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기는 1979년 남해초등학교 6학년 1반을 담임했을 때의 일기입니다. 학생 수가 딱 60명이었어요.
×월 ×일
국어 시간이다.
'통신의 발달'에 대해서 공부하였다. 통신 시설을 발명한 사람들과 그 나라를 칠판에 적어 주었다. 그것을 보던 남식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그 중에 우리 나라 사람은 없습니까?"
마르코니, 벨, 모오스 모두 외국 사람들이다. 나는 안쓰러운 목소리로
"없어."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남식이는 몹시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나라 사람은 통신 시설을 하나도 발명해 내지 못했나야?"
하면서 자꾸만 코를 불고 있었다. 그때 석주가
"있어!"
하고 힘차게 말했다.
"뭐고 마?"
남식이가 눈을 번쩍이며 묻자
"봉수대!"
×월 ×일
산수 시간이다.
갑동이가 어려운 산수 문제를 하나 풀어놓고 "3⅞" 답을 크게 고함 치며 까불고 있었다.
그러자 뒷자리에 앉아서 문제를 풀고 있던 성환이가 그 답이 틀렸다는 뜻으로
"잠이 오나? 변소 갔나?"
하고 타박을 주었다. 갑동이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며 자기가 푼 문제가 틀렸는가 검산하느라고 입이 오므라졌다.
"3⅞, 확실해!"
석주, 길주 이른바 우리 반 실력파들이 그 답이 맞다고 떠들어대자 갑동이는 죽었던 기상이 길 잃은 방랑자가 구세주를 만난 듯 다시 까불댄다. 성환이를 돌아보며
"맞네마. 에헤헤, 지가 틀려 놓고 니가 변소 갔어마."
성환이는 좀 무안하지만 착 눈을 내리뜨고 점잖은 목소리로
"뭐이, 변소 갔어마?"
×월 ×일
자연 시간이다.
둘째 시간에 오늘도 어제처럼 실험을 하였다.
알코올램프에 불이 솔솔 울라 오는 위에다가 철판을 놓고 돌, 못, 나무, 설탕을 태우는 실험이다. 즉 화학적 변화냐 물리적 변화냐 알아보는 실험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제사보다 젯밥에 더 정신을 쏟는다는 말이 있듯이 내 눈을 피하여 철판 위에는 설탕을 조금 올려놓고 나머지는 봉지 채 입안에 털어 넣기 바쁘다.
아무튼 고소한 냄새가 교실에 가득 찬다. 그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창문 밖으로 새어 나갔던지 밑 교무실에 계시던 교감 선생님이 2층까지 올라와 보고
"이 교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구나."
하고 도로 내려가신다. 태성이는
"꼬신 내가 납디까?"
하고 말해서 학생들이 깔깔 웃었다.
실험시간은 좀 시끄럽지만 즐거운 시간이다. 될 수 있는 한 실험을 많이 하는 방향으로 해야 되겠다.
×월 ×일
체육 시간이다.
반별 공차기 경기를 하였다. 첫판에 3반 하고 붙어 4: 0으로 깨졌다. 물론 실력이 달리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자신을 잃고 '호오'하고 놀래더니 투지를 잃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패인은 형채 같은 녀석은 아예 차지도 않고 빠져 버려 선수까지 모자라니 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일치단결 하여 열심히 뛰었다면 1∼2골은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여학생은 피구에서 1등을 하고 들어와 웃음꽃이 피고, 자랑들이 대단하다.
나는 풀이 죽어 들어오는 남학생들을 보고
"불알을 데어서 여학생 주어라."
그 말은 듣기 싫은지
"선생님은 남자이면서 왜 늘 여학생 편만 듭니까?"
"떼 주기 싫으면 관 둬."
볼이 부어있는 투덜씨들 마음이 좀 좋아졌을까, 내가 지나쳤나?
×월 ×일
점심 시간이다.
어제 숙직이었기에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네거리에 잠깐 서 있는 사이에 뒤에서 '퉁' 호박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담장을 뛰어넘어 나둥그러지는 사나이 바로 태성이다.
"이 놈 봐라. 뭣하러 담을 다 뛰어넘어?"
"빵 사먹으러요."
솔직해서 좋다. 그러나 너는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하나는 담을 뛰어 넘은 잘못이요, 또 하나는 군것질하러 나온 잘못이다. 정문에 주번생이 버티고 서 있으니 담을 뛰어 넘었겠다. 더구나 군것질하려고?
"오늘 도시락 안 가져왔나?"
"공부 시간에 묵었빘십니다."
갈수록 태산이다. 누가 들을까 겁난다. 난 웃음을 꾹 참고 엄한 얼굴 모습으로 바꾸어
"빨리 들어가!"
×월 ×일
고정선이가 지갑을 잃었다고 셋째 시간 끝나갈 무렵 입이 부어져 있고, 앞자리 영란이가 대신 그 사실을 전해준다.
나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기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주된 내용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였다. 넷째 시간은 마침 합동 체육이라 모두 밖으로 보내고 혼자서 책가방 속을 검사하는데 우습다. 꼬마 숙녀 아가씨들의 가방 속에 요상한 것으로 그득하다. 성숙이 웃옷 주머니에 자석 덩어리가 나오고, 영화의 예쁜 지갑 속에는 건전지가 나오고, 추선이 가방에서 에나멜선이 한 다발 나온다. 모두 학습자료들이다. 가방마다 못이 나오고, 에나멜선을 곱게 감은 전자석이 나온다. 누가 여학생들 가방이라 할 것인가? 뜨개질 감이 있는 가하면 산수 시간에 썼던 산 가지용 나무젓가락이 한 다발씩 나오기도 한다. 정민이 가방 속에는 껌도 한 통 나온다. 돈 200원이 든 지갑은 찾지 못하고 여학생 가방만 뒤적이다가 말았다. 그새 우리 반 학생들은 줄긋기에서 1등을 하고 들어와 신이나 야단이다. 호숙이는 내곁에 다가와
"선생님, 내 도시락 반찬도 검사했지예?"
×월 ×일
산수 시간에 성환이가 말끝마다 욕을 달길래
"성환이는 꼭 필요 없는 말을 다는데 앞으로는 말할 때 욕을 뚝 떼도록 한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식이가
"아빠 감기 뚝."
하고 선전 푸로 흉내로 히죽거려 깔깔대며 모두 웃는다.
그 말에 언뜻 우스운 이야기 생각이 나서
"서울 손자에게 할머니 죽었다고 가장 짤막하게 전보를 칠 때 뭐라고 하겠니?"
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은 제가끔
"할머니 사망."
"할머니 별세."
"할머니 죽었다."
생각나는 대로 대충 잡아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한참을 듣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할매 꽥."
×월 ×일
어제는 영미가 어디서 꺾었는지 진달래를 한아름 가져왔었다. 오늘 아침에는 교실 문을 열었더니 내 책상 위에 대통령 책상 위에 얹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우아하고 귀풍이 서리는 꽃병이 놓여져 있고, 거기에 꽂힌 접동백 꽃이 온 교실을 환하게 만든다. 나는 마음이 확 밝아졌다.
"대단히 좋군. 누가 갖다 놓았지?"
"진숙이가 가져왔어요."
"그래, 고맙다. 흠흠 냄새도 좋구나."
나는 코를 갖다대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우리 반 여학생들은 참 잘한단 말이야."
나는 여학생 쪽으로 미소를 보내며 칭찬했다.
"누가 꺾어왔지, 자연보호도 모르나?"
"고발을 해야 돼."
아니 우리 반을 위해 가져온 정성을 그런 명목으로 여지없이 꺾어버리다니! 나는 성을 잔뜩 내어 가지고 남학생 쪽을 노려보며
"그래, 고발을 해라. 나까지도."
×월 ×일
시작종이 울려서 막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1학년 5반 선생님이 나타나서 내 팔을 잡아끈다. 나는 무슨 좋은 이야기를 하려나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 나갔더니 골마루를 지나 학습 원까지 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선생님 반 학생이 이걸 망가뜨렸으니 책임져야 합니다."
"뭐라고요?"
사철의 변화용 지구를 망가뜨린 녀석이 태성이란다. 나는 풀이 죽어 교실로 들어왔다. 오늘따라 태성이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꽥 고함을 쳤다.
"왜 망가뜨렸어?"
"살 만져보니 떨어져 있었는디……,"
"그걸 말이라고 해?"
"정말입니다."
"만지기는 누가 만지라더나?"
사전에 과학놀이터 기구를 아끼라는 말을 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나는 화만 내고 있었다.
×월 ×일
4시간을 10분쯤 일찍 마치고 도서관 의자를 우리 반 아이들이 날랐다. 어제 행사 때문에 각 곳에서 빌려온 의자를 오늘 되돌려 주는 것이다. 여고에서 빌려온 것은 2반이 맡고, 우리 반은 도서관 의자를 맡았다.
"늘 왜 우리 반만 시킵니까?"
불평들이 대단하다.
"인민군처럼 이유가 많아!"
나는 불평들을 억누르며 지휘하여 갔다. 어떤 아동은 하나의 의자를 둘이서 들고 가는가 하면 어떤 아동은 두개를 들고 오는 축도 있다.
도서관에 가서 숫자를 파악하느라고 서 있었다. 모두 픽픽 던져 버리고 가는데 정은이가 남아서 각 테이블 밑에다 차근차근 밀어 넣으며 정리하고 있다. 그래 참 착하다. 정은이가 피구경기때도 잘하여 우리 반을 우승하게 만든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오늘 책임성 있게 하는 일을 보니 내 마음도 한없이 즐거워진다.
×월 ×일
채변 검사를 내일 하기에 채변봉투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남식이가 결석을 했다.
"누가 채변봉투를 갖다 주면 좋겠는데……,"
아동들 앞에다 봉투를 흔들어 보이자
"제가 갖다 주겠습니다."
선아가 손을 들며 일어섰다. 한쪽에서 '으흐'하는 웃음소리가 난다. 남학생 집에 여학생이 갖다 준다니 아이들 생각으로 괴상한 모양이다.
"남식이 집을 아니?"
"그럼요. 남식이는 내 동생인걸요."
자랑스럽게 말하고 나오는 선아가 생글거린다.
그렇구나! 주남식이와 노선아가 내외 종간인 것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노선아 집은 '풍년빵집'이다. 엊그제 농담으로
"선아야, 빵 좀 안 가져오나?"
그랬더니
"선생님, 진짜 빵 갖다 드릴까예?"
그래 말만 해도 고맙다.
×월 ×일
태성이는 못 말린다. 공부는 밑바닥을 기는 주제에 공부 시간에 나의 실수 발언을 잘 꼬집는다.
골마루 쪽으로 누가 지나가도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비행기소리만 나도 엉덩이를 걸상에서 떼어 운동장 저쪽으로 바라본다.
6학년이 1학년처럼 주의 산만해서야 되겠는가
"공부하는 학생은 불이 나도 꼼짝 않고 공부만 해야 돼!"
이렇게 엄포를 놓았더니 태성이 왈
"선생님은 선생님 집에 불이 나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뭐야?"
나는 태성이 머리를 꽁 하고 쥐어박았다.
×월 ×일
성환이는 오늘도 공부 시간에 욕설을 하다가 나에게 핀잔을 받았다.
"성환이 아버지가 욕설을 잘하나 엄마가 잘 하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욕설 안 해예."
그래도 효 사상은 훌륭해서 감쌀 줄 안다.
"그럼 누구한테 욕을 배워 그리 잘하니?"
"우리 이웃에예."
"성환이 들어 봐. 성환이는 얼굴도 잘 생겼고, 웃차림도 깨끗한데 욕을 해서는 못써. 욕을 하려면 세수도 하지말고, 머리도 깍지말고, 옷도 떨어진 옷을 입고 그러구 다녀야 돼."
내 말에 편승하여 남식이가 넙죽거렸다.
"점방 문도 열어 놓고."
점방 문이란 바지 앞부분을 말하는 것을 여학생도 잘 안다. 모두 깔깔 웃는데 갑동이가 또 한 마디 보탠다.
"깡통도 차고 행."
성환이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남식이 갑동이 이또 죽었다."
×월 ×일
점심 시간에 교실에 남아 있었는데 밖으로 놀러 나갔던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죽는시늉을 하며 들어와서는 진작 말을 못하고 망설인다.
"왜?"
나는 점잖게 물으며 빙 얼굴들을 바라보았더니
"순원이 보시다(보세요)."
"순원이가 어째서?"
"몰라예. 한번 나와 보시다."
나는 일어서서 운동장을 보았다. 순원이가 보였다. 웬 녀석 뒤에 따라다니며 웃고 있었다. 그 덩치 큰 녀석은 겁도 없이 그야말로 겁도 없이 여학생들이 놀고 있는 곳에 다가가 뒤에서 여학생을 안아버린다. 여학생은 누가 장난치는 줄 알고 예사로이 생각하고 돌아보고는 기겁을 해서 죽는시늉을 한다.
"저 녀석이 누구야?"
"학교도 안 다니는데 정신이 뱅 돌았어예. 그런데 우리 반 순원이랑 태종이랑 그리하라고 시킵니다."
내가 쫓아나가자 그 녀석은 교문 밖으로 황급히 도망갔다.
×월 ×일
버스를 탔더니 미연이가 앉았다가 인사를 한다. 진주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인 모양이다.
미연이는 5학년 때 보다 성적이 떨어지고 있다. 가정형편이 곤란하여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니 측은해 지기도 한다. 내 딸을 삼아 데리고 있을까? 이런 생각도 혼자해 봤다.
미연이는 작년 군 학예대회 때는 독창 부에 최우수를 따낸 만큼 노래도 잘한다. 그러나 6학년 올라와서는 변성기에 접어드는지 노래 솜씨도 떨어졌다.
내 옆자리로 오라고 불렀더니 곧 왔다. 이것저것 묻고 있었는데 미연이는 줄 곳 자기 가방을 뒤지고 있더니 커다란 배를 꺼내서
"선생님, 이거 잡수시다.(잡수세요)"
나는 당황했다. 차 속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극구 사양하며 미연이의 성의를 무시하지 안도록 조심스럽게 말하며 도로 넣게 하였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월 ×일
6학년 합동 체육이 있었다.
남녀 각각 8명씩 대표선수가 나와 학급의 명예를 걸고 힘차게 달려야 할 경주.
남학생은 3등을 가다가 마지막 주자 키다리 진우가 막강의 실력을 발휘하여 모두모두 떨쳐내고 1등을 하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좋아서 모두 의기양양하다.
여학생 차례가 되었다. 여학생은 시종 꼴등을 달리고 있었다. 그 만큼씩 떨어져서 달린다. 다른 남은 아동들은 실망하고 핀잔을 늘어놓고 있다. 나도 속으로 애가 탔다. 마지막 주자가 배턴을 받아 쥐자 냅다 4반을 질러내고 가까스로 3등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 반은 종합 1등을 하였다.
"저게 누구야?"
"하선아입니다."
"으흥, 잘했군, 잘했어."
교실에 들어와서도 막 칭찬했다.
×월 ×일
날씨가 꽤 덥다.
첫 시간부터 해양 초등학교에 가게 되어 걱정이 된다. 소란하여 교장 선생님께 꾸중을 듣지 않을까, 서로 싸워 코피나 흘리지 않을까, 또 장난치다가 유리창을 깨지 않을까 등.
단단히 부탁하고 가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이런 때는 반장이 듬직해야 한다. 반을 위해서 희생할 줄도 알고, 반 애들을 통솔할 줄도 아는 그런 반장이어야 한다.
우리 반 영갑이는 만점은 못 되지만 그런 대로 합격이다. 옆반 선생님 이야기를 빌리면 내가 없을 때 오히려 더 조용하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걸 봐도 영갑이의 역할이 크다고 봐야 옳겠다.
언젠가 공부를 마치고 모두 뿔뿔이 교실을 떠나 버리는데 영갑이 혼자 책걸상 줄을 맞추고 유리창을 다고 하는 책임성 있는 행동을 엿보고 나는 속으로 퍽 기뻤다. '앞으로 우리 반이 잘 되겠는데' 이런 생각이 절로 생겼다.
×월 ×일
시험 채점을 돕던 우리 반 여학생들이 집에 가서 텔레비전 볼 계획으로 마음이 부풀고 있었다.
"나는 수사본부가 재미있더라."
정민이가 쫑알거리자
"나는 수사본부보다 수사반장이 더 재미있더라."
호숙이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너들 우리 오빠는 뭐가 제일 재미있다고 하는 줄 아니?"
혜련이가 입이 벌어지며 요상한 질문을 던졌다.
"유머극장?"
"야, 곰례야?"
"몰라! 뭔데?"
이것저것 들먹이지만 혜련이는 연방 고개만 가로젓더니
"뉴스!"
그러자 아이들이 깔깔거린다. 그 말을 듣고 서연이는 한 술 더 뜨서
"나는 권투, 축구, 그런 것이 재미있더라."
뭐야? 헤헤 히핵.
×월 ×일
골마루에 금붕어장수가 나타났다. 반 아이들이 사자고 졸랐다. 그래서 어항을 2000원 주고 사고, 금붕어 세 마리는 사정사정하여 얻었다. 금붕어장수는 깍쟁이처럼 처음 말과 달리 조그만 놈만 건져준다. 2마리만 줄려는 걸 나머지 한 마리는 애걸복걸하여 얻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 이상하게 남식이가 어항 장수의 물을 한 컵 뜨고 있었다.
"이 물을 마시면 사시미(생선회) 맛이야."
나도 금붕어장수도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헤어졌는데
"선생님! 요술을 부렸더니 컵 속에 금붕어가 생겼네요."
정말 컵 속에는 금붕어 한 마리가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새 한 마리 주워 내었을까? 금붕어 장수가 나에게 준 것들 보다 훨씬 컸다. 한 마리 더 안 줄려고 떼를 쓰던 붕어장수가 측은해지고 한편 고소해진다.
'꾸중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월 ×일
점심을 먹고 나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경숙이가 엎드려 울고 있었다.
"경숙이가 왜 그러느냐?"
"임성이가 때렸어요."
"임성이한테 못 이기나?"
나는 임성이가 공부도 시원찮고, 콧물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아이라 여학생들이 대부분 이기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임성이 무섭십니다."
춘옥이가 작은 목소리로 겁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짓을 한다.
"임성이 이리 나와!"
나는 불호령을 내렸다.
"신문을 흩어서……,"
임성이는 신문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그래 너의 책임을 다하고 있구나. 겉으로는 ' 때려서는 안 돼' 하며 주의를 주었지만 속으로는 '그래 잘한다.'
×월 ×일
첫 시간부터 읍사무소에서 예쁘장한 아가씨들이 BCG 접종하러 나왔는데 며칠 전 투벨크린 반응검사로 주사 맞은 경험이 있는데도 교실 안은 온통 수라장이다. 교문에 나타나는 걸 보고 당장 알아차리고
"흥흥, 우쩌꼬."
"조용히, 해!"
고함을 쳐 놔도 잠시 후에는 역시 마찬가지다.
여학생들은 눈물을 찔끔거리고 특히 추선이 같은 애는 엉엉 울기도 한다.
"세상에 주사 한대에 그렇게 겁을 먹고서야 어디 6학년이라고 하겠느냐?"
마치고 나서 막 핀잔을 주었다.
×월 ×일
오후에 6학년 전체가 과학 실에서 국사 슬라이드 환등기를 보았다. 내가 대충 설명해 가며 이때껏 배운 것을 쭉 보여줬더니 재미있는지
"재방송 해 주시다!"
그래서 다시 틀어주면서 이번에는 목이 아파 말을 안하고 '찰가닥' 하고 넘기기만 하니까
"마이크 소리가 안 납니다."
젠장 요녀석들, 그래 마이크는 고장이 났다. 원시인들의 모습이 나오니까 누군가 뒤에서
"꼬치 봐라."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래도 못들은 척 계속 넘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여학생들이
"곧 나올 거다."
하며 무엇을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궁금증은 곧 풀어졌다. 아름다운 원화 그림이 나오니까
"와와!"
하고 좋아한다. 다음 커트 화랑도 그림이 나오니까 이번에는 남학생이
"와와!"
또 되돌려 원화그림을 나오게 하면 여학생이
"와와!"
×월 ×일
정몽주의 시조를 해설할 때 대쪽같은 곧은 절개라 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을 쉽사리 변하지 않는 사림이 있는가 하면 '이랬다저랬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의지가 약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곁들여 설명해 주었는데 얼마나 알아들었는지…….
6시간 마치고 보충 수업을 산수를 한다고 모두 책을 펴놓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성환이가
"선생님, 국어 하시다."
하며 북북 우기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성환이 말마따나 국어가 진도가 많이 떨어져 있다.
"그러면 국어를 하도록 할까? 국어 책을 내도록 해!"
아이들은 불평 없이 책을 바꾸어 내고 있는데 성환이는 또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선생님, 산수 하시다."
내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자 석주가 하는 말씀
"성환이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그런다."
비유 치고 지나친 표현이지.
×월 ×일
심청 이야기를 공부하고 있었다. 책에 나온 그림을 보던 나는 문득 고등학교 때 어떤 짓궂은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마침 넷째 시간이고 아동들도 지루한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학습 내용과는 관련이 없는 엉뚱한 질문을 꺼내놓고 말았다.
"자, 우리 교과서에 심청이가 물에 뛰어들 때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뛰어드는데 왜 그랬을까요?"
아동들은 문제없다는 듯이 자신 있게
"그거요? 무서워서요."
정답이다. 그래도 나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서 있기만 했더니
"선생님, 틀립니까? 그러면 물이 차가워서요."
"아니 맞아. 잘 맞혔어. 그런데 이런 답도 있어요."
"뭔데요?"
"심청이 빤쓰가 쌍방울표라 자랑하려고."
헤헤헤, 그 웃음소리. 그런데 그 이야기를 부모들에게까지 이야기할 줄이야.
×월 ×일
모두 집으로 갔는데 영미가 아직 가지 않고 까불고 있었다.
영미는 얼굴이 복스럽게 생겼고, 입이 쪼그만 하다. 일기장에 의할 것 같으면 집안 살림이 넉넉지 못한 편인 모양이다. 남의 소작을 하며 한국 고유의 빈한한 농부의 딸이다.
영미는 시시콜콜한 별 것을 물어보고 있더니
"선생님 나이가 몇 살입니까?"
하고 무례하게 내 나이까지 물어 본다. 선생님과 제자 사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어야하니 무례가 아니라고 하자
"왜 묻노?"
"그리다. 몇 살입니까?"
"너의 아버지 보다 한 살 많다."
"아이구매. 우리 아버지는 육십 두 살인디……."
"그럼, 나는 육 십 세살 이다."
"히헤헤, 선생님은 많아 봐야 마흔 몇 살 됐을 깁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보이나?'
×월 ×일
각 가정의 직업을 조사하고 있었다.
농업과 상업이 주가 되는 본 학급은 간혹 공무원 혹은 회사원 공업 등이 1,2명 있었다. 그런데 조사지 에는 자질구레한 직업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간혹 이쪽에도 들어갈 수있고, 저쪽 칸에도 들어갈 수 있는 직업도 있었다. 이를테면 버스운전사는 운수업에도 넣을 수 있겠고, 노동에도 넣을 수 있겠다. 한참 조사하고 있는데 갑동이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제조업은 무엇입니까?"
"제조업이란 뭔고 하면 무엇을 만드는 직업이다. 즉 술도가 집처럼 술을 빚고……."
"헤헹, 그러면 우리 집은 제조업이네."
"무엇을 만드는데 그래?"
나의 질문에 생글생글 웃으며
"오뎅(어묵)예."
"오뎅을 판단 말이냐?"
나의 질문에 다른 아이들이 대신 대답했다.
"갑동이는 오뎅공장 사장 아들이라예."
×월 ×일
방과 후 다른 애들은 호숙이 문병간다고 우우 몰려가고 영란이와 경숙이가 남아서 공부하다가 갔다.
영란이는 눈이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아동인데 말도 잘 듣는다. 쓰레기통 비우는 일이며 화분에 물 주는 일이며 군소리 안하고 잘 한다. 아동들 중에는 선생님가 친해볼려는 축과 선생님을 피하는 축이 있다. 영란이는 앞에 것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친할려고 다가오는 아이 중에는 대개 건방져 가지고 다가오는데 그렇지 안 해서 좋다.
경숙이는 눈이 가늘고 좀 붉은 얼굴에 주근깨가 솜솜히 나 있는 아동으로 1인 1역 담당에 도서를 맡겼더니 아이들이 제멋대로 한다고 늘 볼이 부어 나한테 하소연해 오곤 했다.
영란이는 유림동 방앗간 집 딸이라 가정이 중류 이상이다. 성적은 하위 그룹에 속하지만 먹통은 아니다. 경숙이는 심천이에서 다니는 가정이 구차한 편이지만 학력은 학급에서 중간이다.
그들은 내일도 남아서 공부해도 되냐고 묻고 갔다. '물론 좋고 말고.'
×월 ×일
쉬는 시간에 내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데 골마루에 나갔던 남식이가 쫓아 들어오며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누구 아버지?"
"선생님 아버지예."
'이거 이상하다. 아버지가 올 리 만무한데……, 옳지 작은아버지가 오셨는 줄 모른다.'
나는 순간적으로 속고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갔다. 그 곳에는 웃음을 보내며 허리를 굽신하는 사나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이도 마흔쯤 되었을까?
'그렇지. 작은아버지도 직접 찾아올 리 없지. 전화가 있는데…….'
나는 한편 실망하고 한편 의아하고 또한편 웃음이 나왔다. 그 사나이는 내 마음이야 아랑곳없다는 듯이
"신문 대금을 주셔야겠는데요."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교감선생님... 저도 본 받아야겠어요.. 그나저나 79년도면 제 태어나던 핸데... 지금 이 분들은 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