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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이어진
무더위 속에서 벼들이 춤춘다 외 4편
더위가 왔는데 벼들이 춤춘다 태양이 익어 가는데 벼들이 춤춘다 지구의 더운 생각 속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벼들이 공중 위를 떠돌아 다닌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벼이삭의 달콤한 쌀알이 아니야
타들어가는 쭉정이가 말했고
나는 가끔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지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곳
우리가 함께 들판을 쏘다니던 곳
너는 풍성한 벼이삭을 한아름 안고 추수를 하는 농부의 밀짚모자를 사랑했지
농부의 사랑은 벼를 수확하며 들판 위를 걸어 다니는 것
나는 몰려다니는 안개처럼 형체가 없었고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빗물처럼 꿈이 없었고
꿈이 없어서 그래
나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너를 불러보았고
너는 먼데서 아름답게 먼 곳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고
더위가 왔는가 빗방울처럼
무더위 속에서 우리의 벼들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유리 그릇 안에 담겨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흰구름처럼
나는 두 눈에서 춤추는 벼의 무리를 상상하고 있었지
들판에 갔는데 네가 벼들 속에 숨죽여 있었어 춤추는 벼의 무리 속에 너의 눈알들이 빼곡하게 담겨서
내가 너를 바라보는데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는 춤추고 있었고
더위가 왔는데
너는 내 곁에 없었고
나는 빗방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서 걷고 있었고
사랑하는 들판이라서 그래
들판으로 여행 떠난 소년과 소녀처럼
푸른 하늘은 신비롭기만한데
치렁치렁하게 두 눈을 가린 커튼
식탁 위에는 너에 관한 책
너에 관한 들판
너에 관한 식물도감
너에 관한 전설들이
여기 저기 피어서 저녁의 알전구 속으로 여행간다
노을 속이라면 벼들이 한마음으로 빛을 발할 수도 있을텐데
쌀알들의 눈빛들이 조그만 그릇 안에 담겨 말했고
나는 이 쌀알들을 다 삼킬 수가 없다
더위가 창문 밖에 서 있는데, 빗방울들이 함께 와 있었다 검은 벼들이 몰려다니는 들판에서 거리에서 시장에서
그들은 처음에 무엇이었는지
조그만 볍씨였는지
공기의 해맑은 눈빛이었는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선술집 탁자 위에 둘러 앉아서
들판 위에서라면 작은 들꽃처럼 웃어줄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그만 슬퍼져서 빗방울처럼 유리창에 떨어졌다
무더위가 왔는데 벼들이 춤춘다
슬픔이 익어가는데 벼들이 춤춘다
밤새 벼들의 속삭임이 검은 하늘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만 행복해져서 들판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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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계단을 오르고 있어요 침묵으로 이루어진 계단은 행운들이 층층이 쌓여 평화로와요 불행한 계보의 낙엽이 나무 위에서 굴러 떨어지네요 계단을 채우고 있는 불안한 호흡들은 우리의 지난날이에요 내리는 빗방울을 당신과 나의 간격이 받아 안아주네요 비틀거리는 빗방울을 따라 나는 한 발 한 발 걷고 있어요 시원한 바람이 따라오면서 나를 웃게 하네요 이런 만남의 방식은 심장에서 꺼낸 나무의 색이 어울려요 그림 속에서 구름은 다정했는데 여태 걸어온 길 위에서 갈 길이 멀어 지친 발걸음, 해골들이 바닥에 걸려 채이고 낙엽이 수없이 떨어지는 비탈길이에요 계단에 붙은 채 아래로 흘러가는 빗물과 떨어지는 빗방울은 신의 선물인가요 계단의 끝은 이름 모를 평화가 가득할 텐데 서쪽하늘을 물들이며 날아간 새들은 어디로 잠적한 것일까요 내 안의 가득한 물들이 흘러내리고 있어요 계단 끝으로 보이는 세계는 청보리밭의 들판에서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네요 그 너머의 세계를 신뢰하는 물빛이라서 나는 여태 물의 언어를 내 눈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네요 내 안의 세계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꿈의 운전석이 코너를 돌 때마다 더 파래지던 잎사귀의 눈동자라서 나는 발끝의 힘을 다해 계단을 오르고 있어요 귓속의 당신은 비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나는 기억의 숲 속을 걷고 있어요 호수 위에 떠 있는 흰 구름의 발가락이 빗방울을 후드득 떨어 뜨리고 있네요 사랑의 의미를 담은 빗방울인가봐요 끝이 없는 계단이에요 계단을 내려가면 아름다운 볕들이 모여 산다는 물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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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팔이 소녀
성냥사세요 성냥사세요 내 기억 속의 어린 소녀가 성냥을 판다 추운 거리의 건물들은 우뚝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 세계에 와 본 거니? 이 세계에서 무엇을 구축한 거니? 너는 이 세상에서 죽었던 적 있는 것처럼 얼음을 껴입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얼음 위에 불을 붙이고 활활 타오를 수는 없는 걸까 지나가는 바람이 말했고 나의 의식은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밀려 다닌다 무거운 군화에 밟혀 까맣게 죽어가는 꿈, 꿈속에서 꿈을 꾸다니 이런, 빌어먹을 꿈이라니 나는 죽은 영혼의 심지에 불을 붙이며 내 의식 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
피어올라라 활활, 불을 껴입고 촛대에 불을 붙이며 붉은 입술들이 소리 지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나를 껴입은 얼음들이 말했고 나는 얼음의 투명한 방 안에 앉아 성냥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성냥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걸까 중얼거리며 공기들은 죽어있다 죽음만큼 달콤한 겨울이 있을까 겨울 안에서 겨울을 흠모하는 꼴이라니 너는 성냥을 한아름 들고 저기 사거리 불꺼진 거리 불꺼진 신호등 불꺼진 의식 속을 걸어가고 있다 죽음만큼 행복한 평화가 있을까 내 의식의 벽을 뚫고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꿈에서 죽었던 적 있다면 당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거리에서 성냥들이 활활 타오르며, 이대로 죽어버릴 수는 없는 걸까 속삭인다 죽어 더 이상 눈 뜨지 않게 눈 뜨지 않고 의식 속의 방들을 돌아다니게 붉은 성냥들이 촛불을 들고 얼음의 방 앞에 서 있다
얼음으로 조각된 방들이 와르르 부서져 내린다 내가 날카롭게 부서지는 꿈, 마음에 드는 얼음을 껴입고 영영 깨어나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얼음으로 둘러싼 의식의 영혼들이 말했고 나는 촛불을 들고 부서진 얼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어가고 있다 네가 나의 의식 속을 들여다봤다면 너는 나와 얼음의 문장을 공유한 것입니다 촛불들이 지나다니며 중얼거렸고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촛불 앞에 서 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불이 훅 하고 꺼지는 순간, 나는 마음을 모으고 내가 마치 성냥이었던 것처럼, 얼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고 있는 것처럼 참회하고 있다
의자들이 무너져 내린다 한 번도 내 의식의 방에 들어와 본 적 없는 저 행복한 구름들은 언제 얼음의 문장을 이해하려는 걸까 추운 거리의 문법에서 나는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고 성냥사세요 성냥사세요 얼어붙은 거리에서 나는 해진 옷을 걸치고 누더기누더기 걸어간다 저기 도로의 한 편에 쓰러져 있는 성냥을 팔던 어린 소녀가 있다
누군가, 그 주검을 들여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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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소녀
내 곁을 지나가는 바람은 가벼운 실루엣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귓속으로 들려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 소리
공기와 더불어 흘러 다니니까, 너는 음악이구나 나는 음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이파리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빛들을 머금었다가 뱉어냈다가
나는 나무 그늘 밑을 지나가고 있었지 이 음악 소리에서는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철로의 표정이 느껴진다 이 음표에서는 네가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는 체인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잠시 음악 너머의 세계를 상상해 보았지 네가 깔깔거리며 이파리처럼 웃고 있다는 생각
너의 수런거림이 수많은 이파리들을 헤치며 내게 걸어오고 있었고 비틀거리는 웃음소리였고 사랑스러웠지 이파리들의 신발이 비뚤비뚤 걸어 다니고 있었고 나는, 검은 태양을 따라 걷고 있었어 한참을 울고 나서 다시 걷고, 다시 걷고 네가 오지 않는 시간 검은 용광로 속에 들어가 검게 타오르고 있었지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며 걸어가고 있었고, 철로 저쪽에서 기차가 굉음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고, 어떤 음표의 머리들이 철로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풀들이 철로 옆에서 파랗게 자라나고 있었고, 나는 죽고 싶은 동시에 살고 싶어 하는 구름이 철로 옆을 걸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지
철로 옆을 따라 걸으면 위험하단다 나는 구름에게 속삭이고 있었고 사랑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름 모를 파란 풀들이 소리지르고 있었고 나는 나의 옷자락에 묻어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자근자근 밟으며 걷고 있었고
도대체 너는 왜 이렇게 슬프고 신비한 음악을 매일 연주하고 있는 거니? 지나가는 검은 태양이 중얼거렸고, 청승맞은 나뭇가지의 목소리를 훔쳐올 생각에 나는 종종걸음 치고 있었고, 철로 밑으로 위험한 빛들이 쏟아져서 나는 꿈속으로 도망치고 싶었고 내가 없는 너의 꿈속은 도대체 재미가 없구나, 너는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고 사랑 따위 시시해서 철로 밖으로 이민 보내고 싶다 누구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군가 내 귓가에 토해내고 있었고
멜랑콜리아
멜랑콜리아
네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나는 그만 내가 싫어지려고 한다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에서부터 눈물 부서지는 소리까지 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었고
유리 조각에서 가장 날카로운 빛을 꺼내 제 목소리에 주유하는 창문처럼
비 내리는 날씨는 가장 청승맞은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너는 어린 소년의 발가락으로 내 기억 속의 지붕 위를 걸어간다
너의 목소리를 잘게 부수어
나무의 입안에 털어 넣고
나는 조각난 기억들을 꿰어 맞추며
푸른 이파리의 눈동자 속으로 일하러 간다
바람이 옷가지를 날리우며 철로 옆을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나뭇잎처럼 천천히 철로 옆을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나무의 목소리를 갖고 싶어 나무 밑에 앉아 있곤 했네 파란 잎으로 둘러쌓인 지구는 졸려운지 내게 가방을 맡겨두고 검은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에게서 질리지 않는 입술을 빌려와 너의 목소리에 주유하고 싶었지
저쪽에서 기차의 기적 소리가 힘겹게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검은 태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울어져 오는 강의 길다란 근육을 지켜보았지
창밖에는 네가 잘게 부서져 지구의 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나무와 속삭이는 네 목소리가 바람결에 무한정
내 귓속으로 흘러들고 있었고
나는 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고
나는 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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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을 위한 왈츠
시장을 갔는데 바구니 안에 네가 담겨 있다 점심에 당근을 썰어 넣고 국수를 먹을 레시피를 꿈꾸었는데 네가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손가락이 주홍빛으로 물든 당근이라니
도마 위에서 너는 유니크한 손가락으로 창밖을 연주하고 있고
창문 밖에는 바람이 나무 위를 뛰어다니고 있고
하늘 한편에선 흰구름이 유리그릇 안에 담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름 속이라면 당근은 어떤 스타일의 생각을 풀어 하늘을 물들일까
구름 속을 흘러 다니는 소녀는 당근을 위한 실루엣처럼 근심이 없고
나는 작은 소녀이고 싶은데 너는 내가 늙은 칼이라고 말한다 나는 칼의 두려운 입술을 빌려오고 싶지 않아 점점 당근을 좋아하게 되고 얇고 아름답게 구름을 채 썰어 당근 안에 넣고 날아가는 꿈을 꾸네
너는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이었는데
지금 너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저녁의 그림자를 닮아있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노을의 가르마에는 네가 사랑하는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고
그 안을 떼지어 몰려가는 붉은 머리들의 웃음소리라니
꿈속에서는 네 생각으로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나의 두 눈 속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나의 검은 눈동자는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한 것은 너의 붉은 신발이었는데
나는 당근을 씻고 있고 너는 물속에서 즐거운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너는 가벼운 신발을 신고 공중 위를 사뿐사뿐 걸어다닌다
나는 꿈을 꾸느라 물속에 앉아 오체투지 하고 있고
이것은 당근인가 구름인가
질문하는 날들이 하루 이틀 한 달
나는 계속 물속에서 당근을 씻고 있고 어제 주문한 당근은 흙에서 열심히 잘 자라고 있고
나는 흙 위를 걷는 당근의 푸른 머리를 생각하느라 두 눈이 분주해지고 바람이 불면 물 속이 조금 더 바빠집니다
구름이 흘러가는 언덕 위로 당근의 지느러미가 흘러가는 꿈
나는 책가방을 들고 언덕 아래를 지나가고 있고
구름이 흙 위에 앉아 김을 매고 있고
나는 물속에 손을 담그고 구름을 데려올 생각에 잡념이 없어지고 너는 물속을 흘러 다니며 창밖의 나무들을 연주하고 있고
건반 위에서 뛰어나온 어린 당근이 볼을 기울이고 물소리를 듣고 있다 오늘은 아름다운 어린 너의 생일날, 밖에는 눈이 오고 있고 나는 눈사람처럼 너의 손가락으로 스며들어 케익을 자르고 있고
포근한 눈발이 우리의 집을 집어삼키고 있다 나는 여태 물속에 손을 담그고 있고 악보 위에는 당근들이 뛰어다니고 있고
너는 나의 당근을 기억합니까
나의 베아뜨리체
나의 구름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나의 손가락이 물었고
나는 당근의 검은 혀가 그리워져서 검은 실루엣을 드리운 계단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음악이 흐를 때를 조심해야죠 울음소리가 없는 음악 속에서
나는 즐겁기만 한데 너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전력으로 무릎이 심상치 않고
검은 흙 위를 조심조심 당근이 걸어다닌다
당근은 싱싱하게 구름의 눈 속에서 잘 자라고 있고
나는 여태 물속에 앉아 당근을 씻고 있고 너는 아직 식사 전이고
음악은 수도꼭지에서 두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고
흙 위에서 물속에서 무한한 구름의 붉은 심장 속에서
너는 계속 자라나고 있고
너는 가장 붉은 혀를 구워, 나의 작은 혀에 끼워 넣어주었다
당근들이 춤추고 있었고
유리창 밖, 푸른 나무들이 검은 건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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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본명 이혜순)
1964년 서울에서 출생.
2015년 《시인동네》 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8월 예정, 청색종이),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10월 예정, 여우난골)
연구서 『1980년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멜랑콜리의 정치성 연구』
<빈터> 회원이며, 유튜버 채널 <이어진의 문학의 향기>를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