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모수 22세. 서기전 240년. 5월 21일 이후
귀가한 다음날 설이매 공주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곧장 장당경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일척 가슴에 어떤 찬 이슬이 맺혀 표연히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해모수가 설이매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미안함과 불안감, 뭔지 모를 허전함에 휩싸여 있을 때, 그 날 저녁 다시 기비와 기진이 찾아왔다.
“폐하께서도 현금의 상황을 어거하실 수 없고, 신하들에게 질질 끌려 다니신다니 폐하가 가엾기 그지없고, 설이매 공주가 애처롭기 짝이 없소.”
해모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로하신 폐하를 이용해 먹다니, 참으로 나쁜 놈들이오.”
기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덧붙였다.
“어전친위무사단과 궁중시위대는, 폐하의 친위무사단이 아니라, 폐하를 감시하는 군대로 바뀐 지 오래 되었소. 우리가 폐하의 친위무사단을 새로 일으켜 나라를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오.”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고념苦念에 잠겨 계시겠소?”
“아마도 죽지 못해 임금 노릇하고 계실 거요. 죄다 팽개치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 간절할지도 모르오.”
“군주의 길이 그토록 험악하니, 내막을 안다면 군왕의 길을 가고 싶어 할 자 누가 있겠소?”
해모수는 탄식을 거듭했다.
“저들은 폐하께서 돌아가시거나 스스로 은퇴하실 날만 기다리는 것 같소. 나라가 저들의 손에 떨어진다면 끔찍하지 않겠소?”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오. 왕세자 저하께서 의분에 북받친 나머지 냉철한 판단력을 잃을까 겁나오.”
해모수의 말에 기비가 의견을 개진한다.
“지금이 가장 좋은 적기라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있겠소이까?”
“아닙니다. 왕궁으로 돌아가셔서, 군사들을 철저히 대비시키고, 좀 더 기다려 주시오. 상제 하나님의 표적表迹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표징을 주시는 대로, 제게 지시하는 대로, 저도 움직이겠습니다.”
그건 군사를 일으키자는 기비 왕자의 재촉에 대한 해모수의 답변이었다.
해모수는 다시 한 번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준비만 철저히 갖추고,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천제께서 이 나라를 안정시키기 원하신다면, 반드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닥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우리가 만들면 안 되겠소?”
“안 될 거야 없지만, 우리가 성급하게 발 벗고 나서면, 첫째 명분이 빈약하고, 둘째로 그렇게 되면, 우리의 확신이 흔들릴 우려가 많소. 자신이 제대로 판단해서 행동한 건지 의심하게 된다는 뜻이오. 일단 의심이 들어오면 그 행동은 추진력을 잃게 되니, 막다른 궁지에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천제님을 믿고 끝까지 기다려야 하오.”
기비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다른 골목에서 하는 행동은, 위험하긴 하지만, 힘이 있고 확고부동한 확신 속에서 움직이므로 오히려 성공의 가망성이 많소.”
“그러면 어떤 상황을 막다른 궁지로 보아야 하겠소?”
해모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예를 들어, 저들이 그럴 듯하게 꾸며 폐하를 몰아내거나 시해한다든지, 혹은 저들이 우리를 압박해온다든지 하는 것 등이오.”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지 않겠소? 내 생각에는 기선을 제압하는 게 오히려 성공의 가망성이 높을 것 같은데요.”
“세자 저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튼 조금만 더 참아주시오. 기선을 제압하는 일에도 때가 있습니다.”
“그 세력의 중심인물은 해모수 공자의 맏형인데, 공자께서 어떻게 그와 대결할 작정이오?”
“이건 혈육의 정에 얽매일 문제가 아니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고 있소. 백성의 안위가 중요하오. 물론, 그 점은 내가 참작해서 지혜롭게 행동할 생각이오.”
기비가 무거운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오.”
“이르다 마다겠습니까? 그러나 상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있다면, 우리는 능히 승리할 거요. 그럼에도 도중의 고난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테니, 그 점은 미리 대비해야 할 거요.”
한여름의 밤은 깊어가고 가슴 속 더운 열기는 가실 줄 몰랐다. 별빛은 잠들지 않고 사위는 고요했다.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떠나가시오.”
그 날 밤 해모수와 기비는 굳게 언약하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옆방에서는 기진과 삼칠성주가, 다른 방에서는 백선의와 청아련이 잠들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듯 기비가 말했다.
“천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맹약해야 하지 않겠소?”
“그게 합당하지만, 그건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오. 제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늘의 뜻을 준행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요.”
오늘 우리의 대화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었겠소?”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소.”
해모수는 어제 보았던 설이매의 울음이 눈에 선해 쉬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상제 하나님을 부르며 고요히 호흡하니 평안이 가득하고 기쁨이 솟아올랐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해모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불렀다.
한편. 오열고을성 북문을 빠져 나온 두 필의 건마와 한대의 사두마차는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북쪽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상에 앉은 미소녀의 서리 같이 차갑고 백설처럼 하얀 낯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히지 않았다.
일천 오백 여리 길을 되돌아가는 시일은 십오 년 같았다. 환화궁에 당도한 설이매는 곧장 지地 자 별궁의 자기 집으로 향했다. 방안에 앉아있으려니 아무런 상념도 뇌리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사방에서 들려오던 벌레소리, 새소리, 물소리, 사람소리, 바람소리 등등 천지 만물의 소음이 갑자기 어느 순간 뚝 끊어진 것 같았다.
고독한 정적이 머리에 내려앉고 무거운 맷돌이 가슴 위를 짓누르며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으나 맷돌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가슴 속만이 잘게, 잘게 갈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텅 빈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조금씩,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달포 이상 지난 후였다. 맨 먼저 들어온 것은 이것이었다.
‘해모수! 해모수가 누구지? 아, 해모수는, 해모수는······.’
제아무리 용을 써도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귀에 아주 익은 이름인데?’
“마마, 진지 가져왔습니다.”
설이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해모수, 해모수, 해모수가 누구지?”
“마마! 해모수는, 해모수는··· 죽었습니다.”
“언제 죽었어?”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그래? 왜 죽었어?”
“천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왜 천벌 받았어?”
“마마께, 아주 나쁜 짓을 했으니까요.”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
“음··· 마마께, 마마께, 아주 몹쓸 짓을 저질렀습니다.”
“무슨 몹쓸 짓?”
“그건, 그건, 차마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괜찮아, 말해 봐, 응?”
“마마를 능욕하고 저주하고, 버렸습니다.”
“잘 죽었구나. 근데, 해모수가 누구지?”
“마마, 으흐흑!”
마침내 시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공주마마, 잊어버리세요. 해모수는 죽었으니까 잊어버리세요.”
“울지 마. 왜 우는 거냐? 근데 왜 이렇게 졸리지?”
“마마, 식사하시고 조금 쉬었다가 편히 주무세요.”
설이매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잠, 고뇌를 앗아가 버리는 고마운 잠, 슬픔도 눈물도 아픔도 고통도 외로움도 지워버리는 마법의 잠 속으로.
설이매가 눈을 떴다. 봉창으로 태양빛이 스며든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두 눈에 책이 한 권 들어와, 시선이 거기 머물렀다.
‘무슨 책이지? <행심록>?’
첫 장을 펼쳐보았다.
“大始三神上帝創造天地后人 대시삼신상제창조천지후인”
‘이게 무슨 말이야?’
다시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다.
“神人合一永享福樂逆旅過客歸息神宮 신인합일영향복락역려과객귀식신궁”
“아, 어지러워.”
설이매는 책을 내려놓고 문밖을 바라보았다.
“마마, 저하고 같이 말을 타고 바람을 쐬러 나갈까요?”
설이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렵한 옷차림에 검을 차고 활과 전통을 반대편 허리에 멘 채 두 여인은 황궁 후문을 벗어나 서쪽 성문을 통과한 다음, 강가로 말을 몰았다. 도도히 흐르는 서아리하(요하)의 지류가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꿈틀대고 있었다. 두 여인은 강을 따라 서남방향으로 달리고 또 달린다. 서아리하의 본류와 합류되는 지점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땀을 씻었다.
설이매가 말에서 내려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며 강물 가로 들어갔다. 설이매가 뒤를 돌아보며 시녀를 불렀다.
“얘, 홍선弘宣아 너도 들어와 봐 너무나 시원해! 그까짓 오열골성 밖의 요수보다 여기가 못할 게 뭐냐?”
홍선이라 불린 시녀는 깜짝 놀랐다.
“마마,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리 들어오라고!”
“아니, 그 말씀 말구요.”
설이매가 홍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물었다.
“왜? 여기가 오열골성 밖의 요수보다 낫다고.”
“마마, 오열고을성 밖의 요수는 어떻게 아시나요?”
“아니, 얘가? 어떻게 알다니. 얼마 전에 너희들 다섯하고 거기에 다녀왔지 않느냐?”
“무슨 일로 다녀왔는데요?”
“너, 지금 나하고 장난하는 거니?”
설이매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어머머! 마마, 마마! 으흐흑! 이제야 모든 게 생각나나요?”
“잔소리 말고 빨리 들어와 봐.”
설이매가 갑자기 양손으로 물을 퍼서 시녀 홍선에게 뿌렸다.
홍선은 감격에 겨워 우두커니 서서, 손으로 얼굴에 뿌려지는 물을 훔칠 생각도 못하고 설이매의 어여쁜 자태를 어렴풋이 바라보았다.
“얘, 홍선아. 너 나의 기마술하고 활솜씨 잘 알지? 검 휘두르는 위력도? 내가 병법을 많이 공부한 것도?”
설이매가 연달아 물었다.
“그럼요, 그럼요. 마마의 기마술은 궁에서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궁내 어전친위무사단이나 시위대 가운데 마마와 기마술을 겨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마의 병술학에 관한 조예는 스승님께서 극구 칭찬하신 게 한 두 번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나도 군인이 되고 싶어. 아바마마께 말씀 드려 나에게도 병졸들을 붙여달라고 할까?”
“네. 그렇게 하시어요. 폐하께서도 어쩌면 기뻐하실 거예요.”
“그럴까? 그럼 가자! 지금 바로 가서, 아바마마께 나를 군대에 편입시켜 달라고 얘기해야겠어.”
두 여인은 신이 난 듯 다시 바람같이 말을 몰아 장당경으로 향했다. 태평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온 후, 황궁정문에 다다르니, 거기에 황궁시위대장 해로운 장군이 나와 서 있었다.
그가 설이매를 보더니 인사했다.
“아마 아침부터 말을 타고 어디에 다녀오십니까?”
“바람 좀 쐬고 왔어요.”
“몸은 괜찮은가요?”
“네. 근데, 대인께 말씀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 저도 관병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해로운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설이매 공주가 이제 아주 돌아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하며 물었다.
“시위대장님은 저의 무예 실력을 인정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인정하고말고요. 공주마마처럼 탁월한 기마술을 누가 선보일 수 있겠습니까? 화살은 날렸다 하면 백발백중이고, 어떤 장수와 검을 겨룬다 하더라도 승리하실 것입니다. 또 병법에 아주 밝아 싸움에 나가기만 하면 이기고 돌아오시리라 확신합니다.”
해로운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장황하게 그녀를 칭찬했다.
“정말이에요?”
“그럼요. 제가 왜 거짓으로 과장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저를 좀 군대에 넣어주세요. 아바마마께는 제가 말씀 드릴 테니까. 자리 좀 알아봐 주세요.”
“아, 그건 좀······.”
해로운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폐하께 말씀 드려 승낙을 받아 오시면, 그 때 가서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약속하는 거죠?”
“그럼요. 약속드립니다.”
설이매는 곧장 천天 자 본궁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동안 설이매 물었다.
“홍선아, 내가 장수가 되면, 그 사람을 능가할 거야.”
“그 사람이라뇨?”
“해모수 말이야. 그 사람은 영웅이 될 뻔했는데, 아깝게 죽었어.”
“네?!”
시녀 홍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네, 네. 정말 아까운 인물이었어요.”
“내가 장수만 되면, 그보다 더 뛰어날 수 있을까?”
“그럼요. 마마는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놀라운 재능을 타고나셨습니다.”
홍선과 함께 부황을 찾아간 설이매가 곧장 용건을 말씀드렸다.
“아바마마, 저도 관군에 편입해 주세요.”
고열가 임금이 주름진 얼굴을 들고 설이매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밖을 향해 물었다.
“거기 누구 없는가?”
“폐하, 말씀하옵소서.”
내시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의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즉시 찾아 대령하겠습니다.”
잠시 후 어의가 들어와 부복했다.
“일어나서 이 아이 진맥 좀 해 주시오.”
어의가 설이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후 맥을 잡았다.
“폐하, 장기는 모두 지극히 정상이옵고 뇌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하옵니다.”
“그게 사실이오?”
임금이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예, 폐하. 천제께서 도우셨습니다.”
임금이 설이매에게 물었다.
“얘야, 너 지금 정상이냐?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있느냐?”
“아바마마, 그런 걸 왜 물으세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매우 탁월했다는 걸, 아바마마는 벌써 잊으셨나요?”
“허허! 그렇지, 그렇지. 너의 기억력과 총명을 따를 자가 없었지.”
임금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가득 했다.
“아바마마, 허락하실 거죠?”
“뭐 말이냐?”
“저를 관군에 편입해 달라고요.”
“왜 갑자기 관군이냐?”
“그냥, 군인이 되고 싶어서요. 저도 나라를 위해 싸우고 싶어요.”
“그럼 내가 병가兵加 대인과 상의해 보마.”
“해로운 대인에게는 이미 허락을 받았어요.”
“시위대장은 궁만을 관할하니, 병가 대인과 상의해야 하느니라.”
“하지만, 요즘에 병권을 시위대장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쯤은 소녀도 이미 알 나이가 되었습니다.”
“허허! 얘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임금은 병가 대신과 시위대장 해로운을 불러 상의했다.
“폐하, 우선 장당경 수비대의 기마병단에 소속시켜, 천기대千騎隊의 한 부장副將 직을 수여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옵니다.”
“천기대는 너무 과하지 않은가? 백기대가 어떤가?”
“폐하, 설이매 공주는, 탁월한 지모와 능통한 병법, 놀라운 무예를 감안할 때 천기대 부장은 오히려 낮은 자리이옵니다.”
“이 애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만방자할까 몹시도 두렵네.”
“폐하, 공주도 이미 매우 성숙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임금은 주저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경들이 잘 돌봐주기 바라오.”
“폐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설이매는 그 다음날 당장, 장당경 수비 마병의 천기대 부장 직위와 공주신분으로 병사들을 사열했다. 그리고 쉴 틈도 없이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각종 진법과 병법을 교육하며 각개전투, 사격술, 검술, 기마술, 창술, 정신무장 등등 다양한 것들을 훈련시켰다.
설이매 공주가 소속한 천기대는 혹독한 훈련에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설이매는 직접 일천 기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강가로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한 편, 다른 천기대와의 가상 전투훈련도 시행하는 등, 각 군사를 일당一當 천千, 일당 만萬의 용사로 키우고자 온갖 방안을 다 동원했다.
그녀의 병력 운용 방식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녀가 결코 나이어린 소녀가 아닌, 명실 공히 무서운 여장부임을 새롭게 각인해야 했다. 두어 달이 지나, 그녀의 상관인 천기대장이 다른 부대로 전속되고 그녀가 천기대장을 맡게 된다. 그녀는 천기대장을 맡으면서 일만 기에 달하는 장당경 수비 기마대 전술훈련 교관들의 한쪽 날개도 함께 담당한다.
우리 이야기는 조금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모수가 기비와 함께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자는 언약을 굳게 맺은 후 근 십여 일이 지나도록 기비는 해모수와 함께 이일저일 의논하느라 오열고을성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다. 자정이 지나고 사경四更(새벽 2시 전후)쯤 되었을까? 갑자기 밖에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쾅쾅 들렸다.
백선의가 잠에서 깨어나 방 밖으로 나가는 기척을 느끼며 해모수는 눈을 감은 채 의식을 모으고 있었다.
“어머!”
백선의의 목소리였다.
“나리를 모시러 왔소.”
두 병사가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리, 성주님께서 지금 급한 일로 찾고 계십니다.”
“무슨 일인가?”
해모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긴급하게 상의할 일이 생겼다 하시며, 나리의 어머님과 함께 번조선 왕세자님과 공주님도 같이 모셔오라는 분부이십니다.”
해모수와 삼칠성주, 기비, 기진,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 등 모든 식구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두 병사를 따라나선다.
‘감히 일개 성주가 궁중의 왕자에게 오라 가라 하다니. 그것도 한밤중에.’
기비는 이런 의문이 파고듦과 동시, 필시 이는 모종의 정변政變임이 분명한 것 같아, 바짝 긴장되었다. 하지만 감히 우리를 어쩌랴? 하는 배짱을 다지고 있을 때, 삼칠성주가 안심하라고 눈짓한다.
두 병사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삼칠성주는 해모수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으며 해모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음 회로 계속)
********************
샬롬.
2022. 11. 19.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