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산업문명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굳이 생태주의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상식이다. 지구 상의 모든 천연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석유가 고갈되기 시작하면 곧바로 전 세계에 걸쳐 끔찍한 식량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식량의 90%가 석유와 가스이다. 곡물생산에 들어가는 화석연료 에너지의 1/3은 1헥타르당 200시간이 들어가는 사람의 노동력을 1헥타르당 1.6시간으로 줄이는 데 쓰인다. 나머지 2/3의 에너지가 곡물 생산에 들어가고 그 가운데 1/3이 비료로 들어간다. 씨앗 생산과 보관, 논밭 갈기, 비료, 농약, 가을걷이, 도정, 포장, 운송, 보관 등등 농업생산의 전 과정에서 석유가 투입되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다.
당연히 석유에너지가 논밭에 투입되지 않으면 곡물생산은 확 줄어들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 인구는 약 23억 명이었는데, 2011년 현재 전 세계 인구는 69억 명으로 3배나 늘었다. 곡물생산량이 늘어나지 않으면 인구는 절대로 늘어날 수 없다. 오늘날 전세계 곡물생산량은 1945년보다 꼭 3배 늘어났다. 다른 요인도 있지만 이는 명백히 곡물생산에 투입된 석유 덕분이다.
이미 그런 석유 고갈 사태를 생생하게 겪은 두 나라가 있다. 다름 아닌 북한과 쿠바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소연방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 직후 북한과 쿠바에는 소연방으로부터의 값싼 석유공급이 한순간에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두 나라의 현재는 전혀 정반대이다.
북한은 식량부족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인민들이 굶주려 죽는 끔찍한 상황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여태껏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들의 탈주 사태가 지속되면서 선군정치라는 이름 아래 총칼로 체제 붕괴를 막아야 했고 급기야는 핵실험까지 감행하며 위기 탈출을 모색하는 극도의 군사주의 정권, 3대 세습독재의 왕조정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90년대 초반 당시 남한 사람들이 음식쓰레기를 하나도 발생시키지 않고 그 양만큼의 식량을 고스란히 북한에 보내기만 했어도 북한 동포들은 한 사람도 굶어 죽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란, 아니 남북한의 전쟁세력들은 이처럼 남북한 인민들을 죽이는 살인마들이다.
그러나 쿠바는 지속가능한 유기농으로 전환, 적어도 굶어죽는 인민들은 한 사람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석유문명에서 탈석유의 생태 순환형 대안 농업사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나라에 수많은 의료진을 파견할 만큼 미국보다도 훨씬 앞선 보건의료 체제를 갖춘 나라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 이 두 나라의 미래를 전혀 다르게 갈라놓았을까.
남미에서 가장 잘 살던 나라였던 쿠바의 붕괴
▲ 쿠바 바르톨레메 마소 사탕 수수밭, 뒤로는 공장 굴뚝이 보인다. ⓒ프레시안(손문상)
쿠바는 1959년 혁명 이래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공업국가였다. 1인당 국민소득, 영양공급량, 평균수명, 여성교육 수준, 의사 수, 영아사망률, 주택보급률, 학생 수, 인민의 문화행사 참여 횟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남미 1위 또는 상위권을 휩쓸었다.
이렇게 쿠바가 잘 살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거의 공짜에 가깝게 받고 있던 구소련의 석유였다. 쿠바는 구상무역 형태로 소련에 설탕을 수출하고 소련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았는데, 1980년대 쿠바의 대 소련 설탕 수출 가격은 당시 국제 시장가격보다 5.4배나 높았다. 이런 이유로 쿠바의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식량 재배 면적의 3배나 됐고, 1989년만 해도 쿠바는 전체 식량의 57%를 해외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다. 곡류 100%, 가축사료 97%, 콩류 90%, 쌀 43%를 모두 수입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수입하는 가축사료만 연간 약 200만 톤이나 되었다.
이런 쿠바의 황금 시기는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함께 갑작스럽게 멈춰 버렸다. 하룻밤 사이에 쿠바 무역의 75%가 중단되고 말았다. 쿠바에 있던 소련인이 전원 철수하면서 쿠바 전체 석유 수입량의 53%를 점하고 있던 소련의 석유 공급을 포함해서 연간 60억 달러에 이르는 소련의 각종 지원도 끊기고 말았다. 밀을 비롯한 곡물 수입도 절반으로 감소했고, 비료와 농약 공급은 80% 이상 줄어들었다. 쿠바의 국내총생산은 한순간에 85%나 줄었고 공장은 55% 이상이 정지되어 가동률이 15% 정도밖에 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식량이 부족했다. 1990년 초반 쿠바 인민들의 하루 칼로리 소비량은 1980년대의 30% 이하로 떨어졌다. 자동차가 멈춰 섰고, 장시간 정전이 일상화되었다. 신발, 비누, 치약 등 일상생활의 소비물자도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주택도 생필품 기자재도 기자재의 수리와 서비스도, 의료시설도 의약품도 교육기자재도 쿠바 국내에서는 구할 곳이 없어졌다. 실업률도 엄청나게 높아졌다.
당연히 쿠바도 석유농업을 했다. 소련의 붕괴 이전 쿠바는 75000대 가량의 소련제 대형 트랙터가 있었고, 연간 100만 톤의 화학비료와 2만 톤의 농약을 사용했다. 쿠바 경지면적 가운데 약 80%가 대형 국영농장으로서 대부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다. 나머지 20% 정도의 경작지만이 16만 명이 넘는 소농과 협동조합의 차지였다. 그러나 이 20%의 농지에서 쿠바 전체 국내 농산물의 약 40%를 생산하고 있었다.
1991년 9월 쿠바정부는 '평화 중 비상시기령'을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소비에트식 산업화 모델을 폐기하고 트랙터와 화학비료의 고 에너지 투입 농업 대신 가축을 이용한 최소에너지 투입 유기농으로의 전환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갔다. 이들의 구호는 단순했다.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시계를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쿠바 위기 극복의 주역, 소농과 지역공동체
▲ 쿠바 카마구웨이 농민들이 수확한 사탕수수를 옮기고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쿠바 유기농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천은 다름 아닌 소농과 자립자치의 지역공동체였다. 국영농장의 임금노동자들과 달리 소농들과 소농들의 협동조합은 비료와 농약, 석유 등을 국가가 제공해 줄 수 없는 준전시 상황을 맞아 누가 무엇을 던져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재빨리 자신의 땅에 걸맞은 생태 순환의 유기농업을 실천해 나가는 주체성을 발휘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국가가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위기 상황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눈에 보이는 땅이란 땅에는 모두 닥치는 대로 먹을거리를 심고 농사를 지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바리오'라고 불리는 도시 이웃 공동체, 마을 공동체야말로 쿠바가 위기를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소농들처럼 도시의 '바리오' 이웃 공동체들은 스스로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쿠바 유기농의 대명사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도시농업을 일구어 나갔다. 이 덕분에 녹색혁명 작물인 밀과 쌀 생산은 급격히 감소했지만 채소 생산은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4년경부터 도입된 쿠바의 도시농업은 하바나 채소 소비의 90%, 전국에 걸쳐 약 70%를 공급하고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처럼 쿠바의 식량 자급자족은 소농과 '바리오' 공동체의 작품이었다. 물론 탈석유 유기농으로의 전환을 국가 목표로 정하고 소농과 협동조합, '바리오' 공동체 지원을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실천한 카스트로 정권의 지도력 또한 위기 극복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오늘날 쿠바는 경제 형편이 나아지면서 쌀은 소비량의 20∼3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밀과 옥수수를 비롯한 농산물들도 일부 수입하고 있다. 또한 쿠바의 주 수출품인 담배와 설탕, 감자 농장에서는 화학비료를 투입하는 석유농업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석유 공급이 끊어지고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1990년대 초반 5~10년 동안 소농과 협동조합, 지역공동체들이 외부의 지원 없이 순전히 인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룩해냈다는 것은 혁명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방비를 절반으로 줄이다
쿠바 유기농업이 성공하고 '바리오'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주택, 식량, 의료 등 쿠바 정부의 확고부동한 평등주의 복지정책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비상시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쿠바정부는 기존의 배급제를 기본으로 식료품을 평등하게 분배하면서 어린이, 노인, 여성 등 약자들의 굶주림과 아사(餓死)를 막아낼 수 있었다.
궁핍한 경제사정에서도 쿠바정부는 1989년 9억 페소였던 건강의료비를 1994년에는 오히려 11억 페소로 증액했다. 대신 1989년 13억 페소였던 국방예산을 1995년에는 그 절반 이하인 6억 페소로 삭감하는 과감한 조처를 단행했다.
인구 2억 4000만 명에 각종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150만 세계 최강의 군대와 국방비가 무려 7000억 달러로 전 세계 국방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이 적국으로서 호시탐탐 쿠바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쿠바는 인구 1100만 명에 군대는 육군 3만8000명, 해군 3000명, 공군 8만 명 등 총 12만 명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비상시기인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은 그 이전보다 더 거세게 쿠바에 대한 봉쇄를 강화해왔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에 그렇게 강요하는 미국의 투표율은 정작 50% 선에 불과하지만 쿠바 유권자들은 95%가 투표에 참가한다. 그것도 미국의 거짓 선전과 달리 선거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다. 협동조합과 지역자치공동체에 뿌리박은 민주주의의 힘은 그 어떤 군사력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쿠바가 온몸으로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남북한의 통일운동과 모든 정치운동, 시민사회운동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결단코 미국의 위협과 봉쇄는 강성대국을 지향하는 100만이 넘는 북한군(북한주민 수 2300만 명)과 선군정치, 수많은 아사자와 되풀이되는 식량위기의 재앙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남한의 흡수 통일론에 기초한 전쟁주의와 군사주의, 남북대립 정책 또한 그렇다.
최악의 선택을 한 북한 전체주의
▲ 식량 배급을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 ⓒ연합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한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잘 살았던,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공업국가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을 수립, 빠르게 전후 복구를 달성했고 금세 식량의 자급자족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놀라운 정도로 빠른 식량의 자급자족 달성은 1946년 남한에 앞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에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토지를 갖게 된, 절대다수의 자영 소농과 협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화학비료와 농약을 투입하는 석유농업이었고 석유는 소련으로부터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50년대 북한은 남한에는 단 1대도 없었던 뜨락또르(트랙터)를 2000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까지 북한의 단위면적당 화학비료 투입량은 349kg/ha에 이를 정도로 세계에서 비료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전후 복구에 성공한 북한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상징하듯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가난과 부패에 찌든 남한이 수해를 입었을 때는 거꾸로 쌀을 원조해 주기까지 했다.
통일부에서 운영하는 북한 통계 포탈의 1965년 통계를, 북한 인구가 남한 인구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해서 보면, 당시의 남북한 경제력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시 남한에서는 북한이 더 잘 사는 나라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중정(지금의 국정원)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는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기까지 해야 했다. 1980년대까지 남한의 군사독재정권은 지금의 북한과 거의 똑같이 외신까지 통제하는 암흑의 전체주의 국가 체제였다.
그렇게 소련식 사회주의 산업화 전략을 추구하면서 전후 복구에 성공해 남한을 경제력에서 압도했던 북한은 그러나 곧바로 소련과 마찬가지로 소농과 협동조합을 말살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북한은 '협동적 소유'를 '전 인민적 소유'로 단계별로 전환시킨다는 목표 아래 1950년대의 농업협동화운동 초기부터 협동농장에서 국유 부문의 비중을 계속해서 높여나갔다.
1960년대 말 주체사상이 확립되고 주체농법이 도입되면서는 협동농장은 '주체성'을 잃고 어용 관변단체로 전락해 사실상 국영농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1970년대 이후 북한은 극심한 관료주의와 생산력 발전의 정체 현상에 허덕이면서 경제력에서도 미국의 지원 아래 외자를 유치해 수출 공업화 전략을 취한 남한에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한 또한 석유 공급이 한순간 끊기는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당연히 공장은 가동을 멈추었고 석유에너지 투입 중단으로 식량 생산량도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북한에는 소농과 협동조합, 인민들 자체의 지역공동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북한이란 전체주의 왕조체제는 오직 수령과 당의 영도와 이를 따르지 않으면 숙청되는 개개 인민들만 있었다. 인민 대중들은 주체사상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최악의 식량부족 사태에 직면해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보이는 땅마다 닥치는 대로 채소와 곡물을 심고 비료가 없으면 똥오줌으로 거름을 만들어 유기농을 실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수령과 당의 지시 명령을 기다리다 굶어 죽는 최악의 사태는 이렇게 해서 발생했던 것이다.
소농과 협동조합이 없으면 굶어죽는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추구하는 생산성은 농업에서는 소농과 가족 농이 훨씬 높다. 에너지 투입을 계산하면 대규모 공장식 집약농업에 견주어 소농의 농업 생산성이 월등히 높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상식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 '소농과 협동조합 강화론'을 주장한 차야노프와 스탈린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은 소련의 운명을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스탈린은 1929년 이른바 '위대한 전환'이라는 5개년 계획의 하나로 농업 집산화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자영 소농을 프롤레타리화하는 정책으로 자영농민의 토지를 몰수하고 모든 자영농민을 강제로 국영농장 노동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광폭한 농민 해체 정책이었다.
당연히 대다수 농민이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이런 봉기는 1929년에는 1200여 건, 1930년에는 1만4000여 건이나 일어났다. 스탈린은 수백만의 농민들을 숙청하고 1800만 명의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차야노프도 숙청되었고 소비에트연방에서 소농과 농업공동체, 협동조합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 러시아 농업은 국영농장 중심으로 공장식 농업, 석유농업으로 치달았다.
소련의 붕괴는 1987년 석유정점에 도달한 소련의 석유 사정도 주요하게 한몫을 했다. 1980년대 내내 저유가가 지속되었고 이에 따라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소련의 석유경제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인한 국방비 부담까지 겹쳐 급속도로 파국을 향해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소연방 붕괴의 핵심 요인은 식량위기였고, 국가가 인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주지 못하면서 소련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량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쩌면 거의 유일한 대안인 소농과 공동체를 스탈린이 말살한 순간 소련의 붕괴는 이미 예고된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대량 아사(餓死) 사태와 쿠바의 식량위기 극복은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있는 소농과 협동조합, 자치공동체가 있느냐 없느냐 그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북한의 식량 자급률은 약 75%대를 오르락내리락한다. 25% 정도의 식량이 부족해서 끔찍한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남한의 식량자급률은 25% 정도, 쌀을 제외하면 5% 남짓 된다. 조만간 석유를 200, 300달러를 주고도 확보하기 힘든 세상이 곧 닥친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박승옥 공동대표
197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됐다.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을 펴냈다. 박승옥은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정책실장, 1987년 전태일기념사업회 부설 구로노동상담소 개설, 1990년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등으로 일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뒤인 92년 농촌으로 내려가 10여 년 동안 생태, 환경, 에너지 문제에 천착했다. 2005년 6월부터 재생가능에너지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대표로, 2011년부터는 에너지생태건축협동조합 공동대표로 농업 및 에너지의 자립·자치와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힘쓰고 있다. 최근 석유와 에너지에 대한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책 <상식: 대한민국 망한다>(2010년)를 썼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공제조합 운동을 하기 위해 2009년 9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으로 결성하고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라는 이름으로 2010년 2월 공식 출범했다. 현재 장례문화 공동체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상포계는 작년 12월 8일 영면한 고 리영희 선생님의 장례를 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