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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두 차례나 죽을 위기를 겪은 무 태후와 조영 일행은 잠시의 지체도 허용하지 않고, 말을 갈아타 가며 북으로, 북으로 길을 재촉해, 동짓달 중순에 계성 서쪽의 한 아담한 고택에 당도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뜻 밖에도 고려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초가草家였다. 행랑채와 뒷간채 등 주택은 오래된 것 같았지만, 매우 정갈하고 깔끔해 보였으며, 집 사면의 나지막한 담장과 나무대문, 그리고 드넓은 앞마당 등의 모습이 전형적인 고려인 농가의 생활터전이었다.
조영 일행이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쪽에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 곁에는 절구통이 추위를 맞으며 외롭게 서 있었다.
집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휑한 찬바람이 마당을 휩쓸었다. 댓돌 위에는 두어 켤레의 남자 신발이 놓여 있다.
“할아버지!”
극시아가 큰 소리로 불렀다. 어디에서도 응답이 없었다. 극시아는 행랑채로 가서 헛기침을 하며 문을 두드렸다.
“할아범! 거기 없어요?”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조영이 보니 그는 허리가 구부정한 팔십여 세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극시아와 조영 일행을 보고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귀족처럼 보이는 쟁쟁한 남녀 수십 명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 왔으니, 그도 무리는 아니다.
노인은 문 앞에 놓아둔 지팡이를 찾아 들고 어적어적 걸어 나오며 극시아 일행을 두리번두리번 쳐다보았다.
극시아와 여미아가,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동시에 인사한 후, 극시아가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아이고! 이게 누군가요? 아씨들이 아닌가요?”
“맞아요. 근데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네? 뭐라고요? 제 귀가 요즘 잘 들리지 않아서요.”
그가 귀에 손바닥을 모으며 고개를 들이대었다.
“우리 할아버지요, 어디 계세요?”
극시아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 주인 나리께선 멀리 출타하셨어요. 편지 한 장을 주시며, 아씨들이 오면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노인은 곧장 방안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서찰을 한 장 가지고 나와서 공손한 태도로 극시아에게 바쳤다. 극시아가 받아 펴보니, 익숙한 필체가 눈에 띄었다.
미시아美示雅, 여미아, 극시아 보아라. 너희들이 홀로 여기에 왔다면 여기서 머물고, 만일 다른 손님들을 대동하고 왔다면, 그분들을 모시고 즉시 계성 북문 밖 고가장高家莊으로 가거라.
병술년 동짓달, 할아버지로부터.
‘······?’
영문을 알 수 없는 묘한 편지다. 극시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언니! 고가장이 어떤 곳인지 알아요? 계성 북문 밖에 있다는데?”
여미아가 극시아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그 편지를 내게 보여줄 수 있겠니?”
극시아가 말없이 서한을 건네었다. 여미아가 읽고 난 후 조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영 장군님, 계성 북문 밖 고가장이라면 장군님의 본가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저희 집을 그 지역 사람들이 고가장이라고 부릅니다.”
조영이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이어서 물었다.
“그런데 고가장은 왜 묻습니까?”
“조부께서 저희더러 손님들을 모시고 고가장으로 가라 이르셨습니다.”
“오, 그래요?”
그 때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무 태후가 입을 열었다.
“조부께선 숨은 고인이신가 보군요. 손녀들이 손님들을 모시고 올 줄을 아셨다니.”
극시아가 늙은 하인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출타하셨고, 언제 돌아오시나요?”
“그건 소인도 전혀 모릅니다.”
“할아버지는 언제쯤 집을 떠나셨어요?”
“언제더라, 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무슨 일로 집을 떠나가셨어요?”
“그것도 나리께서 제게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게 도대체 뭐예요?”
극시아가 눈썹을 찡그리며 언성을 높였다.
“소인은, 소인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그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극시아가 체념한 듯, 여미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니, 할아버지 편지대로 지금 즉시 고가장으로 갈까요?”
“조영 공자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구나.”
곁에서 듣고 있던 조영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아, 저희 집에 오시는 건 대환영입니다. 저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무 태후가 그의 말을 잘랐다.
“나도 흔쾌히 그대들과 동행하겠네. 고가장이라, 예까지 왔으니 고조영 장군의 생가를 나도 꼭 가보고 싶구먼.”
“저희 집은 누추해서 귀하신 마마께 누를 끼치게 될 터인데요?”
“아닐세. 오히려 내가 폐나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네.”
“마마께서 저희 집에 친림하신다면, 저희로서는 크나큰 광영이고 은덕일 것이옵니다.”
조영이 두 손을 잡고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읍을 했다.
“젊은 사람이 꽤나 번폐스런 예의를 구사하는군.”
무 태후가 웃으며 말하고 앞장서서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승려 회의가 그 뒤를 곧장 따라붙었다.
극시아 조부 댁의 늙은 하인은 대문 밖으로 멀리 백여 보까지 전송을 나갔다. 극시아와 여미아 일행의 발걸음이 눈에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지팡이를 짚고 서서 지켜보던 노인은,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신형을 돌렸다.
집안으로 돌아온 노인은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펴더니 위엄 있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젊은이가 헛간채에서 뛰어나오며 대답했다.
“소인, 여기 있사옵니다.”
노인은 형형한 안광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도 아마, 아씨 일행이 다녀간 것을 알고 있겠지?”
“네, 청지기 나리.”
“내가 지금 편지를 한 장 써 줄 터이니, 너는 즉시 지름길을 택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고가장으로 가서 그곳 청지기에게 서한을 전달해야 한다. 아씨들과 그 일행이 고가장에 당도하기 한참 전에 그곳에 도착하여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노인은 즉시 문방사보를 꺼내 몇 자 휘갈겨 쓴 다음, 편지를 봉해 젊은이에게 건네었다. 젊은이는 봉투를 품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마구간으로 달렸다.
젊은이가 말을 타고 나간 후, 노인도 역시 한 필의 말을 꺼내와 안장을 지운 다음, 말위에 뛰어 올랐는데, 그의 몸놀림은 바람같이 가벼웠다. 노인은 말을 몰고 천천히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영 일행은 한풍을 맞으며 나왔으나 얼마 가지 못해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저물기 전 계주薊州에 겨우 당도한 그들은 그 밤을 계주의 한 여관에서 보내고 이튿날 여유있게 나와 계성의 북문을 지나서 오정쯤에 고가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영은 실로 오랜만에 집에 당도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고가장의 대문은, 손님들의 왕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굳게 닫혀 있었다. 조영이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잠시 후에 대문을 열며 하인 하나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아니, 작은 나리 아니십니까?!”
“그렇다네, 어서 문을 열게.”
대문이 활짝 열리고 조영과 나란히 무 태후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영은 안으로 들어가며 달려 나온 다른 하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
“아, 나리마님께서는 수일 전에 여행을 가신다며 남녘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떠나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는가?”
“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쯤 돌아오신다던가?”
“그것도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원래 무 태후는 조영과 극시아가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승려 회의의 조언을 받아들여, 급히 사람을 보내 조영의 조부 고승을 낙양성으로 모시고 오게 했다. 이에 고승은 무태후의 사자들을 따라 낙양성에 가고 없었으나 조영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매우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조부께서 계시지 않으니 섭섭하구나.”
조영은 애석해하며 다시 물었다.
“이곳에 손님들이 몇 분이나 머물고 계시느냐?”
“예, 아마도 한 백 분은 될 것입니다.”
“그 중에 혹시······.”
조영이 말을 맺지 못하고 극시아를 돌아본다. 극시아가 말을 받아 자기 조부의 나이와 형모를 대략 설명했다.
“그런 분이 계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확인해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영은 일단 무 태후 일행을 영빈관으로 모셨다. 무 태후와 태평공주 이영월, 그리고 그들의 시녀들은 독립된 아담한 집 한 채에 머물게 했는데, 이곳은, 여러 달 전 이루하와 여미하가 고가장에 들렀을 때 하룻밤 묵은 집이다.
극시아와 시녀들에게도 정결한 방들을 주고, 이루하와 여미아에게도 따로 방을 내어 주었는데, 그곳은 여인들의 숙소로서 남자들의 거처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조영의 처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조영은 함께 온 일행을 각자의 방에서 잠시 쉬게 하고, 자신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명상에 잠기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하인이 와서 아뢰었다.
“나리께서 문의하신 그런 분이 여기에 오신 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틀 전에 그 분은 이곳을 떠나셨다 하옵니다.”
조영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루하와 여미아 아씨를 이곳에 모시고 오너라. 아, 아니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조영은 곧장 일어나 이루하와 여미아의 처소로 가서 헛기침을 했다.
“들어오세요.”
여미아의 아리땁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영이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어떡하죠? 여미아 아가씨의 조부님으로 생각되는 분은 이곳에 오셨다가 이틀 전 떠나셨다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이곳에 가라 이르셨으니 무슨 조처가 있을 겁니다. 그 때까지 며칠 기다려보죠.”
“그게 좋겠군요.”
조영은 곧장 밖으로 나와 하인에게 일렀다.
“오늘 나와 함께 오신 손님들은 내 처소에서 오찬을 모두 같이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조영은 서재로 들어가서 책들을 뒤적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제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조영은 새 책 한권을 꺼내었다.
高麗史略 고려사략
장중한 필체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는 그의 조부 고승이다. 익히 아는 내용이지만 조영은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고려(고구려) 이전의 환국과 신시시대로부터 시작해 옛 조선의 역사, 그리고 부여사가 간략히 서술되어 있었다.
고구려사에서는 중시조 고등왕高登王(서기전 ?-1286, 단군조선 22세 색불루 임금의 조부)으로부터 시작해 단군조선의 색불루 임금, 대부여의 해모수 임금, 고구려의 고주몽성제, 태조무열제, 광개토경호태왕 등 중요한 직계 선조들을 모두 다루고, 보장태왕(고구려 마지막임금)의 즉위에 이르기까지 개략적인 고려인의 계통, 문명, 지리, 학문 등을 기술해놓았다.
책장을 넘기며 조영은 간절한 생각에 잠겼다.
‘무 태후가 이 책을 읽고 우리 고려인들을 좀 더 이해한다면, 우리를 멸시하지 않고, 우리와 화목하게 지내기 원할 것이다.’
조영은 하인을 시켜 비단보자기에 책을 곱게 싸도록 이른 다음, 식사자리로 나왔다.
여인들의 상에서는 무 태후와 태평공주가 상석에 앉았다. 상위에는 밥과 국, 수십 가지 반찬과 각종 요리가 매우 깔끔하고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무 태후는 고려인들의 전통음식이 입에 맞고 맛있다며 연신 칭찬을 늘어놓았다.
오찬 후 조영은 무 태후를 찾아가 비단보에 싸 둔 책을 선물했다.
“마마, 이 책은 저의 조부께서 지으신 것인데, 마마는 책을 좋아하시므로, 제가 이것을 마마의 선물로 골라보았습니다. 이 책에는 우리 고려인들의 역사가 아주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심심풀이로는 이 책 만 한 것도 드물 것입니다.”
조영은 긴 서론을 늘어놓으며 책을 건네었다. 무 태후는 눈을 빛내며 책을 받아들었다.
“고맙네. 답례는 집에 가서 하겠네.”
조영 역시 감사를 표하고 물러나왔다.
만찬도 진수성찬이었다. 여러 날의 여행에 지친 무 태후 일행은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조영도 자기 집에 돌아오니, 식사 후에 긴장이 풀리고 피곤이 몰려와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온몸이 너무 갑갑해서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손과 발이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란 조영은 크게 소리를 지르려다 마음을 추스르며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제 밤의 일을 곰곰이 되짚으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일행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기억 밖에 없다. 아마도 음식에 약물이 섞여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이 결박당하는 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놈들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다!’
그러나 조영의 본가에서 누가 감히 이런 몹쓸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조영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조용히 사색해 보았으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방은 깜깜해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느 지하실인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지하실이 없는데? 그렇다면 내가 밤새 어디로 끌려왔단 말인가? 여미아와 극시아, 이루하, 마마 일행은?’
혹시 승려 회의 일당이 이곳 계성 관아의 힘을 빌어 벌인 일은 아닐까?
그건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이곳은 자기 집이 아닌가? 자기 하인들이 음식을 만들고 가져오지 않았는가? 애써 추리해보아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내 집에 와서 결박을 당하다니! 내가 없는 사이에 하인들이 모두 누구에게 매수를 당해 적당으로 돌변했단 말인가?’
조영은 갑갑한 나머지 한 바탕 사자후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사방은 적막에 싸여 있을 뿐 그의 목소리는 실내에 갇혀 조금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영은 일어나 간신히 앉아 뒤로 묶인 손을 벽에 기대고 다리를 뻗은 채 조용히 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음속에서 여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미아가 지금 나와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아마도 고요히 명상에 잠겨 호흡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 같았다.
조영은 여미아의 자태를 떠올리다가 곧장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호흡기도 삼매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때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손에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그들은 말없이 조영에게 다가와 조영의 결박을 풀었다. 조영을 자유롭게 한 후, 그들은 조영 앞에 꿇어 엎드렸다.
“태자 전하!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어리둥절한 조영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를 결박한 죄에 대해서는, 나중에 엄히 다스림을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지금은 속히 가셔야 할 데가 있으니,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조영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묻고자 할 때, 두 사람 중 하나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먼저 말했다.
“전하! 조금 있으면 모든 궁금증이 죄다 풀릴 것이오니, 잠시만 참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다른 괴한이 재촉한다.
“전하, 어서 일어나소서!”
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사람도 함께 일어서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조영 곁에 서고 한 사람은 뒤를 따른다.
조영이 밖으로 나와 보니, 이른 새벽인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여기저기에 전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거대한 장원 안인 것 같았다. 조영이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제지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리저리 길을 돌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커다란 이층 전각 앞이었다.
한 괴한이 대문 안쪽을 향해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 전하를 모셔왔습니다.”
대문이 역시 조용히 열렸다. 대문을 연 사람이 세 사람을 안내하며 헛기침을 세 번 했다.
“들어오시게 하라.”
등불 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깜깜한 실내로부터 즉각 낮고도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과 함께 방문이 열리며 불빛이 새어나왔다. 조영이 앞장서서 마루를 지나 방안으로 들어섰다. 실내가 매우 넓었고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다가 조영은 깜짝 놀랐다. 높은 의자 위에 그의 조부 고승이 단아하게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조영이 엉겁결에 엎드려 문안인사를 드리자, 고승이 말했다.
“놀라지 말고 일어나라.”
조영이 일어나 방안을 둘러보니 여러 사람이 서 있었는데, 한결같이 얼굴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조부 고승의 우편에는 고승의 그것보다 낮은 의자에 노인인 듯한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도 역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노인의 우측에는 여인인 듯한, 키 작은 사람이 역시 얼굴을 가리고 시립해 있었다.
“이 분 임任 대인께도 인사를 드려라.”
고승이 조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고승은 오른손 바닥을 펴서 자기 우측에 앉은 복면 쓴 노인을 가리켰다. 조영이 어떤 자세로 절을 올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그 노인이 의자에서 먼저 일어나 조영 앞에 꿇어 엎드렸다. 조영도 역시 엎드려 맞절을 했다.
“태자마마를 처음 뵙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고충이 있어서 얼굴을 가렸으니 용서해 주소서!”
노인의 목소리가 매우 장중하고 부드러웠다.
고승이 노인을 조영에게 소개했다.
“이 분은, 너도 차츰 알게 되겠지만, 우리 고려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서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어른이시다. 앞으로 너도 이 분을 깍듯하게 예우하고 항상 임 대인이라고 불러라. 알겠느냐?”
“소손小孫, 명심하겠사옵니다.”
그 때 느닷없이 매우 아리땁고 고운 목소리가 조영의 귀에 들려왔다.
“노황 기하! 태자 전하에게 저는 소개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임 대인이라고 불린 노인의 우측에 시립해 있던 복면 쓴 흑의인으로부터 나온 목소리였다. 여인의 음성이다. “노황老皇 기하基下”는 고승에 대한 호칭이다.
그 때 임대인이라는 노인이 황급히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얘가!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익혔느냐? 어서 속히 태자 전하께 꿇어 엎드려 사죄해라!”
그의 목소리가 자못 준열했다. 여인은 머뭇거리다 엎드려 조영 앞에 절했다.
“태자전하를 처음 뵙습니다.”
조영은 모든 상황이 너무나 뜻밖이어서 어리둥절했던지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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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5. 25.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