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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의미의 논리학”인가?
- 새로운 “논리학”이 나올 수 있는가?
* 넋두리
서양 철학사에서 어느 한 부분이 비하되고 배제되어 없는 것(유령)처럼 여겼을지라도, 사람들은 그 유령 같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깊이 지각한다(apercevoir). 이런 깊고 무매개적인 지각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설명하지도 증거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 깊은 지각이 현실에서 현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또는 재현(표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는 것을 현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현상과 재현이 철학사에서 실재적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일반인에게 상식(le sens commun)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런 일반적인 인식은 상식의 오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안이비설신)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상식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서, 이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문제 삼지 않았다. 문제 삼는 자들이 비정상 또는 분열증자처럼 여겼다. 이는 마치 구석기와 신석기, 그리고 철기 이래로 인류가 자연과 투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많은 난관을 거치면서 노력(포노스) 해왔다는 사실을 잊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괴로우니까? - 망각의 효과 - 이 오관의 통일성을 각 감관의 자율성보다 먼저 있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선전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상식의 기준으로 지구는 평평하고 하늘에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이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상식을 통해 삶의 터전에서 규칙과 규준도 있고, 도구 사용에 따른 사고의 발달에서 법칙과 원칙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사상사적으로 문자 또는 문헌으로 설명한 것이 그리스 고전시대라고들 한다. 탈레스 이래로 철학의 시작이라고. 물론 이집트와 바빌론이 하늘의 운행의 일정한 규칙성에 따른 책력을 각각 나름대로 가지고 있어서 토지든, 초원이든, 바다이든, 삶의 터전(영토)과 더불어 사는 방식에 적용한 것이 신화와 전설로서도 전승되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주나라 성립시기에(기원전 1200년), 이집트에서 고왕조 기제의 피라밑(기원전 2600년)과 중왕조 시기인 기원전 1600년전 문자기록들(룩수스 궁전), 구 바빌론에서 길가메시(기원전2600년) 설화 점토판을 근거로 기원전 2000년경에 어떤 방식으로든, 표시 또는 등록하여 태양의 운행의 규칙성을 알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학문적으로 논의 된 것을 고대 그리스로 삼는 것은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체계적 서술과 설명을 시작했고, 규칙을 넘어서 법칙을 찾고, 그리고 원리로서 전승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렇게 다음 세대들에게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즉 그 이전의 것은 아직도 부분적 자료와 비의적 독해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해 ‘뭣’인가, 읽어낼 수 있고 알아낼 수 있다고 하였을 때, 철학 또는 학문의 시작이라고들 한다.
삶에서 규칙과 교준, 사고의 법칙과 원리의 구별은 앞 시대의 문명들의 종합에 이르렀던 고대 그리스로부터 탐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중국과 인도도 분류와 계열을 할 수 있지만, 학문 발달사에 이런 이중화를 구별하여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그리스의 것일 것이다. 우선 이런 구별이 분류인가? 이분법적인 항 대 항의 대립으로 파악은 고대에서부터 20세기에서도 여전히 학문들마다에서 달리 증명 또는 증거 하면서 가지치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분류와 분할은 인간의 삶의 편리와 터전의 안정을 위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지구의 평평함이라는 오관의 인식(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하늘의 운행과 지상의 토지(바다) 사이의 어떤 관계 또는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서양은 여러 방법을 취했지만, 산술적 방식의 작대기를 동원한 2항과 손가락의 수의 5항은 일찍이 알려진 것인데, 물론 이런 산술화가 물체들의 다루는 노력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이런 수의 확장에서 달의 운행에서 29 또는 30일, 일 년의 운행 365일과 맞추어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천체의 운행에서도 숫자의 놀이가 딱 떨어졌더라면, 쉬웠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불운이었지만, 그 불운 때문에 인간은 세계와 자기를 알기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의 운행을 그리는 방식과 달리 지상 위에 선과 원을 그리는 방식으로 대체하면서 측정술과 더불어 기하학이 등장했으리라. 산술학이 먼저이고 기하학은 나중이라고 확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산술의 숫자가 먼저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상식(sens commun)의 인식은 하늘과 땅 사이에 관계가 나름으로 정합성을 갖는다고 설명을 하려고 했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단위(통합에서)에서 2-4-8로 전개되는 이항구조는 정합성이라기보다 현상의 다양함을 기호(표시)에 대응하는 방식을 갖추어서 삶에 유용하게 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는 이런 설명을, 상식에 맞게 사고하여, 전승하기에 좋은 문자로 쓴 이가 플라톤(티마이오스)과 아리스토텔레스(자연학, 자연배후학: 형이상학)이다. 오관을 통한 정립의 약점은, 하늘의 천정 위에 다른 우주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이 둘 사이에 정합도 대응도 안 됨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틀 속에서 체계를 만들려고 했고, 만들었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해 줄 수 있으리라, 이 체계가 법칙과 원리라는 사고의 틀의 형성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방향(bons sens, 봉상스)으로 잡은 것은 데카르트 이후이지만, 그래도 방향이 이중성 또는 복잡성 속에서 하나의 체계 또는 방법이 있을 것으로, 즉 통일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 벩송은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에서 이런 고대 시기가 하늘과 땅 사이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신체 사이에 그럴듯한 연대(solidaire)가 있을 뿐이라 한다.
상식의 시대에 이런 체계가 있고 또한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무지몽매한 또는 맹목적인 자들이 등장하였다. 종교가 인민의 지위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상부 성직자들이 마치 고대의 황제(파라오, 참주)처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을 맹목적 사고로 만들었을 수 있고, 그럼에도 상식으로는 이런 맹목적 체계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이런 사고에서 지배는 명령일 수밖에 없다. 1500여년이 지나면서, 상식으로 설명하였던 두 갈래의 길(하늘과 땅)에서 하늘의 뚜껑을 열면서, 하늘의 길로 사고의 확장을 하는 것이 땅에 메인 것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한 방향(bon sens, 봉상스)으로 길을 열고 나간다. 봉상스의 길은 하늘의 운행 법칙이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땅도 그 하늘 운행의 일부이기에 법칙과 원리로 정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역시 고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의 논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영혼과 신체에 관한 인간의 문제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이 토지(지구)에 영향을 주듯이, 영혼이 신체에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 또는 신학의 독단처럼 영혼이 신체에 들어오느냐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신앙이 마남사냥으로 강압하고 있는 시대에, 영혼이 하늘(하늘이 완전성이고 보편성이기에)에서 왔다는 것을 버릴 수가 없었다.
상식과 달리 양식은 하늘의 뚜껑을 열고 우주로 확장하듯이, 영혼의 사유를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 확장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영혼이 신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여전히 맹목적 성직자는 무지몽매한 백성에게 명령(계명)으로 쥐고 흔들어서, 말하자면 성직자의 광기가 신자의 광기에 덮어 씌웠기에, 상식에 대항하려는 현자들은 말조심 할 수밖에 없었다. 신 없이, 성령의 신체화 없이, 영혼은 사물들과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방향을 잡은 이가 데카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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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의 시대에서 한 방향은 확장은 사실상 데카르트의 분석기하학이라고 하지만, 대수학의 승리였을 것이다. 대입된 기호가 무한을 대신할 수도 있었고, 그 당시에는 지각할 수 없고 실재로 대상화할 수 없는 0(무 無)의 개념은 대수기호서 부정형 x처럼 실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있기는 있지만 정할 수 없는 x와 더불어 기호로서 0의 반대방향도 수학적으로는 논의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학에서 부정성의 끝에 있다고 여긴 무가 있었는데, 무(0)의 반대방향이 수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면서(경제학에서 부채에서도), 없음(0)의 지위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대립의 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수라는 숫자의 세상을 넘어서 다른 기호들의 등장은 상식을 넘어서 양식으로 무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는가 하면, 0과 더불어 다른 방향도 열었다. 그럼에도 근대시대에 이런 기호의 의미들의 확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시간이 지나야 했다. 기호들은 체계 안에서 정합적일 때, 그 논리를 현실이든 체계 안에서든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항 또는 기호가 대상과 연관에서 상식적으로 다루었는데 비해, 기호가 대상없는(지칭할 수 없지만, 생각할 수 있고 나아가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사유는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봉상스의 권능인 셈이다). 이런 기호가 실체로서 실재함을 구체적 물체에서 다루게 될 때, 물체 속에는 충력, 힘, 에너지, 열 등과 더불어 기호의 적용범위는 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상태들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양식은 기호들의 체계와 정합성에 맞는 표상들이 있다고 여겼고, 이런 표상들은 대상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고 구축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구성과 구축은 상식을 넘어서 양식으로 대체한 인식에서 가능하였다.
볼 수 없는 것이면서도 물질 속에서 실재적으로 움직이는 뭣이 있을 수 있고, 이 뭣이 작동하는 방식은 수동적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능동적 요인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하였다. 물질로서 사물들에서도, 대수학의 대입함 넘어서는 범위 또는 상태의 역량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화학과 생리학의 발달은, 물질이든 생명이든, 이런 요소와 요인들이 항들처럼 한계(경계)로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으로(열이든 에너지든) 활동성과 생명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물질 또는 물체의 근본적 성격이 “움직이고 있는 중”일 것이라는 생각을 나중에게 하게 될 것이다. 이때에서야 이제까지 정지라는 측면에서 점과 원자로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이었고, 이것들에서 정지에서 다음 정지까지를 또는 계속하는 위치 이동을 운동이라고 했던 생각은 양식에 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질은 움직이고 있으면서, 형태도 생성하고 변하고 게다가 성질도 변질하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운동(변화, 변질)를 내재하는 물질은 항, 형태, 단위로서 구성도 구축도 아니고, 오히려 움직이는 동력적인 요소들의 혼성(composition)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런 인식을 벩송은 고등양식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봉상스와는 다른 길도 있으며, 고등양식은 혼성을 공감성하는 것으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2:39, 57SLA) (3:35, 57S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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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 대립의 사고가 낳은 대결구조는 현상적이다. 이에 비해 발생적 과정에 대한 탐구와 이해에서 대결보다 조화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들뢰즈가 흥미로운 점은 벩송과 달리 언어를 중심으로 감화작용들을 다루었다는 것이다(이 내부 이야기는 길다, 왜냐하면 애정관심과 성감대를 다루기 때문이다). 벩송은 서양 철학사가 거꾸로(반대방향으로) 되어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기억을 다룰 수 없었던 과거의 철학은 공간을 먼저 두고 그 위에 점이든 원자든, 관념이든 개념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것은 정지로부터 운동을 다루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운동하고 변형하고 변화하는 기나긴 과정을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흐름 지속으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지의 사고인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철학, 신칸트주의의 네오스콜라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들뢰즈는 여기선 언어를 다룬다. 고착된 기호로서 언어의 기호들을 다루었다. 사람들은 언어를 다룸에서, 기표든(음성기호) 기의이든(상상물 또는 사고 대상), 입말이든(목소리) 말투이든(말씀), 메시지(전화, 라디오, TV)이든 빛이든(매체자체), 물질적 이동에는 이미 상상의 이동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들뢰즈는 이런 기호작용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움직이는 뭣이 먼저 있기에, 그 다음에 그 뭣을 다루는 방식에서, 의미의 방식들은 여럿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숫적 다수가 아니라 질적 다양체라는 것이다. 뭣이 움직이는 것에 관한한, 삶에서 감화작용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개념으로 일반화라는 것이다(라이프니츠 해석에서 내부가 뚫린 이층 집). 또는 감화작용의 방식과 개념의 일반화가 다른 방향(sens)으로 전개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감관이 구성한 또는 사유가 구축한 의미는, 한 방향(봉상스)이라는 것이다. 의미의 생산에서, 다양한 발산을 사유한 것이 아니라, 구성과 구축의 방식, 사고의 틀에서 의미를 규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터전에서 삶에 우러나오는 기호들은 상식과 양식과는 다른 방향들이 한 방향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방식의 설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항들이라든지, 데카르트 이후의 사유의 대상화라든지, 칸트의 선험적 형식들은 구조화 또는 개념화라든지, 이런 한정된 것으로부터 인간의 삶의 터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머리 속에서 그려진(상상, 공상)의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진솔한 방향은, 빛처럼 발산하는 다양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의 논리학적 사고에 대해 전복을 끌어냈다. 그 끌어냄에서 단초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반대했던 퀴니코스-스토아학파의 것이며, 살아있고 움직이 세계영혼 속에 개체생명(영혼)이 있다고 한다. 벩송과 마찬가지로, 스토아아 사상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보아야 했던 철학을 들뢰즈도 마찬가지로 주장했다. 하늘과 땅, 영혼과 신체, 주체와 대상으로 이분법적으로 갈라서 사고하는 철학이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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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가 말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은 스콜라철학과 네오스콜라주의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데아로부터 현실태인 사물들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비판한다. 빵과 포도주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이야기에 감각(sens)이 생성되지 않지만 의미(sens)가 있고, 의미가 있으면서 실재하는 또는 살아있는 사물들로 전승되는 착각과 허구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상식을 비판하고 나아가 양식을 비판한다.
감관의 작용들이 의미를 창조한다고 믿는 자들의 철학은 유명론에서 제기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할하여 설명하면서 정태적 생성이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신학은 존재가 현존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존재는 상징으로, 마치 수학이 점, 선, 면, 체적, 그리고 분할(미분)을 설명하면서 사물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상징을 이해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5감관들의 종합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인간 신체를 보라, 피, 숨, 소화는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아도 작동한다. 이런 작동을 부교감신경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리학자들은 설명한다. 그 작동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원리가 있는가? 이런 통합 또는 통일성이 있다고 믿는 쪽이 봉상스(bon sens)이다. 이 봉상스는 상식의 한 방향(sens)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봉상스에 말상스(mal sens)가 들어 있을까? 신학자와 같은 사람들은 잘못하는 상식을 악의 상식으로 간주하여 버린다. 그들에게 말상스는 철학사에 없다. 그런데 봉상스의 길이 아니면서 말상스도 아닌 상스의 길이 있다. 별종의 길이며 농상스(non-sens)라 부른다.
농상스로서 철학사에서 잘못된 길을 갔다고 여기는 논리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잘못된 길인지 좋은 길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생물학과 생리학의 발달로 농상스(말상스)가 봉상스 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질병은 과도한 상스로서 봉상스도 질병과 징후를 생산하고, 결핍의 상스로서 말상스도 질병과 징후를 낳는다. 마찬가지로 사회학에서는 소외와 비정상의 징조를 생성한다.
더군다나 애정관심(sexualité)의 봉상스와 말상스는 말할 것도 없다. 이 미묘한 감정과 공감은 더해도 모자라도 안되는 거인가? 상스는 어떤 의미로 생성되는가? 자아 완성의 길로 매진하는 노력과 강도가 필수적이라 말하고 싶은가. (57SLA)
(5:01 57SMH) (5:11, 57S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