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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헝가리인들에게 남다른 호감을 가지는가
산단의 끝인 T자형 로터리를 우측으로 벗어나면 뽀르뚜 다 모이따 길(R. Porto da Moita)이다.
까미노는 이 길을 따라서 IC2(지선도로2호선)를 지층으로 입체 통과한 후 곧 좌회전한다.
이스뜨라다 벨랴 길(R. Estr. Velha), 오래 된 길임을 뜻하는 노명이다.
포도밭과 유칼립투스 숲이 있는 이 길을 따라 남하를 계속하면( R. Sra. da Alumieira ~ EM601-2 ~
R. Prior Dr. Cura Rachão 등 약 3.3km) 바후와 통합하기(2013년) 전에 프레게지아의 다운타운이
었던 아구아다 지 바이슈(Aguada de Baixo)다.
교구교회(Igreja Paroquial de Aguada de Baixo)에 이어 끄루제이루(Cruzeiro/Crucero/길에 서
있는 돌 십자가상)를 지나는 까미노 뽀르뚜게스.
남하를 계속하여 예배당(Capela/Capilla)을 지난다.
지도의 표기는 '까뻴라'지만 소규모 슈라인(shrine)이 바른 표기일 것이다.
남쪽 지근(Aguada de Baixo의 lugar Aguadela)의 노변에 자리한 까페가 눈에 잡혔다.
진지한 교감이 있는 추억거리를 만든 하스떼이루(Cafe) 이후 처음인 이 까페(Rossio/호씨우)는 이름
대로 광장(rossio는 뽀르뚜갈어로 광장)이 딸린 까페다.
광장의 벤치에서 아직 녹지 않은 물을 마시고 사과 1개를 먹으려 할 때 다가온 두 청년.
처음 보는(까미노에서는) 최 고령자의 인력(引力)에 끌렸다는 순방향 뻬레그리노들이다.
28, 26살의 헝가리 청년이라고 자기 소개를 먼저 한 그들은 내 나이가 궁금하단다.
(Sir, would you tell us your age, please)
81살 나이에 압도된 그들 중 하나가 비로소 국적을 물어왔다.
매너가 다를 뿐 이런 경우는 흔했는데, 서양식일 망정 조신하고 예의범절이 탁월한 이 젊은이들.
다른 청년들과의 추억까지 반추하게 한 그들이 내 맘에 쏘옥 들었다.
대서양 해변, 고지대의 노르떼 길에서 1박할 때였다.
여름을 즐기던 피서객들이 모두 철수하고 나홀로가 된 밤에 깁자기 몰아닥친 대서양의 거센 풍우에
천막집이 망가지기 직전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밤길을 걸어오던 젊은이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천막집을 리모델링해 편한 밤을 보내게 도와주었는데,
예의바른 볼런티어(volunteer) 청년들도 헝가리인이다.(메뉴 '續까미노이야기' 6번/5회글 참조)
내가, 가장 열정적이고 순도 100%의 뻬레그리나로 지목한 손녀(까미노에서맺은)도 헝가리 여인이다.
까미노에서 마주한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친근하게 호감 가는 나라 사람들이라 주저
없이 나이는 물론 국적까지 알려 주었다.
남은 사과 1개도 사연을 말해 주며 둘이 나눠먹도록 하고.
그렇다면, 까미노에서 나는 헝가리인에게 남다른 호감을 가졌는가.
모든 까미노에서는 한반도의 북쪽 사람들(北韓) 외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지구촌의 모든 사람과
교류하게 되는데 유독 헝가리인들에게 더 호의적이라는 뜻인가.
단언하건대, no다.
까미노에서는 정치체제는 물론 역사와 문화, 종교가 다른 지구촌의 만민이 함께 걷고 먹고 자기 때문
에 이질감에서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뻬레그리노스의 중대 과제라할 수 있다.
종교적 영성 수련은 차치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인성 훈련 없이는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영, 정서적 호 불호가 갈린다 해도 드러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2차대전 이후 동구권 나라들은 공산블럭에 가담했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으며 아직도 진행형이다.
까미노들에서도 시간과 돈의 절대적 부족 때문에 목불인견의 신체적 참상을 돈독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고 혼신을 다해 걷고 있다.
치료를 위해 쉴 시간이 없으며 소위 영양 보충을 위한 외식은 커녕 치료비도 없다.
뼈가 보일 정도로 갈라진 발과 다리를 붕대로 싸매고 당초의 예정대로 걸어야 하는 그들이다.
걷기가 힘겹다는 이유로 고가의 차량을 이용하며 신개발 기법인양 우쭐대는 사람들과는 하늘과 땅의
차가 있는 그들(동유럽권의 Peregrinos)에게 나는 무한한 경의를 보내며 기꺼이 함께 걸었다.
그들 중에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나라 사람들도 있으며 헝가리인과의 접촉이
많은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굳이 산술적으로 해명한다면 확인을 하지는 않았으나 동구권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뻬레그리노스의
수가 많기 때문이라 할까.
무엇보다도 그들의 예의 바른 언행이 그들의 수를 많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리라.
드디어, 아침나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몸과 기운.
25km 뿐 아니라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을 만큼 싱싱해졌다.
기압골에서 허우적거리던 내 전체를 최고조에 이르게 끌어 올려 준 볼런티어들은 까페 하스떼이루의
이사벨과 천사 넬슨, 이 헝가리 청년들이다.
교회도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른다
까미노는 여기 호씨우에서 새 이름의 길(R. Alto da Povoa)을 따른다.
폭이 넓지는 않으나 높다(alto)는 이름에 비해 완만하고 미미하게 오르내리는 포장 도로다.
널따란 숲을 가로지르는 길 양편으로 부분적인 개발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주택들도 띄엄띄엄 들어서
있을 뿐 취락이 형성되지 않은 지역이다.
뻬레그리노스에게 시급한 생필품은 사전에 준비햐야 함을 의미한다.
공급자가 매력을 느낄 만큼의 수요가 없는데 고정 공급망(가게)이 있겠는가.
호씨우 남쪽으로 1km쯤(작은삼거리모퉁이)을 지날 때 눈에 띈 것은 소교구마을 아구아다 지 바이슈
(Freguesia de Aguada de Baixo)의 표지판이다.
이 지점이 프레게지아 아구아다 지 바이슈의 시종점임을 의미한다.
아베이루현의 지자체 아게다와 아나디아(Anadia)의 경계라는 뜻도 된다.
지자체 아나디아의 소교구마을 상갈료스(Freguesia Sangalhos)의 시종점도 되고.
순 역 방향에 따라 진입과 탈출, 송영(送迎)을 표하는 역할도 한다.
역방향인 내게는 아게다의 아구아다 지 바이슈에서 아나디아의 상갈료스로의 진입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바후(Barrô)와 합병하기 전 프레게지아(소교구 마을)의 표지판이기 때문에 철거 대상이다.
합병 2년에 불과하여 철거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으나 전체 까미노(프랑스일부와이베리아 반도)의
주변에는 이와 동일한 운명의 표지판들이 무수히 방치되어 있다.
지방 행정구역의 변천사(變遷史)라고 강변할 텐가.
역사는 커녕 부식으로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잔해가 흉물로 남아있는데도?
까미노는 알뚜 다 뽀보아 길을 따라서 상갈료스의 와인농장(Quinta da Grimpa)과 까뻴라(Capela/
Capilla/예배당)를 지난 후 남행하는 꼼바뗀치스 길(R. dos Combatentes)을 따른다.
아제냐(Azenha / 상갈료스의 루가르)의 까비스 상 조앙(Caves São João da Azenha / 와인농장)과
아벨랑스 지 까미뉴(Avelãs de Caminho)의 까뻴라 까지 1km 미만의 길이다.
미니 슈라인(shrine/santuário)과 세탁실 까지 딸려 있으나 관리가 매우 부실해 보이는 예배당이다.
규모있는 취락이 형성되지 않아서 모일 신도가 없기 때문일까.
한 이베리아 반도지만 스페인의 벽촌과 달리 이 지역(뽀르뚜갈의 시골)의 까미노에는 활성적인 교회
가 없고 간혹 있는 십자가 건물은 소규모 예배당 수준이다.
그나마도 부실한 관리로 후이나(ruina/붕괴)가 우려될 정도다.
스페인의 외진 까미노에서는 "까미노를 잃었는가, 걱정하지 말고 교회를 찾아가라"는 말이 나돈다.
반드시 교회를 거쳐 가는 까미노와 교회의 불가분의 관계를 짚어보게 하는 말이다.
바닥에 깔려있는 까미노(길) 표지는 보이지 않아도 원근 불문, 높이 서있는 교회는 보인다.
교회를 찾아가는 것과 까미노에 들어서는 것은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교회의 왕래 길이 바로 까미노니까.
그러므로 잃어버린 까미노는 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까미노 자체인 교회에 당도하면 절로 교회문을 열게 되는데 잠겨있으며 을씨년스런 까뻴라의
문을 열고 싶겠는가.
내가 너무 성급하게 비판했는가.
까뻴라 이후, 꼬이뚜(Coito/lugarejo/bus stop)를 지나는 길 양편이 사뭇 달라져 가고 있다.
앞 마당에 예수상(像)이 서있는 주택을 비롯해 인기척을 강하게 풍기는 건물(주거용)들이 돋보이고
밀도를 높혀가고 있는 듯이 보였으니까.
전자제품판매점(Vei-Gás,Lda Sede)과 보건소(Centro de Saude de Avelãs de Caminho)가 있다.
상주 인구가 많음을 의미한다.
라르구 노싸 세뇨라 두스 아플리뚜스(Largo Nossa Sra.dos Aflitos/아플리뚜스의성모광장)를 따라
지자체 아나디아의 프레게지아(소교구마을) 아벨랑스 지 까미뉴의 다운타운에 당도한 것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데
까미노는 V자 형으로 N1 국도에 진입한다.
합류지점에는 이그레자(Igreja / 교회)에 버금가는 까뻴라(예배당)가 있고 기념비(Monumento /A
Henrique Marques Moura의 흉상)도 있다.
이 지방인들에게는 기릴만한 인물이겠지만, 이 늙은 뻬레그리노의 눈을 끌어간 것은 그 앞에 서있는
'모혼 까미노 뽀르뚜게스 303km'(Mojon Camino Portugues 303km/스페인어)라는 이정석이다.
다만, 303km의 근거(기점)가 애매한 것이 옥의 티라 할까.
순방향(a Santiago)과 역방향(a Lisboa), 중간지점을 모두 상정해 보았지만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백두대간과 9개의 정간 정맥들, 옛길(10大路) 기타 걸을 수 있는 장단 거리 길들을 두루 섭렵
하며 개탄한 것은 하나같이 가지각색인 이정표였다.
국내외에 우후죽순처럼 신출하는 무수한 단체 중에 이런 오기를 바로잡을 모임은 왜 없는가.
가공할 정도로 발전한 거리 측정기기와 기법을 깡그리 외면(거부)하고 구태의연하기는 이베리아반도
도 예외가 아니다.
까미노 가이드북으로 큰 재미를 보고 있는 출판사들이 제각각이고 심지어 스페인 최대의 자치지방인
까스띠야 이 레온의 훈따(Junta/지방정부)가 발행하는 가이드북들도 버전(Version) 마다 각각이다.
아(to)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까미노가 가장 많다는 자부심으로 각종 가이드북을 출판, 무상으로
무한 공급하고 있지만 이정표는 예외 없이 낙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산업단지 또는 개발지역의 까미노를 옮겨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관광객의 욕구 충족이라는 이유로 경광 좋은 코스의 신설도 있다.
까미노가 지역 이기주의와 지방 권력 간의 키재기 다툼에 희생물(루트의 이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거리가 들쭉날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변명이야 말로 침묵하는 것만 못하며 까미노와 정통 뻬레그리노스를 욕보이는 짓이다.
인위적인 길은 까미노가 아니며, 까미노가 아닌 길을 걷는다면 뻬레그리노스도 아니기 때문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명과 인명의 오류도 부지기수다.
까미노를 걷고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더러는 책을 냈거나 내려 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들 역시 잘못된 자료를 인용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오류 투성이 책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출판계의 금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은가.
나쁜 사람이 좋은 책을 만들 리 없고 나쁜 책이 바른 사람을 만들 리 없다.
못된 사람은 못된 책을 민들고, 그 못된 책은 역시 못된 사람을 만드는 무한 악순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한다?
광에서 인심 난다
남하하는 까미노는 국도(N1, IC2)에 진입한다.
활대 형으로 남하하다가 국도에 편승한 것.
곧 정자나무 아래, 휴게벤치가 있는 노변의 돌십자가상(Crucero/Camino Portugues de Santiago)
앞에서 국도를 떠나 남남동 길(R. Castelo ~ Av. Laranjeiras ~ R. Solidariedade)을 따른다.
벤치에서 잠간 휴식을 취하는 사이.
무심코 펼쳐 본 구글 지도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길에 들어서면 초입에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묵게 되었을 숙박소"(Quinta da Portela/Caminho
de Santiago)가 들어서 있는 길.
세라믹 회사(Colorobbia Portugal-indústria Cerâmica Lda)가 자리한 N334 도로를 건너 N235
국도(Variante à N235)에 진입할 때까지 3km쯤 되는 포장 소로다.
내 기억이 맞다면 2015년 7월 이후에 생긴 숙박소일 것이다.
내가 통과한 2015년 여름에는 보지 못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으니까.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잠긴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두들겨 보았으나 오지 않는 응답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는 나그네다.
길 양편이 유칼립투스와 잡목 숲이지만 볼품 없는 숲이다.
무계획에 질서 없는 개발 탓일 것이다.
지근에 관리되고 있는 공동묘지(Cemitério de Avelãs de Caminho)가 있다.
인근에 마을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 지역 역시 미구에 산단지역으로 정착될 것임을 뜻하는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군사용어를 빌리면 전진기지 또는 전위부대라 할까.
국도를 횡단한 까미노는 원형 삼거리(Rotunda do Cabecinho)와 원형 사거리(Largo do Cruzeiro/
십자가 광장)를 지나는 까베씨뇨 길(R. do Cabecinho)을 따라 남하한다.
프레게지아 아르꼬스 이 모고포리스의 루가르 알펠로아스(Alféloas)의 경작지를 관통하는 하천(rio
da Serra/관개용?)을 건넌 후 이그레자 길(R. Igreja)에 진입하기 까지 농로를 걷는다.
이그레자 길에서 우측, 까비스 아르꼬스 두 헤이(Caves Arcos do Rei/와인농장) 앞을 지나는데 이름
'헤이'(Rei/King/王)가 내 관심을 끌어갔다.
와인 농장 이름에 왜 킹?
3대째 이어오는 가족 소유의 와이너리(winery/양조장)란다.
'헤이'는 소비자 만족을 염두에 두고 엄선된 포르투갈 와인을 의미한다고.
한 이베리아 반도 안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스페인과 뽀르뚜갈은 토양과 기후 조건이 같을 것이다.
두 나라의 주생산품인 포도주의 질 역시 대동할 텐데 아니라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
뽀르뚜갈의 와인 산지들을 걸으며 스페인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 것은 인심이다.
국토가 협소하기 때문인지 포도의 재배에서 와인의 생산에 이르기 까지의 전체 생산 라인의 규모가
작거니와 인심도 박한 듯이 느껴졌으니까.
"광에서 인심 난다"는데 광이 좁기 때문일까.
전통을 내세우는 대부분의 스페인 양조장(와인) 앞에는 환영하는 안내판이 서있다.
와인의 생산 과정을 견학하고 시음도 할 수 있게 안주까지 준비되어 있는 공간도 있다.
까미노에서는 뻬레그리노스가 주 고객이지만 관광 여행중인 일반인들과는 상거래도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10대로와 지방의 길에서도 주조장을 지나다가 후한 막걸리 인심을 확인하기 다반사였다.
한데, 뽀르뚜갈에서는 그같은 체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 때는 과문 탓으로 돌렸지만 뽀르뚜갈을 떠날 때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어떤 기회에 드러낸 아쉽고 허전한 내 감정을 위무한 한 뽀르뚜갈인 친구 왈:
뽀르뚜갈의 와이너리도 스페인 같은 안내판 홍보는 없지만 시음의 기회를 주며 이 곳 헤이 와이너리도
월요일 ~ 금요일에 시행한단다./wine tastings available Mon. ~ Fri.)
하지만 나이 90살이 목전인 내게 무료 시음할 기회가 오겠는가.
시각의 상대성
아르꼬스에 진입했다.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노변의 표지판 'ARCOS'와 와인농장의 간판 'ARCOS'다.
프레게지아 아르꼬스도 2013년에 서쪽의 모고포리스(Mogofores)와 통합했는데 표지판은 아구아다
지 바이슈처럼 건재하고 있다.
효력이 상실된 통합 이전의 표지판은 미관의 문제도 있지만 표지판 문화에 미숙한 외지인에게 혼란의
주범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을 알기나 한가.
이그레자 길을 따라 잠시 서진하면 상 빠이우 교구교회(Igreja Paroquial de São Paio)에 당도한다.
외형으로는 규모가 꽤 큰 이그레자(Igreja)다.
오늘 눈에 익은 것은 부실한 소규모 까뻴라들 뿐이었고 이그레자라 해도 까뻴라를 겨우 면할 정도였
기 때문일 것이다.
까떼드랄과 대형 교회를 보면서 왔다면 자그마한 교회로 보였을 테니까.
시각의 상대성이다.
교회를 떠나 남하하는 까미노는 노변의 음수대를 거쳐 간다.
뽀르뚜갈 타일로 정성껏 꾸몄으나 먹통인 음수대.
아침나절의 음수대 처럼 아무 해명이 없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유일한 것이 물(potable)인데, 물이 없는 깨끗한 미관이 무슨 소용인가.
지나온 2곳의 음수대에 모두 물이 없으니 100% 먹통이다.
이름 난 바이하다(Bairrada) 와인의 주산지인 지자체 아나디아의 다운타운에 들어선 까미노.
N235 도로에서 분기하는 다른 N235 도로에 진입할 때까지 주스띠누 쌈빠이우 알레그리 길(R. Justi
no Sampaio Alegre)을 따라 남하한다.
N235 도로를 건넌 후에는 벨라 비스따 길(R. da Bela vista~R. Prof. Dr. Rodrigues Lapa)을 따라
축구장(Anadia Futebol Clube)과 공동묘지(Cemitério de Anadia)를 지난다.
남하(Urbanização Montouro 길)를 계속하여 아나디아의 스포츠 단지를 지나 이스뜨라다 다 비냘
길(Estrada da Vinhal)에 드는 지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곧 지자체 아나디아의 남단 프레게지아였던 아깅(Aguim)이다.
2013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따멩고스, 오이스 두 바이후(Tamengos, Óis do Bairro)와 통합된 마을.
종착지 메알랴다(Mealhada)가 5km남짓 남았으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예정대로 마감하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하루의 정리를 뜻하는 마지막 휴식이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마지막으로 맥주 1병을 마신 바르(Bar).
주인이 메알랴다 숙소까지 6km라고 했는데 역산하면 그 지점(Bar)은 스포츠 단지 주변 어디쯤이다.
당시의 스포츠 단지 주변은 유칼립투스와 잡목 숲길로 기억되는데 이 기억을 확인하고 바르의 위치도
찾을 목적으로 인터넷 구글길을 보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전벽해라 할 만큼 광대한 숲이 거창한 스포츠 꼼쁠렉스(Complex)로 변해 있으니까.
바르는 온데간데 없고 단순한 숲길을 독점했던 까미노도 대부분이 대로변(路肩/road shoulder)으로
밀려난 꼴이 되었고.
악평 알베르게 헤지젠씨알 일라리우
까미노는 이스뜨라다 다 바르제아 길(Estr. da Várzea)을 경유, 상 조제 예배당(Capela de Säo Jose)
에서 예배당 알빨량(Capela de Alpalhão) 까지 1.5km의 거리를 남하한다.
아깅의 루가르인 알빨량에서 동남 방향으로(R. Escolas) 잠시 나아가면 도로는 끊기고 숲길이다.
살아 있는 오리지널(original) 까미노의 확률이 100%인 길.
황금이 노랗다고 노란 것이 다 황금은 아니듯 까미노가 숲길이라 해서 모든 숲길이 까미노는 아니다.
하지만 까미노가 숲길이라면 오리지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애당초, 까미노의 출범 당시에는 대부분의 까미노가 숲길로 시작했다.
숲들의 개간 개발로 취락이 이뤄지고 산간벽지 외에는 발전 정도에 따라 도시와 농촌이 형성되었다.
대소 길들도 숲길에서 시작하여 필요 정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으며 이 변화는 무한한 진행형이다.
길에 편승된 까미노도 오리지널의 상실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숲길로 남았다면 당연히 오리지널이다.
까미노에서는 국보에 해당하지만 숲의 개발과 함께 흔한 길 중의 하나로 전락될 운명의 길인데 양 방
향(順逆)에서 야금야금 먹어드는 형국이라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길.
북에서 남으로 활대처럼 되어 있으며 1km도 되지 못하는 짧은 숲길이 끝났다.
이스꼴라스 길을 떠나 까르발랴스 길(R. Carvalhas)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순 방향은 메알랴다의 까르발랴스 길에서 아나디아의 이스꼴라스길로)
그 사이에 지자체 아나디아와 메알랴다(Mealhada)의 경계를 넘어온 것.
숲 내의 정황으로 보아 이스꼴라스길과 까르발랴스길이 손잡는 날이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 한데
극동의 늙은이는 그 날이 없기를 바라며 골인지점을 향해 피치를 올렸다.
(개발 없기를 바라는 것인데 억하심정이냐고 따지는 이 지역인들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남하(R. Regato)와 남서진(R. 25 de Abril)을 계속하던 까미노는 잠시 폰치 길(R. Fonte)을 따른다.
노변에 폰치(공동우물)가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
메알랴다가 종점(양방향모두)인 뻬레그리노스는 우물 길 건너편 대각선 위치에서 걷기를 끝내야 한다.
거기에 서있는 건물이 알베르게니까.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 좋지 않은 평판인 헤지젠씨알 일라리우(Residencial Hilário).
이미, 인내심의 무한 발휘를 작심했으므로 실망할 일이 없는 알베르게다.
도착한 즉시 백팩을 비웠다.
아직 떠있는 해를 이용하여 텐트와 백팩을 말리고 너른 공간에 닥치는 대로 펼쳐서 젖은 것들을 건조
하는 일 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니까.
도착하여 맨 먼저 하는 일인 등록과 베드 배정은 그 후의 일로 밀렸다.
내 알베르게 이용료의 상한선은 10€다.
10€를 초과하면 지체 없이 천막집을 짓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알베르게의 이용료가 1€만 더했더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텐트 이용의 구실이 되므로)
너른 공간인 것만도 다행이므로 모든 부정적인 점들은 접기로 한 것이다.
베드를 2등급으로 나누고, 알베르게 마다 wifi 설치가 경쟁적인데도 이를 외면하고, 있는 주방시설의
이용마저 못하게 하면서도 뻬레그리노스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알베르게.
양두구육이며 뻔뻔함의 극치지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