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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군을 믿어도 될까
동해시 부곡동의 금강산건강랜드는 내가 이용한 팔도의 대중찜질방 중에서 늙은이에게
가장 호의적인 2곳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서남동길 금강하굿둑(충남 서천)의 금강웰빙타운인데 공교롭게도 이름도
같은 금강(뜻은 다르지만) 두 글자가 포함되어 있다.
딴 데에 비해 우대할인이 파격적인 점보다 늙은이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손꼽는 이유다.
묵호항쪽으로 다시 나온 시각은 아침 7시 30분경.
인접한 북평항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대규모의 석탄과 시멘트 반출용 산업항이었기
때문인지 동해지만 청결한 이미지는 없었으며 그런 분위기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동해안의 어업기지항 또는 피난항의 역할과는 별도로.
울릉도 여객선이 운항중에 있으나 인기있는 항로가 되지 못하는 듯 한가롭다.
해양경찰(Korea Coast Guard)전용부두가 있고 함정들이 정박중이기 때문인지 경계도
까다로워 접근을 포기하고 동해항길 묵호대교를 건넜다.
묵호항~삼척은 4년전 평해대로 때와 그 전 동해종주자 격려차 함께 걸었던 길이다.
포장된 너른 해변길(향로봉길?)에 조성되어 있는 인도를 따라서 묵호역 남쪽 부곡동의
묵호항역을 지났다.
하평해변을 지나면 가세해변이다.
가세쉼터에서 고불개해변, 어촌정주어항 천곡항, 한섬, 감추 2 해변과 감추사에 이르는
송림과 꽃길 해안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감추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의 딸(공주)이 병을 고치려고 감추해안에 와서 가료, 완치
된 곳에 지은 절이란다.
옛 사찰은 공주가 기도드린 석굴 흔적뿐이고 지금의 절은 1902년에 신축했단다.
신라의 세 여왕중 마지막인 진성여왕(眞聖)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혜성대왕(惠成)으로 추봉한 남편 위홍(魏弘)이 부왕(48대경문왕)의
동생이므로 숙부가 남편이다.(근친혼이 다반사였다니까 그럴 수도 있다)
위홍의 사후에 황음(荒淫) 방탕,사치가 극에 달해 나라가 어수선했으며 그 시기에 이복
동생 궁예(弓裔)가 등장했고 견원(甄萱)이 후백제를 일으켰다.
권제이(卷第二)-기이제이紀異第二)의 '진성여대왕과 거타지'편을 보면 "臨朝有年 乳母
鳧好夫人 與其夫魏弘匝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贓蜂起.(임조유년 유모부호부인 여기
부위홍잡간등삼사총신 천권요정 도적봉기/왕이 된지 몇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남편
위홍잡간 등 삼, 사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맘대로 휘둘러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내우가 극에 달해가고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아들들이 있으나 조카(49대 헌강왕의 아들)에게 손위(遜位)하였으며
딸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셋째딸이 감추에 와서 투병했다고?
우리나라의 현 대통령은 여자다.
그녀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지지자들은 이 시대의 선덕여왕이라고 띄우며 아버지에
이어 제2의 박비어천가(朴飛御天歌)를 불러대고 있다.
그러나 이즘의 인터넷에는 선덕여왕이 아니라 진성여왕이라는 글이 나돌고 있다.
그녀는 과연 선덕여왕일까 진성여왕일까.
이 늙은이 눈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패션쇼장의 늙은 모델로 보일 뿐인데.
동해시의 다운타운과 바다를 오른쪽과 왼쪽에 끼고 가는 잘 가꿔진 산책로.
영동선 철길과 나란히 감추사를 지났다.
해군동해체력단련장 직전까지도 계속되는 길.
참으로 감칠맛나고 신명나게 걷게 하는 길이다.
체력은 곧 국력이다.
적과 싸워 승리하려면 강력한 체력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단련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해군제1함대사령부의 체력단련장은 해안에 자리한 전용골프장인 듯.
초원을 라운딩 중인 그림같은 모습의 선남들이 험하고 거센 바다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체력을 단련중인가.
군인이 골프를 통해서 체력을 단련한다?
골프체력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골프장과 이웃해 즐비한 고층해군아파트 도로변(용정삼거리)에 유허비(遺虛碑)가 있다.
이조 말엽부터 1c에 걸친 마을이며 70여년간 살아온 주민들이 가족을 대동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보금자리를 해군장병체력단련장 용지로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며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용정동(龍井洞) 5개 해안마을 주민들의 향수가 담겨있는 비(碑)다.
대승적 결단이었겠지만 군인들 골프 삼매경에 빠지라고 집 비워준 꼴이며 이 군인들이
우리의 아들들이라는데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어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 군인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서-남-동길에서 천안함 부대인 해군제2함대사령부를 견학한(2012년 5월 3일) 후 나는
심각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으며 어쩌면 절망적인지도 모른다(본란12번글 참조)
제2함대와 제1함대는 다를까.
"동해수호 전통 반드시 이어가겠습니다"
'해군제1함대사령부' 이름의 플래카드가 부대 담장에 걸려있으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
서해의 2함대사령부에도 걸려있는 다짐이니까.
해군만 그런가.
육군도 공군도 신뢰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현실은 "중이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만 탐내고 있다"는 속말부터 떠오르게 하고 있다.
군과 관련된 모든 조직이 하나같이 조국 수호는 말로 할뿐 뒷전이고 권력이라는 잿밥만
탐내고 있지 않은가.
"38도선에서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 이라고
호언하던 자들이 해바라기성 국군 수뇌부였다.
무기도, 전력도, 싸움방식도 전혀 달라진 현실이지만 걸핏하면 타도와 섬멸을 부르짓는
자들이 그 때와 하도 닮아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5일장마당은 N-E-W-S의 최대 유통장
음울한 기분으로 해군부대 지역을 벗어났다.
송정삼거리를 지나 송정동 도로변의 괴이쩍은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松羅亭(송라정), 花浪亭(화랑정) 두 개의 현판이 붙어있는 정자다.
번화롭고 공단지역이 된 이 마을의 옛 이름이 솔난데(松生處)에서 솔밭마을(松田村),
소나무가 아름다운 마을(松羅汀 松羅亭)이었다는데 화랑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꽃이 물결치는(花浪) 것 처럼 보였던가.
동해항사거리에서 전천 하류인 북평교를 건넜다.
전천은 백두대간 두타, 청옥산에서 발원해 무릉계곡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며
동해항은 옛 북평항이 탈바꿈한 우리나라 굴지의 무역항이다.
삼화동 무릉계곡 입구에 위치한 단일규모로는 세계 최대라는 쌍용시멘트 생산공장에서
생산되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온 시멘트를 반출하던 작은 산업항이었는데.
천연항이 아니고 인공굴입항(人工掘入港)의 입지조건에도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와
사카이미나토(境港/일본)의 국제여객선 항로가 있는 국제항으로 발전했다.
삼척군 북평읍의 중심지였던 북평동(北坪)이 마침 장날.(3, 8일)
5일장은 여전히 인근 각지 가가호호의 세세한 소식의 유통장이다.
장마당을 배회해 보면 영어 'NEWS'(소식)가 아주 잘 만들어진 단어라 생각하게 된다.
North-East-West-South(북동서남/동서남북)을 한데 모으면 최고의 소식이 되니까.
그래서 5일장마당에서는 식당, 난전 가릴 것 없이 두 귀(耳)를 열고 있으면 시간이 가고
있음을 망각하게 된다.
간단하게 몇마디 나누기도 하지만 뭔가를 나눠 먹으며 소식을 주고 받는다.
막걸리나 소주잔을 나눌 정도가 되면 조금 진지한 사이다.
회포가 왜 그리도 많은지 식당이 바글거린다.
유선전화는 물론 2G폰도 고믈이 되었고 스마트폰으로 모든 소식을 즉시적, 동시적으로
교환하면서도 만나고 싶고 만나면 할 말이 많은가.
시골의 5일장도 씀씀이 통이 커졌나 음식점 메뉴들이 서울을 기죽인다.
그래도 통큰 손님들이 몰려든다.
고작, 백반 또는 해장국 정도인 서울나그네와는 판이 다르다.
해장국 먹은 늙은이에게 준 후식 냉식혜가 하도 꿀맛이라 한컵 더 달라 했는데 선선히
더 많이 따라주는 주인녀의 인심이 손님을 끄는 인력이리라.
동해비경제6경이라는 만경대(萬景臺)가 전천 하구에 있다.
이조15대 광해군5년(1613)에 첨정(僉正/각부서의종4품)이었던 이곳 출신 관원 김훈이
은퇴하여 지은 누정이란다.
당상에 감히 오르지 못하는 당하관(堂下官)으로 현재 직제로는 서기관급에 불과하건만
누정을 짓고 신선처럼 살았으니 민초들의 신고가 얼마나 심했을까.
경포호반에도 종사품무반외관직이 세웠다는 방해정이 있는데.
해군제1함대사령부 이후 추암으로 가는 해변은 계속해서 막힌다.
SK에너지 동해물류센터와 동해화력, 동해자유무역지역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에 가장 근접한 공단1로를 따라서 추암지역에 도착해 관광안내소에 배낭을 맡기고
일대를 살피러 나섰다.
용추(龍湫)에 기이한 바위가 있다 해서 추암(湫岩)이라 했다는 곳.
가다오다 많이 들렀지만 보고 또 보아도 매력적이고 신비스런 기기묘묘한 바위들이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이름지었다는 동해시 제1경 능파대(凌波臺) 촛대바위와
삼형제바위 등등.
이조500년에 걸쳐 모사꾼,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7삭동이 한명회의 눈에는 미인의
걸음걸이처럼 보였던가.
인큐베이터(incubator)가 없던 당시에 7삭동이가 어떻게 살아났을까.
능파대 앞에 설 때마다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는 버릇이 있다.
그가 살아나지 못했다면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사육신(死六臣)이 없었을 것이다.
남이(南怡)의 옥사도,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조의 왕조실록과 역사는 많이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택당 이식도 이곳을 다녀갔는지 시(능파대)를 남겼는데 송강 정철의 흔적은 없다.
경관(景觀) 편식가였나.
광화문, 경복궁, 숭례문의 정동방에 이어 추암해변은 남한산성의 정동방이란다.
남한산성이 여염집 담벼락 정도로 짐작되는가.
고려31대 공민왕(恭愍王/1330~1374) 때 집현전 제학이었던 심동로(沈東老)가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지었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제63호 해암정(海巖亭)도 있다.
삼척심씨의 시조인 그는 후학양성을 위해 이 누정을 건립했단다.
조금 전에 들러서 온 만경대와는 대조되는 건물이다.
관광객을 위한 조각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지자체들이 조각공원이 없으면 예술 불모지로 하대받을까 두려워하고 있는가.
조각공원도 지자체를 휩쓸고 있는 열풍중 하나일 것이다.
지자체의 예산으로 비중있는 중견조각가의 작품을 진열할 수 있을까.
저질 양산의 장으로 전락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수로부인 설화의 메시지는?
관광안내소의 50대(?)여직원(이명숙?)은 명랑형(明朗型)이다.
볼거리를 늘리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외형보다 내실에 충실하기를 권하며 관광안내소를
나온 후 추암해변에서 증산해변으로 넘어갔다.
동해시가 끝나고 삼척시가 시작된 것.
경계표지나 지경마을은 없으나 추암과 증산은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다.
1980년 이전에는 동해시는 아예 없고 북평과 묵호 사이가 삼척과 강릉의 경계였으므로
지경이 있을 리 없다.
마을 주위의 산세가 시루(甑)처럼 보여서 시루뫼(甑山)라 했다는 마을의 해수욕장.
옆 동산은 이사부사자공원이다.
"신라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이어받은 가족형 테마공원"이란다.
주문진해수욕장에는 이사부장군의 우산국(울릉도,독도) 복속 1500년(2012년)기념비를
세워 청소년에게 이사부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는데 삼척에는 돈벌이 공원이다.
삼척시의 연간 수입에 관광지 입장료의 비중을 나는 모른다.
다만, 삼척시의 관광지 입장료 단가는 타지자체에 비해 월등히 높다.
장기적 전략으로 볼 때 박리다매(薄利多賣)와 박매다리(薄賣多利), 어느 쪽이 유리할까.
그보다, 지자체들이 시행하고 있는 지역민 할인혜택을 외지인 할인으로 바꾸면 어떨까.
고장의 주민은 지역발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원로의 방문객에게 특혜를 준다면
충격적인 감동을 함께 줄 텐데.
지역민 특혜는 외래객에게는 바가지 쓰는 기분을 준다.
서울의 유료관광지 입장에 서울시민 특혜가 주어진다면 지방민들은 서울시 당국자들을
매도할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한 이유다.
해안의 수로부인공원(水路夫人)에서 잠시 쉬었다.
삼국유사 권제이(卷第二) -기이제이(紀異第二)에 있는 '수로부인'의 해가(海歌) 설화를
토대로 하여 복원했다는 해가사 터가 있다.
공원내의 '해가사의 터'는 '해가의 터'가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해가사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해가를 불렀으며 해가사란 해가의 가사를 뜻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33대 성덕왕(聖德王)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명주)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을 때 부인 수로가 바닷가 천길 바위벽에 피어있는 철쭉꽃에 반해
"저 꽃을 꺾어 내게 바칠 자 없는가?"
"거기는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이라며 종자들(從者)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꽃을 꺾어 가사(歌詞)를 지어 함께 바쳤다.
사건은 이틀 후에 일어났다.
해변 정자(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홀연히 용이 바다에서 나타나더니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버린 것.
어처구니없는 한 순간의 변고에 남편 순정은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한 노인이 또 나타나 말했다.
"故人有言 衆口鑠金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以杖打岸 則可
見夫人矣(고인유언 중구삭금 금해중방생 하불외중구호 이진계내민 작가창지 이장타안
즉가견부인이/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하였거늘 바다짐승인들 여러 입을 두려워
하지 않겠는가.당장 경내 백성을 불러 노래를 지어 부르며 몽둥이로 강언덕을 두들기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이요"
노인의 말대로 한 결과 용이 바다에서 부인을 모시고 나와 바쳤는데 이 때 부른 노래가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남의 부인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 (여약패역불출헌/네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는 해가(海歌)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문헌상 삼척해변의 와우산 끝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단다.
"紫布岩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고삐 놓게 하시고)
吾肹不喩慙肹伊賜等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친 가사다.
수로부인의 절세의 미모는 노인의 혼을 빼앗기도 했지만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려 가는
곤욕을 자주 겪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절세 미녀를 아내로 맞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되는가.
새천년도로와 소망의 종
해안길은 수로부인공원에서 삼척해변역을 지나 삼척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후진역 후진해변이었다.
옛 동헌을 기준해서 볼 때 뒤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뒷나루'라 했으며 후진(後津)은
한자표기일 뿐이지만 후진곳이라는 속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었다.
들르거나 지나칠 때마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하필 후진이냐" 고 멘트했는데 어느 땐가
삼척으로 바뀌었다.
1km가 넘게 길고 넓은 폭 백사장을 가진 삼척해수욕장에는 코스별로 여러 이름이 붙은
테마타운길이 조성되어 있다.
데크를 깔고 새로 조림(造林)을 하고 편의시설을 확충하는 등 공을 많이 들이고 있으며
적잖이 성공적인 것 같다.
그러나,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력(引力)을 발산하지 못하면 미시적 성공일 뿐이다.
내적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천혜의 자연도 편리한 시설도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자체들과 지역주민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삼척해변에서 옛 이름이 살아있는 곳, 어촌정주어항 후진항과 작은후진해변, 삼척항에
이르는 4.6km해안길은 '새천년도로'라는 이름의 신설 해안로다.
새천년 이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해안로들이 속속 건설되어 동해안에도 미구에
단절 없는 해안도로가 완성되리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만 보배인 것을 어찌 하겠는가.
자연 경관의 훼손이 안타깝지만 큰 이익을 위해서는 작은 손해를 감수할 수 밖에.
종적이 묘연했던 길들 중에 해파랑길이 등장한 새천년해안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해안길에는 과욕이 빚은 아쉬움과 데크 인도에 대한 불만이 있기는
해도, 아름다운길 100선 선정과 관계없이 긍정적인 길이다.
추암에서 10리도 못되는 해변에 지자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또 조각공원이 있다.
어줍잖은 조각품 보다 차라리 수석(壽石) 또는 목석공원이면 어떨까.
신기하고 오묘한 돌이 많은 강원도 땅 아닌가.
작은 어항에 다름 아닌 낚시터도 조성되어 있다.
TTP방파제를 만들어 안온하고 차량의 출입과 주차가 가능한 낚시터다.
도로 밑으로 긴 회랑을 만들어 조사들을 흡족하게 할만한 곳이다.
낚시와 무관한 늙은 길손에게도 맘에 드는 분위기니까.
해안로 된비알 쪽을 성축한 너른 광장에 탑을 세우고 작은 종도 매달았다.
소망의 탑이며 소망의 종이란다.
"소망의 문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며 종을 3번 치고 소원을 빌면 소망이 이루어진다
는 신비의 종"이라는데 맨손으로 치라는 것인가.
시도때도 없이 종을 쳐대기 때문에 추를 아예 떼어버린 것인가 추가 없는 종이다.
한데, 왜 3번을 쳐야 하는가.
종로 보신각 제야의 종은 33번 친다.
옛날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5경(새벽4시)의 33번 타종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이 33번 타종이 불교에 뿌리 둔 것이라니까 숭유억불이라 했으나 불교를 등지지 못한
이조였으며 왕과 왕족의 치병과 사찰의 관계가 그러했고 성균관 서생들까지도 그랬다.
성균관 서생들이 상소할 때도 33명을 뽑아 보냄으로써 전체 의사임을 표방하였다니까.
총의를 표현하는 완전수가 33인인 것은 기미독립선언 대표에 이르기 까지 총체적이다.
홍익인간을 표방하는 천도교의 33천 역시 33번 타종에 의미부여를 했다지만.
3이라는 숫자는 양의 동서와 종교를 망라하여 완전수로 각인되어 있다.
해(日), 달(月), 별(星)은 3광(光)이고 천(天), 지(地), 인(人)은 3재(才), 지(智), 인(仁),
용(勇) 또는 기독교의 믿음, 소망, 사랑과 불교의 법신(法身), 반야(般若), 해탈(解脫)은
3덕(德), 귀(耳), 눈(目), 입(口) 또는 불교의 불(佛), 법(法), 승(僧)은 삼보(寶)라 한다.
삼위일체와 3일만에 부활 등 3에 근거하여 신, 구약성서에 제3성서의 당위를 주장하는
기독교 종파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삼척 소망의 종도 이에 근거하여 3번 치라 하는가.
팰리스관광호텔 뒤에 있는 봉황산의 정자들을 눈요기 시켜주는 길을 따라 돌고 돈다.
봉황산은 봉황(鳳凰)이 비상하는 형국으로 명당임을 간파한 일제가 봉황의 비상을 막기
위해 양 날개에 해당하는 지점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삼척의 안산(案山)이다.
이사부쉼터에서는 낮 시간이라면 갈 길 관계없이 마냥 쉬련만 이미 해가 사라진 5시 반.
이사부광장, 횟집거리를 거쳐 무역항이 된 삼척항을 지났다.
다음 행선지는 삼척부사 허목(1595~1682)이 세웠다는 척주동해비(三陟陟州東海碑)와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 삼척포진성(浦鎭城)과 미수 허목(眉叟 許穆) 유적지.
일명 퇴조비(退潮碑)인 척주동해비는 조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세웠으며 평수토찬비는
임금의 은총과 수령의 치적을 자찬한 글이라는데 육향산(六香山)에 오르기를 포기했다.
비들이 있는 곳인데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허목의 사당인 미수사(眉叟祠)를 담 너머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밤이 된 시간에 삼척의 단골인 천지연으로 갔으나 찜질방은 스크린 골프장으로 변했다.
불경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폐업했단다.
미리 알았더라면 꽤 먼 거리를 걷지 않고 새천년도로의 한 정자를 골랐을 텐데.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식사도 하고 정자 있는 곳도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지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곳(삼척)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전남산(産/광주?) 식당(용주골
순대) 주인의 자상한 안내와 빈 박스 제공으로 삼척의 밤도 무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밤이 지나면 2박 3일의 길이 남을 뿐이지만 삼척의 남은 길(울진경계까지)이
관동길에서 가장 무거운 길이기 때문에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해안선이 긴데다 단절구간이 많고 이 구간에서는 예외 없이 높고 긴 재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