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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묏자리 풍수
김두규1)
묏자리 풍수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한다.
풍수하면 으레 묘지 풍수를 떠 올릴 만큼 묏자리 풍수는 풍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풍수 고전 [장서]의 첫 문장이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생기를 타는 것이다(葬者乘生氣)”라고 시작하는데서 알 수 있듯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을 풍수는 전제하고 있다. 묘지뿐만 아니라 부도, 태실 등도 크게 보아 묏자리 풍수에 해당된다.
묏자리 풍수가 산 사람이 사는 양택(주택) 풍수 보다 더 중시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식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만이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사람이다’라는 관념 속에 살아오는 우리 조상들에게 살아있는 사람에게 집(양택)이 필요하듯, 죽은 사람에게도 집(음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은 사람의 집(묏자리)을 찾기 위한 기술로서 풍수지리가 활용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묏자리 풍수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면 그 범위와 내용이 너무 다양하여 하나의 전형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우선 중국과 우리나라 임금의 무덤을 비교해 봐도 그 규모나 터 잡기 방식에서 차이가 있고, 또 우리나라 왕릉과 일반 서민들의 무덤의 터잡기 방식이나 규모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풍수설이 너무 다양하여 그 설마다 이상으로 여기는 입지조건이나 땅의 모습이 다르다. 현재 시중에서 활동하는 일부 풍수술사들은 자신만이 진정 명당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자신이 읽은 책이나 배웠던 선생의 한정된 풍수설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지 큰 틀에서 보면 부분적일 뿐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하에 묏자리 풍수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사진 1,2 중국의 황릉과 우리나라 임금 무덤
우선 우리의 묏자리 풍수가 큰 빚을 지고 있는 중국의 묏자리 풍수는 제외시키기로 한다. 또 백제 무녕왕릉이나 신라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풍수가 수용된 흔적이 보이지만 자세한 기록이 없어 이 역시 훗날의 작업으로 미룬다. 또한 풍수가 성행하였던 고려 왕조에서 묘지 풍수가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나 고려 왕조가 공인하였던 풍수고전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그 전형을 말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주로 조선왕조와 그 전통을 이어받은 현재의 묏자리 풍수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사진 3; 풍수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백제무녕왕릉
조선 왕조에서 묏자리 풍수가 성행했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유교를 국교로 채택한 조선조에서 고려의 불교식 풍수와 다른 유교식 풍수가 유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묏자리 풍수였다. 유교는 충효사상을 실천덕목으로 여기기 때문에 풍수 역시 충효를 구체화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즉 돌아가신 부모를 좋은 곳에 모시자는 효의 실천 방법으로 풍수가 활용되면서 음택(묘지) 풍수가 중시된다.
둘째, 임진왜란과 더불어 중국의 풍수사(두사충, 섭정국, 이문통...)들이 명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오면서 묏자리 풍수에 바람을 넣는다. 이들은 명나라 군대의 진지와 병영 위치 선정에 참모역할을 하기 위해서 왔지만, 사적으로 왕실과 사대부의 묘지 소점에도 관여하여 묏자리 풍수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다.
셋째, 산림을 사유화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묘지 풍수가 악용되면서 조선 후기 묏자리 풍수는 극에 달한다. 조선조에서는 ‘산과 내, 숲과 못은 백성과 더불어 공유한다’는 원칙으로 산은 국가 소유였다. 그러나 임란 이후 온돌의 보편화와 이로 인한 땔나무 수요의 급증 등으로 산을 사유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진다. 사대부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으로 산림에 대한 사유화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가 조상의 묘지 소점을 통해서이다. 어느 산에 묏자리를 잡은 후 표시를 하여 다른 사람이 이를 쓰지 못하도록 하여 그 땅을 점유하거나(매표埋標와 치표置標), 묏자리를 잡은 후 관으로부터 공증을 받아서 점유하거나(입지立旨와 입안立案),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워 그 포상으로 산지를 하사하는 받아(賜牌) 땅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땅을 점차 사유화해나간다. 이때 풍수적으로 좋은 산을 묏자리로 잡거나 혹은 풍수적인 이유로 특정한 땅을 점유한다. 물론 이러한 터 잡기가 합법적인 것보다는 비합법적인 것들이 더 많아 산송山訟과 묘송墓訟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묏자리 풍수는 조선조에 가장 성행하였으며, 그 영향은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우선 조선조 묘지 풍수는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묏자리 풍수의 고전은 어떤 것일까?
묘지 풍수서적과 설들이 너무 많아 아무렇게나 몇 권을 골라서 묘지 풍수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는 없다. 공인된 풍수서적을 토대로 해야 하는데 고려의 지리업(풍수학) 고시과목은 [신집지리경新集地理經], [유씨서劉氏書], [지리결경地理決經], [경위령經緯令], [지경경地鏡經], [구시결口示決], [태장경胎藏經], [가결訶決], [소씨서簫氏書] 등 아홉 가지 풍수서이지만 전해오는 것이 없다.
조선왕조의 지관(地官) 선발 고시과목은 [청오경靑烏經], [장서葬書: 금낭경錦囊經] [호순신胡舜申: 지리신법地理新法), [명산론明山論], [지리문정地理門庭], [감룡경撼龍經], [착맥부捉脈賦], [의룡경疑龍經], [동림조담洞林照膽] 등 아홉 개 과목이다(조선 후기에 [탁옥부]가 추가되었다가 다시 제외됨). 이 가운데 [청오경], [장서], [명산론], [호순신], [감룡경], [의룡경] 등이 전해져 오고 있고 그 나머지 과목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간간히 언급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실전된 상태이다. 따라서 조선조 묏자리 풍수 대해서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풍수서들만으로 재구성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추가할 것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빈번이 인용되는 주자朱子의 [산릉의장山陵議狀]과 정자程子의 [장설葬說]이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성리학의 대가 주자와 정자가 남겨 놓은 이 두 글을 금과옥조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조 묏자리 풍수뿐만 아니라 현재 통용되는 풍수에서 다뤄야 할 두 가지 중심 주제가 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는 명당발복설이고, 다른 하나는 풍수의 유파와 그 내용이다.
명당발복설은 믿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렇다(불연기연不然其然)’라는 것이다. 동기감응설(同氣感應說)은---역사적으로 끊임없는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지금까지 묘지 풍수의 핵심이론이다. 명당발복설의 근거가 되는 동기감응설을 제거해 버린다면 풍수설 그 자체가 무너진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풍수이론에서 절대적이다. 이에 대해 정자는 [장설]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자식과 손자는 같은 기운을 갖는데, 조상의 유골이 편안하면 그 후손이 편안하고, 조상의 유골이 불편하면 그 후손이 불안한 것 역시 그와 같은 이치이다.”라고 하여 동기감응설을 인정하였고, 주자 역시 [산릉의장]에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유골을 온전하게 모셔 그 혼령이 편안하다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며 제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입니다. (...) 혹시나 땅을 선택함에 있어 세밀하지 못하여 땅이 좋지 못하다면 반드시 물이나 땅강아지, 개미 혹은 바람 등과 같은 것들이 광중을 침범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유골과 혼령이 불안할 것이며 재앙이나 사망 혹은 대가 끊기는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땅의 좋으면 그 위에 초목이 울창하게 자라듯, 조상이 좋은 땅에서 편안하게 영면하면 살아있는 후손도 편안하다는 논리에서 ‘개체적 우주관이 아닌 대아적(大我的) 우주관 혹은 이 세계가 관계의 그물 망’(전북대 김기현 교수)으로 엮어져 있다는 유가적 세계관에서 보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조선조 풍수학 고시과목에서는 동기감응설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청오경]은 “인생 백년에 죽음을 맞게 되니 (...) 뼈는 뿌리로 돌아가는데, 그 뼈가 길한 기운에 감응하면 많은 복이 사람에게 미치리라. (...) 혈(묏자리)이 길하고 온화하면 부귀가 끊임이 없을 것이나 혹 그렇지 못하면 자손은 외롭고 가난해 질 것이다”고 하였다. [장서(금낭경)]은 “사람은 부모에게서 몸을 받는다. 부모의 유해가 기를 얻으면, 그 남긴 바 몸인 자식은 음덕(蔭德)을 받는다. 經에 이르기를, 氣가 鬼에 감응하면 그 복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 털끝만한 차이로도 禍와 福이 천리의 차이를 낸다”고 하였다.
조선조 지리학(풍수학) 고시과목 가운데 유일하게 이기론(방위론) 풍수서인 [호순신]에는 한 개인의 부귀명예 뿐만 아니라 성품까지도 영향을 준다고 하여 문자 그대로 ‘풍수결정론’을 주장한다:
“무릇, 땅에다가 집을 세우고 뼈를 묻게 될 때 받는 것은 땅의 기운이다. 땅의 기운에 아름답고 그렇지 않음의 차이가 이와 같은 즉, 사람은 그 기를 받아 태어나기 마련인데, 어찌 그 사람됨의 맑고 흐림과, 똑똑함과 멍청함, 착함과 악함, 귀함과 천함, 부자와 가난함, 장수와 요절의 차이가 없겠는가?”
다른 풍수학 고시과목들 역시 대체로 이와 같이 묘지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후손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명당발복으로 운명을 바꾼다.
명당발복설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갖는 신비성 및 혁명성 때문이다. 동기감응설은 ‘신의 하는 일은 빼앗을 수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운명은 고칠 수 있을 것이다’는 혁명적 희망---비록 그것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라도--을 오랜 기간 묘지 풍수가 성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에 심어 주었다. [장서(금낭경)]에서는 이를 “신이 하는 바를 빼앗아가 천명을 바꾼다(탈신공개천명奪神工改天命)”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집단 무의식적인 풍수관념은 비록 생물학적으로 유전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통이란 이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운명을 거부하는 역천逆天 사상은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순천順天 사상이 때로 줄 수 있는 절망감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집단의 운명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은 풍수지리와 금단술金丹術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금단술은 한 개인의 불노장생만을 꾀하는 차원에 한정되는 반면, 풍수지리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한 집안을 흥하게 할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한 나라를 거머쥘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제공하기 때문에 더욱더 대중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 최명희 선생은 민중들이 입장에서 묏자리 풍수가 줄 수 있는 희망을 [혼불]에서 다음과 같이 형상화하고 있다(이 대목은 전라도 임실/순창지역의 사투리로 쓰여 있어 타지역 사람에게는 읽기가 좀 어렵다):
“나뭇가쟁이맹이로 차고 날러가 버릴 수 없는 것이 타고난 조상의 뻭다구라먼, 그거이 저 앉은 한 펭상의 근본이라먼, 내(작중 인물 홍술)가 인자 저것(홍술의 손자)의 조상이 되야서, 내 뻭다구를 양반으로 바꽈 줄 수는 도저히 없는 거잉게, 멩당이라도 써야제. 천하에 멩사(名師). 멩풍(名風)을 다 데리다가 묏자리 본 양반으 산소 옆구리를 몰래 따고 들으가서라도 멩당을 써야제. 우리 재주로는 어디 그런 집안으서 신안(神眼) 뫼세다가 잡은 자리만 헌 디를 달리 구헐 수도 없을 팅게. 그 봉분 옆구리를 째고 들으가서라도 양반이 쓴 멩당인디 오죽헐 거이냐.
뻭다구 하나 잘 타고나 양반이 된 그 뻭다구 옆에 내 뻭다구 나란히 동좌석허고 있다가, 세월이 가고 가서 나중에는 그것도 썩고 내것도 썩어 한 자리에 몸뚱이로 얼크러지먼, 니 다리, 내 다리, 니 복, 내 복을 누가 앉어 따로 따로 어지 개리겄능가. 어찌 되얐든 그 자리다가 뫼 쓴 것이 되야부렀는디. 그런 뒤에 멩당 기운이 발복(發福)을 허먼, 그 자손 내 자손이 똑같이 받겄지.“
[혼불]에 등장하는 천민 ‘홍술’은 자기 아들 만동이는 이미 어쩔 수 없었고, 그 만동이가 낳은 아들, 즉 자기의 손자만큼이라도 당대 발복하는 명당에 더부살이로 들어가면(암장暗葬을 한다는 뜻) 제 애비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속에 명당으로 알려진 남의 선산에 암장을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겠다는 절박한 심정은 ‘홍술’로 하여금 불법적인 암장을 감행하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암장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또 내일에 대한 희망도 전혀 없는 천민 ‘홍술’의 입장에서 그러한 희망마저 앗아버린다면 삶은 더욱더 절망적일 것이다.
문명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이르러 그러한 명당발복설이 황당한 미신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질문과 같아 믿음의 문제 일수도 있고, 또 그러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된다면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풍수지리라는 대상을 학적으로 접근하는 풍수학자이지만 그 이전에 풍수설(묏자리 풍수뿐만 아니라 양택 풍수)을 믿어 그 구체적인 실천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동기감응설’을 부정해버리면 풍수지리에 대한 더 이상의 관심과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럴 경우 풍수학자로서의 삶도 단순히 호구지책 이상이 아닐 것이다.
묏자리를 잡는 데 두 가지 큰 유파 이기론과 형세론
이기론
양기풍수와 마찬가지로 묘지 풍수에는 크게 두 가지 유파가 있다. 하나는 형세론(형기론: Form School)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론(방위론: Compass School)이다. 땅의 형세를 육안으로 살펴 그 좋고 나쁨을 가리는 것이 형세론이라면, 이기론은 음양, 오행, 팔괘라는 범주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나침반(Compass)으로 기를 측정하고 터를 잡는 방식인데, 이 이기론 풍수 또한 내용이 통일되지 않고 다양하다.
이 둘 가운데 형세론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는데, 주자朱子나 정자程子는 형세론만을 인정하였고, 조선 사대부들 역시 이를 본받아 형세론만을 중시하였다. 조선조 지리학(풍수학) 고시과목 가운데에서는 [호순신]이 유일한 이기론 풍수서이다. 조선조에 형세론과 이기론이 어느 비중으로 수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조임금의 다음과 같은 언술이 참고가 될 것이다:
“형국(형세론)과 음양(이기론)은 서로 안팎이 되므로 어느 한쪽을 폐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중에서 경중을 논한다면 형국인 체를 제쳐두고 용을 구한다거나 본(本: 형세론)을 팽개치고 말(末: 이기론)을 잡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호순신]의 이기론 풍수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형세론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수용되어왔는데, 현재 시중의 이기론 풍수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호순신]의 이기론 풍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소개하여 현재 시중의 이기론 풍수사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자.
‘호순신’의 이론 핵심은 산의 흘러오는 방향과 물의 빠져나가는 방향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길흉화복이 좌우된다는 논리이다. 우선 전체적인 산의 흐름이 어느 쪽으로 돌았는가를 살펴 좌선국左旋局과 우선국右旋局으로 나눈다. 예컨대 한양의 경우 삼각산→북악산→인왕산→낙산으로 감아 돌아 오른쪽 팔이 감싸는 형세이므로 우선국右旋局이 된다. 좌선국인가 우선국인가를 정한 다음 산이 뻗어오는(내룡來龍) 방위가 무엇인가를 측정한 뒤, 이를 사국四局 가운데 하나에 배속시킨다. 좌우선국과 사국四局이 정해지면 물이 빠져나가는 곳, 즉 수구水口가 어느 방향인지를 살펴 이를 다시 [호순신]의 포태법胞胎法과 구성법九星法에 따라 길흉화복을 정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형세론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적지 않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로 정한 계룡산 도읍지 조성공사가 바로 이 호순신의 이기론에 의해 중지된다. 왕릉의 경우 형세론에 입각하여 주로 소점하였다 할지라도 [호순신]이론에 부합해야 했음이 왕조실록 곳곳에서 드러난다. 태종의 왕릉,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 무덤, 선조비 의인왕후 박씨 무덤, 정조임금이 이장을 주도한 사도세자 무덤(융릉) 소점 과정 등에서 [호순신] 이기론이 상당한 비중으로 논의되었음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해방이후 남한에서의 이기론 풍수는 이와 전혀 다른 [지리오결]이란 풍수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풍수 변천사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형세론
풍수의 두 가지 유파 가운데 형세론은 조선조에 주류를 이루는데 대부분의 앞서 언급한 조선조 풍수학고시과목 가운데 [호순신]을 제외한 모든 풍수서가 형세론이었다.
조선조 지리학(풍수학) 고시과목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청오경(장경)], [장서(금낭경)], [명산론], [감룡경] [의룡경]과 같은 형세론 풍수서를 토대로 조선조 묘지 풍수에서 말하는 형세론의 모습을 재구성하기란 어렵지 않다. 어렵지 않음에도 하나의 통일된 모습으로 간단명료하게 그려내기가 쉽지 않음은 언급한 풍수서들 마다 그 논리 전개나 구성 방식이 전혀 다르고 심지어 용어조차 다르기 때문이다. [청오경]과 [장서(금낭경)]는 추상적인 부분이 많아 땅을 파악하는데 구체성이 떨어진다. 양균송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감룡경]과 [의룡경]은 본질적으로 중국의 거대한 산줄기와 물줄기를 염두에 두고 땅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이 작은 산줄기 작은 물줄기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명산론] 역시 중국에서 유입된 풍수서적이긴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이며 체계적으로 땅 보는 방법을 제시하여 초보자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이러한 풍수서적들의 특징을 감안하되 여러 풍수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형세론의 구체적 모습을 재구성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땅기운을 시신이 안장되는 혈처로 운반해준다는 중심 산줄기(龍)를 다루는 부분
② 시신을 안장하게 될 땅기운이 뭉쳐진 곳(혈穴)을 다루는 부분
③ 조성된 무덤(혈장穴場) 앞에 펼쳐지는 들판(명당)을 다루는 부분
④ 무덤 앞에 펼쳐지는 들판(명당)으로 흐르는 물(명당수)을 다루는 부분
⑤ 사방에서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산(사砂)들을 다루는 부분
사진 4: 풍수의 이상적 요건을 갖춘 묏자리 명당도
사진 5: 흔히 괴혈怪穴로 불리는 묏자리 명당(일반 묏자리 명당과 그 구성은 동일하다)
①에서 다루는 부분을 심룡법尋龍法(혹은 간룡법, 멱룡법)이라고 한다. 혈처로 땅기운을 공급하는 중심산줄기는 명당 발복과 관련하여서 주로 후손의 흥망성쇠 기간 및 흥망성쇠 유형을 주관한다고 하는데, 대체로 그 뻗어오는 모습이 힘과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좋고 그렇지 않는 것을 나쁜 것으로 본다.
②에서 다루는 부분을 정혈법定穴法, 혈법穴法, 도장법倒杖法, 점혈법點穴法 등으로 불린다. 시신을 안장할 정확한 지점으로 풍수의 핵심이다. 이를 찾는 일이 매우 어려워, 주자朱子는 [산릉의장]에서 “소위 정혈법이란 침이나 뜸에 비유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일정한 혈의 위치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털끝만큼의 차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혈을 찾는 것이 어려운 만큼 그 찾는 방법에 대해서 각 풍수서마다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여 하나의 공통된 모습을 그려낼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혈처가 되는 곳은 단단하고 반듯하며, 밝고, 비석비토(非石非土)의 토질에다, 일정한 모양을 갖춘 토괴(土塊)로서 주변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땅기운의 뭉치는 정도에 따라 혈의 크기가 정해지며 그에 따라 대통령이 나올 수도 있고 면장이 나올 수 있다. ‘면장이라도 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는 80년대 어느 대통령의 말도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사진 6: 논두렁 명당
③에서 다루는 부분을 명당론明堂論이라 할 수 있다. 풍수고전들은 명당을 그 위치, 모양, 크기 등에 따라 내-, 외명당; 대-, 중-, 소명당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명산론]은 자그만치 30가지로 세분하기도 한다. [명산론]은 명당의 기능에 대해서 “내명당은 발복의 속도를 주관하며, 외명당은 발복의 대소를 주관한다“고 하는데, 이를 다시 현대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토지의 하중능력’을 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체로 혈穴과 수구水口사이가 명당의 범위인데, 명당의 크기는 혈과 수구 간의 거리에 비례한다. 혈과 수구 간의 거리가 짧을수록 혈과 수구 간의 경사도가 가파르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반대로 혈과 수구 간의 거리가 멀수록 경사도가 완만하여 좀 더 넓은 공간이 형성된다. 이러한 명당의 크기에 따라 생산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발복의 속도와 대소를 주관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④ 혈 앞에 펼쳐지는 들판(명당)을 흐르는 물, 즉 명당수明堂水는 흐르는 땅기운을 멈추게 하여 혈을 만들어주는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모든 풍수서들이 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서(금낭경)]는 “기氣는 물에 닿으면 머문다”고 하였고, [청오경]은 “산이 다가들고 물이 돌아들면 곧 귀하게 되고 재물도 풍족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명산론]은 “물의 산과의 관계는 피의 살과의 관계와 같아, 둘이 서로 보이지 않게 이익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기론 풍수서인 [호순신]에서는 물을 사람의 혈맥에 비유하여 그 사람의 생노병사가 모두 이 혈맥에 의존하듯, 풍수에서의 물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풍수에서 물(명당수)이 이렇게 중요한 만큼 아무리 작은 물도 소홀히 할 수 없어 [감룡경]에서는 ‘땅보다 한 치(一寸)만 낮아도 물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명당발복과 관련하여서 명당수의 역할은 주로 재물을 주관한다고 시중의 술사들은 이야기 하나, [명산론]에서는 부(재물)와 귀(벼슬) 모두를 주관하며 오른쪽으로 명당수가 돌아나가면 여자가,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남자가 잘된다고 하였다. 풍수에서 명당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컸던 만큼 조선 세종 임금 당시 한양의 명당수인 청계천 수량 및 수질 보전과 관련하여 조정에서 수년 동안 ‘명당수 논쟁’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명당수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하며, 적절한 습도와 환경을 유지시켜 주고, 각종 오폐수 및 오폐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갖으며, 농업용수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길흉화복과 실제로 밀접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⑤에서 다루는 것은 혈穴과 명당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에 대해서이다. 이 가운데는 사신사四神砂(청룡, 백호, 주작, 현무)뿐만 아니라, 안산, 조산朝山, 주산, 나성羅星, 수구사水口砂 등 모두를 아우른다. 혈을 감싸는 주변 산들이 중요한 까닭은 땅 기운을 갈무리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명산론]에서는 “혈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길하고 흉한 산(砂) 모양들은 너무 다양하여 3000여 종류가 있는데, 이 역시 상황과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다양한 주변 산(砂)들의 뜻을 생각하고, 상세한 것까지 해석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해석론이 다양하다. 전체적으로 반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좋은 사(砂)로 보고, 추하고 험한 것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대부분의 풍수서적들의 공통이다.
현재 우리나라 묏자리 풍수
지금의 묏자리 풍수는 어떤 모습이며 조선왕조에 비해 그 수요는 어떨까?
조선시대 보다는 현저하게 묏자리 풍수를 신봉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묏자리를 구하려는 비율은 떨어졌다.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는 현대인들에게 [혼불]의 작중 인물 ‘홍술’처럼 절망적 상황에서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리 없고, 한 개인과 가문에 일어나는 흥망성쇠를 ‘과학적’ 접근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그러한 미신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른 한편, 조선조에 다른 생계수단이 없는 잔반殘班이나 중인들이 호구지책으로 풍수활동을 하였다면, 지금에서 와서는 그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수입이 좋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풍수설을 조장하거나 풍수로 사람들을 겁을 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매장보다는 화장 추세가 들어가면서, 묏자리 보다는 납골당이나 수목장樹木葬으로 장묘문화가 바뀌어 가는 추세도 묏자리 풍수에 대한 관심을 옅어가게 하는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문화말살로 우리 전통 사상의 참된 부분들이 많이 사라졌는데, 풍수 또한 이로 인해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기를 겪었던 것이 묏자리 풍수의 변화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지리학(풍수학)’ 고시과목이 사라지면서 이론과 실무에서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무장되어 공인받았던 풍수학인과 술사들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장의업자들이나 산일을 하던 일꾼들이 대행하다 보니 내용은 빈곤해지고 형식화 되어갔다. 고려와 조선 풍수의 재구성, 실전된 과거 풍수서적들의 발굴, 전해지는 풍수고전들의 교감校勘과 역주譯註작업을 바탕으로 그 당시 묏자리 풍수가 가졌던 사회사적-, 인류학적-, 철학적 의미 파악 등이 선행되지 않다 보니 해방이후의 묏자리 풍수는 국적불명의 각종 설들로 인해 문자 그대로 ‘목소리 큰 사람’의 몫이 되어버렸다. 조선 말엽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리오결]류의 이기론 풍수, 이를 간소화한 삼합三合風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수맥 찾기’의 풍수에의 침투, 1990년대 서양 인테리어 풍수의 무분별한 수용, 최근에는 대만산 ‘현공’ 풍수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묏자리 풍수뿐만 아니라 우리 풍수 전반을 위해서는 ‘술이부작述而不作’적 겸손과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묘지 명당을 써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여 묏자리 풍수 이야기를 끝내고자 하는데, ‘묏자리 잘 써서 정말로 명당발복을 받은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최근세기 2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묏자리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몇몇의 이야기를 통해 이를 알아보자. 조선왕들 가운데 풍수에 관심이 많거나 능했던 왕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 정조임금은 당대 최고의 풍수학자였다. 세손(世孫)시절인 177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성묘하면서 그곳이 소문대로 흉지 임을 확인하고 정조임금은 뉘우치는 바가 있어 풍수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풍수공부 방법과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옛사람들이 풍수지리를 논한 여러 가지 책을 취하여 전심으로 연구하여 그 종지를 얻은 듯하였다. 그래서 역대 조상 왕릉의 용혈사수(龍穴砂水)를 가지고 옛날 방술과 참고하여 보았더니, 하자가 많고 길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갖지 못하여 세속의 지사로서 안목이 있는 자를 널리 불러 그 사람의 조예를 시험해 본바 그들의 언론과 지식이 옛 방술에 어긋나지 않아 곧 앞뒤로 전날 능원을 논한 것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들의 논한 바가 상자에 넘칠 정도였다.”(홍재전서 57권).
정조 임금의 풍수 공부과정 역시 다른 풍수학인들의 공부 방법과 비슷하여 우선 풍수지리서를 많이 읽어 그 대략을 이해 한 뒤, 조상의 능역을 답사하였고, 마지막으로 당시의 유명하다는 지사들을 불러 공부를 한 것이다. 정조 임금의 풍수공부 기간은 15년이 넘는다. 그러는 도중에 정조임금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을 많이 당한다. 30이 넘어 얻은 유일한 왕자 문효세자가 다섯 살 때 석연치 않게 죽고, 이어서 문효세자의 생모가 다시 임신을 하였으나 갑자기 죽는 등 왕실에 불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이것이 모두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원래의 무덤은 현재 서울 시립대 안에 있었음) 터가 나쁜 탓이라는 소문과 상소가 이어지자 1789년 그는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으로 옮긴다(현재의 융릉). 왕릉을 옮기고 나서 1년 안에 국가의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왕조실록에 기록)이 있었는데, 예언대로 왕자가 태어났다. 정조임금의 입장에서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이 나빠 왕실에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좋은 땅으로 모시니 그 발복으로 왕자를 얻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7: 정조임금의 풍수실력이 발휘된 융릉(사도세자 무덤)
이러한 정조임금의 사례를 몇 십 년 후 왕손 흥선군이 모를 리 없었다. 흥선군은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무덤을 많은 정성과 노력 끝에 충남 예산 가야사 터로 옮긴다. 2명의 천자가 나올 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853년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태어나고, 명복은 나이 12살 되던 1863년 임금이 된다. 그 후 그는 임금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결국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 두 명이 나왔으니 예언된 풍수설이 그대로 실현됨 셈이다. 당연히 흥선대원군은 풍수를 더욱 믿게 된다.
사진 8: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무덤
윤보선 대통령 집안의 묘지 풍수이야기도 흥미롭다. 윤 대통령 집안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윤대통령 부인 고 공덕귀 여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5대조 윤대통령 5대조 할아버지 묘를 이순신장군의 후손들의 땅에 암장을 하였다고 한다. 굶주려 죽을 직전의 스님을 구해준 보답으로 그 스님이 좋은 자리를 찾아주었다. 그러나 그 땅이 이순신 장군의 사패지지賜牌之地 였던 까닭에 부득불 암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발복으로 집안이 번성하였다고 믿고 있고, 윤대통령도 그 땅을 사랑하여 사후 국립묘지가 아닌 이곳에 안장되었다. 지금도 풍수공부를 하는 많은 초보자들의 현장 답사지가 되고 있다.
사진 9: 명당발복이 이뤄졌다는 윤보선 대통령 5대조 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묏자리 풍수 관련 이야기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95년 당시 국민회의 총재인 김전 대통령은 부모님 묘를 용인시 이동면 묘동으로 옮겼다. 그 자리는 천선하강天仙下降(신선이 하강하는 형상)의 명당으로 ‘남북통일을 완수할 영도자가 날 자리’ 였다는 보도가 1996년 월간 신동아에 나왔다(안영배 기자). 그로부터 일 년 후에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이 기사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거리가 되었고 극성스러운 사람들은 용인의 김대중 선영까지 답사를 가기도 하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능성이 없어보이던 김대중 총재는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또 남북평화정착에 토대를 만들었으니 예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사진 10: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영
물론 이렇게 묏자리 풍수를 신봉하여 덕을 보았던 사람도 있지만 실패한 사람도 많았다. 명성황후 민비는 왕비가 되고나서 왕자를 얻지 못하자 친정아버지 무덤을 1866년부터 자신이 시해당하기 1년 전인 1894년까지 28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여주→제천→이천→광주(廣州)→보령 순서로 7년에 한 번꼴로 이장하였던 것인데, 마지막 이장지인 충남 보령의 무덤 터는 당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소개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장 1년 후 명성황후는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러한 예는 부지기수라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다.
사진 11: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무덤
지금도 묏자리 풍수는 권력을 지향하거나 크게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유혹의 대상이다. 2001년 자민련 김종필 명예 총재,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조상의 무덤을 명당이라고 알려진 충청도에 옮겼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도 2002년 17대 대선에서 낙선한 후 조상 묘를 이장하였다. 대통령 후보였던 이인제 의원도 2005년 부모 묘를 옮겼다. 물론 풍수적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한국 주요 정당의 총재급만 언급하였지만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묘지 풍수를 믿은 흔적이 나타난다. 이장의 결과 어떻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단시일에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고 10년 넘게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토의 부족과 묘지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데 묘지 풍수가 우리 시대에 무슨 순기능을 할 것이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 문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산사람이 좀 더 편하게 살려고 죽은 사람의 공간까지 침해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은 ‘생명’이라는 큰 틀 속, 즉 죽은 사람도 사람으로 보아 그 거주 공간을 인정해 준다는 관점에서 보면 무엇인가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