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반장 월례연수] 구약 성경 인물 ① 아브라함
부르심 전의 생활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손이며, 칼데아 지방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에 살던 아브라함 가족은 어느 날 북쪽 하란으로 이주합니다. 하란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졌을 때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습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세 12,2) 하느님께서 보여 주실 땅은 미지의 장소였으므로 쉽게 떠나기에는 두려울 수도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며 낯선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아버지)와 ‘룸’(높다, 귀하다)이 합성된 이름으로, 직역하면 ‘귀하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훗날 주님께서는 계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게 하십니다.(창세 17,4-5) 여기서 ‘아브’는 아버지이고 ‘라함’은 많은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부르심 후의 생활
부르심에 응답한 이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일은 끊임없는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은 안락한 여행이 아니라 언제나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았고, 그때마다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시련의 시간을 통해 주님의 사람으로 단련되어 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
부르심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스켐에 머물 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대한 말씀을 듣고, 이후 베텔의 산간 부락에 머물다가, 이스라엘 남쪽 네겝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다 흉년이 심해져 이집트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아내 사라의 뛰어난 미모 때문에 파라오(이집트 왕)에게 불려가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창세 12,15) 이후 그는 이집트를 떠나 네겝으로 옮겼고 다시 베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 거주지는 헤브론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 전체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실현으로 사라가 임신할 것도 알게 되었고,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이후 사라는 헤브론에서 죽었고, 아브라함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헤브론은 성조(聖祖)들의 무덤이 있는 땅이 되어,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 그리고 야곱과 레아도 여기에 묻혔습니다. 이런 이유로 훗날 다윗은 이곳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임금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가나안에 정착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에도 사라는 여전히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몸종 하가르를 취해 아이를 가지라고 청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동의했고, 86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주님께서 들으셨다.’(창세 16,11)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14년이 지난 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사악을 낳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잘 어울렸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될까 두려워한 사라는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어울리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내보내도록 청하였고, 이사악이 젖을 뗄 무렵,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가르와 함께 파란 광야로 쫓겨났습니다.(창세 21,21)
오늘날 유다인은 이스마엘을 베두인족 조상으로 여깁니다. 또한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마호메트) 직계 조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은 이슬람교 성지가 되었고, 현재 예루살렘 통곡의 벽 옆에는 이슬람 사원인 황금 사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사악의 탄생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가 많아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을 때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악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셨습니다.(창세 17,19) 어원은 ‘웃다’라는 동사인데, 이는 주님께서 사라의 임신을 알려 주시자 아브라함이 엎드린 채 웃으면서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창세 17,17)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련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아브라함을 혼란에 빠뜨린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사라와 함께 끔찍이도 기다렸던 아들이며,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번제’(燔祭)는 직역하면 ‘태우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죽여 피를 제단에 뿌린 뒤 불에 태워 연기가 올라가게 하는 제사입니다.(레위 1,3-9)
괴로운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을 따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아들과 함께 모리야 땅으로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악이 아브라함에게 더더욱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합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세 22,7)라고 말입니다. 이 물음에 아브라함은 담담하게 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그리고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는데,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그 일을 중단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진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고,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합니다.(창세 22,14) 또한 훗날 아브라함의 애환이 깃든 이 모리야 땅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집니다.
아브라함의 죽음
사라는 127세에 헤브론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히타이트 사람에게서 땅을 매입해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에 아내를 안장했습니다.(창세 23,19) 이후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크투라입니다.(창세 25,1) 그는 아들 6명을 낳아 주었고, 아브라함은 그 아들들에게도 재물을 나누어 주며 동쪽 땅에서 살게 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도 175세에 죽어 사라 곁에 묻혔습니다. 성경은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장례를 주도했다고 전합니다.
생각해 보기
1. 약점투성이인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파라오에게 아내 사라를 자기 여동생이라고 말하고 뒤로 슬쩍 빠져, 파라오가 사라를 한동안 부인으로 삼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집트에도 여러 재앙이 닥쳤습니다. 당당하게 자기 아내라고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에게도 끝까지 신의를 지키시며, 아들 이사악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시련에 당당하게 맞서기보다 회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의 완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헌신적인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삶과 의지까지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습니다.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 안에서 그분의 부르심에 내 모든 삶을 투신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신앙의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신앙의 길을 보여 주었고,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길잡이, 2017년 2월호]
출처 :
http://pds.catholic.or.kr/pds/bbs_view.asp?num=3&id=161944&PSIZE=50&searchkey=N&searchtext=%EC%9D%B8%EB%AC%BC&menu=4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