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平穰城" 大遼국의 東京이다.(今遼河 東岸) 遼書만으로...신당서에는 자세하게 나오지만 아직 조작되지 않은 원본을 찾지 못하여 요사에서 발췌합니다.
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東京遼陽府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周武王釋箕子囚,去之朝鮮,因以封之.作八條之教,尚禮義,富農桑,外戶不閉,人不為盜.
동경 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주나라 무왕시 기자를 죄인으로하며 조선에 기거하게 하여 봉지로 삼았다.8조법을 만들어 교화시켜 예와 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양잠을 하여 잘 살았으며 문을 열고 지내도 도둑이 없었다.
傳四十餘世.燕屬真番、朝鮮,始置吏、築障.秦屬遼東外徼.漢初,燕人滿王故空地.武帝元封三年,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後漢出入青、幽二州,遼東、玄菟二郡,沿革不常.
40여대의 군왕이 있었고 연나라가 진한과 번한을 속국으로 삼아 조선에 관청을 설치하고 진나라가 요동밖을 공격하였다.한나라 초 연나라사람 위만이 빈땅에을 왕을 삼았다.무제원봉2년 조선을 정벌하여 진번,임둔,낙랑, 현토등 4군을 두었다. 후한때 청주와 유주 2군이 빼앗기고 빼앗고 하여 요동 ,현토2군은 그 연혁이 늘 같지않다.
漢末為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為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國"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
한나라말 공손도가 그땅을 점거하여 자강에 전하길 공손연이 스스로 연나라 왕이라 칭하였으나 한나라 건원때에 위나라가 연을 멸하였다. 진나라가 고구려성을 함락시키고,후에 모용수가 귀환할적에 고구려왕이 평주를 안전한 곳으로 삼아 기거하였다.위나라 태무시기에 고려왕이 기거하고 있는 평양성에 사신을 보내었다.요나라 동경이 바로 평양성이다.
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東京遼陽府
城名天福,[三]高三丈,有樓櫓,幅員三十里.八門:東曰迎陽,東南曰韶陽,南曰龍原,西南曰顯德,西曰大順,西北曰大遼,北曰懷遠,東北曰安遠.宮城吊北隅,高三丈,具敵樓,南為三門,壯以樓觀,四隅有角樓,相去各二里.
그 성이름은 천복이며 높이는 약3미터이고 누장이 있고 둘레는 삼심리이다. 여덟개 성문이 있는데,동쪽은 영양이고,동남은 운양이며, 남쪽은 용원이고 ,서남은 현덕이며,서쪽은 대순이고 ,서북은 대요이며,북쪽은 회원이며,동북은 안원문이다. 궁성은 북쪽으로 끼고 높이는 약3미터,적에 맞서기 위한 무기가 갖추어져있고, 남쪽으로 문 세개가 있는데 루에서 앞을 관찰할수있다. 네 모퉁이는 각루가 있는데 서로 거리가 2리이다.
宮牆北有讓國皇帝御容殿.大內建二殿,不置宮嬪,唯以內省使副、判官守之.大東丹國新建南京碑銘,在宮門之南.外城謂之漢城,分南北市,中為看樓;晨集南市,夕集北市.街西有金德寺;大悲寺;駙馬寺,鐵幡竿在焉;趙頭陀寺;留守衙;戶部司;軍巡院,歸化營軍千餘人,河、朔亡命,皆籍于此.東至北烏魯虎克四百里,南至海邊鐵山八百六十里,西至望平縣海口三百六十里,北至挹婁縣、范河二百七十里.東、西、南三面抱海.遼河出東北山口為范河,西南流為大口,入于海;東梁河自東山西流,與渾河合為小口,會遼河入于海,又名太子河,亦曰大梁水.
동에서 북오루후커로 400리이고, 남으로 해변 철산까지 860리, 서에서 망평현해구까지 360리, 북으로 읍루현 범하까지 270리, 동서남 삼면이 바다를 품고 있다. 요하는 동북산에서 나와 범하를 이루고 서남류는 큰항구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동량하는 동산 서류에서 혼하와 합쳐져 작은 항구를 이루며 회요하는 바다로 흘러간다. 태자하는 대량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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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사 동경 요양부에 의하면 元魏太武遺使至其所居平穰城 遼국"東京"本此
북위 태평진군(太武帝)가 태자때 고구려의 태황제의 도성 평양 성에 거하면서 태황제의 수명사로 거하였다. 그 곳은 곧 대요국때 東京이다. (대요국은 평양성에 남경을, 후에 동경을 설치하였다.북위서에도 태무가 유사로 평양에 파견됬다는 기록이 있다.
(2)또 요사 동경 요양부에 “遼河出東北山 [入]為范河,西南流為大[凌河],入于海
요하(沸流水 동명제는 奄水(중원칭 遼水)를 건너서 졸본(忽本)에 이르고 동쪽으로 비류수沸流水(今遼河)를 공략 송양을 복속하다) 요하는 동경 요양부 동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면서 범하范河와 합수하고 서쪽에서 흘러드는 대능하[大凌河]와 더불어 남쪽 바다로 든다고 하였다. 필자의 해석이 맞다면
고조선 평양성의 위치는 동쪽 지금의 요하와 서쪽 대능하 사이에 위치한다고 봐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신당서에는 좀 더 구체화하여 명확하지만 요사로서 고조선 평양성이 명확히 밝혀졌다고 할 수 있다.
www.coo2.net의 정훈님글을 본문 주석을 달음.
부>
원문으로만 해석하면 후대에 개정되어 기술한 지역으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요하와 범하 릉하가 평양성을 찾는 키워드인데 동경요양부는 거란이 고려와 전쟁후 빼앗은 지역으로 오인합니다만...
실제는 고구려 전기 평양성 후기 평양성(장안성)으로 이동이있다고 보여집니다.
최후의 평양성은 하북성 랑방시 (동안현)으로 비정합니다.
첫댓글 북위 태평진군(太武帝)가 태자때 고구려의 태황제의 도성 평양 성에 거하면서 - 예전에는 하국이 상국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어졌다 한다. 그렇다면 북위의 태무제는 태자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여진것이 맞는것 아닌가....
추리도를 눈여겨보시면 통주아래쪽에 동경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한도시로 특정되기보다 평양지역으로 넓게 봐야할것 같습니다(예를 들면 경기도처럼). 북경옆을 흐르는 영정하와 난하사이의 지역이 고구려의 중심지역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