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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자본]
문화자본, 어떻게 만들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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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바로 그 '개인 간 문화 취향의 차이'가 형성되는 데는 소속 계층이 주요 변수로 작용했고, 이 '문화취향'의 차이는 학력, 화폐 등과 더불어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데 주요한 권력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역작 <구별짓기>는 이 연장선에서 쓴 연구서다.
문화자본은 문화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능력, 문화의 장에서 행사할 수 있는 상징적 권위, 공공 제도가 부여하는 권력의 행사, 교육과 계급에 의해 축적된 문화적 취향 일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에서 문화자본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행사될까? 20년 가까이 국내 대중문화의 이론, 현장 연구를 병행한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책 <문화자본의 시대>에서 이 화두를 분석한다.
요점은 '문화는 자본으로 수렴되고, 자본은 문화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는 것. 고급 예술, 공연예술, 대중문화산업 등 우리 사회에서 문화자본이 생성, 작동되는 방식을 소개한다.
고급문화, 아티젠의 출현
최근 10여 년간 눈에 띄는 문화예술계 변화로 해외 유명화가들의 잇단 전시회 성공과 대형 클래식․뮤지컬 시장의 확장, 미술품 경매 시장 활성화 등이 꼽힌다. 이런 문화현상의 이면에 이를 후원하는 문화자본 계층, '아티젠'(Artygen)이 있다.
아트(art)와 세대(generation)가 결합된 단어로 소비의 주된 선택기준에서 미적 요소를 중시하는 잠재적 상류층, 안정된 중산층 계급을 일컫는 마케팅 용어다. 국내에서는 주로 제품을 고를 때 예술적 감각을 고려하고 미적 디자인을 선호하며 고가의 문화예술 작품이나 문화예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소비주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아티젠은 언제, 어떻게, 왜 출현했을까? 주지하다시피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경제가 위축됨에 따라 부동산 가격은 하락한다. 자본 축적이 가능했던 상류층은 자산 가치를 높이는 기회를 맞았고, 2000년대 이후 상류계층 중에서도 최상위 소비계층은 분절된다.
이른바 양극화 현상의 시작이다. 이들은 적극적인 고급 소비주체로 떠오른다. 명품가방, 최고급 실내 인테리어, 주상복합타운 등이 유행하는 것은 이들 최상위 계층에게 자산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동연 교수는 "상류층의 '계급적 구별짓기'가 일어나는 지점이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문화자본"이라고 지적한다. 부의 축적은 또 다른 투기와 함께 자신을 교양인, 문화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미적 투자로 이어진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문화와 예술의 취향을 구현하려는 욕망은 비단 최상위 계층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가진 중산층 계층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와 고용불안정 시대를 거치며 중산층 계급은 다수 하향평준화와 소수의 상향평준화로 분화됐다. 비정규직의 양산은 상대적으로 정규직과 전문직의 소득증가를 가져와 중산층 내에서 적극적인 소비력을 가진 새로운 상위계층을 만들었다.
고급 예술에 대한 문화적 취향, 선호도는 오랜 기간 교육문화자본이 투자된 배경에서 형성된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존케이지나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을 감상하기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새로운 예술취향을 드러내는 한국의 상위 중산층, 아티젠의 등장은 고급 예술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소비 욕구의 증가라고 볼 수 있다.
이동연 교수는 "상위 중산층 계급의 예술 선호도는 충분히 체화된 문화자본을 보여주기보다는 늘어난 경제적 취득 자산을 잠정적인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소비욕구를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또 한편으로 아티젠의 출현은 한국의 교육열에서 비롯된 점이 많다. 국내 미술과 관련된 대규모 전시회는 여름과 겨울 방학 시즌에 몰린다. 유명 전시회는 실제로 문화예술 애호가보다 자녀 교육을 위한 가족들의 참여가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아이들에게 미술, 음악, 무용 같은 예술 사교육을 시키는 학부모들이 고급예술 시장을 이끄는 숨은 주역인 셈이다.
이동연 교수는 "이들은 자녀들에게 예술적 고급취향의 미적 감각을 길러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육자본의 축적을 위한 목적을 가진다. 상위 중산층 계급에 비해 경제적 자산 능력은 부족하지만,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소비에 따른 교육자본 축적의 잠재적 욕구는 일반 중산계급들보다 훨씬 높다"고 지적했다.
문화자본이 키운 공연시장
2000년 이후 한국의 공연 시장은 급성장했다. 2003년 4월에 있었던 '빈필 오케스트라'의 월드컵 상암경기장 공연에는 국내 클래식 공연 역사상 최대 유료 관객인 4만 6000여 명이 관람했다. 최고 30만 원 하는 로열석은 예매 후 가장 먼저 매진됐다.
한달 후 상암경기장에서 공연한 오페라 <투란도트>역시 대성공을 거두는 등 초대형 공연예술 붐은 본격 엔터테인먼트 시대를 알리는 지표가 됐다. 이밖에도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으로 시작된 대형 뮤지컬 붐,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로 이어지는 팝 가수들의 공연 등 한국 공연시장은 블록버스터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도 역시 '문화자본'이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공연 시장이 블록버스터 중심으로 재편된 것은 무엇보다 공연 제작에 대형자본이 유입됐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벤처형 금융 투자자본은 2000년대 초 영화산업에 대한 투자가 계속 실패하자 뮤지컬, 공연산업 쪽으로 투자 방향을 선회한다.
<오페라의 유령>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를 제작한 오리온 그룹의 '제미로'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을 제작하며 창업투자사의 투자를 받았고, CJ엔터테인먼트는 2004년 뮤지컬 <캣츠> 지방 순회공연에 5억~10억 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으며, CJ클래식을 설립, 본격적으로 공연예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기업은 공연 제작에 자본을 투자하면서 문화 인프라, 즉 공연장 건립에도 투자하기 시작했다. LG그룹이 2003년 620억 원을 들여 LG아트센터를 건립했고, 롯데그룹은 2006년 450억 원을 투자해 1200석 규모의 초대형 뮤지컬 전용극장 샤롯데극장을 건립했다. CJ엔터테인먼트 역시 대학로에 900석 규모의 대극장을 포함, 3개관 극장을 소유하는 뮤지컬 전용극장을 오픈했다.
정리하자면 '해외 공연 성공 - 공연제작 투자 붐 - 대기업 가세 - 공연장 인프라 건립' 등으로 국내 대형 공연시장이 급성장하게 된 것이다. 공연산업의 활성화는 공연시장, 노동인력 창출과 관객들이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대기업이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형식의 공존을 파괴한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몇몇 공연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공연들이 물량공세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면서 공연의 '종다양성'은 과거에 비해 더 줄어들었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해외 공연에 대한 로열티 지급 등 공연제작비에 거품이 끼면서 티켓 가격이 급상승됐다는 점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199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주요 공연 티켓 가격을 비교하면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 공연은 최고 1.5배, 오페라는 2.5배, 연주자와 성악가의 리사이틀은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이들 공연 시장은 관객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투자 기업, 즉 대기업의 문화자본에 의해 형성된 형태다. 2000년대 국내 대형공연 시장의 특징은 투자 기업의 프로모션으로 활용되면서 급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전 기업이 공연을 후원할 때 조건 없이 현금을 지불하고 홍보를 요청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직접 참여해 티켓 관리를 자신들의 고객관리 수단으로 활용한다.
기업이 일정한 금액을 주고 후원금 만큼 티켓을 받아 VIP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증정하는 형식이다. 때문에 티켓가격이 상승되고, 공연에 대한 충성도는 떨어진다. 일례로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린 다섯 작품 26회 공연에서 총 관람객 1만 2000명 중 유료관객은 7800명, 무료관객은 4347명으로 집계됐는데, 무료관객의 대부분은 기업 협찬에 따른 초대권으로 온 관객이었다.
대중문화, 수직계열화 독점화
한국의 문화자본 특징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분야가 대중문화 산업이다. 그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하면 독점화, 수직계열화, 생산 주체들 사이의 커넥션이다.
물론 미국과 일본, 유럽 등 문화가 산업적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어느 사회나 독점화 경향은 있다. 그러나 한국 문화자본의 독점화는 문화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모두에서 획일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동연 교수는 "한국에서 문화자본의 독점화, 혹은 수직계열화가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문화관행과 불공정한 커넥션에 의해 심화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동연 교수 인터뷰 참조)
독점화의 사례는 많다. <트랜스포머>나 <아바타> 같은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는 전국 2000여 스크린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대중음악은 이동통신 자본에 포획됐다. 가요 차트를 장기독점하는 건 소녀시대, 원더걸스, 2PM과 같은 아이돌 팝이다. <무한도전> <1박2일〉 같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을 통해 주당 평균 20여 차례 재방송된다.
최근의 독점화는 1강 체제로의 시장독점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 대한 통신자본의 전략적 흡수, 미디어 융복합에 따른 차세대 방송 시장의 지각 변동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독점을 통해 '연예자본-방송유통-소비·라이프 스타일'은 수직계열화된다. 멀티플렉스 극장의 출현과 더불어 CJ, 롯데, 오리온 등 영화배급시장에 독립적인 대기업 계열사가 등장하면서 영화산업의 내적 자본 규모가 커졌고, 이 자본의 확대는 결국 영화기획제작과 영화배급, 영화상영업을 하나의 자본이 총괄하는 수직계열화 체제를 낳았다.
음악 산업도 음원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며 자본의 우위를 점한 이동통신사 위주의 시장이 된다. SK텔레콤은 음원 서비스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국내 대표음반사인 서울음반을 인수했고, LG텔레콤은 음원저작권 확보를 위해 한국음악산업협회에 100억 원의 음악발전기금을 지원하기로 합의하고, 2005년 6월까지 무료 음원 서비스를 제공하다 직후인 2005년 7월부터 뮤직온이란 브랜드로 유료 음원체제로 전환했다.
KTF도 음원포털사이트 도시락을 개설해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음원, 게임, 영화 등 부가서비스가 늘어나면서 이동통신사가 벌어들인 매출액은 2004년 18조 7000억 원에서 지난해 36조 3000억 원이 됐다. 이처럼 문화자본의 형성과 축적, 문화콘텐츠가 유통되는 미디어 플랫폼이 독점화, 수직계열화되면서 대중이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도 모두 획일화, 독점화될 우려를 낳는다.
문화자본의 재생산은 부르디외의 언급을 빌려 말하자면 '교육과 학력의 체제 안에서, 개인들의 일상의 문화적 선호도와 취향을 통해서, 미디어의 지속적인 주입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출세를 위해 학력에 올인하고 교육을 위해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중상류층(아티젠), 독점화 수직계열화된 TV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 미디어에서 반복되는 문화민족주의의 언어틀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적 특수성 압축성장 과정서 생성… <문화자본의 시대> 등 동시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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