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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아동센터 평택답사 계획
▶ 시간 : 2022년 7월 23일 오후2시~5시
▶ 장소 : 평택 북부지역 문화유산
▶ 지도 :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 인원 : 학생 20명, 교사 3명
▶ 일정표 : 평택 → ① 진위면 봉남3리 이세필 묘 → ②진위면사무소 3.1운동 유적 → ③ 진위향교 → ④ 삼봉 정도전선생 사당(문헌사) → 평택
①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6형제와 신흥무관학교
② 진위면의 3.1운동
③ 진위향교 : 조선시대 학교와 교육
④ 민본정치(民本政治)를 꿈꾼 삼봉 정도전
1.평택시의 옛 중심마을 진위면 봉남리
진위면 봉남리는 조선시대 진위현의 읍치(邑治=고을의 중심)였다. 이 고을은 조선 초 충청도에 속하였다가 태조 7년(1398) 경기도로 옮겼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고을이었지만 세종 6년(1424) 중앙동, 이충동 일대의 송장부곡(松莊部曲), 서탄면의 천장부곡(川莊部曲), 오산 경계의 청호역과 부산을 통합하고, 세종 15년(1433)에는 원평동, 신평동, 통복동, 비전동, 고덕면 일대를 지배하였던 영신현(永新縣)을 통합하면서 고을의 규모가 커졌다.
갑오개혁(1894~5) 때 진위군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으로 서평택지역(수원군)과 충청도 평택군(팽성읍)을 통합하여 ‘진위군’이 만들어지면서 중심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경부선 평택역을 중심으로 근대도시가 발달하고 군청(郡廳)이 평택역 앞으로 옮겨가면서 쇠퇴하였고, 1938년 10월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크게 쇠퇴했다. 일제강점기 봉남리는 ‘진위군 북면 봉남리’였다. 그러자 1949년 마을주민들이 옛 중심지의 의미를 살리자라고 주장하여 북면을 ‘진위면’으로 바꾸었다.
봉남리에는 진위관아와 객사, 향교가 있었다. ‘진위관아’는 현재 평택시청과 같은 것으로 평택지역 전체의 행정사무와 재판, 군사적 일들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객사는 궁궐을 상징하는 건물로 정당에 궐패를 모셔두고 부임하는 진위고을 수령과 관리들이 망배례를 올렸던 곳이다. 또 나라의 명령을 받아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들이 묵어가는 여관의 역할도 있다. 향교는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중고등학교)이었다. 조선은 400개 쯤 되는 고을마다 향교를 설치하고 선생님(훈도)를 파견하여 교육하게 했다.
봉남리 앞으로는 삼남대로가 지났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경기도를 지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까지 지나간다고 해서(삼남지방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삼남대로’라고 불렀다. 삼남대로는 춘향전에도 나온다.
전라도로 내려갈 제 청파 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 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남태령,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팔달문 내달아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칠원, 소새비들, 천안삼거리...
큰 길이 지나가면서 봉남리에는 ‘진위읍내장’과 ‘주막거리’가 형성되었다.
2.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6형제와 신흥무관학교
평택시 진위면 무봉산 일대는 경주 이씨의 터전이었다. 무봉산 일대가 경주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조선 전기 때부터다. 조선 후기에는 이항복의 증손자 이세필이 입향하고 그의 후손들이 출세하면서 가문이 번창하여 봉남리, 가곡리, 동천리, 마산리, 송북동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했다.
봉남3리와 가곡1리는 일제가 나라를 빼앗자 모든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고문당하여 죽고 굶어 죽을 때까지 독립투쟁을 하였던 경주 이씨 가문의 이석영, 이회영 6형제의 고향이다. 경주 이씨는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만한 대단한 집안이었다. 임진왜란 때의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었으며, 직계 후손들에서만 문과 급제자 31명, 정승 6명, 대제학 2명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가문이었다. 고종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청나라와 무역을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벌어 조선 최고의 부자 중에 한 명이었다. 서울의 명동, 정동 회화동에는 엄청난 규모의 집이 있었으며 경기도 남양주에는 600만 평 이상의 땅이 있었고, 평택에도 무봉산 일대가 모두 경주 이씨 땅이었다.
하지만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고, 우리민족은 희망을 잃어갔다. 그러자 이유승의 아들 6형제 가운데 이회영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가 나라를 빼앗자 독립투쟁을 위해 온 가족이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자고 제안했다. 6형제는 이회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모두 팔아서 6형제 가족 모두가 만주(서간도 삼원포)로 망명을 떠났다. 서간도에 가서는 경학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곳에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와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의열단과 대한광복군을 조직하여 투쟁하였다. 그 결과 이회영선생은 일본경찰에서 잡혀 여순감옥에서 고문당하다 돌아가셨고, 이석영 선생은 상하이에서 굶어 죽었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들어 죽거나 총맞아 죽거나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6형제 가운데 해방 후 돌아온 사람은 5번째 이시영선생(초대 부통령) 밖에 없었다.
현재 봉남3리에는 이세필의 묘와 유적들, 진위면 가곡1리에는 이유원의 아버지 이계조의 묘, 진위면 동천리에는 경주 이씨 묘역이 남아 있다.
●평택지역 경주 이씨 계보(系譜)
• 17세 :이 과(李 薖) : 상서-상서공파의 파조
◉25세 :이몽량의 4남 이항복(李恒福) - 영의정, 문충공, 권율의 사위
• 28세 :이정남의 손자 이세필(李世弼)-형조참판-①태좌(台佐) ②정좌(鼎佐) ③형좌(衡佐)
◉29세 : 이세필의 큰아들 이태좌(李台佐) - 좌의정, 충정공
• 30세 : 이태좌의 큰아들 이종성(李宗城) - 영의정, 문충공
◉34세 : 이유승(李裕承) -우찬성 -①건영(健榮) ②석영(石榮, 이유원에게 출계) ③철영(哲榮) ④회영(會榮) ⑤시영(始榮) ⑥호영(頀榮)
*참고 : 평택시사신문 특별기획 ‘100년의 함성과 만석꾼의 꿈을 찾다’-김해규, 성주현
3.진위면의 3.1운동
평택지역은 경기도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철도교통이 발달하고, 천도교가 전파되었으며,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저항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택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기산리 옥녀봉과 권관리 계두봉에서 전개되었다. 옥녀봉과 계두봉 시위는 천도교도였던 현덕면 권관리 이민도와 이승엽이 주도하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신왕리 고등산, 오성면 숙성리 뒷산, 양교리 오봉산, 청북면 현곡리 신포장터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1일에는 근대도시로 발전하던 평택역전에서 쌀장수 이도상과 목준상, 평택공립보통학교 학생 안충수 등 1,00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3월 21일에는 천도교인 마을이었던 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 주민 500여 명이 진위교구장 박창훈의 인도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3월 23일에는 진위공립보통학교 6학년 학생 20여 명이 중심이 되어 봉남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3월 31일에는 진위면 봉남리에서 박성백, 최구홍이 주도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들은 진위면사무소(북면사무소) 앞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른 뒤 주변 마을을 돌며 만세를 불렀다.
4월 1일 밤에는 평택역 광장에서 3천여 명이 시위를 전개했으며, 사전에 약속한 팽성읍, 고덕면, 오성면, 청북면 일대의 주민들은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봉화(횃불)를 올리며 시위를 했다. 4월 2일에는 서탄면장 윤기선이 각 마을의 구장(이장)들에게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면사무소 앞에 모이게 해서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에는 고덕면, 진위면, 오성면, 현덕면 주민들이 평택역으로 진출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서탄면 수월암리, 사리 주민들도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결과 200여 명이 구속되었고, 64명이 죽거나 다쳤다.
*참고 : 평택시사신문, 평택의 3.1운동(평택문화원)
4.진위향교 : 조선시대 학교와 교육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0호다. 진위향교(대성전)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불에 탔으며 향교 관리 최응수가 위패만 보존했다. 1644년 진위현령 남두극이 대성전을 건축했고, 1660년 현령 송박이 대청을 다시 지었다. 1839년 현령 황종림이 명륜당을 다시 지었으며, 1889년(고종 26)에 전면적인 개수 및 보수를 하면서 향교의 본래 모습을 회복했다. 1987년에는 동, 서재를 중수했고, 2007년 대성전을 다시 지으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진위향교의 공간 배치는 전학후묘(앞쪽에 교육 공간, 뒤쪽에 제사 공간 위치) 방식이다. 향교에 들어가려면 가장 먼저 홍살문을 지난다. 홍살문은 두 개의 기둥 위에 화살과 삼지창을 꽂아 놓은 뒤 붉은 칠을 했다. 화살과 붉은색은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가 있다. 향교는 교육을 하는 신성한 곳이니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다. 외삼문은 공부하는 공간(강학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외삼문 안에는 교실과 교무실, 도서관이 함께 있는 명륜당이 중앙에 있으며,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신성한 공간이다. 그래서 ‘문묘’라고도 부른다. 대성전에 들어가려면 내삼문을 지나야 한다. 대성전 내부에는 중앙에 공자의 위패가 있고 좌우에 공자의 제자와 성리학을 만든 주자와 정자,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가 있다.
조선시대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서당에서 공부했다. 서당은 마을이나 가문에서 세운 사립교육기관이다. 서당에서 13세~15세까지 공부한 뒤 향교나 서원에 입학했다. 향교는 오늘날 중고등학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입학정원은 최소 30명에서 최대 90명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공부를 한 뒤 경기도에서 실시하는 사마시(향시, 소과)에 응시한다. 사마시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된다. 진사나 생원은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고 대과에 급제하면 벼슬길에 나갔다.
조선시대는 유교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바르게 성장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반 뿐 아니라 중인이나 상민층에게도 교육받을 권리, 과거시험을 볼 권리를 줬다. 또 학생들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학비와 생활비를 나라에서 제공했다. 군대나 부역도 면제했다. 그만큼 후세가 잘 성장해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참고 : 진위향교 홈페이지, 김해규, 『평택문화유산길잡이』(2007)
5.민본정치(民本政治)를 꿈꾼 삼봉 정도전
‘난세에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나라를 운영할 학자들이 길러지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세상을 바꿀 혁명가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려 말은 난세(亂世=어지러운 세상)이었다. 밖으로는 오랫동안 고려를 억압했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성장하고 있었다. 안으로는 원나라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친원파 세력들, 부패한 귀족들(권문세족)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고려 말 국제정세가 크게 바뀌는 것을 깨달은 공민왕은 반원개혁정치를 폈다. 원나라의 강요로 낮아졌던 왕에 대한 칭호와 관료제도를 바로 잡고, 몽고말과 몽고 풍습까지 금지시켰다. 신돈을 등용해서 불법적으로 수탈한 권문세족의 농장과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해방시켰다. 원에게 빼앗긴 땅도 되찾았고 친원파들도 내쫓았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반발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신진사대부는 본래 시골의 향리거나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고려 말 성리학을 받아들여 학자로 성장했고 공민왕 때 부활한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해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하지만 개혁이 실패하자 신진사대부는 고려왕조를 지키며 개혁하자는 온건파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혁명파로 갈라졌다.
정도전은 혁명파 신진사대부였다. 정도전은 운명이 끝난 고려왕조가 망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여진족 정벌과 왜구 토벌로 인가가 높았던 이성계와 손을 잡고 권문세족과 온건파들을 제거한 뒤 조선을 건국했다. 정도전은 성리학이라는 유학을 공부한 학자였다. 정도전이 생각한 이상정치는 맹자가 주장한 왕도정치, 민본정치라고 생각했다. 왕도정치는 ‘도덕정치’를 말한다. 왕이나 신하, 백성들이 모두 유교적 성인군자가 되어야만 좋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다. ‘민본정치’는 왕이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라 ‘백성의 뜻에 따라 경영되는 나라’를 말한다. 정도전은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으로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같은 조선의 헌법을 만들었고, 한양도성과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을 만들었다. 왕보다는 백성들을 대표하는 신하들이 정치를 주도하기 위해 야심만만한 이방원을 밀어내고 비교적 세력과 야심이 적은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야심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세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도전이 받았던 귀족으로는 훈작도 박탈되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관직과 훈작을 복권시켰고, 고종 8년(1871)에는 문헌(文獻)이라는 시호와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진위면 은산리는 삼봉 정도전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정도전선생의 사당과 기념관, 가묘,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