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재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닷드네의 모함에도 고레스 칙령 재발견 되어 성전 재건돼”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다윗 계열의 자손을 일으키는 날을 예언하였다(렘 23:5-6). 그리고 다윗의 후손 총독 스룹바벨은 스가랴에 의해 이렇게 예언 되어 있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슥 4:9)며 그의 정통성을 기록하고 있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의 뜻은 ‘바벨론에서 난 싹’을 의미한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김의 장남 스알디엘의 아들이다(학 1:1; 12-14; 마 1:12). 그러나 또 다른 아들 브다야의 아들로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스알디엘이 자손 없이 세상을 떠나자 브다야가 그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낳았거나 동명(同名)의 아들로 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대상 3:17-19).
“스룹바벨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 왕의 영광을 얻고 그 왕좌에서 다스릴 것이라”는 스가랴의 예언과 달리 그 뒤에는 이러한 언급이 있는데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앉으리니, 이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하였다(슥 6:13). 그리고 선지자 스가랴에 의해 언급된 제사장은 여호수아(예수아)인데 그는 제1성전 시대의 마지막 제사장의 손자로서 제2성전의 사독계열의 첫 대제사장이었다.
학개, 스가랴 선지자들에 의해 인정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성전재건의 역사를 이루는데 있어 핵심적인 지도자로 부상한다.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을 위기로 여겼던 총독 닷드네와 그의 동관들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받고 이들을 향하여 항의하였다. 너희가 무슨 권한으로 성전을 재건하느냐 하는 것이다(에 5:3). 그러나 그들은 고레스(Cyrus Ⅱ, 558-530. BC)의 칙령에 의해 건축한다고 답변하였다.
총독 닷드네는 유프라테스 서쪽 영지 아바르-나하라 지역의 총독이었음이 기원전 502년의 설형문자를 통해 실존 인물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은 성전건축의 도움 제공을 거절한데 분개한 사마리아인들의 배후 방해 공작과 연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느 4:7-23).
총독 닷드네는 이러한 성전 건축 재개에 대하여 페르시야 제국 당국에 보고하였고 이러한 공사 재개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장을 조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고레스 2세가 작성한 문제의 칙령은 다리오 왕의 명령으로 엑바타나의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였고, 문서 보관소에서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하였다. 엑바타나(Apadana)는 메대의 옛 수도였으며 당시의 페르시야 왕들의 여름 궁전이었다. 여기서 발견된 고레스의 칙령은 모든 원조를 아낌없이 하여 주라는 내용의 칙령이었다.
고레스 2세는 기원전 539년 신바벨론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유대 유민기 생활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종말을 맞이한다(대하 36:21). 당시 유다의 첫 번째 총독 세스바살은 여호야긴의 아들이었던 네 번재 아들 세낫살과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H. Tadmor).
세스바살은 스룹바벨과는 전혀 다르게 한번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고 있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에스라서 5장 14절에 세스바살이라는 이름한 자라고 기록하므로 거리를 둔채 언급하고 있다.
고레스 2세가 전사한 기원전 530년 이후 페르시야를 통치하였던 캄비세스 2세(CambysesⅡ, 530-522 BC) 통치시기에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중단된 시기였다. 그의 통치기간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반란세력들을 제압하는 국가적 변란기였다. 이 기간은 페르시야 정부와 유대공동체 사이의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 수가 없다.
캄비세스 이후 다리오 1세(Darius Ⅰ 522-486 BC)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레스 1세의 칙령을 발견하므로 이로인하여 성전건축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성전 기구의 반환과 이러한 성물들이 옛 규정에 따라 거룩한 예식에 사용되도록 조치되었다.
이렇게 기원전 520년경 여름부터 성전재건을 시작한 유대 지도자로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스 5:1-2, 6:14, 학 1:-2:) 당시의 페르시야 제국은 반란을 기도하였던 가우마다의 징벌이후 제국의 기틀을 흔드는 징조만 보여도 민감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정황을 생각하여 보면 다리오 1세의 성전 건축 재개의 허락은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아닐수 없다. 이처럼 다윗의 자손 스룹바벨과 힐기야의 자손 여호수아라는 두 지도자에 의해 성전건축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리오 1세 집권 초반이었던 기원전 522년 12월 22일부터 521년 6월까지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사르 3세에 의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머무르고 있던 다리오 1세는 바벨론 속주 민족 가운데 하나인 유대민족이 다리오에게 착실한 충성을 보여 주고 그들의 도움으로 유대지역을 페르시야의 영향권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줌으로써 이집트 정복이후 허리의 위치와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로서 정치적으로도 안정된 완충지대를 확보함으로써 제국의 전체적 이익을 고레스 1세는 깊이 생각하였을 것이다(A. Kuhrt).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희망사항은 무엇이었을가? 다윗 왕조 계열의 여호야긴과 그의 직계는 포로기 유민시대라는 오랜 침묵의 기간동안 그들의 구심점이요, 미래에 회복하여야 할 국가재건의 기대가 함축된 신앙적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고레스 2세의 칙령 발견과 더불어 다리오 1세에 의한 고레스 2세의 칙령 문서를 재확인하는 명령이행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황이었다.
그 후 다리오 1세는 여호야긴의 손자였던 다윗의 자손 스룹바벨에게(대상 3:9) 페르시야 총독(Satrap)직의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것은 다리오1세 초기에 다윗왕조의 회복에 대한 유대민족의 소망에 많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속주지방의 왕조가 계승되도록 허가한 지역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길리기아와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과 구브로(사이프러스)에도 왕족들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F.Bianchi).
기원전 520년 초 귀환한 스룹바벨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해 8월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다리오 1세는 유다인들의 성전재건 허락이후 스키타이인과 엘람인들의 반란을 진합한다. 선지자 학개에 의하면 스룹바벨은 여호와 소유의 인장반지였으며 코스모 폴리탄(Cosmopolitan) 시대의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다(슥 4:1-6, 10:14).
위기 시기인 기원전 519년 다리우스 통치시기의 황금시대를 맞이할 즈음 페르시야는 예루살렘의 상태를 위험지대라고 인지하고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인 닷드네에게 그곳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라고 명령하였다(스 5:3-17). 이러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고레스의 칙령대로 성전이 건축되었고 하나님의 성전은 드디어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던 것이다(스 6:16-22).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 누구도 중단 시킬 수 없는 대역사(大役事)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