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영덕의 관광명소인 신재생에너지 전시관 옆에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근원이며 국문학사상 귀중한 작품인 신득청 파조님의 역대전리가 가사문학비가 건립되었다.
동해바다의 푸른파도가 출렁이고 풍력발전기의 힘찬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 들리는 가사문학비가 있는 풍력발전소는 영덕읍내에서 울진방향(구도로)으로 약2km를 달리다가 우측편에 삼계리 와 윤선도선생 시비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역대전리가 가사 문학비-
나라세워 다스려 사직을 편안히 함은
앞 시대 나라를 일으킨 임금같고
나라를 어지럽혀 사직을 망하게 함은
앞 시대 못난 임금과 같도다
열사와 충신 참선비와 어진이가
난세라고 어찌 없겠는가
좀스럽고 간악하게 아첨하는 무리가
평시라고 어찌 없겠는가
임금의 마음 어떠냐에 따라
간신이 충신되고 충신이 간신되며
난세가 평화되고 평화가 난세되니
어찌하여 이런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평산신씨 판사공파 파조이신 신득청 선생의 자는 澄叟(징수) 호는 理猷軒(이유헌)이시다. 고려 충숙왕 후 원년(1332년 壬申)에 형 矢直齋(시직재) 伯淸(백청)과 雙生(쌍생)으로 태어났다. 그 때문에 初名(초명)이 仲淸(중청)이었다. 文貞公(문정공) 不諼齋(불훤재) 賢(현)의 손자요 文暄公(문훤공) 簡齋(간재)(또는 皆命齋) 用羲(용희)의 次子(차자)이다. 벼슬은 고려 太僕正禮賓判事(태복정예빈판사)이시다.
선생은 천성이 英敏(영민)하여 10여세에 文章(문장)을 성취하고 “我生萬物中 獨與天地參”(아생만물중 독여천지참)이란 詩句(시구)를 지을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27세에 형제가 同榜及第(동반급제)하여 國中名士(국중명사)들이 그의 文義講論(문의강론)에 경청하였고, 원나라 名儒(명유)들도 그의 器度(기도)에 敬服(경복)하였다. 장령(掌令:從4品)이 되었을 때, 順天君(순천군) 채홍철(蔡弘哲)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고 송나라 제도와 儀禮(의례)를 회복할 것을 청하였다.
공민왕 10년(1361) 典理參議(전리참의) 겸 大言(대언)으로서 中道(중도)에 被召(피소)되어 益齋(익재) 李齊賢(이재현)과 牧隱(목은) 李穡(이색)이 파직 당하므로 곧 벼슬을 그만두고 退鄕(퇴향)하였다.
공민왕 15년(1366 丙午) 35세에 다시 집현전 翰林學士(한림학사)가 되었다.
선생은 평생에 激獨(격독), 揚淸(양청)을 自任(자임)하였다. 鄭圃隱(정포은)이 일찍이 이르기를 “맑기가 세차게 흐르는 물과 같고 곧기가 낙낙장송과 같다. 그러나 곧아도 뾰족한 살촉이 없고 맑아도 심히 차갑지 않으면 가히 너그럽게 세상이 보호함을 얻으리라.
淸如滾滾水(청여곤곤수) 直似落落松(직사낙낙송)
直而無尖鏃(직이무첨족) 淸而無激冷(청이무격냉)
可而寬得(가이관득) 保於世(보어세)라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辛亥) 가을에 歷代轉理歌(역대전리가)를 製上(제상)하였으니
이 해는 辛旽(신돈)을 주살한 해였다. 그 전에 부친 簡齋公(간재공)과 鄭夢周(정몽주). 李穡(이색). 金革(김혁). 李仁復(이인복). 및 兄(형) 伯淸(백청)과 더불어 辛旽(신돈)의 죄를 강력히 탄핵한 사실이 있었다. 조정이 혼미함으로 다음 해 1372년(임자) 영해 仁良村(인량촌)으로 돌아왔다.
여흥왕(우왕) 4년(1378 戊午)에 百僚(백료)의 三徵(삼징)에 응하여 吏部尙書(이부상서), 大匡僉議(대광첨의), 判門下府(판문하부), 堂上判事(당상판사), 平山君(평산군)에 封(봉)해젔다.
임금께 勸學成就(권학성취), 開善閉邪(개선폐사)를 말하고 때때로 탑전(榻前)에서 歷代轉理歌(역대전리가)를 唱奏(창주)하였다. 벼슬한지 얼마 되지 않아 時政(시정)의 道塞(도색)함을 알고 물러나 다시 영해 仁良村(인량촌)에 돌아왔다.
세상이 어지러워 鳳停山下(봉정산하)에 茅屋(모옥)을 마련하니 목은 이색이 “鳳停齋”(봉정재)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그 후 조정에서 네 번이나 불러도 나가지 않음으로 포은과 목은이 주선하여 田土 30結을 나라에서 내리도록하고 그 고을 원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여흥왕(우王) 14년(1388 무진) 왕이 이성계에게 내몰려 강화로 옮겨진 이후에는 동료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반드시 글 말미에 王在江華 東宮代理(왕재강화 동궁대리)라고 써 보냈다. 그 해 역도들이 여흥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날조하므로 종조부인 성재공 치(言+置)와 형 시직재 백청이 윤왕(창왕)께 권신의 執命傾國(집명경국)과 上王의 流離在外(유리재외)와 國姓幻造(국성환조)등의 賊臣兇策(적신흉책)을 통박하는 밀서를 올렸다가 전 가족이 도륙을 당하였고, 선생도 함께 함몰될 처지인데 목은. 포은. 벽은(류번)등 儕流(제류)들의 구원으로 간신히 목숨만을 보전하였다.
드디어 1392년 고려가 망함을 듣고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다가 동해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문인 김삼근. 김계권 부자와 이주. 송극기. 정양필. 김정. 김진양 등이 의관을 거두어 초혼장을 鳳停山(봉정산)에 모셨다. 그 후 자손들은 관향 “平山”을 피하고 세칭 寧海申氏(영해신씨)로 불리었다.
“실로 조부이신 文貞公은 우리 동방의 夫子요 부친 簡齋公은 선친의 학문과 뜻과 사업을 이었고 참으로 선생도 그 아름다운 자취를 꽃다웁게 승습하여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나라가 망함에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마쳤으니 魯仲連(노중련)의 무리도 선생이 실지로 투신한 海上을 천추에 고려의 하늘 고려의 땅이라고 말할 것이요....” 하였다.
華海師全(화해사전)을 편찬한 元耘谷(원운곡)의 遺史(유사)중 선생의 사적은 글자마다 슬픈 눈물로 엮어졌다.(두문동서원지)
선생이 지은 역대전리가가는 당시 불도가 성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흥청대는 양상을 秦漢(진한)에 비유하고, 또 忠賢(충현)을 능멸하는 政事(정사)를 批判(비판)하면서 임금은 거울로 삼고 신하는 그 도리를 취하여 致身行志(치신행지)하라는 내용인데 선생은 동양사학에 정통하였으므로 그 명문을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근원이 되는 국문학사상 귀중한 작품이다.
뒷날 두문동서원에 배향 되었으며 640년 前 선생이 사셨던 宗基가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28-1, 2번지인데 지금까지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子에 순빈재 예(후손: 청송, 영덕에 거주)와 전리령 자악(후손: 창수면 미곡 거주)과 해우유사 자성(후손: 영해 일원에 거주)이고, 女에 정랑 곽치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