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오재길의 자녀교육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칠닥이가 자신의 경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하이고 우리는 뭐 가정교육이란 게 없었니더. 아부지가 거 일제 때부터 포목 난전장사로 기반을 잡아 고물상을 이어 지면서 그저 장사치로 돈 좀 버셨고, 어무이는 그런 부자양반에게 아들을 생산하러 팔려간 씨받이 소녀였지요. 부모님 두 분 다 번듯한 교육을 받은 적 없는지라 자식교육이라는 게 없었지요. 내가, 내가 어무이한테 맞는 것 보다 싫었던 게 뭔지 아니껴?”
오원장과 성권사는 관심 있는 표정으로 칠닥이를 지켜본다.
“우리 어무이는 늘 그랬어요. 아이들을 때리지는 않았지만 욕을 했지요. ‘ 요 망할 놈의 자식아!’ 하고요. 매번 망할 놈의 자식, 망할 놈! 했쓰이 내가 어떻게 됐겠습니까? 뭘 하면 망하기만 하는 거요. 어무이가 망할 거라 했쓰이 한 번도 성공해 보지 못하고 쭉 망하기만 한기라요.”
오원장과 성권사는 폭소를 터트렸다.
<농사 농법>
수타이너 농법
반장은 전화기에 대고 심하게 다그쳤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어는 왜 나오기로 하고는 안 나오느냐 그 일이란 금방 끝닐 수 있는 건데 그것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키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요즘사람들이 유기농을 특별한 농법으로만 생각하고 그 조차도 상업적으로 계산한 거지요. 오재길선생의 가르침은 애국, 애천 하늘의 뜻에 따르고 민중에게 이로운 그런 농사라 생각하는데, 김사장네 농사는 인부를 고용하고 능력이 못한 자는 제외시키고 그러니 순박한 시골 할머니가 저렇게 날카롭게 사나워진 거라 생각해요.”
그런 말을 하면서 칠닥이는 덧붙이는 생각이 있었다. 선생의 애국 애천의 농사에 있어서 애국이라는 개념은 현세에 수구세력들이 입에 바르게 외쳐대는 정권수호의 미화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칠닥이의 그런 뜻 깊은 발언에 성권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말로 되받았다.
“대정에서 유기농사하는 그 분도 오재길선생처럼 농사지으라면 가능치도 않다 그랬어요. 아버지는 공부하고 강의 다니고 그러시기만 했지. 직접 손수 흙을 만지신 건, 유기 농사하던 전이었어요. 우리 보고야 맨 돈 생각하지마라 그러셨지만 현실이 어디 그래요? 약 안 치고 풀 맬 생각해 봐요 끝이 없는데다가 가능치도 않는....”
칠닥이는 말문이 탁 막혔다. 이렇게 초현실적인 현실에 자신이 반하는 숭고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오재식박사>
바다가 보이는 표선 앞바다 카페에서 칠닥은 할아버지에게 오재식박사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 분이 누군지 아시니껴?”
“내 동생이오.”
무심한 듯한 것 같으면서 이어지는 말이,
“대학을 두 개나 했소.” 하심은 적잖은 자부심이 실려 있었다.
방계성목사는 추자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얻은 큰 소득이 오재길, 오재식 형제를 만난 것이라 했다.
아버지 오전태, 어머니 김길성 사이에 칠남매의 차남인 오재길과는 13살이나 어린 오재식은 1932년 출생이다.
그는 서울대 종교학과와 미국 예일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일찍이 중학교 재학 시에 오재길의 스승인 함석헌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대학시절에는 강원룡목사를 만나 기독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오재식은 2013년 향년 81세 대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과 제3국장에 올라 제3세계 개발원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북한문제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높아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장과 참여연대 창립대표를 맡으면서 박원순변호사와 함께 이 나라의 가장 강력한 시민단체를 만들어 냈다. 1997년 월드비전 회장에 취임하여 북한을 비롯한 지구촌 빈곤지역을 누볐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앞장서와 ‘한국 에큐메니칼(교회일치)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회고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은 소천 일 년 전 80세에 출간한 저서이다.
<방인성목사>
방계성목사의 둘째 아들 방정원목사는 작은 교회, 시골교회, 재건교회에서 평생 사역을 하였다. 방정원목사의 아들이며 방계성목사의 손자인 방인성목사는 교회개혁운동에 선두에 있는 인물이다.
방인성은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여 2005년 서울 창신동의 성터교회에서 50의 나이에 시무를 맡는다. 대표적인 보수교단의 교회에서 방인성목사는 당회에서 당회장자리를 목사와 장로가 윤번제로 맡도록 체제로 바꿨다. 교회민주화를 시행하는 한 방법이었다. 이를 교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교단이 압력을 가해지자 방목사는 2008년 1월 사임해 버린다. 이듬해 함께여는교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교회민주주의에 앞장서며 같은 해 인터넷신문 뉴수앤조이를 발행한다. 자신의 한 쪽 신장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떼 주기도 한 방목사는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조용기목사를 횡령과 배임의 고발하기도 하는가 하면 그를 직접 만나 약속이행을 다짐 받기고 하였다. 청년시절부터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남북한 교류문제로 당시 이재정 통일원 장관을 만나기도 하였다. 20014년에는 김홍술목사와 함께 세월호사고 문제로 40 여 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단식해단 예배에서 호소를 했다.
"예전에 투쟁하던 방법 다 내려놓고, 순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유명 인사들을 의지할 것도 없고 우리 국민·민중이 일어나야 합니다. 맘몬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지만 우렁찬 목소리였다.
방인성목사는 경기도 양평에 개신교 생활공동체인 평화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남북평화와 통일에 관심 있는 젊은 부부들이 함께 사는 마을공동체를 꾸리는 일이다. 교회 집사로부터 기증받은 경기도 양평군 신복리 1000 평가량의 대지에 마련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로서 내 근본적인 소명은 평화다. 청년 시절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평화라고 생각했다. 남북통일도 그렇고, 우리 안의 갈등도 그렇고, 차이를 넘어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는 게 내 목회의 관심이다. 할아버지가 한국 개신교 초창기 지도자 중 한 분인 방계성 목사다. 조부는 일제 치하 신사 참배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렀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를 도왔다. 해방 후 강단에 인공기를 내걸라는 북한군의 지시를 무시했다가 총살당하셨다.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일어난 일이다. 이런 비극은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 성경의 복음이 원수를 품어 안고 평화를 이뤄낼 수 있는 힘이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고, 통일에 대해 관심 갖게 된 것 같다.”
<오중신원장>
오중신은 오재길농부의 둘째 아들이다.
오중신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중학교를 거쳐 거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거창고등학교는 1953년에 세워진 기독교 이념에 따른 전인교육기관이다. 학생 수를 정예화한 이 학교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정서교육과 지식교육을 해 온 일찍이 대안학교의 모델 된 학교이다. 그는 한 살 터울의 그의 형과는 달리 스스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함석헌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아버지 오재길의 평생농부를 결심한데에 대한 집안형편을 고려한 것이다. 아버지의 농장일을 돕던 중신은 소의 인공수정하기 위해 방문하는 수의사를 보고 경비절감의 차원에서 인공수정사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여 축산협동조합에 취업을 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는데 그는 기독교 집안의 딴 식구와는 달리 술도 하고 담배도 즐겼다. 이점에 대해 아내가 된 성권사가 실망도 하게 된다.
오원장은 칠닥이가 만나거나 들어 온 오재길 가계의 인물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며 배짱이 컸으며 다소 집안 분위기에서는 이단아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원장님은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분이지. 한 번은 급한 서류라고 우체국에 가서 빠른 등기로 부쳐달라고 부탁하기에 그렇게 했거든, 그런데 며칠 후 똑같은 부탁을 또 하는 거야. 그러면서 자신이 민망했던가. ‘ 아, 전 번에 것은 내용물을 넣지 않고 봉투만 보내지 않았겠어.’ 하시더라고.” 칠닥이는 그렇게 말했다.
“어릴 때 동네사람들은 둘째가 형인지 알았어요. 제 형을 자전거에 태워서 뒤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모든 행동거지가 형을 보호해 주는 모습이었지요.”
어머니 방권사의 말로 형의 형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나 아버지 오재길은 늘 냉정하였다.
축협에 근무하는 중신을 그만 두게 하고 농장 일을 하게 하였다. 결혼을 시킨 일 년 후에 평택에 있는 제일동포의 농장에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중신부부는 빈손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오재길은 자신의 농사가 어려워지면 아들을 다시 부르고는 하였다. 제주도에서 재단법인 농장을 하면서 처음에는 아들에게 공익재산에 대한 사심이 생길까봐 배제를 하다가 자신이 노령에 접어들고 농장을 운영할 사람이 없어지자 당진에서 터를 잡고 농장을 하고 있는 그 아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오중신은 가라 그러면 갔고 오라면 왔다. 이점에 대해서 부인 성권사는 시아버지에게는 못내 섭섭하고 억울하기까지 하였다. 그녀는 언제고 당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늘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방권사>
<성인순권사>
“솔직히 집안에 돈이 있었으면 결혼을 달리 결정할 수도 있었지요. 오빠의 사업실패로 여고 졸업반이 되도록 등록금을 못 내서 졸업식에 오지마라 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집은 땅도 많고 과수원도 있고 목장도 한데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아버님께서 부르시더니 봉투 하나를 내 놓는 거예요. 그냥 용돈이다 하면서 그 자리에서 각인을 시키는 것이 농장의 모든 땅은 자식에게 줄 것은 단 한 평도 없다는 거지요. 모두가 공적인 재산이라며. 몇 년을 농장에서 일꾼으로 봉사를 해도 아버지는 보답이 없었어요. 그래서는 안 된다며, 아주버님이 주장해서 약간을 챙겨 받기는 했을 뿐이지요.”
성권사는 제주도가 경치 좋고 공기 좋다는 자연적인 여건보다도 종교적인 삶의 조건에 아쉬워했다. 교회는 멀었고 교우관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택시를 타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외딴 곳의 교통이 불편함도 그녀에게 회의를 부르게 한다. 성권사는 때때로 칠닥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시내라도 나가게 되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한 사람으로서 여자로서 방권사나 성권사는 오재길선생의 업적에 있어서 희생된 부분이 있다고 하겠다. 성권사의 심정을 방권사는 잘 알 터이다. 그래서 늘 며느리를 다독거림을 보여 주었다.
<추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