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華城) 둘러보기 [2005.11.27. 일요일] [ 한국의산천]
역사 깊은 문화유적이 살아 숨쉬는 수원은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지역의 입지적 특성을 살려 건설한 계획도시로 수도 서울 남부의 관문 역활을 했다.
영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現 융,건릉)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화성은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실학의 대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천천히 어둠이 내리자 성벽 아래 전등에서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사도세자(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현경왕후)를 모신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능은 건릉(健陵)이다.
융건릉 상세보기 클릭 ■☞ 화산의
융건릉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바람 불어 좋은 날이다. ▲ 화홍문 근처의 언덕에 있는 방화수류정 옆의 연못인 용연
정자와 버드나무 사이에 보름달이 수면위에 비추어지는 아름다운 정취를
"용지대월"이라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는다. (조리개 2.8에 노출
2초인데 대낮처럼 환하게 나왔습니다.) 수원팔경
▲ 북동포루 화홍문 서쪽에 있다. 루는 대체로 5좌(座)가 있는데, 그
구조는 모두 똑같다.
▲ 봉돈 봉돈은 일자문성의 위에, 동2포(東二鋪)와 동2치(東二稚)의 사이에 있는데 행궁을 안조(案照)한다. 4성을 쌓고 나서 파수(把守)를 설치하여 정찰할 임무를 맡긴 것은 척후(斥候)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멀리 육지나 바다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것을 더욱이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에 철성(凸城)의 제도에 의거하여 비로소 봉돈을 설치하였다. 벽돌로 쌓아올려 성의 몸체 위에다가 벽돌로 다시 높게 쌓았으며,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오게 하여 마치 치(雉)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내면은 굴곡이 지게 하여 3층으로 만들었다.
양쪽 가장자리의 층계 끝에는 벽돌로 지은 집이 이어졌고, 용마루 없이 기와로 덮었다. 남북에 각각 한 간씩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온돌로서 지키는 군졸이 거처하는 곳이고, 북쪽 것은 판자를 깔았는데 기계 따위를 넣어둔다.
▲ 봉돈 돌층계의 등에 기대어 하나의 네모진 성을 만들고, 층계 위에는 짧은 담을 3 층으로 만들었는데, 아래는 2집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면의 2간은 벽돌로 쌓은 담인데, 길이가 18척 6촌이고, 한 가운데에 작은 문을 홍예로 틀었다. 담의 높이 13척으로 높이가 집과 같다. 담의 안쪽 등()의 아래에 해당하는 곳은 남북이
32척이고 동서가 21척이다.
▲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은 화서문 북치(北雉) 위에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벽돌로 삼면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둔다. 그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를 만들고 나무 사닥다리를 사용하며, 위아래에 공안(空眼)을 많이 뚫어서 바깥을 엿보는데 편리하게 한다. 불랑기(佛狼機) 백자총(百子銃)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상청판(上廳板)과 하청판의 2판을 설치하여 누(樓)일 경우에는 2층으로 하고 포(鋪)일
경우에는 3층으로 하여 층마다 벽돌로 된 면에 불랑기를 쏘아댈 포혈(砲穴)[사방 1척]을 내었다. 상층의 벽돌로 된 면 위 쪽은 판자로 둘렀으며 문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중층과 상층에는 각각 청판(廳板)을 여는 사방 3척의 덮개판 하나를 만들어, 밀고 당겨서 열고 닫게 하여 나무 사닥다리로 된 오르 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다. 아래 층 안쪽에는 벽돌로 된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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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 옆 관광안내소의 친절한 안내와 팜플렛 자료를 참고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일 뿐입니다. 아무 것에도 매달리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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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산천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
첫댓글 그룹 캔사스의 "Dust In The wind" 오랫만에 듣는 음악일세.... 그래 .... 인생은 덧없고, 이노래 가사처럼 먼지속에 바람이 휘날리듯... 그렇게 가는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