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눈박이 외계인
눈이 한개인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눈이 두개인 사람이 외계인이 된다. 나는 어제 청문회장에서 눈이 하나달린 괴물들에 맞서는 외로운 두눈박이를 보았다.
19일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2차 청문회가 열렸다. 이날 청문회에는전∙현직 국정원관계자 7명과 경찰관 15명 등 총 26명의 증인이 출석해 사건의 진위를 다퉜다. 지루한 공방이 오간 이날 청문회의 쟁점은 이정도로 요약된다.
1)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외압이 있었는가?
2) 경찰수사과정에서 축소∙은폐수사가 있었는가?
3) 중간수사 발표가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이었나?
이 질문들에 대해 권 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의 경찰관들은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응답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경찰의 수사는 정당하고 합리적이었으며,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개입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경찰수사과정에서 사라진 100쪽 분량의 분석자료에 대해 묻자 모두 "모른다"고 답했다. 경찰이 은폐수사를 벌였다는 의혹의 핵심증거에 대해 아무도 해명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사건초기 경찰수사를 지휘했던 권은희 과장(당시 수사경찰서 수사과장)은 이들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권 과장은 외압을 가하지 않았다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발언은 거짓말이며, 수사과정에서 의도적인 축소-은폐수사가 있었고, 중간수사발표는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논하고 싶지 않다. 국정조사 과정과 청문회를 지켜보고도 아직 그런걸 따진다는 것 자체가 비이성이다. 이 글은 청문회에 참석한 '부품'들과 한사람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다.
훌륭한 조연들
기타등등 14명의 경찰 증인들은 일사불란한 증언으로 권 과장의 증언을 철저하게 소수의견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권은희 과장은 고 노무현 대통령 이후 가장 핫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권 과장의 증언은 시종일관 차분했지만 간결하고 명쾌했다. 청문회를 지켜 본 사람들의 관심은 14명 경찰관들의 압도적 다수의견이 아닌, 1/15의 소수의견에 불과한 권은희 과장의 발언에 집중됐다. 누가 뭐래도 '권은희 청문회'였다. 여당 의원들은 그녀에게 매우 비상식적인 질문세례를 퍼부었지만, 그럴수록 권 과장의 발언에서는 기품이 넘쳤고 그녀의 당찬 기개는 기타등등 14명의 경찰 증인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광주경찰이냐? 대한민국경찰이냐?" -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 "왜 혼자만 다른 주장을 하나?" -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했나?" -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 "종북이야기에 반론하는 사람은 종북세력과 한 편이다" - 새누리당 이장우 의원 |
이날 청문회장에서 나온 망언들이다.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마련된 청문회장에서 이런 바보들의 행진을 보고있다는 것 자체가 이나라 민주주의의 치욕이다. 우리는 이날의 치욕을 잘 기억해 후세에 전할 의무가 있다.
영혼없는 관료들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그러나 어제 청문회장에서 보았던 증인들은 단지 '영혼이 없다'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만큼 잘 기름칠 된 '부품'의 모습이었다. 내눈에 비춰진 그들은 양심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아닌, 그저 주어진 목적에 의해 움직이는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그런 금속성의 '부품'들 사이에서 인간 권은희가 빛을 발했던건 당연하다.
권은희 과장을 향한 찬사가 쏟아진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찰이며, 정의의 상징으로 추앙받는다. 그럴 자격이 있다. 권 과장을 더욱 빛났게 했던 건 '악역'을 맡은 훌륭한 조연들의 존재였다. 특히나 함께 증인으로 나선 권 과장의 동료 경찰관들은 거짓을 담합함으로써 진실을 말하는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영혼을 팔아 한명의 영웅을 만들었다. 참으로 값비싼 '희생'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가림막 뒤의 여배우
권은희 과장이 맞서 싸워야했던건 여당 의원들과 동료 경찰들만이 아니었다. 청문회장 한켠에 마련된 가림막 뒤에는 권 과장이 맞서야 할 또다른 외눈박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목소리출연으로 만족해야 했던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은 권은희 과장의 증언과 반대되는 주장을 '읽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카메라에 컨닝페이퍼를 들키기도 했고 '대본'에 없는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 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댓글녀 김하영은 회심의 눈물연기까지 선보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흔한 아이돌배우의 발연기에도 미치지 못해 보였다.
어제 청문회의 또다른 주요 쟁점이다.
국정원 여직원, '감금'인가 아닌가?
댓글녀 김하영은 자신의 행동이 정치개입과는 무관한 "북한과 종북세력의 왜곡 선전활동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말하며 일체의 곤란한 질문에 대해 "모른다" "답변이 곤란하다"며 회피했다.
권은희 과장은 이번에도 '소수의견'을 피력했다. "감금을 당해 무서웠다"는 김하영의 증언에 대해 권 과장은 "법리적으로 감금은 유·무형적으로 장소 이전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이라며 "김씨가 얘기했듯 당시 저와 통화가 진행 중이었고 (김하영은) 저희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금이 아니다"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두 사람의 주장이 엇갈린다. 한명은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말했고, 다른 한명은 가림막 뒤에 숨어서 말했다. 인간 권은희의 말과 얼굴없는 국정원 '부품'의 말, 누구의 말을 믿을지는 당신 몫이다.
둘을 가르는 차이 - '영혼'
김하영이라는 인물은 참 흥미롭다. 그녀는 작년 12월 12일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다. 얼굴도 이름도 없다. '감금'됐던 김하영은 진짜 김하영이 아니다. '감금'자체가 허구인데 '감금됐던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감금녀 김하영'은 국정원과 여당의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인물일 뿐이다. 어디에도 인간 김하영은 없다.
청문회를 빠져나가는 김하영의 사진을 두고 진짜 김하영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의미없는 의심이다. 그것이 김하영이든 아니든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김하영이라는 이름에는 얼굴도 영혼도 없다. 청문회에 어떤 몸뚱이가 나왔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권은희 과장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찰관이 되었다면, 김하영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직원'이 되었다. 이렇게 선명하게 대비되는 <명예와 불명예>도 드물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같은 자격으로 청문회장에 선 두 인물이지만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같은날 청문회장의 증인으로 선 김하영과 권은희. 공무원이라는 점과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을 빼고서는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인간상이다. 그들은 색으로 치면 흑과 백이요, 크기로 치면 좁쌀과 태양이다. 본의아니게 두사람을 비교해야 하는 공교로움과 미안함을 권은희 과장에게 전한다.
지금이 정의로운 시대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권은희 과장에게서 '영웅의 기개'를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를 두눈박이 외계인으로 만든 것은 눈이 하나달린 괴물들이 지배하는 작금의 난세(亂世)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녀가 수많은 외눈박이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정상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링' 밖에서 수많은 두눈박이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도 또다른 '권은희'가 될 수 있다>
권은희와 김하영, 두 인간상의 완벽한 대비는 한가지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권은희류'인간으로 살 것인가, '김하영류'인간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것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야 하는 건 인간의 숙명이다. 물론 그 둘은 매우 전형적인 '예'일 뿐 그들 사이에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인간과 부품>
<소신과 굴종>
<양심과 거짓>
<정의와 불의>
권은희과 김하영은 그 선택의 결과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하영처럼 살면 김하영이 될 것이고, 권은희처럼 산다면 당신도 권은희가 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청문회장에 섰던 두 사람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이 사회가 조금은 정의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댓글 아고라 '다람쥐 주인'님의 글은 읽을만한 글이 참 많습니다. 블로그도 한번 가보세요. http://daramjui.tistory.com/
새누리당 외눈박이들의 거짓과 음모가 판치는 국정조사 청문회장을 매우 잘 묘사한 글입니다. 머지않아
하늘은 지금은 소수인 것 같지만 진실의 편이라는 것을 (어제 오늘의 고국의 시국상황을 보면서) 증명해
보일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