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비가 많이 오던 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자 골프 선수와 골프를 치게 됐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나와 골프를 치고 싶었다는 말을 건넸다. 골프팬은 알겠지만 프로 골프 선수와 한번 라운딩을 하면 골프에 대한 눈이 달라지게 마련. 하물며 세계적인 골프 선수와 골프를 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현재 박세리와 쌍벽을 이루는 그녀가 나와 골프를 치고 싶다는 연락을 해오자 은근히 가슴이 뛰었다. 미 LPGA에서 많은 갤러리를 몰고 다니는 미녀 골프 선수로 나이에 비해 기량이 월등해 차세대 골프스타로 주목받고 있는 그녀는 최근 큰 대회에서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IMF 경제난 때 박세리가 이룬 미 LPGA 우승이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되었듯, 근래 그녀가 일군 우승은 다시 한번 한국인의 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하필 그녀와 골프를 치던 날, 나의 컨디션은 제로에 가까웠다.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아주 나쁜 상태는 아니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추운 것이 과연 끝까지 무사히 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 컨디션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그녀의 건강도 염려됐다. 골프 선수는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데 비를 맞으며 골프를 치면 혹 경기에 지장이 생길수도 있는 일.
미안한 마음에 '괜찮겠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자 오히려 비를 즐긴다는 표정으로 "괜찮습니다. 수중전이라고 생각하면 되죠. 설마 비가 와서 저랑 안치겠다는 말씀은 아니죠?"라고 반문했다. 그녀의 유머 섞인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은 나는 기분 좋게 샷을 날릴 수 있었다.
최근 아깝게 우승을 놓쳤던 미 LPGA 대회 얘기를 했더니 "우승할 수도 있었다"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승부에 대한 근성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그녀에게 "다른 선수가 우승하는 순간에도 자신을 응원해준 갤러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많은 박수를 쳤습니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세계적인 골프 선수와 골프를 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골프장을 모두 돌고 나니 이렇게 마음 편하고 기분 좋게 골프를 친 적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날이 어둑해지자 우리는 지인들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식사 도중, 조금은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중 한 명이 그녀에게 지나친 팬 공세를 퍼부었던 것.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웃으려 노력하며 이를 모두 받아주었다.
나 때문에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와 빗속에서 라운딩을 돌고 또 저녁 식사 중 팬 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던 그녀.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그녀를 위해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매니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야말로 가장 무서운 계약을 한 매니저가 된 셈. 영능력자가 한 운동선수를 독려하고 힘을 줄 때 그 선수가 과연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는지 여러분도 지켜보게 될 테니 말이다.
나는 골프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과의 외로운 승부인 것이다. 여기에 운을 더해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매니저의 역할이다. 특히나 골프와 같은 스포츠는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30cm의 퍼팅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 골프가 아닌가.
"내년에도 저와 함께 골프를 칠 수 있게 몸 건강히 계셔야 해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떠나는 그녀를 보면서 나이가 들수록 더욱 완숙한 골프 실력을 발휘, '에이지 슛(Age Shoot:라운드를 자신의 나이, 혹은 그 이하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골프의 정수)'을 이룰 수 있으리라 예감했다.
과거 월드컵 4강 예언이 있은 후 스포츠 경기 결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직감적으로 그녀에게 큰 운이 오리라는 것 만큼은 확신한다. 그녀의 우승은 이제 온 국민의 기쁨이 아니던가. 미 LPGA가 한국 선수들의 독무대가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