하시는 우리 교회 여러 성도들의 모습을 주님은 지금도 보고 계시고, 반드시 그 헌신을 갚아주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이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미리 가서 사도 바울이 훗날 로마에 압송되어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나 뵈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미리 준비하기 위하여 언제나 미리 길을 닦는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 4장에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 말씀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이 순교할 즈음에 브리스가 부부는 에베소에 다시 내려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네로 황제의 대 핍박 때에 더 이상 로마에 있지 못하고 사도 바울의 교감 속에 에베소 지역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조차 끝 인사 맨처음 문안 인사의 목록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언급할 만큼 두 사람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변함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두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과 고마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로마서 16:3 이하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이 두 사람은 사도 바울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목까지도 대신 내놓을 정도로 충성스럽게 곁에서 도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한 사람으로서 엄청난 복음 전도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하는 비밀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곁에는 수많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협력자들이 있었기에 그러한 놀라운 복음 진보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협력하고 헌신한 것은 사도 바울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라기보다는 복음과 진리와 성령에 온전히 매어서 주 예수를 뜨겁게 사랑한 결과로 사도 바울을 위하여 그토록 목숨까지 내놓고 헌신한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줄에 매일 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시대에도 복음과 진리와 성령은 이렇게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복음의 협력자, 평신도 동역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 로마 시대와 같은 불신앙과 세속화의 시대 속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우상이 무너지고 세속문화가 변화되고 복음의 진리가 능력있게 확산되는 복음의 진군가가 이 시대에 힘차게 퍼져나갈 줄 믿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신앙의 아름다움을 짧게 요약하면, 첫째 특징은 두 사람은 합심하여 주님을 섬겼다는 점입니다. 여섯 번 이름이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두 사람이 늘 함께 나란이 언급됩니다. 바늘가는데 실가듯이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만큼 두 사람은 복음 진리 안에서 늘 사랑하여 합심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서로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힘써 격려하고 더 열심히 섬기는 사람을 다른 사람은 뒤에서 잘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신앙의 귀한 모델 가정이 됩니다. 특별히 브리스길라가 더 열심히 섬길 때 아굴라는 조금도 질투하거나 발목을 잡거나 하지 않고 열심히 신앙의 외조를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처럼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데 있어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잘 격려하고 뒷받침하여 장차 주님 앞에서도 똑같이 아름답고 귀한 상을 나란히 함께 받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점을 들자면, 그들의 직업은 평생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들의 직업 목적은 돈을 더 많이 벌어 자신들의 일신상의 안일과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장막 만드는 일을 부업으로 여겼고, 자기들의 본업은 평생에 주의 종 바울을 도와서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교회를 세워가는 핵심 공로자 중 하나가 되게 한 것입니다.
분명 훗날 그들 부부가 사도 바울 순교 후에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 주님 앞에 귀한 칭찬과 면류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받은 상은 참으로 영광스러워 사도 바울이 받은 귀한 상들에 버금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를 대접한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 두 사람은 천국에 가서 지극히 아름다운 신앙의 부부로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모두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두 사람처럼 평생 복음과 성령에 매인 자 되어 진리 증거에 헌신하고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주님 앞에 기쁨으로 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