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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에도 수문장이 있다(소설)
1.
신 명예 권사(권사가 되지 못해 교회에서 예우해서 권사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는 조카딸 신보라가 자기 발로 교회에 나와 준 것이 너무 신기하고 고마웠다.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자기만 어쩌다가 교회에 늦게 나와 열심히 다녔으나, 권사 투표 때마다 낙방하여 나이 들어 교회에서 명예 권사라는 명칭을 받았는데, 자기는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마치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것인 양 누가 자기를 권사라고 부르면 조롱하는 것처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자기 손으로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보라가 제 발로 교회에 나와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신 권사는 보라에게 교회에 나와 주어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았지만, 혹 그 애가 마음이 변해 교회를 안 나올까 봐 눈치만 보고 교회 출석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주 동안 꾸준히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고 드디어 용기를 가지고 교회 카페에 그녀를 불러 마주 앉았다.
“어때, 교회를 나와 보니 다닐만해?”
“좀 어색하지만, 사촌오빠 때문에 나온 거니까 열심히 다녀보려고 해요. 다음 주부터는 목사님이 인도하는 새 가족 확신 반에도 나가기로 했어요.”
사촌오빠란 대학을 나오고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자기 아들 병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보라의 아버지인 신 권사의 오빠는 뒤늦게 발견된 췌장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말기가 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병수는 거의 매일 병실을 찾든지, 아니면 전화 기도로 외숙이 하나님을 믿고 작고하기 전 침상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였다. 또 가까이에 있는 은퇴 목사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문병하지 못한 날에는 병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케는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이를 결사반대하였다. 하지만 오빠는 병수의 간절한 기도에 감격해서, 찾아오지 않으면, 스스로 전화로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오빠는 임종 전 세례를 받고 소천하였다. 그 뒤로 보라는 교회를 찾게 된 것이다. 신 권사는 보라가 자기처럼 부끄러운 권사가 되지 않고, 잘 믿고 인정받는 교인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기 친구들이 “너는 그렇게 오래 믿고 권사도 못 됐냐?”라는 말이 너무 듣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보라야, 너는 정말 바르게 믿고 구원받아라. 네가 알아 둘 것은 교회는 이 세상과 다른 성스러운 또 하나의 사회란다.”
“고모 그게 무슨 소리야?”
“교회는 세상과는 가치관이 전혀 달라. 말, 행동, 생각이 다르다는 이야기야. 여기서는 공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주일이라고 불러야 해. 주일이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이야.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이었거든.”
“그럼 나는 이 세상에서 온 이방인이네.”
“그렇지.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딴 세계에 들어온 거야. 천당 가려면 먼저 교인이 되어야 하고, 교인이 되려면 교회에 나와야 하는데 그 첫 관문은 주일성수이야.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이야.”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지키는 건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하면 돼. 그냥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거야. 성경에는 일주일 중 하루를 거룩하게 성별(聖別)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날을 쉬게 하라고 했어. 그래서 교인들은 옛날에도 주일에는 장사하지 않았어. ‘육일 양복점’이라고 주일에 장사를 안 하는 기도교인이 경영하는 양복점이 있을 정도야. 이제 좀 세상과 교인의 차이점을 알겠어?”
“그래서 예배당에 들어가면 찬송을 부르고 박수하게 해서 예배 전, 잡담을 금하는 거군요.”
“세상은 흙탕물처럼 더러운 곳이야. 그곳의 모든 죄 된 생각을 버리고 정하게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해. 찬양대가 세상의 옷을 감추고 유니폼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한 뒤,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 하게 회중을 넘겨주면, 그때 주의 종이 나와 말씀을 선포하는 거야.”
“목사님은 좀 부담스럽겠어. 모인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그렇게 철저히 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농담도 못 하고 허튼소리도 못 할 게 아니에요?”
“그럼. 목사님은 신학교를 나온 특별한 주의 종이지 않아?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우리는 받아먹고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야.”
“너무 숨 막힐 것 같아. 고모는 어떻게 이런 생활을 해 왔어?”
“좀 더 있어 봐.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너무 편해. 꼭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이 속에 들어와 있으면 천당까지 태워다 주거든. 편하고 기쁘기만 해. 너무 따지지 말고 주일성수만 하면 돼.”
2.
일 년 뒤, 신 권사는 또 보라와 교회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이번에는 보라가 세례를 받은 기념으로 화환을 갖고 있었다.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제 너는 이 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구나.”
“다른 사람은 세례를 받으면 눈물을 흘리고 간증도 하고 하는데, 왜 나는 그런 감격이 없는지 모르겠어.”
“그건 네가 아주 순탄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순종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야. 이상할 건 하나도 없어, 너는 이제 교인이 되는 둘째 관문인 세례를 통과한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받은 딸로 영접해 주실 거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꼭 세례를 받아야 해?”
“그럼.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여러 사람 앞에서 선포해야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는 사랑한다.’라고 공표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결혼식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면서 세례를 받아야 공동의회에서 투표권도 생기며, 기독교 기관에도 세례증으로 취직할 수 있고, 교회에서 장로 권사가 되려고 해도 세례교인이라야 한다고 말했다. 이건 세속적인 정치적 이야기였다.
“고모, 그것은 거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에서 속물같이 살라는 이야기 아니야?”
“지금까지는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지면 핍박을 받아 숨어 살아야 했어. 또 그것이 알려질까 봐 성경을 끼고 다닌 것도 부끄러워했지만, 지금은 당당히 정체성을 들어내고 세상을 기독교 가치관으로 주도해 나갈 때가 된 거야. 너무 숨어 살 필요가 없어. 기독교 정당을 만들다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고모. 나는 목사님의 설교나 교인들의 봉사적인 활동을 볼 때, 기독교가 싫지 않아. 하지만 뭔가 내가 잘못 끌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지금은 시작이어서 네가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교회는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면 아무것도 모르게 돼. 너도 이제 세례를 받았으니 교회 안에 들어와 어떤 부서에 들어가 참여해 봐. 그래야 정말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게 돼. 어때, 교회에는 화요일마다 모이는 중보(仲保)기도 팀이 있는데 하나님과 동행하고 영통(靈通)하는 삶을 살려면 기도밖에는 없어. 너도 거기 들어가 활동해봐. 나도 거기 나가는데.” 이렇게 기도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신 권사는 권유했다.
3.
그렇게 권유를 받은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보라는 중보기도 팀에 들어와 있었다. 고모의 이야기로는 이 기도는 교인이 되는 세 번째 관문이라고 말했다. 이 기도팀에는 온갖 기도 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부부의 불화, 속 썩이는 자녀 문제, 진학, 결혼, 음식점, 유치원 개원, 병실에 입원한 환자, 또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게 해 달라는 기도… 등. 모두 하나님께 기도해서 복 받고 잘되게 해 달라는 기도 부탁이었다. 이 일들은 다만 기도팀원들만 알고 있어야 하며, 이곳은 밖으로 비밀이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대통령 산하의 국가안보실이나 국가정보원 같은 막중한 책임을 갖는 곳 같기도 했다. 때로는 담당 부목사와 함께 가정이나 병원을 심방하기도 하는 일이 있어, 많은 교인의 가정을 찾아 교인들의 숨겨져 있는 삶을 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보라는 중보기도 팀에 있으면서 자기는 너무나 서투른 기도를 하는 것 같아서 그만 빠져나오고 싶었으나, 고모의 강압에 못 이겨 참아내고 있었다. 그 기도팀 회원들은 고급 기도훈련을 받은 사람들처럼 막히지 않게 수십 분씩 기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방언으로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보라에게도 오래 기도하고 있으면, 자연히 방언이 터진다고 다정하게 일러 주는 것이었다. 방언이 아니면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이나, 먼 곳에 있어 연락을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가 아니면 상대방의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방언이 아니면 자기 상상을 따라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계속 기도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팀원들은 다 신들린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자기는 그들과 같은 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수십 번 하는 것이었다. 그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심방 갔을 때 어떤 집에서는 귀신들이 방구석에 우글우글 숨어 있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분명 영안(靈眼)이 뜨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도대체 중보기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를 믿지 않아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혹은 어떤 이유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내가 끼어서 기도를 대신 해주는 사람이 중보자가 아닌가?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일반 회중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사정을 호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어 회중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중보자 노릇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뒤로는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서, 지금은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직접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응답을 받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지금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뿐이다. 그런데 내가 감히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는 말인가? 특히 평신도가 목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자리에 설 자가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도 자기는 중보기도 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라는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면 고모는 말했다.
“중보기도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합심 기도라고 생각하면 돼. 뭐 생각 나름이야. 명칭이 문제야? 성경에도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루게 해주신다고 했잖아? 그냥 모여서 기도하는 거로 생각하면 돼.”
“그런데 교회 속사정들을 알고 나니 교회가 거룩하다는 느낌이 싹 가셨어요. 그냥 교회에 와서 사람들은 보지 말고, 거룩해 보이는 목사님이나 거룩해 보이는 찬양대나 쳐다보고 집에 가는 것이 나에게는 유익할 것 같아.”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치유 받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 찬양하고 감사하며 사는 곳이야. 그런 현장을 보지 않는다면 교회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증인 노릇을 않는 일이야.”
보라는 교육을 받지 않은 고모가 교회에 들어와서 엄청 유식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모, 기도란 무엇이라고 생각해? 나와 내 가족, 내 교인들이 복 받고, 무병장수하며 성공하게 해달라는 그런 복 비는 것이 전부인 거 같아.”
“아니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원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될 천국에 있어. 내세가 없으면 종교가 아니야.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다 죄인이어서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사는 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고 돌아가셔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서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태초의 천국으로 우리를 초청하셔. 의로운 하나님이 심판 주로 오셔서 억울하게 당한 핍박을 갚아주시며, 죄인들은 지옥으로 그리고 우리는 천국으로 인도하셔.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야. 따라서 그런 것도 기도해야 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야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려워. 오늘 야외에 놀러 나가려면 비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운동 경기 때는 우리 백군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거든. 이것은 내 뜻이자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잖아?”
“그렇게 기도해도 돼. 하나님이 알아서 응답해 주시니까. 다만 진심으로 기도하고 싶은 대로 기도해.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없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의 의에 빠진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할 거야. 꼭 이것은 구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되면 그렇게 해. 하나님께서 알아서 버릴 것은 버리고, 들을 것은 응답해 주실 거야.”
4.
보라는 이렇게 힘들게 교회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지, 어떤 알지 못한 세력에 자기는 세뇌를 받고 있는 게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았다. 종교란 신비하고, 빠져들면 헤어날 수 없는, 또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치광이와 같이 되어가는 그런 마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북 정권을 종교집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중보기도 팀에 들어간 지 3년째에 고모는 이것이 교인이 되는 아주 중요한 네 번째 관문이라면서 또 다른 십일조 이야기를 했다. 십일조를 남몰래 내지 말고 반드시 액수를 적어서 매월 빠짐없이 하라는 것이었다. 보라는 남편이 가져온 월급을 관리하는 것뿐이어서 남편의 동의 없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남편을 설득해서 꼭 수입의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간 가정이 파탄 나며 자기도 교회에 나올 수 없다고 말했는데도 고모는 완강했다. 남편을 전도해서 교인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십일조라도 내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남편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게 기도를 해 보라고도 했다. 교회에서 한 사람의 신앙의 척도는 세례교인으로서, 주일성수하고, 성실히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라는 것도 덧붙였다.
“이런 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를 속박하려고 만든 형식이요 율법이지 않아요? 꼭 교회가 교인들을 위협해서 돈을 더 많이 받아내려는 것 같아요. 하나님도 그런 교인이라야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받은 성도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것은 천국 간 뒤의 이야기이고,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먼저 교회에서 관습적으로 행하는 법을 지켜야 해. 그래야 장로가 되어 당회에 들어가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증(勸懲)을 관장하지. 많은 교인이 장로만 쳐다보고 있는데 먼저 장로가 되지 못하면, 새로 교회에 들어와 방황하는 교인들을 어떻게 바른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겠어.”
“고모,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주하던 바리새인 같은 장로들이 거짓 교사가 되어 순진하게 따르는 많은 교인을 잘못 인도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천국에서 ‘나는 도무지 너를 알 수 없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것 아니야?”
“그러나 당회에서 장로 후보자를 7년 이상 된 세례교인, 주일성수, 십일조 교인으로 기준을 정해 놓고 2배수로 선정 발표한다면 어떻게 하겠어. 먼저 장로는 되어야 하는데.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지 않아.”
“장로 안 하면 되죠.”
“교회에 교인만 데려다 놓는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야.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성화의 과정을 밟아서 장로가 되어 먼저 방황하는 양들에게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해.”
보라는 남편의 너그러운 양해로 교회를 다니고 있으나, 남편은 교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교회에 대한 교묘한 예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어느 경합에서 맨손으로 짜서 귤즙을 잘 짜내는 시합이 있었는데 내로라하는 역도 선수, 차력 선수, 기계체조 선수가 다 참여했는데, 그중에서 삐쩍 마른 60대 남자가 일등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직업을 알아보니 교회 회계 장로였다는 이야기 등…. 그런 남편이 자기에게 통장을 맡겼다 할지라도 생활비 이상을 지출하는 것을 십일조로 허락할 리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돈을 훔쳐서 사는 못 된 놈이라 하겠지만, 남편은 십일조를 내면 자기 봉급을 훔쳐 간 못 된 마누라라 할 것이다. 물론 보라가 짬짬이 학생들의 과외수업을 한 수입을 다 털어 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십일조가 되겠는가? 고모는 드디어 말했다. 하나님은 물질에 관심이 없으신데 십일조의 액수가 무슨 문제겠는가? 하나님은 감사해서 드리는 마음을 받으실 분이셔. 그러니 낼 수 있는 만큼의 헌금을 십일조로 작정하고 십일조 헌금 봉투에 이름과 액수를 적어 내라는 것이었다.
“교회는 왜 십일조 헌금 낸 사람의 이름을 꼭 주보에 발표해서 여러 교인에게 알리는지 모르겠어요. 십일조 안 내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헌금을 냈는데 명단에 나오지 않는다는 불평을 해서 그것은 영수증을 대신해서 발표하는 거야.”
“이렇게 개인정보를 누출하지 말고, 개개인의 헌금 고유번호를 정해서 알려 주어 헌금을 낼 때마다 이 고유번호로 저장해 두고, 이름 대신 이 고유번호를 발표하면 더 좋지 않아요? 그럼 연말 정산 때 회계도 고유번호로 검색하면 정확히 헌금 액수를 알 수 있을 텐데.”
“아무튼, 헌금은 개인 신앙의 척도일 뿐 아니라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도 돼.”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주정헌금, 절기헌금, 감사헌금, 지정헌금, 일천번제헌금…. 그래서 무당에게 복채를 내는 것처럼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어요.”
“액수를 생각하지 마.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아낌없이 내면 되는 거야. 이웃 사람과 비교하지 마. 나는 다만 이 세상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상 이 세상의 교회법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그러나 잘못된 관행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아요?”
“바로 잡기 전에 바른 장로가 당회원이 되어 교인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무엇이 참다운 순종인지 바른 삶을 살도록 먼저 신도들을 의식화해야 해.”
5.
보라가 거룩한 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되어 무의식중에 세속화되어가고 있을 때, 교회의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선거가 있었다. 관례대로 당회에서 필요한 인원만큼 장로 권사, 안수집사를 배수 공천하여 공동의회에서 장로는 2/3. 권사, 안수집사는 과반수 찬성으로 당선자를 확정하게 되었다. 보라가 놀란 것은 자기가 장로 후보로 당회에서 뽑힌 것이었다. 자기는 교회 출석한 지 10년에 불과했고, 나이도 40대 중반으로 가장 젊은 장로 후보에 해당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신 권사의 입김이 작용하였을지도 모른 일이었지만, 이런 교회의 정치내막을 알 도리가 없었다. 자기를 아는 몇몇 집사들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피택(彼擇) 장로와 권사, 안수집사가 공표되자, 교회 내는 어수선해졌다. 탈락한 사람의 불만과 피택 된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이 카톡을 통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보라에게는 어떻게 해서 장로로 당회에서 피택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권사도 되지 않은 사람이 장로 후보가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한국의 새 정부에서도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후보지명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장로 후보가 되었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 아니냐고 말하며, 교회의 평온과 조직의 엄연한 서열을 위해서도 자진해서 사퇴하라고 직격탄을 날린 사람도 있었다. 연이은 댓글은 장난이 아니었다. 보라도 자기가 단상에 올라가 대표기도를 하며, 당회의 정치판에 끼어들며, 주일 아침마다 교회 입구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교인들과 악수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을 맞는 일은 자가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처음 보는 신입 교인을 악수로 맞으며“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내가 교회 나오는데 당신이 왜 감사하는데.”라고 자기를 쏘아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목사는 선거일까지 시간이 나는 대로 장로나 권사는 직분이지 결코 계급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자기를 대신해 교회의 막중한 직분을 맡아 수고할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험담이나 루머로 인격을 모독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라는
“고모, 어떻게 된 거야. 나 장로 하고 싶지 않아. 성경 지식도 부족하고. 그만 자진해서 사퇴할까 봐.”라고 말했더니
“무슨 소리야. 모르겠어? 네 개의 관문을 통해 여기까지 올라온걸? 너는 교회를 지키고 있는 엄격한 수문장(守門將)들의 심사를 거쳐 여기까지 온 거야. 너는 꼭 장로가 되어야 해. 장로가 되는 것이 마지막 다섯 번째 관문이야. 장로가 되어 이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해.”라고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이었다.
“네가 장로가 되는 것은 내 평생의 꿈이었어. 네가 네 개의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나에게 질문한 걸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라고 말하며, 신 권사는 계속했다. 1. 주일성수, 2. 세례, 3. 중보기도, 4. 십일조. 이것은 구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율법이라고 보라가 자기에게 반격했었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자기는 뭐라고 타일렀는가? 이 관문을 통과하면서 자기의 일을 다 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바로 그것이 율법이 되어 우상숭배나 토속신앙인 미신에 빠지는 걸림돌이 되지만,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감당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이런 관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 한 걸음씩 다가가는 성화(聖化)의 길을 걷고, 드디어는 죽어 주께서 주신 면류관을 받는 영화(榮華)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보라는 고모를 생각할 때마다 성경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누가 고모를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완전히 거듭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다.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실상은 자기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6.
항존직(恒存職) 투표일이 다가왔다. 이날 신 권사는 특별히 고운 옷을 갈아입고 교회에 출석했다. 보라가 장로가 되는 것을 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 자기의 부끄럽고 서럽던 명예 권사의 오명을 씻는 것은 보라가 당당히 장로 당회원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대 예배가 끝나면 바로 공동의회를 열어 항존직 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장로 후보자들은 전면에 나와 한 줄로 서서 인사를 할 것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기호대로 교회에서 요구하는 장로 수만큼 세례교인은 각자 투표용지에 표를 찍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배에 나와 있어야 할 보라가 보이지 않았다. 예배 직전에 갑자기 보라 남편이 나와 예배당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 권사는 깜짝 놀라 그 곁으로 갔다. 조카사위는 무엇 때문인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신 권사는 그를 데리고 예배당 밖으로 나왔다.
“자네가 웬일인가?” 그러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보라가 미쳤어요. 교회에 열심을 내더니 이제는 집을 나갔어요.”
“뭐라고? 어딜 갔어?”
“기도원인가, 무언가 하는 데 간다고 집안 살림도 팽개치고 나가 버렸다고요.”
“아니, 오늘같이 중요한 날 어딜 가?”
두 사람 다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신 권사는 수십 년의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요, 조카사위는 아내가 교회에 미쳐서 집을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거기가 어딘데?”
신 권사는 가까운 곳이면 지금이라도 가서 잡아 올 기세였다.
“나도 모르죠. 이런 쪽지를 남겨 놓고 집을 나가서 지금 교회가 가정파탄을 냈다고 항의하러 온 길이요.”
그 쪽지는 다음과 같았다.
QT
종이 되신 여러분,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eye-service, as men-pleasers)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표준 새 번역 골로새서 3:21, 22)
이 말씀은 바울이 종들에게 권면한 말씀이다. 나는 주님의 종이다. 따라서 이것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내 상사에게는 두려워서 열심히 그를 위해 일했으며, 주님께는 그분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가림으로 건성건성 했다. 나는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가? 어렵고 힘들 때만 요술 방망이 두들기듯 해서 불러내어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고 기도만 했고 주일성수나, 십일조도 진심으로 하지 않았다.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셨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찾아가 그들 편이 되셨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분은 내 편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전해지려고 노력해도 완전해질 수 없으며, 어떤 노력과 행위로도 주 앞에 의롭게 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그분의 용서만 믿고 주님을 눈가림으로 섬겼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사람을 하나님 섬기듯 했으며, 주님을 세상 사람 섬기듯 그렇게 살아왔다. 바울은 주님을 심판 주로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그의 상(賞) 주심을 소망으로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내가 세상일을 할 때 주님께 하듯 하라는 뜻은 우리의 속사람을 아시는 주님은, 눈가림할 수 없으므로 주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세상일을 하라는 뜻이다.
교회가 항존직을 선정하여 교회의 신령한 관계를 살피고,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권면하는 일을 맡긴다고 할지라도, 그 방법이 옳지 않거나, 나는 모르지만, 그 속에 인간의 부패한 생각들이 끼어 있다면,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분노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이 의심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처럼 내가 장로 후보로 선임되는 것을 나도 믿을 수 없다. 또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을 장로의 조건으로 세운 것을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릇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겠다는 궤변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을 주님께 하듯 하려면 나는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공동의회에서의 항존직 투표는 보라의 궐석(闕席)으로 진행되고, 아무 일이 없는 듯 막을 내렸다. 목사는 선거가 끝난 뒤 이제 교회의 막중한 일을 맡게 될 항존직들을 뽑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것과 그들께 영력을 더하시어 죽도록 충성하며 주께서 명령하신 지상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올해에는 주님의 집인 이 성전에 3,000명의 신도를 채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선거를 마무리했다.
낙선된 후보들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오직 순종이 있을 뿐이다. 얼마 동안 낙선된 후보들의 불만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있는 선거 후유증이다. 교회에 언제나 있는 마귀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얼마 동안 “사탄, 마귀는 물러나라.”라고 기도하면 교회는 또 평온해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