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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간 400주년 맞은 ‘킹 제임스성경’ |
출간 당시 약 1000부가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킹제임스성경은 오늘날에도 200부 정도 남아 있다. 4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종이와 잉크 상태가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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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킹제임스성경(King James Bible·이하 KJB)이 출간 400주년을 맞는 해다.
KJB는 영어로 출간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책이다.
오늘날 영어로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KJB의 영향을 받고 있다.
4세기 동안 10억 부 이상 인쇄된 KJB는 1611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주도로 완성된 영어 성경이라 ‘흠정역(Authorized Version)’이라고도 불린다.
KJB는 제임스 1세가 임명한 학자 47명이 1604년부터 세 곳에서 6개 집단으로 나뉘어 작업한 끝에 탄생했다.
번역에는 히브리어·아람어·희랍어로 된 성경 원본이 사용됐지만 학자들은 불가타 성경(405년에 완역된 라틴어 성경)과 기존의 영어·스페인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독일어 성경들도 참조했다.
링컨과 오바마가 취임선서에 사용한 킹제임스성경 |
링컨과 오바마가 취임선서에 사용한 킹제임스성경
영국인에 언어·종교적 자신감 부여
번역 작업에 국왕의 시시콜콜한 간섭은 없었지만 국왕과 런던 주교인 리처드 밴크로프트(나중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됨)가 내린 지침은 KJB의 내용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신학과 교회 제도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독관(overseer) 대신 주교(bishop), 회중(會衆·congregation) 대신 교회(church)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청교도들이 사용하던 제네바 성경(Geneva Bible·1560)에 담긴 주석은 ‘왕들은 폭군’이라는 둥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divine right of kings)에 도전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KJB에는 아예 주석을 뺐다.
78만8280단어로 된 KJB는 일치의 문서다.
영국 국내에선 성공회의 ‘공도문(公禱文·The Book of Common Prayer)’과 더불어 국민 통합에 기여했다.
KJB 덕분에 영국은 고교회(High Church)·청교도·교황파 등 영국 내 다양한 신앙 흐름을 통합할 수 있었다.
학자들은 전원 성공회 소속이었지만 KJB에는 청교도들의 요구도 반영됐다.
KJB는 영어의 발전과 확산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번역에 참가한 학자들이 읽기에도 듣기에도 편한 성경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자들은 KJB가 셰익스피어의 희곡들보다 영어 발전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 읽어 주는 KJB를 듣고 성경 구절을 외우며 글쓰기를 배웠다. 영어 철자와 문법의 표준화에 기여한 KJB는 대영제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는 과정에서 영어가 세계어로 부상하는 데도 한몫했다.
KJB는 영어가 아직 라틴어나 프랑스어에 비해 열등하다고 영국인 스스로 인정하던 시대에 탄생했다.
불멸의 문학작품이기도 한 KJB는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더불어 영어 수준을 격상시켰다.
KJB 출간 5년 후 사망한 셰익스피어가 KJB 출간작업에 참여했다는 신화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KJB는 영국인들에게 언어적·종교적 자신감을 부여했다.
실낙원을 쓴 존 밀턴(1608~74)은 신이 영어로 인간에게 말한다고 굳게 믿었다.
새 번역 성경 등장으로 위상 흔들
KJB는 ‘세계를 바꾼 책’으로도 불린다.
KJB가 세상을 바꾼 것은 틀림없지만 KJB가 역사와 사회에 미친 영향에는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다. KJB는 분명 민주주의, 혁명, 해방, 노예제 철폐, 교육, 자선, 사회적 평등에 기여했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이나 미국 독립혁명(1775~83)에서 혁명가들의 손에 들린 것은 KJB였다.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1963년 연설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에도 KJB가 인용됐다.
반면 KJB는 압제, 제국주의, 노예제, 남녀 차별의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1861~65) 당시에는 남북 모두가 KJB에서 자기편의 정당성을 찾았다.
노예주도 해방 노예도 KJB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KJB의 용도는 누구 손에 들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달랐다.
400주년을 맞아 영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린다.
번역 작업에 참가한 학자 47명의 고향에서도 기념행사가 열린다.
셰익스피어가 연극을 공연했던 런던의 글로브극장에서는 17일부터 25일까지 배우 20명을 5명씩 4개 그룹으로 나눠 KJB 전체를 낭독한다.
400주년 기념행사는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대성당 내 예루살렘 체임버에서 거행될 기념 예배로 끝난다.
KJB는 출간되자마자 성경의 제왕으로 등극한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제네바성경을 선호했다.
초기 판본들에는 오·탈자도 많았다.
1631년판에는 ‘not’이 빠져 ‘간음하지 말라’가 아니라 “Thou shalt commit adultery(간음하라)”(출애굽기 20:14)라는 웃지 못할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KJB는 이전의 영문 성경과 달리 삽화와 주석이 수록돼 있지 않은 게 특징이었는데 이 점도 초창기 KJB의 인기를 제한했다.
KJB를 만든 성공회는 ‘프로테스탄트이지만 가톨릭(Protestant, yet Catholic)’을 추구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에서 ‘중도의 길(Middle Way, via media)’을 걸었다.
그러나 KJB는 그 전성기인 18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엽까지 250여 년 동안 모든 개신교회가 사용하는 표준 성경이었다.
오늘날 KJB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신국제역본(New International Version·1978), 신개역표준성경(New Revised Standard Version·1989) 등 수많은 성경이 나왔다.
이들 성경은 1947년에 발견되기 시작한 사해문서를 포함, KJB 발간 이후 세상에 다시 나타난 성경 사본들을 반영한다.
KJB의 ‘종주(宗主) 교회’인 성공회에서도 KJB 외에 여섯 종류의 영어 성경(Revised Version, Revised Standard Version, New English Bible, Good News Bible 등)을 추가로 사용한다.
KJB의 위상이 가장 크게 위협받는 곳은 KJB가 탄생한 영국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1953년, 그해에 태어난 모든 신생아는 여왕의 명에 의해 KJB를 선물받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6~35세 영국인 중 51%가 KJB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일각에서는 영국 성공회의 교회 출석률이 10%대로 추락한 원인은 바로 성공회가 KJB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결혼·장례식에서 자주 사용
KJB는 오늘날에도 1억6000만 명의 기독교인이 사용하고 있다.
KJB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교회, 침례교, 흑인 교회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평소에는 다른 성경을 사용하더라도 결혼식·장례식에서만은 단연 KJB를 많이 쓴다.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에서도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는 KJB에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찾아 읽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할 때 사용한 성경은 1853년에 출간된 KJB였다.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1년에 사용한 성경이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1789년 KJB에 손을 대고 선서했다.
다른 성경은 사용할 수 없다는 ‘오로지 킹제임스성경 운동(King James Only Movement)’도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 진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운동이다.
KJB의 정확성과 깊이와 권위를 다른 성경에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 일부는 KJB에 신(神)의 새로운 계시가 담겨 있으며 오히려 KJB를 기준으로 히브리어·희랍어 성경을 수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KJB의 생명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어체다.
KJB는 출간 당시에도 약간의 고어체가 사용됐다.
일상 회화에서는 사라진 ‘thee(너를, 너에게)’ ‘thou(당신은, 너는, 그대는)’가 사용된 것이다.
17세기 초반의 영어로 집필된 KJB를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어 1982년에는 400년간 누적된 영어 어휘·문법의 변화를 반영한 ‘뉴킹제임스성경(NKJB)’이 출간됐다.
94년에는 수정을 최소화해 ‘thee’ ‘thou’도 계속 사용되는 ‘21세기 킹제임스성경’이 나왔다.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