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창 석 [吳 昌 碩]
4497350 이경은
1. 작가의 생애
吳昌碩(1844~1927)은 절강성(浙江省) 안길(安吉) 사람으로 본명(本名)을 준(俊)이라고도 하였고, 또 준경(俊卿)이라고 하였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자(字)인 창석(昌碩)을 이름 대신 사용하였다. 호(號)는 부려(缶廬), 노부(老缶), 노창고금(老蒼苦鐵), 대롱(大聾), 파하(破荷) 등이 있다.
그는 매우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17세에 이르러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으로 온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혼자서 각지를 헤매는 불행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서화(書畵)와 전각(篆刻)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견문을 넓혔다. 동치(同治) 3년(1864) 21세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9명의 가족 가운데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세상을 버렸음을 알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며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학문을 닦다 22세에는 수재(秀才)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명적(名蹟)을 구하고 명사들과 교류하면서 서화와 전각을 학습하기 위하여 전국으로 유랑의 길을 걸었다. 이 때부터 40대 초반까지 소주(蘇州), 항주(杭州), 호주(湖州) 등 예술의 고장을 찾아 때로는 서화와 전각을 팔고 때로는 명가의 문객으로 머물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서화와 전각의 기초를 튼튼히 쌓았다. 그 후 오창석은 상해를 중심으로 서화와 전각의 창작에 전념하였다.
상해에 터를 정한 광서(光緖) 13년(1887) 44세부터 50대 중반까지 오창석의 서화와 전각은 고대의 법칙과 명가들의 그늘에서 점차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으로 돌아다닐 때 주로 생계의 수단으로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하여 창작한 기교적인 작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강조한 작품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오창석의 신변에는 두 가지의 큰 충격이 있었다. 하나는 중일(中日)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현(安同縣)의 현령(縣令)으로 임관한 일이다. 그는 친구인 오대징(吳大徵)의 요구로 중일 전쟁에 참가하여 참모와 문서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서 25년(1889) 동향(同鄕)인 정원보(丁元保)의 추천으로 안동현령에 부임하였으나 관료 사회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전쟁에 참가하여 국가의 나약함을 느꼈으며 관직에 부임한 후 더 이상 가망성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오로지 예술의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50대 중반 이후에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비록 전각은 가능한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나 서예와 그림을 많은 양을 창작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서풍과 화풍을 창작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광서 30년(1904) 절강성의 유명한 전각가인 정인(丁仁), 엽명(葉銘), 오은(吳隱), 왕복암(王福庵)이 항주의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모여 금석과 전각의 할술단체인 서령인사(서령인사)를 창립하고 오창석을 초대 사장으루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창석은 인도(印刀)를 놓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결국 10년후 다시 집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준국은 물론 한국과 일분으로까지 널리 알려졌다. 1914년 白石六三郞(시라이시 록사부로)은 자신이 경영하던 ‘육삼원(六三園)‘에서 최초로 ’오창석서화전(吳昌碩書畵展)’을 열었으며 그 후 상무인서관(商印書館)과 서령인사(西泠印社) 등에서는 <오창석화훼책(吳昌碩花卉冊)>, ,<부려인존부(缶廬印存)>, <오창석서화집(吳昌碩書畵集)>, <오창석서화보(吳昌碩書畵譜)>, <부옹근묵(缶邕近墨)>, <부옹묵희(缶翁墨戱)>, <고철쇄금(古鐵碎金)> 등을 발간하였다.
後年에는 詩, 書, 畵, 篆刻에 다방면으로 활약(活躍)을 했으나, 그 藝術은 자신도 말한 바와 같이 篆刻은 第 一, 書는 第 二, 畵는 第 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27년 11월 6일, 오창석은 중풍에 걸려 상해의 우거(寓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84세였다.
2. 작품소개
1) 篆 刻
오창석은 10세쯤부터 인장(印章)을 새기는 일을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그가 각인(刻印)을 즐겨하는 것을 알고 여러모로 그것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의 각인을 더욱더 본격화되고 한층 더 열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젊었을 때 각인을 배워, 처음에는 절파(浙派)를 따랐지만 뒤에 절․원(皖) 양파의 장점을 취하여 융합했다. 그리고 거기에 등완백(鄧完白), 오양지(吳讓之), 조지겸(趙之謙) 등의 법을 섞었고, 다시 그 근본인 진한(秦漢)으로 소급하여 진한인의 ‘단감독조(胆敢獨造)’ 의 정신을 발양(發揚)하고 순박혼후(純朴渾厚)의 멋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미 앞사람의 법도를 융합하여, 더욱 잘 변화시키고 조금도 규칙격율(規則格律)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중년 이후는 이들 유파의 속박에서 벗어나, 직접 역대의 금석문자 가운데서 다시 많은 정화(精華)를 흡수했다. 고대의 이기(彛器)나 문물은 왕왕 보배로운 연성벽(連城璧)에 견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이것을 사들일 힘이 없었으므로 수장가에게 탁본을 구해 볼 수 밖에 없었지만, 탁편(拓片)으로는 충분히 원물(原物)의 정신이나 기질을 전할 수 없는 결점이 있어서 그의 연구상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고인(古人)의 예술의 성과를 탐색하기 위해서, 그는 힘자라는 데까지 한(漢)의 전(磚)이나 와당류(瓦當類) 같은 비교적 값이 싼 고물을 구입하여 주야로 마사(摩挲-손으로 문지름)하여 모사하고, 비교 연구하고, 또 손수 탁인하여 동호인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조각하여 벼루를 만들고 명을 새겨 책상 위에 놓고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그는 널리 중장(衆場)을 취하고, 수축(收蓄)을 겸하여 오랜동안 반복 탁마함으로써 능히 융합관통(融合貫通)하여 스스로 신의를 창조하고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창석은 무르익은 필묵의 맛을 노련하게 각으로 환치시켜 표일중후한 가운데 깨어진 듯 벌레 먹은 듯한 고인(古印)이 지닌 파침(破蝕)의 미를 특징으로 한 오풍(吳風)을 창출하였다.
일찍이 새겼던 인은 예전에 손수 수탁하여 <오창석인보-吳昌碩印普>, <전운헌인존-篆雲軒印存>과 <삭고려인존-削觚廬印存>고 등의 인보집에 수록하여 친구에게 주었으나, 아깝게도 그 수가 적었기 때문에 현재는 대단히 희소하여 보기 어렵다. 만년의 대표작은 <부려인존-缶廬印存>에 수록되어 있어서, 서령인사(西泠印社)와 선화인사(宣和印社) 등의 간행본이 세상에 나와 있으므로 비교적 구하기 쉽다.
2) 書
서예도 전각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당시의 명가를 따랐으나 30대 이후 <석고문(石鼓文)>에서 필의(筆意)를 터득하여 전서는 물론 행서와 초서에 응용하였다. 그러나 창작은 물론 임서에서도 자형과 결구(結構)의 외형보다는 필획의 기운과 내면의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부려집>에 의하면 그는 65세 때 새긴 <석고문>의 발문(跋文)에서 “予學篆, 臨石鼓數十載, 從此一日有一之境界. 惟其中古茂雄秀之氣, 今尙不能窺其一二.”(내가 전서를 배움에 <석고문>을 수십 번 임서한 이후부터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경지에 올랐다. 오직 그 가운데 예스럽고 웅장하며 빼어난 기운 가운데 한두 가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다 볼 수가 없다.)라 하여 <석고문>에 심취한 이후 나날이 새롭게 발전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렀어도 필획과 결구의 정신을 다 찾아내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다. 해서(楷書)는 종요(宗要)와 구양순(歐陽詢)을 배워 단아하면서도 질박한 맛을 표현하였고 행서(行書)는 왕탁(王鐸)과 미불(米芾)을 배웠으나 후에 전서의 필의를 융합하여 자신의 서풍을 개척하였다. 초서(草書) 또한 전산(傳山)과 왕탁의 광초(狂草)에 전서의 필획 기운을 응용하여 종세(縱勢)의 흐름이 많은 서풍을 창작하였다.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도 전서와 행초가 가장 많으며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마종곽(馬宗霍)은 <처악루필담(霋嶽樓筆談)>에서 “缶廬寫石鼓, 以其畵梅之法爲之, 縱挻橫張, 了無含畜. 村氣滿紙, 篆法掃地盡矣.”(오창석은 <석고문>을 쓸 때 매화를 그리는 법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로와 세로로 늘어져 함축미가 없다. 촌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며 전서의 법칙을 싹 쓸어버린 것과 같다.)라 하여 전서의 필획이 가지는 함축성이 부족하고 전서의 법칙이 없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평가도 역설적으로 보면 오창석의 서예는 필법은 물론 결구에서도 고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서예 작품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대단히 많지만, 위작(僞作)도 적지 않다. 그의 초기와 만년의 대표작은, 각기 상해의 서령인사 간행의 <고철쇄금>과 상무인서관 간행의 <부려근묵> 1, 2집에 실려 있다.
3) 畵
오창석은 작화에 있어서 새로운 창조를 중히 여겼지만, 모방도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법(法)을 취하되 높은 것을 요(要)함’으로서다. 그래서 그는 청등(淸藤), 설개(雪个), 청상(淸湘), 석전(石田), 백양(白陽) 등의 여러 대가를 극히 존경하였고, 그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음을 집중하여 임모하여, 그들의 정화를 섭취하는 데 힘썼다. 그는 다시 근세 저가들의 장점을 융합하여 형식은 버리고 그 정신을 취해서, 창조혁신을 더해 가지고, 단련된 간결한 필묵으로 심원한 경지를 나타내어 풍부한 사상과 감정을 여기에 집중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필묵(筆墨)이 향하는 대로 성법(成法)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기에는 조잡한 듯하나 안으로는 혼후(渾厚)를 머금어 허실상생(虛失相生)을 이루었다. 제멋대로 그린 듯하되 잘 간동그려, 성긴 데는 말이라도 달릴 것 같고, 촘촘한 데는 바늘도 들이밀 수 없는, 그야말로 ‘대허(大虛)에 착안하고 소심(小心)으로 수습함’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으로는 梅, 竹, 松, 菊, 연꽃, 水仙, 蘭, 牧丹, 紫藤을 비롯하여, 그 밖에 들꽃과 오이 같은 것도 많으며, 때로는 산수며 佛像, 그리고 人物도 그리고 있다. 그의 용묵설색(用墨設色)은 질감이 풍부하고 濃淡의 수운(水暈)이 각기 알맞게 조절되어 있다. 그 목적은 물체에 내재한 기질과 생명력을 표현하여, 형사(形似)를 뛰어넘어 신운(神韻)을 전하고, 고도한 예술을 형수(亨受)시키는 데 있다.
3. 서예사적 가치
그가 타계한 지도 어느덧 50여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세계의 많은 예술 애호가들에게 자양을 안겨 주고 있다. 그가 평생에 심혈을 기울였던 서화(書畵)며 금석(金石), 시문(詩文)들이 고귀한 예술 유산으로 남겨져서 후인들의 모범으로 쓸모있게 된 것을 그는 지하에서라도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으로서 오창석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은 민영익(閔泳翊)이다. 민영익은 국내 정치 생활에서 떠나 대륙에 망명하게 되자, 주로 상해, 소주에 머물면서 오창석의 예술을 흠모하였고 또 오창석은 민영익이 나라의 친척이기 때문에 그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래서 오창석의 예술은 그대로 민영익의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고, 또 이것이 직접적으로 우리나라에까지 도입 전파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을 바롯한 동양과 서양에서도 관심을 쏟고 있는 그의 예술성은. 강인한 의지로 각고면여(刻苦勉勵)한 위에 널리 여러 선인(先人)과 동료들의 장점을 취하여 얻은 견고한 기초 위에서, 대담한 창조를 행하여 최미(最美)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결과지만, 그 예술성은 그를 흠모하고 외경하는 후인(後人)들이 있는 한 꺼지지 않고 영원히 아름답고 현란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을 것이다.
4. 참고서적
中國書藝의 理解 - 圓光大學校出版局
中國書人傳 - 云林筆房
吳昌碩 - 悅話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