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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의 대 로망 장한가(長恨歌)
마오저뚱(毛澤東) 친필의 장한가(長恨歌) / 양귀비 동상(華淸池)
2011년 8월, 시안(西安/옛 長安) 관광은 관광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진시황릉(秦始皇陵) 관광과 함께 인근의 화산(華山, 혹은 花山) 등산이 포함되어 있어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등산을 목적으로 떠났는데 비가 와서 등산을 하기는 했지만 구름과 안개 속에 헤매다가 왔다. 화산은 무척 험했지만 등산 코스가 아기자기해서 즐거웠다.
시안은 아테네, 로마,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꼽히는 도시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라는데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13개의 왕조가 도읍을 정했던 곳이었다고 하니 숨어있는 역사적 유물 유적과 이야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이라고 하겠다.
시안(西安-옛 이름 長安) 관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진시황릉(秦始皇陵)과 더불어 1988년 쿵리(鞏悧) 주연의 ‘붉은 수수밭(紅高粱)’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이 총 감독을 했던 엄청난 규모의 대공연인 ‘장한가(長恨歌)’ 공연이다.
이번 여행은 진시황릉과 병마용(兵馬俑), 화산(華山) 등산 등 이야기꺼리가 많지만 다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장한가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기로 한다.
입장료가 50달러인 이 공연은 비싼 입장료가 전연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중국식 오페라로, 내용은 당나라의 대 시인이었던 백거이(白居易:樂天)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써내려간 대서사시 장한가(長恨歌)가 그 모티브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엄청난 규모의 공연장인데 당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바로 그 장소 화청궁(華淸宮)의 건물들과 그 앞의 연못 화청지(華淸池)가 무대이고, 그 뒤의 여산(驪山) 전체가 배경이 되는데 그 높은 여산 정상부근에서 엄청난 크기의 인공달이 떠오르는가 하면 여산 전체에 수많은 전구가 켜지면 산이 아니라 수많은 별들이 있는 하늘이 되고, 까마득한 계곡에서 케이블을 타고 선녀가 하강하는 등 그 스케일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연못(華淸池) 가운데 설치한 무대는 물밑에 갈아 앉았다가 솟구쳐 오르는가하면 물속에서 엄청난 크기의 오작교(烏鵲橋)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산 밑의 거대한 궁궐건물에서부터 좌우의 모든 건물들이 모두 공연장으로 활용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표현할 때는 관람석 바로 앞으로 실제로 말을 탄 병사들이 달렸다는데 말에 채여 관람객이 다치는 사고가 난 뒤로는 그냥 병사들이 뛰어 들어오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도 엄청난 함성과 대포소리, 작열하는 불꽃과 화약 냄새로 온통 관객들의 얼을 빼 놓기에 충분하다. 그런 엄청난 스케일에 놀라게 되지만 실제로 이야기의 줄거리는 너무나 슬픈 사랑이야기로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당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그 내용을 금방 알 수 있고 서글픈 사랑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데 그 내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의 천재시인인 백거이(白居易/樂天)가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쓴 칠언고시(七言古詩)로 120구(句) 840자(字)에 이르는 서사시인데 특히 마지막 부분인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 부분은 특히 중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지금까지도 부부의 금실이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구절이고, 특히 공연 끝부분에서 현종이 양귀비를 안고 이 부분을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는 많은 중국 관객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기를.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으련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은 끊일 때가 없으리.
♧ 비익조(比翼鳥)-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각 각 하나씩이어서 둘이 합치지 못하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
♧ 연리지(連理枝)-각기 다른 뿌리에서 장성한 나무가 가지가 만나 하나로 연결된 나무
이 장한가는 백거이(AD 772~846)가 35세 때 시안(西安/長安) 주지현(周至縣)의 현위(縣尉)로 재직할 때 고을의 장로(長老)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서사시 형식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첫째 부분은 양귀비가 총애를 받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까지,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어 몸부림치는 쓸쓸한 생활,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가 하늘에서 내려와 현종과 만나는 장면으로 되어 있는데 공연도 그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간다.
<이야기의 배경>
<1> 현종(玄宗)- 당나라 6대 황제(AD 685~762)
현종은 52세에 총애하던 황후 무혜비(武惠妃)가 죽는데 하필이면 자신의 18번째 왕자의 부인이던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의 미모에 빠져버린다. 결국 현종은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시켜 며느리였던 양옥환을 도교(道敎) 사원에 넣어 5년간 신분세탁을 시킨 후 AD 745년, 61세 때 자신의 귀비(貴妃)로 책봉하니 그가 곧 중국 고대(古代) 4대 미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양귀비(楊貴妃)로 당시 26세였다고 한다.
도교사원에서 도사(道士)가 되면 모든 허물이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이 된다고 한다. 즉 양귀비가 다시 처녀로 깨끗해 진 것이라나... ♧무혜비(武惠妃) -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사촌 오빠 항안왕(恒安王) 무유지(武攸止)의 딸
<2>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현종은 뛰어난 시인이며 서예가(현종의 친필로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이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고, 양귀비는 당시의 미인 기준이었다지만 풍만한 체구(키 165cm, 몸무게 70kg 정도)에 체취(體臭/암내)가 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춤과 노래에 능해 현종이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면 기막히게 춤으로 표현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고 하니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던 듯싶다.
훗날 중국 사람들은 양귀비의 미모를 두고 수화(羞花)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양귀비가 모란꽃을 어루만지자 꽃이 양귀비의 미모에 부끄러워 꽃송이를 오므리고 고개를 숙였다는 뜻이다.
또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말도 있는데,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라는 뜻이다. 조비연은 임풍양류(臨風楊柳-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 형 미인, 양귀비는 부귀모란(富貴牡丹-복스러운 모란꽃) 형 미인이라 했다.
조비연은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로 너무도 날씬해서 손바닥위에서 춤을 췄다고 하여 작장중무(作掌中舞)라는 말을 만들어 낸 미인이다. 조비연은 출신이 비천했지만 가무에 뛰어난 소질이 있어 성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었고, 동생 조합덕(趙合德)까지 데려와 동생 또한 황후가 되었으나 황제가 죽은 후 자매는 비참하게 살다가 둘 다 자살하는 비운의 미녀들이다.
양귀비는 옥(玉)을 좋아해서 항상 온 몸에 수많은 옥을 달고 다녔다고 하는데 양귀비가 걸으면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잘랑거리는 옥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에도 커다란 옥을 입에 물고 잤다고 한다. 그런데 양귀비는 심한 체취(암내)가 있어 이를 감추려고 사향(麝香-사향노루 수컷의 배꼽과 생식기부분에서 나오는 향즙<香汁>) 주머니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사향은 고급 향료일 뿐만 아니라 귀중한 한약재로 그 약리작용은 ①개규(開窺-정신을 맑게 함), ②활혈(活血-혈액순환이 잘되게 함), ③최생(催生-아기 분만을 쉽게 함) 등에 특효가 있지만 여성에게 쓸 경우 지속적인 자궁경련이 일어나 임신을 어렵게 한다고 한다. 그런 연유인지 현종과 양귀비 사이에는 소생(所生/子息)이 없었다.
<3> 양귀비 일가의 득세와 안녹산(安祿山)의 등장
양귀비는 자신이 귀비의 자리에 오르자 사촌오빠 양검(陽劍)을 불러들이는데 현종의 총애를 받은 양검은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40여개의 관직을 독점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된다. 양국충에게 모든 정사를 맡긴 현종은 오직 양귀비만을 데리고 여산(驪山) 아래 온천지(溫泉池)에 화청궁(華淸宮)이라는 궁궐을 짓는데 온천물을 이용한 목욕시설과 연못을 조성하여 화청지(華淸池)라 하고 여기에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이곳 온천은 진시황 때부터 유명한 곳이었는데 현종은 이곳을 보수•확장하여 새 건물을 짓고 모든 국사(國事)를 팽개치고 이곳에서 양귀비와 사랑을 속삭였던 모양이다. 황제의 욕탕인 구룡전(九龍殿) 연화탕과 양귀비의 욕탕인 해당탕(海棠湯), 또 양귀비가 올라 머리를 말렸다는 누각 등이 남아있는데 뒤에 있는 여산(驪山)과 어울려 풍광이 수려하다.
한편, 변방의 절도사였던 안녹산(安祿山)은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인 이민족으로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고 하는데 장안으로 들어오자 젊고 우람한 체격의 안녹산에게 마음을 뺏긴 양귀비는 양자로 맞아들이고 총애하는데(나이는 안녹산이 16세 연상) 두 사람 사이가 연인사이였다고 한다.
양귀비의 총애를 받은 안녹산의 세력이 커지자 자연히 양귀비의 사촌오빠로 권력을 잡고 있던 양국충과 부딪치게 되는데 양국충이 현종에게 안녹산을 모함하면 양귀비가 나서서 적극 옹호하여 세 사람의 관계가 차츰 미묘하게 흘러간 듯하다.
<4> 안사(安史)의 난(亂)과 양귀비의 죽음
안녹산(安祿山)과 그의 휘하였던 사사명(史思明)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전횡과 부패에 대항하여 그들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AD 756년 낙양에서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안녹산은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장안으로 군사를 몰아 쳐들어오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난 중의 하나이다. 9년 간 지속된 이 난은 안녹산의 안(安)과 사사명의 사(史)를 따서 ‘안사(安史)의 난’, 혹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 이라 불린다.
안녹산이 장안의 동관(潼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양국충은 현종을 쓰촨성(四川省) 지난(濟南)으로 피난할 것을 상소하여 도피하던 중 산시성(陝西省) 싱핑(興平)에 이르렀을 때 부하 진현례 등이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잡아 처형하는데 양귀비의 복수가 두려워진 이들은 다시 현종을 협박하여 양귀비가 살아 있는 한 안녹산이 추격하는 빌미가 될 것이고, 양국충을 살해한 장병들이 불안해하여 현종의 신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며 양귀비를 처단할 것을 종용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현종은 결국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비단 끈을 내려 양귀비가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하고, 양귀비는 기꺼이 그 비단 끈으로 마외역(馬嵬驛) 앞 배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
이때가 AD 756년으로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는데 이 양귀비의 죽음을 마외병변(馬嵬兵變)이라 일컫는 것은 이곳의 지명이 싱핑(興平)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이었기 때문이다.
이 양귀비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루머가 나돌았는데 양귀비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①묘를 파보니 유골이 없었다, ②죽을 때 대신 용모가 비슷한 궁녀로 바꿔치기 했다, ③살아서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다, ④도교사원에 들어가 다시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숨어버렸다... 등이다.
안사의 난은 양귀비가 죽고 한 달 후 안녹산이 장안(長安)을 점령하여 성공을 거두지만 이듬해(AD 757) 안녹산은 자신의 맏아들 안경서(安慶緖)에 의해 살해당하고, 2년 후(AD 759)에는 사사명에 의해 안경서마저 살해당한다. 이어 AD 761년에는 사사명(史思明) 마저 자신의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당하고, AD 763년 사조의가 스스로 자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9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안녹산의 처는 고구려 유민으로 이른바 조선족(朝鮮族)이었다고 한다.
한편 현종은 난(亂) 중에 아들 이형(李亨)에 의해 강제로 황제자리를 양위(讓位)하고 태상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장안의 감로전(甘露殿)에 갇힌 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지난날 영화에 대한 허무함 속에 쓸쓸히 칩거하다가 AD 762년, 생을 마감하고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 백거이(白居易)는 杜甫(두보), 李白(이백)과 함께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3대 시인으로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향산거사(香山居士), 자는 낙천(樂天), 시호는 문(文)이다. 허난성(河南省) 낙양부근 신정현(新鄭縣)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인 낙양 용문석굴의 왼쪽 건너편 향산 기슭에 잠들었는데 그 묘원(廟院)은 백원(白園)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