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켈리(William Kelly)
윌리암 켈리(1821-1906)는 북아일랜드의 얼스터(Ulster)라는 마을에서 영국성공회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켈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위었다. 이러한 불행이 켈리의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더욱 부지런하도록 하는데 기여를 했다.
근면하게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켈리는 더블린에 위치한 트리니티 대학에서 고전을 전공했으며, 졸업 당시 고전학부에서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20세 되던 해, 사르크(Sark)라는 섬에서 켈리는 요한계시록 20:11-12을 읽는 중, 종교적인 잠에서 깨어나도록 자기 영혼이 크게 각성하게 되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수년 후에 켈리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실 때 사용하신 다음 구절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이 말씀을 통해 저는 구원의 큰 확신과 기쁨을 얻었으며, 제 영혼이 거듭난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영혼의 구원에 대한 의심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안에 안식하고 있는 제 영혼이 죄로 인해 먹구름이 끼일 때, 크게 당황하며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일어난적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의 속죄하는 효력은 나의 보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는 것과 하나님이 그 피에 부여하신 가치에 있다는 믿음으로 해방을 얻었습니다.
" 회심 후 켈리는 국교를 떠나 소규모로 모이는 신자들의 교제와 그 운명을 함께 하였다.
그후 30년이 넘게 켈리는 건지(Guernsey)라는 도시 가까이 살았으며, 그 마지막 여생의 거의 절반을 블랙히쓰(Blackheath)라는 곳에서 살았다. 켈리의 첫 번째 아내는 건지 출신의 몽고메리양이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헤레포드 출신의 깁스 목사의 딸이었다. 두 번째 아내는 학자적 소질을 갖춘 훌륭한 언어학자였으며, 남편의 사역을 훌륭하게 조력하였다.
켈리의 학식의 정도를 측량하자면, 그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쓴 책과 설교한 분량의 어마어마한 양을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그의 지식은 너무도 방대한 것이어서, 누가 그의 설교를 듣게 되면, 분명히 켈리가 소장하고 있는 15,000여권의 모든 책을 켈리가 실제로 읽은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가 확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적어도 켈리는 자신의 장서에 무슨 책이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켈리 자신이 쓴 책의 제목들만 해도 대영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책의 카달로그의 10페이지에 달한다고 한다.
켈리는 사무엘 P. 트레겔레스를 도와 본문 작업을 했다.
2년동안 켈리는 The Prospect라는 잡지의 편집을 했으며, 그후 1856년부터 The Bible Treasury의 편집인으로서 50년간 사역을 감당했다.
The Bible Treasury의 편집일을 하면서 켈리는 영어권에서 영성이 뛰어난 사람들과 서신왕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칭 "플리머시즘" 혹은 "다비즘"이라고 부르며 교제를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한 그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는 해악한 "고등비평주의"로부터 위험이 없는 참신한 영적인 책들과 말씀의 여러 가지 중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건서적을 원했는데, The Bible Treasury가 그러한 필요를 채워주었다.
켈리는 성경 거의 전반에 걸쳐서 주석서를 발간했다. 데이빗 비이티(David Beattie)는 켈리에 대해 말하길, "켈리의 대부분의 저서는 성경 강해 형태로써, 심오하면서도 그 내용이 간략(simple)해서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어떤 켈리의 독자들은 "simple; 심플하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켈리의 저서를 읽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스위스 내과 의사였던 헨리 로씨어(Henry L. Rossier)(1835-1928)는 다비의 저서 "Etude Sur La Parole"를 세계적으로 유통하는 일에 협력자였는데, 그 책을 켈리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 "Darby's 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으로써, 모든 성경 학도가 가까이 두고 연구해야할 불후의 명작이다.
이외에도 켈리는 수년동안 다비의 저서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틈틈이 번역한 결과로 34권의 다비 전집을 내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의 글이 The Bible Treasury에 수록되어있다.
켈리는 다비의 글 속에 엄청난 광맥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난해한 점도 있음을 시인할정도로 정직했다.
다비의 글을 읽으면서 도움을 입었던 사람들은 암호를 해독하듯이 수고한 윌리암 켈리라는 사람이 있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켈리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젊은 성경학도들을 권면하면서 "다비의 모든 글을 읽으라(read Darby!)!"고 했다고 한다. 켈리는 자신의 권면의 말처럼 그렇게 했다.
그것이 켈리로 하여금 좋은 결과를 맺게 했다. 한번은 다비가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켈리에게 "켈리 형제, 형제가 사람들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써주게.
나는 단지 생각나는대로 불러줄테니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비와 켈리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동역의 참된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역자주)라고 했다고 한다.
윌리암 켈리는 다비와는 침례나 교회 치리 등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지만, 거의 대부분에 대해서는 다비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켈리를 "다비 해설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떤 미국의 작가는 다비의 예언에 대한 가르침을 에드워드 어빙과 마가렛 맥도날드라는 세칭 여자 선지자와 연관을 지으려했는데, 다비의 인격에 대한 최종적인 변호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 켈리였다.
켈리의 매우 훌륭한 글, "성도의 휴거는 누가 먼저 제창한 것인가?"(The Bible Treasury, 제4권 314p)에서 켈리는 사도행전 16장의 이야기를 하면서 존 다비가 미래 사건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마가렛 맥도날드가 황홀경에 빠져 방언하는 가운데 나온 말에서 가져왔다는 생각은 마치 바울이 빌립보에 사는 귀신들린 여종이 한 말에서 구원의 가르침을 가져왔다는 말과 다름없음을 지적했다.
이 여종이 실제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행 16:17)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만일 중상 모략적인 말을 널리 유포시키는데 수고한 데이브 맥퍼슨(Dave MacPherson)과 같은 사람의 말을 따른다면, 바울의 구원의 가르침도 또한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 될 것이다.
학식이 있는 언어학자요, 본문 비평가이자 주석가인 켈리는 세상의 조명을 피했다.
종종 자신의 저작물에 단지 W.K라고 표기했던 켈리는 그리스도 뒤에 자신을 숨기고자 했다.
켈리의 사촌이 대학에 다닐 때, 그 대학의 헬라어 교수는 그 젊은 사람이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보고 크게 놀라게 되었다.
그후에 세상에 묻혀 지내는 켈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교수는 더블린에 있는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하기 위해 켈리의 집에 갔다.
그 교수는 명문대학의 교수직을 제안하면서 "유명해지는 길을 선택하도록" 제안했다. 그러자 켈리는 조금도 지체없이 "어느 세상에서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C.H. 스펄전은 켈리에 대해 "우주를 위해 큰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다비주의로 인해 마음이 좁아진 사람"이라고 했다.
크도록 마음이 넓고 큰 형제인 스펄전이 다비, C.H. 매킨토시, 그리고 켈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펄전은 자신의 책, "Commenting on the Commentaries"에서 켈리의 책 13권을 인용했는데, 한가지 놀랄만한 것은 켈리가 만일 그토록 문제있는 사람이라면, 왜 스펄전 형제는 켈리의 그 많은 책을 읽는데 주저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스펄전이 켈리의 소선지서 강해에 대해 추천의 말을 한 것을 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켈리는 소선지서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할수조차 위대한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예를들어, 켈리는 우리 영국이 인도를 잃게 될 것을 발견했습니다(이 당시 켈리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인도의 독립에 대한 예언을 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역자주).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그 탁월한 생각을 그토록 왜곡시켜 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 스펄전은 켈리의 생각이 왜곡되게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잃게 된다는 것이 영국인들에게 애국심이 결여된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예언적인 가르침에 역점을 두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켈리는 성경학도였지, 새로운 뉴스에 대한 강해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켈리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이방에 대한 그 시대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성경적으로 강해하도록 했으며, 지금은 그것이 이미 사실로 증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강해하는 일 외에 켈리는 아일랜드 사람답게 논쟁에 참여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켈리는 심지어 교황의 칙령에 반박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에 따라 폰티스(H.W. Pontis)라는 사람은
"거듭난 많은 사제들과 수도승, 그밖에 고등교육과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켈리의 집과 프랑스에서 그와 교제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마라톤 경주에 있어서 42km를 넘어서면 그때부터 마라토너는 한결같이 "어떤 벽"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32km를 넘는 지점부터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이라고 한다. 매우 힘든 거리를 달려왔기 때문에 심한 고통이 있을 지라도 고통을 무릅쓰고, 혹은 그 고통을 이겨내고 더 달려야 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 벽"에 이르게 된다. 예를들어 매년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최종결승점을 향해 달리며, 마라토너들이 회귀점을 돌고나면, 그때부터 언덕을 오르는 것과 같이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 경우 "심장마비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결승점까지 달려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더 이상 달릴수없을 것이라고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달릴수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다리는 더 이상 달리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주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승자가 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택하신바 된 성도들이 결승점에 다다라서 "벽"을 만나 좌초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형제 윌리암 켈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켈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력 가운데 첫 번째를 꼽으라면 역시 평론가(controversialist)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가장 명석한 학자로서 평론 사역을 했다.
켈리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과연 켈리가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것을 생각했었을까?
1881년, 존 다비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을 때, 다비의 신실한 친구 중 몇명이 켈리를 징계하고자 했다. 켈리는 이러한 상황을 감지했었다. 켈리와 다비가 동역했던 모임의 외적인 형식과 실행에 대한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모임의 하나됨을 위해서 서로 다른 견해들은 유보되어야 했다.
그러나 런던의 파크 스트리트(Park street) 모임에서 징계가 행해졌는데, 켈리는 그러한 조치에 대해 반대했다.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켈리는 "확실히 우리 주님은 징계가 있기 전에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예비적인 절차가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지 않았는가?
'교회여 들으라'; 이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닌가?
주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고 하지 않으셨던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이 둔다면 주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다비가 자신의 추종자들이 켈리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며, 파크 스트리트 모임의 결정에 순복하든지, 아니면 출교시키겠다고 했을 때, 다비는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다비의 마지막 서신은 다음과 같이 마치고 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바울의 사역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의 사역이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여러 세대들이 있음을 보여주었고, 다른 사람은 각 세대들이 어떠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윌리암 켈리에 대한 그 어떠한 공격에도 반대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명은 소용이 없었다.
켈리는 자신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있는 수많은 모임의 교제로부터 출교를 당해야 했다. 켈리는 어떤 교리적인 오류나 도덕적인 문제로 출교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켈리는 "지역교회의 독립성"을 말한 결과로 출교된 것이다. 아마도 가장 출중하고 가장 능했던 성경교사로부터 살아있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된 것 같다.
1884년에는 설상가상으로 켈리는 동역자인 두 번째 아내를 잃게 되었다. 그 당시 켈리는 아내의 병간호를 하면서, 헤이만 웨포드(Heyman Wreford) 형제에게 편지를 쓰면서, 복음사역을 격려하고 있었다.
켈리 자신도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지만, 낙심되어 자학하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켈리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바로 이 시련의 시기에 켈리의 열매가 가장 풍성한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시련의 풍파 속에서 켈리는 그의 검과 방패를 떨구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생애의 마지막 14년동안 켈리의 집필하는 사역이 펼쳐진 것이다. 웨포드 형제의 도움으로 정열적인 사역이 엑스터(Exeter)에서 진행되었다.
웨포드는 빅토리아 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허다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몰려왔다. "형제교회: 위대한 회복의 역사"라는 책에서 데이빗 비티는 "그토록 어수선한 시대에 주일저녁 집회에 수천명의 청중들이 몰려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풍성하게 축복하신 일의 결과로써, 그의 설교를 통해서 수백명씩 구주께로 인도되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고 기록했다. 22년동안 켈리는 Queen Street Meeting Room과 빅토리아 홀에서 연간 시리즈로 강의했다. 이 강의들은 속기되어, 결국 The Bible Treasury에 연재되었으며, 현재는 책으로 편집되어 있다. 조그만 안경을 쓰고, 종종 어깨를 으쓱거리며, 밝게 빛나는 얼굴에는 마치 새겨진 듯한 미소를 머금은 사람이 엑스터에 있는 의사의 집 문앞에 서있다.
날카로운 위트와 낙천적인 모습은 그대로이지만, 발걸음은 왠지 무겁다. 불면증으로 인한 고생과 기운없어 보이는 사람이 1906년 웨포드 박사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다.
헤이만 웨포드가 켈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간호를 하기 위해서였다. 켈리의 생애 마지막에는 두딸이 임종을 지켰는데, 켈리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이 쏟아졌다고 한다.
켈리는 생애의 마지막 기간을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켈리는 침대에 누워 웨포드 부인을 올려다보며, "내 마음의 빛은 그리스도입니다"고 말했다. 웨포드 형제는 침대 가까이 다가서면서, "켈리 형님, 좀 어떠세요?"고 물었다. "힘이 없지만 천국가기에는 충분하네"라고 켈리는 대답했다. 켈리가 한 마지막 말 중에서 한가지가 그의 장례식 메시지로 사용되었다.
"참되고 실제적인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십자가, 세상의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실제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도우시길 빕니다. 아멘. |
출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칼빈주의- 원문보기 글쓴이: 에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