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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여행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여우위에(최종명)
웨이룽우(왼쪽 위), 커자 부족 기념 솥(왼쪽 아래), 기념비(오른쪽)
이 커자라는 말은 토객계투(土客械鬥), 즉 토착민과 이주민이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말에서 유래한다. 남방으로 이주한 부족들이 원주민들과 마찰이 생기게 됐다. 청나라 함풍(咸豐)제 시대인 1854년 광둥 홍건군(紅巾軍) 폭동이 일어나는데 많은 농민들이 참가하게 된다. 이때 이주민 지주 아들이 홍건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모병을 하고 청나라 군대와 합세해 난을 진압한다.
이때 이주민 지주들은 기회를 틈타 마구 토지를 확보하는데 이때 토착민 지주들이 ‘외지인이 관을 등에 업고 토지를 약탈한다(客民挾官鏟土)’며 들고 일어나 보복을 시작해 서로간의 ‘계투’가 시작됐다.
토착지주들은 축객을 명분으로 이주민 촌락으로 진입해 재산과 전답 등을 강제적으로 탈취하자 폭동이 점차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토착세력이 지역간 연대를 도모하자 이에 대응해 이주세력들도 군대를 만들고 병영을 세우고 전쟁에 가까울 정도로 큰 싸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전투구는 장장 12년 동안이나 지속되는데 이때부터 북방으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을 ‘커자’라고 한 말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쑨원, 덩샤오핑, 주더 등 중국 대륙을 움직였던 많은 지도자들이 커자 출신이다. 전 타이완 총통인 리덩후이, 싱가포르 총리 고촉둥, 태국총리 탁신, 필리핀 대통령 아키노 역시 그렇고 아시아 최고 재벌이라는 홍콩의 리자청을 비롯 화상의 절반 이상이 커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바위에 새겨진 커자선민남천기념단(客家先民南遷紀念壇)을 보고 있으니 비록 크기는 작지만 커자가 담고 있는 역사의 무게가 느껴졌다. 1971년부터 시작해 홍콩 및 동남아시아를 거쳐 이제 중국대륙에서도 커자 사람들은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한족이라고 하지만 독특한 성향과 문화를 지닌 커자를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2) 간저우 贛州 청나라 시대 골목에서 한가로운 고양이와 닭
장시 성 남부의 역사 문화도시 간저우는 성의 약칭을 '간(贛)'이라 할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닌 도시다. 그 중에서도 '간'의 한자를 쪼갠 장공(章貢) 구의 허핑루(和平路)에는 200여 년 전 가옥과 거리가 잘 보존된 자오얼샹(灶兒巷)이 있다.
원래 이곳은 청나라 시대 관리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그들 옷 색깔이 검다는 뜻의 '자오(皂)'색을 주로 입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부뚜막에서 집안의 길흉을 주관하는 뜻이면서 같은 음인 '자오(灶)'로 바뀐 것이다.
자오얼샹 패방이 주변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최근에 새로이 만들어진 듯하다. 패방을 지나 가니 약 200미터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청나라 도광제 시대의 점포, 수공업공장, 호텔, 금융점포, 관공서와 민가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고관대작이 살만한 곳은 아닌 듯하다. 서민들이 살아가는 거리이지만 그래도 마치 과거 속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준다.
전형적인 간저우 지방 건축양식으로 지은 둥푸(董府)는 1802년에 만들어진 식당이다. 이곳 가옥은 송나라 돌과 명나라 벽돌, 청나라 기와가 첩첩이 쌓여 있다. 얼핏 봐서는 어디가 역사의 경계인지 찾아보기 힘들어 보인다. 모든 돌이 송나라 것이 아닐 터이고, 벽돌이나 기와도 그럴 것이다.
거리에는 한가롭게 고양이, 강아지와 닭, 오리들이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다. 거리에 떨어져 있는 먹이 하나를 두고 고양이 2마리와 암탉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 닭은 굳건하게 서 있고 고양이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쪼르륵 돌아오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고양이 녀석들이 포기하고 다른 먹이가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면서 따르릉 울리니 동시에 고개를 살짝 돌리는 모습도 귀엽다.
반대편에 앉아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한없이 여유롭다. 이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도 여유롭게 움직인다. 간혹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을 빼면 사람들 나름대로 나른한 오후를 부담 없이 지내고 있는 듯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리 3마리가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뒤뚱거리며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골목길 안은 모두 집 마당인가 보다. 동물들이 제 집처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연탄 배달하는 사람도 지나가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손자 데리고 나온 할머니도 있다. 골목 길에 또 가로 세로로 난 골목이 있다.
왼쪽 오른쪽 이리저리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데 골목 끝에서 새끼를 밴 암캐 한 마리가 마주보고 서 있다. 잠시 후 슬쩍 몇 걸음 물러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목을 하늘로 쳐들더니 워워워워 하면서 경계한다. 두 번 다시 소리 내더니 골목 밖으로 내빼는데 집을 지킬 정도로 용맹해 보이지는 않는다.
속옷을 포함해 온갖 빨래를 널어놓았으니 약간 민망하기도 하다. 오후의 햇살에 바짝 말라가는 옷들이 진풍경이다. 골목을 빠져 나오는데 열려 있는 집 창문으로 반사된 모습을 보니 거울처럼 갑자기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 뒤로 빨래들이 걸려 있는 모습이 보기보다 인상적이다. 유리 속에 비친 서민들의 빨간 팬티도 외지인에게는 그저 하나의 풍경일 뿐인가 보다.
아까와 달리 색깔이 다른 오리 3마리가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 오리는 왜 3마리씩 몰려 다니는지 모르겠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본 집들 모습이 아주 낡아 보인다. 전선들이 마구 엉켜 있고 집들의 채색도 거의 오래돼 보이지만 왠지 정이 듬뿍 담긴 느낌이다. 물론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편리하고 현대화된 집으로 바뀌면 좋겠지만 200년이나 지난 거리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문화체험으로는 좋은 기회였던가 싶다.
3) 간저우 贛州 강물 위 배로 만든 다리 위에 떠올라
간저우 시내 중심지를 휘돌아 흐르는 간장으로 가봤다. 강변에는 송나라 시대의 성벽이 강변을 바라보며 길게 세워져 있다. 이 벽돌로 쌓은 성벽은 9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 송나라 성벽에 있는 다섯 개의 성문 중 하나인 젠춘먼(建春門)이다. 성문 안으로 얼핏 강물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성문 앞에는 작은 포장마차가 하나 있어서 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강변에서 바라보니 한 아저씨가 강물에 무언가를 열심히 씻고 있다. 깐 마늘로 보이는데 왜 강물에 씻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왼쪽으로 멋지고 긴 다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부교(浮橋)다.
남송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문학가인 홍매(洪邁)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부교는 배 3척을 하나씩 밧줄로 엮는 방식으로 모두 100여 척의 배로 만들었다. 다리의 길이는 약 400미터에 이른다. 수운이 한창 발달했을 때는 이 부교가 하루에 두 번씩 열리기도 했다. 벌써 800년이나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니 이곳 간저우의 자랑거리라 할만 하다.
부교는 배를 잇대어 묶어서 다리 구실을 하도록 한 것이다. 옛날에는 이렇게 강에 이런 교통로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자전거나 도보로 강의 남북을 연결해주고 있다. 잔잔한 강물 위에 두둥실 떠나갈 듯한 쪽배들이 부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참으로 신기하다.
자세히 보니 목선도 있지만 철선도 있다. 물살이 보기보다 굉장히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쓰레기들도 흘러가는데 배들은 꿈적도 않고 잘 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다 지탱하며 참으로 오랫동안 버티고 있다. 다리는 대부분 나무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간혹 패어나간 나무도 많다.
배를 연결한 쇠사슬에 잠자리들이 가볍게 앉아있다. 늦여름 잠자리는 참 동작이 빠르면서도 자주 어딘가에 앉는다. 잠자리들이 부교 위 배와 사슬 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부교를 걸어서 건너갔다. 비록 미풍이지만 강바람이 조금 불어오니 시원한 편이다.
강을 건너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강아지 대여섯 마리가 떼를 지어 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짐을 어깨에 얹고 부교를 오가고 있는데 강을 건너 왕래하는 훌륭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시 다리를 건너 되돌아오면서 보니 성벽이 참 길다. 중간에 성문들과 성 누각이 솟아 있는 모습이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비록 많이 보수를 한 흔적이 있긴 하지만 가지런하게 성벽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서 보기 좋다.
다리를 다 건너와서 보니 성벽에 바둑판 3개가 그려져 있다. 흰 돌과 검은 돌이 어느 정도 포석이 끝난 모습이다. 하지만 진짜 바둑의 모습은 아니고 그냥 아무렇게나 돌을 새긴 것은 조금 아쉬웠다.
성벽 위를 따라 걸었다. 아주머니 3명이 자전거를 타고 나란히 성벽을 지나가고 있다. 또 하나의 성문인 융진먼(湧金門)은 옛날에 가장 번성했던 부두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유람선을 탈 수 있으며 해상 식당이 하나 있다.
성벽에 자라난 이름 모를 들풀들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성벽 위라면 또 모를까 어떻게 성벽 사이를 뚫고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다. 씨앗의 생명을 그냥 대수롭게 생각할 일은 아닌 듯하다.
성벽 옆으로 삼륜차 하나가 삐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모터 소리가 났다. 화물선 하나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 옆에 온통 빨갛게 색칠을 한 큰 배 하나가 정박해 있다. 화물선이긴 한데 남녀 한 쌍이 우산 하나를 쓰고 타고 있다.
성벽을 따라 가니 3층 누각으로 높이가 27.8미터에 이르는 바징타이(八鏡臺)가 나타났다. 바징타이 앞 강변공원에서 바라보니 고기잡이 배가 열심히 고기 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다. 이 강에서는 자유롭게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가 보다. 짐을 싣고 이동하는 뱃사공이 열심히 노를 젓는 모습도 보였다.
공원 모래사장에서 한 꼬마아이가 놀고 있다. 장난감 트랙터로 모래를 담아 종이컵으로 옮기고 있다.
베이먼(北門) 옆으로 난 계단으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길을 걸어가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한참 동안 사마귀가 움직일 때까지 함께 노려봤다. 해가 서서히 지려는지 햇살이 점점 약해진다.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 길이 평화롭다.
성벽 옆에 아담한 가옥이 하나 있고 입장료를 받는다. 장제스(蔣介石)의 장남 장징궈(蔣經國)의 옛집이다. 장징궈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직후 국민당에 가입해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이곳 간저우에서 활동했다. 당시 장징궈가 살았던 관저인 것이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했으며 타이완으로 건너가 7,8대 총통을 역임했다.
마당에는 장징궈가 1941년에 직접 심었다는 백목련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곧게 뻗어서 나뭇가지가 온 집을 다 뒤덮고 있다.
간장 강변에 자리잡고 노을이 지면 더욱 포근해 보일 이 옛 가옥에 서늘한 강바람도 불어오고 있다. 실내에는 당시 사진을 비롯 책상 등이 전시돼 있는데 대부분 실제 사용하던 물건이다.
아담한 오목 요(凹)자 형의 방3칸 집이 정말 마음에 든다. 강변을 바라볼 수 있으며 900년이나 지난 성벽이 집을 막아주고 있을 뿐 아니라 사방이 확 트인 전망도 좋다. 게다가 ‘옛 모습을 수리하되 옛 모습 그대로(修舊如舊)’ 둔 원칙에 따라 지금까지 지켜온 집 분위기도 어느 한 곳 빈틈 없이 당시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데 낡았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정말 이런 집이라면 대궐 같은 집도 부럽지 않을 듯하다.
최종명(중국문화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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