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 : 우리가 알거니와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성경 말씀----------------------------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
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
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 연구
1. 예수님께서 제자 중 누구를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는가? 모든 제자를 데리고 가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자중 베드로와 야고버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산을 올라갔다. 이들만 데리고 간 이유는 그들만이 믿음이 강건하였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어떻게 변형 되셨는가?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으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짐
3.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신 분들이 누구인가? 환상이보임 : 모세와 엘리아
4. 베드로가 이때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베드로는 초막을 3개 지어 예수님까지 하나씩 드린다고 함
5. 이때 구름 속에서 무슨 말씀이 잇었는가? 하늘에서 말씀이 내려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두려움을 떨치고 보니 오직 예수만 보임
6. 예수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우선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믿는것
7. 8절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8.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명하셨는가? 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인자가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나기 전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심 Why? :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엘리아도 먼저 왔지만 믿지 않았지 않느냐, 나도 마찬가지이며 그들에게 고난 받을 것.
9. 세례요한 은 어떠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인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위키백과 세례자 요한 (히브리어 Jochanan ben Sacharja), 기원전 1세기 말에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예수를 심판주로 묘사하는 설교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예언자이자, 세례자이다. 요셉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로서 역시 기독교의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요한이 당시에 주로 세례를 베풀었던 활동에 비추어 그의 이름 앞에 "세례자" (개역한글판이나 침례교용 개역한글판에서는 세례, 혹은 침례)라는 별명를 붙여 부르며,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세례자라고 부른다.인도 유럽어에서 부르는 세례자 요한은 대개 다음과 같다: 영어 John the Baptist, 프랑스어 Jean-Baptiste, 독일어 Johannes der T?ufer, 이탈리아어 San Giovanni Battista.)
요셉푸스 플라비우스 역사적 중요성 요세푸스의 저서를 통해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사해 사본과 연관지어서 2차 성전기 이후의 유다이즘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요세푸스에 대한 연구는, 그와 바리새파와 관련성에 주목했다. 전통적으로 그는 바리새파에 속하면서도 나라를 판 변절자로 그려졌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신진 학자들에 의해 현대적인 요세푸스 상이 형성되었다. 이는 그가 어느정도는 바리새파이며,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역사가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1990년 이후 현대의 연구는 그가 바리새파라기보다는 사제계급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Cf. Steve Mason, Todd Beall, and Ernst Gerlach).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해 역사적인 인물과 단체, 관습과 지리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성서 외적인 사실들도 제공한다. 일례로 히브리 대학의 에후드 넷저는 요세푸스의 저술을 연구하여, 35년동안의 실패 끝에, 헤롯의 무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요제푸스가 기록한 것과 일치하는, 예루살렘에서 12킬로미터 남쪽에 떨어진 헤로디움 언덕으로 가는 길의 사막 평지의 터널과 물웅덩이 속에 있었다. 오랫동안 요세푸스의 고대 그리스어 원전은 소개되지 못했고, 불완전한 라틴어 번역에 의존했다. 1544년에서야 네덜란드의 휴머니스트인 아놀드 알레니우스에 의해 그리스어 원전이 출판되었다. 이 그리스어본은 1732년 영역본으로 번역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그 문서를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얻을 수 있다.
저작
신약성서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생애 사복음서는 대개 요한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신약성서 학자들의 모아진 의견으로 가장 일찍 쓰여졌으리라 추측되는 마르코 복음서 (1, 1-8)은 요한의 전도 활동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으며, 마르코의 기록은 다시 마태오 복음서 (3, 1-20)와 루가 복음서 (3, 1-11)에 작고 큰 전승들을 빼고 나면 거의 비슷하게 쓰여져 있다. 이와 반면에 요한 복음서 (1, 19-28)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서서 자신의 활동사항을 보고하는 투로 짧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방법의 차이들은 복음서 편집자들의 신학과 편집의도가 달라서 그런 것일 뿐, 세례자 요한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요한의 탄생과 가족 사항은 오로지 루가 복음서(1, 5-25)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루가에 따르면 요한은 유대의 사제직에 있던 즈가리야 (고대 희랍어: 자카리아스)와 아론의 피를 받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아들이라고 한다. 요한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늙도록 아내로부터 아이를 얻지 못하고 살던 즈가리야에게 어느 날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곧 엘리사벳이 남자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며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요한이라 지어 부르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도하는 일을 맞게 되리라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즈가리야는 나이가 지긋한 관계로 천사가 전한 탄생소식을 믿지 못하여 상당히 몇개월 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설화에 뒤이어서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 즉, 탄생설화를 덧붙이는 편집구조로 요한과 예수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태어났으며,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얽혀진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빨리 태어났으며 태어난 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가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며 설교하기 시작할 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 기독교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를 격렬한 심판자로 소개한 예언자로 본다. 또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미 엘리야갸 왔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칭해, 그가 큰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인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마태 11:14, 17:10-2, 마르 9:11-3)
신약성서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생애 복음서는 대개 요한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신약성서 학자들의 모아진 의견으로 가장 일찍 쓰여졌으리라 추측되는 마르코 복음서(1, 1-8)은 요한의 전도 활동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으며, 마르코의 기록은 다시 마태오 복음서(3, 1-20)와 루카 복음서(3, 1-11)에 작고 큰 전승들을 빼고 나면 거의 비슷하게 쓰여져 있다. 이와 반면에 요한 복음서(1, 19-28)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마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서서 자신의 활동사항을 보고하는 투로 짧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요한의 탄생과 가족 사항은 오로지 루카 복음서(1, 5-25)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루카에 따르면 요한은 유대의 사제직에 있던 즈카르야(고대 그리스어: 자카리아스)와 아론의 피를 받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아들이라고 한다. 성경에 따른 요한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늙도록 아내로부터 아이를 얻지 못하고 살던 즈가리야에게 어느 날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곧 엘리사벳이 남자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며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요한이라 지어 부르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에 덧붙여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도하는 일을 맞게 되리라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즈가리야는 나이가 지긋한 관계로 천사가 전한 탄생소식을 믿지 못하여 상당히 몇개월 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에 뒤이어서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적는 편집구조로 요한과 예수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태어났으며,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얽혀진 것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빨리 태어났으며 태어난 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가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며 설교하기 시작할 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가 세상에 올 것을 소개하기 위해 보냄 받은 예언자로 묘사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3주일에 마가복음서에 기록된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읽는다.(대림절 문서를 참고하라.) 그의 설교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속죄양으로서의 메시아 사상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중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요한의 증거는 기독교 신앙이 정립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한은 또한 메시아가 옴으로써 곧 심판이 온다고 처음에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일반 민중의 기대와 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예수는 조금 보정을 해 주어야 했다(마태오 11장).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전한 위의 두 가지 메시아 사역은 시간차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초림에는 속죄양의 겸손한 모습으로 오고 두번째 올 때는 심판주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또 성서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이 사람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11:11)라는 구절이 나오듯, 그는 구약 최후의 예언자이자 신약 최초의 예언자인 것이다. 세례자 요한하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사람으로 유명한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보도를 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스스로 원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1]
세례자 요한과 침례종파 침례교에서는 예수가 물에 잠기는 세례예식인 침례를 받았다는 해석을 하여 침례를 성서적 세례라고 주장한다.
만다교의 시각 만다교도들은 세례자 요한을 최후의 예언자로 여긴다. 만다교도들은 그가 예수를 세례해 주었다는 데 동의하지만 예수를 선지자로 받아들이기는 거절한다. 그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유일한 메시아이다. 그래서 역사비평을 성서해석방법으로 받아들이는 성서학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를 초대교회가 만다교 신자들과 누가 메시아이며, 예언자인가에 대한 논쟁을 한 역사적 배경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만다교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천사가 세살짜리 아이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는데, 요한은 그가 천사인 걸 알면서 그에게 세례를 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죽는다. 천사는 요한의 사체를 진흙으로 감싼다.
9-1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제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의 대답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수님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기에 이 소문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구약의 예언에 따라서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라고 했던 것은 유대인들은 예레미야 역시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리워 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과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권위를 보고 이처럼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평가는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이 무엇인가. 왜 이와 같은 고난을 받으셨는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은 처참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뤄졌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이 비록 주님을 3년 여 따라다니며 여러 말씀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한 존재에 불과함을 익히 아시고 이제 곧 닥쳐올 자신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 제자들이 절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신성을 밝히 드러내 주시며 그들에게 영적인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⑶ 천국의 영광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우리 모두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우리 주님과 영생복락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11. 당신이 받을 영광이 무엇인가?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 할 수 있는가?
내가 받을 영광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은 구원과 천국의 영광, 예수 중심의 신앙생활로 고난에 동참
제목:변화산의 기적
최근의 의학이 발견한 호르몬중에 "다이돌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엔돌핀이 암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다이돌핀의 효과는 엔돌핀의 4,000배라는 사실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럼 이 다이돌핀은 언제 우리 몸에서 생성될까요? 바로 "감동 받을 때"입니다. 좋은 노래를 들었거나,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되었을 때,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엄청난 사랑에 빠졌을 때, 이때 우리 몸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혀 반응이 없던 호르몬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안나오던, 엔돌핀, 도파민, 세로토닌이라는 아주 유익한 호르몬들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굉장한 감동이 왔을 때 드디어 위에서 말씀드린 "다이돌핀"이 생성됩니다. 이 호르몬들이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 강력한 긍정적 작용을 일으켜 암을 공격합니다. 대단한 효과이지요.
그래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일시적이지만, 감동적인 설교나 기도 찬양 등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성령 충만이 임하면 이 다이돌핀이 가장 많이 생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배드리며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하시다, 찬양을 하시다 성령충만함을 받으셔서 다이돌핀이 많이 생성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를 데리고 변화산이라는 산에 올라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이 예수님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제까지 이들은 예수님은 그냥 보통 사람으로 아니 스승으로만 여겨왔는데 거기서 이 제자들은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거기서 구약의 위대한 -- 말로만 들었던 성경에서만 들었던 선지자 모세를 보았고 엘리야를 보았고 그들이 주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놀랍고도 황홀한 체험을 그들은 변화산에서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기적을 체험 했는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1.먼저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가 여기다가 초막 셋을 짓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제자들은 이런 신비한 체험을 하고는 세상의 궁궐에서 사는 것보다도 변화산에서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의 궁궐에서 사는 것보다도 이 산위에다가 초막 짓고 주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고백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내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해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분토와 같이 여기노라' 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경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변화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기가 쉽지 않기에 험하고 죄많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변화산의 체험을 먼저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또 세상을 버릴 수 있는 그런 믿음을 주님이 이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수난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은 처참한 십자가 대속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뤄졌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비록 주님을 3년 여 따라다니며 여러 말씀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한 존재에 불과함을 익히 아시고 계셨습니다.
주님과 제자들 앞에서 십자가가 길이 놓여있습니다. 그 길은 정말 고통의 길이요, 죽음이 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하늘의 영광을 본다면 십자가로 가는 그 길을 쉽게 용기를 내고 걸어갈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주님의 판단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곧 닥쳐올 자신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 제자들이 절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신성을 밝히 드러내 주시며 그들에게 영적인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므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의 영광을 보여줌으로 그들에게 용기, 담대함, 기쁨, 십자가 후에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우리들에게 항상 엄청난 에너지를 줍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광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이 영광을 보더니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기전에 먼저 하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스데반이 보았습니다. 거기서 순교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위대한 에너지를 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모습을 우리가 경험할수록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힘으로 우리는 능력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늘의 영광을 보기를 기원합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정말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하며 심지어 순교하는 것까지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셋째로,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여기서 초막 셋을 짓고 이 산 위에서 사십시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변화산의 초막을 위하여 세상의 부귀 영화를 버리는 것도 중요한데 그것이 믿음의 최종 목표 최종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초막을 위하여 세상의 궁궐도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원하신 것은 그 믿음 가지고 초막을 짓고 살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힘을 가지고 바로 그런 믿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이 불의한 세상에 내려와서 이 병든 세상에 내려와서 이 마귀가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 내려와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혹이 많은 세상, 죄가 많은 세상, 마귀가 우글거리는 세상 그러면서도 우리 육체적으로 보면 번쩍 번쩍 거리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기 위해서 바로 이런 변화산의 황홀한 체험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4. 네 번째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빛보다도 더 밝게 변할 것이라는 약속의 메시지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외형적인 변화와 내면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얼굴의 변화는 그 성품과 인격의 변화입니다. 얼굴은 감정의 표시판입니다. 평화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누구에게나 부담을 주지 않고 다정하게 보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습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습은 웃는 얼굴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주안에 기뻐하"여야 합니다. 시내 산에 40일간 하나님과 대면하고 오는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본받는 성숙한 인격으로 그리고 성품으로 변할 때,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이 해같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의복 역시 마음을 드러내 주는 거울입니다. 그 어떤 빨래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도록 빛이 나고 희었습니다. 이는 순결이요, 승리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한 구원받은 옷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신 피 공로로 우리의 예복은 희어졌으매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지혜도, 우리의 의지도 모두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용모가 해같이 빛난 것은 천국의 영광이 어떠한가를 간접적으로 소개하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비록 이 땅에서는 좁은 길, 좁은 문, 십자가의 길을 가기에 지치고 탄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도록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천국에 가서 해같이 빛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위로와 격려를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용모가 변모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완전한 변화를 제자들에게 목격하도록 허락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이 이 땅에 초림하신 때 초라하게 인간의 몸을 입고, 마구간 말구유에 오셨지만 마지막 재림하실 때는 빛보다도 더 밝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빛보다도 더 밝은 이 모습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1.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갔습니다. 기도하는 것만큼 능력을 받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정의는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교인들과 함께 하신다면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님, 삶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니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도란 구하며 응답받는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단순히 내 소원만을 응답받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뵙는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 자신과 주위를 밝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자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한시도 깨어있어 기도하지 못하느냐"하실 때 영어 성경에 보면 한시를 "한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시간은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 쫓겨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에게 일어난 변화를 누가는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이 변하였고 그 입은 옷까지 변하여서 눈부신 광채가 났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밝게 빛났다는 것입니다. 예쁜 얼굴을 가지고 싶은 여 성도님들은 특별히 귀담아 들어야 될 대목 아닙니까?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여러분을 예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앉아 있는 시간 그것이 여러분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의 영광의 반사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그 옷이 얼마나 빛났던 지 빨래하는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끝없이 선전해대는 어떤 세탁기나 표백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옷이 빛났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고 계신 순간에 그의 얼굴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입고 있었던 옷까지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믿음 생활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세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시고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35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아니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헬라어 aujtov"아우토스 인칭대명사로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또 하셨습니까? 나를 따르는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따르는 자들이 나아갈 길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을 때 칭찬을 들었습니다(눅10:42).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칭찬을 들은 이유도 저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까닭입니다(행17:11).
유명한 D.L.무디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듭난 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기로 서약하면서 생활을 했는데도 늘 넘어집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당황한 무디는 산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중에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그를 휩싸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신기한 복들이 자기 심령에 물밀 듯 쏟아졌습니다. "아, 이제 나는 됐다!"라고 생각한 무디가 산을 내려와 살아보면 그 은혜가 한 달을 못 갑니다. 그래서 아하, 혼자는 안되겠구나! 유명한 부흥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부흥집회마다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제 이런 귀한 은혜 속에서 삶을 영위하리라" 그러고 나서 한 두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또 비참한 자기를 보게 되었고, 또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에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저주하며 혐오하던 무디가 어느날 문득 펴든 성경이 로마서 10장 17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무디는 위대한 무디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오직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떠난 신앙 이것은 저급한 신비주의 신앙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 중심의 신앙은 그 터가 견고하며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를 성도 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와 말씀의 깊은 세계로, 예수님의 인격의 성숙한데까지 자라나서 빛보다도 더 밝은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빛보다도 더 밝은 모습으로 변화 받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별첨 : 송수천 목사의 설교
우리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마 17:14-20)
어느 한 가정에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부인은 아주 열심히 천주교를 믿는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개망나니 짓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부인에게 '성당에 나가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의논을 했습니다.
어디서 변화하셨는가? 마태/마가복음에는 '높은 산'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북방 가이샤랴 빌립보와 가까운 2,700m의 '헐몬산'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전통적인 견해는 갈릴리에 있는 540m의 '다볼산'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변형된 예수님의 옆에 모새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눈앞에 광경에 감동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는 허망한 말을 합니다. 또 이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는 음성으로 완전히 공포에 빠져 땅에 엎드렸습니다. 기독교는 산의 종교입니다. 인류의 역사의 시작을 에덴동산에서 시작했습니다. 노아 홍수 후 인류가 재출발한 곳도 아라랏 산에서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헌납한 것도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곳은 나중에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신앙의 진원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것도 시내 산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종교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엘리야가 참 종교를 증명한 곳도 갈멜산이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놓은 곳도 다윗 성, 즉 시온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곳도 갈보리 산입니다. 산은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접촉점을 의미합니다. 변화 산의 예수님의 변형은 기독교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확고한 증명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났으며 엘리야가 불 병거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한 사건이 변형된 사건입니다. 변화산의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여전히 메시야 전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서기관들의 말이 마음에 걸려 이를 예수께 묻자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로 왔음을 암시했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는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으며 일생 변치 않고 훌륭히 사도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그때 변화산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벧후1:6절 하반 절부터 17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지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1. 변화산의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마가복음에는 그저 산에 올라가신 것처럼 기록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9:28)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고 하며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눅9:31)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대조 종합하여 보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하였습니다.
가.믿음의 길은 기도의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할/ 기도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7:7). 온갖 헝클어진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 열쇠 마스터키인 기도가 있습니다. 깊은 기도에 사로잡히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 뜻을 이루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할/ '스펄젼' 목사님은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을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나. 변화 산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은 처참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이뤄졌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이 비록 주님을 3년 여 따라다니며 여러 말씀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한 존재에 불과함을 익히 아시고 이제 곧 닥쳐올 자신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 제자들이 절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신성을 밝히 드러내 주시며 그들에게 영적인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2. 산아래 사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읽은 본문 14절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함께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자 산아래 다른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 하나를 고치기 위해 소란을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매 예수님의 발 밑에 한 사람이 와서 꿇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아이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아이의 형편은 막9장에 보면 '벙어리 귀신이 들린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 아이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이따금씩 귀신으로 거꾸러져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기도 했습니다. 때로 발작이 심할 때면 불 속에나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그의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의 아버지의 아픔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아들이 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 아픔의 어떨까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16절입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10: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이미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 제자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느냐?' 수없이 바라보고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과 또 무슨 구경거리나 된 듯이 모여들어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가슴으로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적어도 3년은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감동도 받고 은혜도 받고 용기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화려한 이름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 속은 다 비어버린 껍데기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닙니다. 봉사도 잘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믿음이 참 좋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전혀 믿음 없는 행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참 믿음이 좋습니다'라는 말에 속은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감격이 없이 습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믿음으로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강한 자는 '붙어 다니는 놈'입니다. 성도는 붙어 다니는 자입니다. 누구에게 붙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요15: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할/ 주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때 주님은 간질병을 앓고 있는 소년 하나를 데리고 쩔쩔 매는 제자들의 불 신앙을 크게 책망하시고 아이를 데려오게 하여 귀신을 쫓아 내 주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별의별 짓을 했지만 고치지 못했는데 주께서 단번에 고치시니 묻기를 '선생님은 간단히 고치는 것을 왜 우리는 못합니까?' 라고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대답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가. 먼저 '질병으로 신음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그들을 향한 '교회의 임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질병이 죄에서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의 평안을 잃게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잃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현대의학의 증언입니다.
작가 '펄 벅'은 오늘 미국 부부의 관계를 '성적 동반자의 의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성의 자유, 성의 개방 사상을 간통과 동성애를 합법화시켰습니다. 미혼모의 증가와 독신주의 등의 사회 문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처럼 '물질의 부와 권력의 힘과 성적 쾌락'은 '현대인의 3대 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세 가지 악령에 사로잡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믿/
나. 이런 현대인들 속에 교회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교회가 할 수 있는 이 치유의 능력을 세상에서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은혜의 체험을 통해서 신적 능력을 소유해서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20절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 오늘날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메시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들린 아이에게 기도를 하니까 그 시간에 바로 나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는 못합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는데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이 주제를 붙들고 나가면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응답했으므로 그 음성이 분명히 이 시간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올 줄로 믿습니다. /할/아멘!/ 대부분 사람들은 자금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배운 것이 없어서, 배경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무엇이 없어서라고 변명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꼭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많은 믿음의 주인공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감동을 받았던 것은 그 당시 미국 여자 농구팀을 이끌고 왔던 감독입니다. 그분은 암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불같은 믿음을 가지고 드디어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그가 맨 마지막에 인터뷰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자랑스러운 믿음의 딸 양 영자의 모습을 봤습니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유남규 선수는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러분 위대한 훈련은 기적의 힘을 낳습니다. 믿음도 훈련된 믿음만이 거대한 힘을 낳습니다. 훈련된 믿음만이 기적의 역사를 이룩합니다. 믿음이란 우리 인생의 강박관념과 모든 어려움을 정복할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산은 ㈀고난과 역경일 수도 있고, ㈁낙심과 절망일 수도 있고, ㈂좌절과 패배일 수도 있고, ㈃인생의 문제, 즉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도 '절망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의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는 뜻인데,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도움의 종류는 '적군의 손에서 구해주는 군사적인 도움과 고아나 과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곤경에서 구해주는 비군사적인 도움'이 있습니다. 도움을 얻는 비결은 바로 기도입니다. 마21:21-22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할/
다. 신앙생활은 도전정신이 있어야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차피 인생은 빈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무엇인가 가지고 나온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삼성의 이 회장도, 현대 가의 정 회장도 빈 손들고 나왔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할/ 여러분! 깜짝 놀랄 사실하나를 말씀드릴까요? 인생길이 가장 위대한 것들은 모두 공짜입니다. 우리가 집도 사고, 옷도 사고, 모든 일용할 물품들을 분명히 값을 치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귀중한 우리의 생명, 공기, 자연, 시간, 건강 이런 것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공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 우리의 눈도, 귀도, 손도, 발도 공짜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도 비용이 필요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일은 믿음과 함께 시작되어집니다. 마17:20절에 보면 예수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고, 또한 눅18:27절에서는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믿음의 큰 재산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⑵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내 영혼에 비타민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계속 비타민을 먹이면 큰 믿음이 됩니다. '다니엘 파울링'이라는 학자는 우리에게 성공적인 법칙 3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분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두 손을 번쩍 들고 '주여 나는 믿습니다.'를 세 번 외친답니다. 그리고 '주여 나는 할 수 있습니다.'를 세 번 외치고, '주여 나는 오늘 사랑만 하렵니다.'를 세 번 외친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꾸 감사를 하고, 사랑을 하면 특수 호르몬이 나와서 예뻐지고 장수하게 만들고 암세포를 죽인다고 합니다. 이상구박사의 건강비결도 이런 차원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사람을 죄악감과 공포심과 걱정과 불만으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할/ 작은 믿음이라도 붙들고 나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돼는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이라도 한탄하지 마시고 용기를 모으고 믿음을 비타민을 열심히 공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위대한 영감이 따릅니다. ㈂놀라운 지혜가 따라 옵니다. ㈃거대한 현상이 생깁니다. /할/ 우리 주님은 확실하게 약속해 주십니다. 요10:10절을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할/ 여러분! 세상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 때에 누구나 분명하고 확실한 동업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육신의 형제를 동업자로 삼습니다. 그러다가 형이 그럴 줄 몰랐느니, 동생이 형을 속인다느니 말이 많게 됩니다. 또 육신의 자녀가 부모를 동업자로 삼습니다. 그러더니 또 실망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부가 제일 좋은 동업자라고 하면서 배우자를 동업자로 삼습니다. 사실 부부 이상으로 든든한 동업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배우자가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은 조석변개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은 떠나도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안 떠나십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축복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즉 믿음을 자긴 자들에게 축복해 주시며 오늘도 기적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아멘!/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 소년이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언덕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았을 때 나라를 구원하는 다윗 왕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반나절을 수많은 수모와 허탈 속에 지내던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는 보잘 것 없는 청년들이 하나님을 동업자로 삼고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시간 이후부터는 '나의 동업자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입니다. /할/
⑷믿음을 금이나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권면도 믿음을 계산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못했습니까?' '내 믿음이 얼마나 될까?' 믿음의 계산을 통해서 우리의 자고한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닫는 자가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측량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왜 나에게 축복을 안겨줍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뭔가 풀린다고 말하더니 나는 예수 믿고 더 어려움을 당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심으로 네가 하나님께 얼마만큼 '믿음을 보였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죄 때문에 통곡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일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해 보셨습니까? 그 영혼이 지옥 음부에 떨어질 것을 바라보고 얼마나 가슴을 조였습니까? 정말 모든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얼마만큼 매달렸습니까? 우리는 진지하게 이 문제들을 한 번 반성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한번은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갈릴리 해변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주님이 일어나서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만큼 축복하시고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이 시간 진실하게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 믿음에 늘 도전해야 합니다. ㈂믿음에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싱싱한 믿음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느 곳인가 나를 도울 믿음의 사람이 있다고 하는 기적을 알아야 합니다. 산 아래 내려오신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간질병으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쓰러지는 병자와 그 아비의 아픔에 예수님은 견딜 수 없는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급히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의 모습을 보시는 순간, 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여기 '믿음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패역하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는 하면서도 '주인을 향한 섬김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패역'이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왜곡시킨다' '그르친다' '굽게 한다'는 뜻의 '디아스트레포'입니다. 이 말은 잘못된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믿는 티가 나지 않는 생활이 바로 패역한 생활입니다. 헌신이 없는 생활,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생활이 패역한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패역'은 '거룩에 대해서, 정직에 대해서'의 거역합니다. 살인이 일어나고 범죄와 폭력과 테러가 일어나고 자연은 공해로 죽어가고 지구는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여러분!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귀신을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기가 간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 마귀를 이기는 길은 핵폭탄이 아닙니다. 말씀의 능력을 가진 믿음만이 이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간질병을 고친 사건은 육적인 질병만을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활 전부의 질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예수께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사업을, 직장을, 모든 부분을 다 일으키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패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은사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사를 통하여 건설됩니다. 이 은사는 믿음을 수반해야 하며 기도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⑸이제 '우리들의 생명 위에 주님의 손이 얹어져야' 합니다. 저들은 낙심하여 자신들을 바닷가에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한탄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어깨 위에 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제일 값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할/ 오늘 본문 20절에서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또 마21:2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어려운 문제의 짐을 가르쳐 말씀할 것입니다. 가정의 짐, 사업의 짐, 물질의 짐, 그 어떠한 짐도 던져지고 옮겨지는 역사가 주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할/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의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약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들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축복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아멘!/ 이 위대한 영감, 이 위대한 손길이 닿은 자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임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2009년 2월 22일 대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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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맥정 원문보기 글쓴이: 이목고
첫댓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업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