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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감나무 이런 단어를 접하면, 그야말로 옛 추억의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얼마 날짜를 지나면 명절입니다.
명절을 앞두고 벌써 마음은 고향에 온 것 같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의 고향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저 자신이 태어난 원초적인 장소일 뿐 만아니라 어릴 적의 보고 듣고 느낀 진한 향수가 일게 하는 마음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향의 진한 정기가 앞으로의 바쁜 생활에서도 늘 행복할 수 있도록 텃밭을 풍성하게 일구어야겠습니다.
한편 지금 이 글쓴이가 사는 부산 청룡동에도 감나무가 영글어 갑니다.
부산의 어느 지역보다 감나무가 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늦여름을 느끼는 터라 감나무가 푸르디 푸르지만 곧 빠알갛게 될 날도 머지 않은 듯 합니다.
감나무를 보면서, 벌써 한해도 중반을 훨씬 넘어 섬을 느끼며, 남은 한해도 이 글을 보시는 분을 포함한 모든 가까운 분들이 소원이루시길 기원하여 봅니다.
고향의 감나무는 희망입니다.
고향의 감나무는 전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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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후명 저, 윤후명의 식물이야기 《 꽃 》 책소개
책을 읽다보니 『협궤 열차』나 『돈황의 사랑』에서 볼 수 있었던 작가의 감성적인 문체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것 같다.
작가 스스로 "꽃에 바친 시간은 참 길다.
'태어나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싶을"정도니 말이다. 이 책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에 피어나는 꽃들에 대한 감상문이다.
'원초적 황홀함'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것이 '꽃'말고 어디 있을까.
꽃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는 물론, 우리 시(詩)에 등장하는 수많은 꽃들 또한 만날 수 있다.
[yes24제공]
지은이의 말처럼 '철들면서부터' 꽃에 바쳐온 애정이 책 전체에서 묻어난다.
그는 학창시절 '문예반'이 아니라 '원예반'이었고, 그의 꿈은 작가가 아니라 '식물학자'였다.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연재해온 꽃.나무에 대한 글들을 모아 엮었다.
서울에서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인 노루귀부터, 잎과 꽃이 서로를 보지 못해 그리워한다는 상사화, 겨울에 더 푸르른 꽃무릇과 석창포까지, 계절별로 피고지는 꽃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담겼다.
섬세한 언어에서 은은한 향기가 느껴지는 꽃 이야기 책.[알라딘제공]
▶ 저자 윤후명
尹厚明, 본명 : 윤상규(尹尙奎)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었다.
1969년 연세대학교를 졸업, 강은교, 김형영, 박건한 등과 함께 시 동인지 『70년대』를 창간하고, 도서출판 삼중당에 취직하였다.
이후 10년 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근무하다가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출간하였다.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어 소설가와 시인의 길을 병행하면서 단편 『높새의 집』 『갈매기』 『누란시집』을 발표하였다.
1980년 전업작가로 나서 김원우, 김상렬, 이문열, 이외수 등과 함께 소설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고, 단편 『바오밥나무』 『모기』 등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시집 『名弓』(1977),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1992) 등이 있고, 소설집 『敦煌의 사랑』(1983), 『부활하는 새』(1986), 『원숭이는 없다』(1989), 『오늘은 내일의 젊은 날』(1996), 『귤』(1996), 『여우 사냥』(1997), 『가장 멀리 있는 나』(2001), 『둔황의 사랑』(2005, 2005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 선정 도서) 등과
장편소설 『별까지 우리가』(1990), 『약속 없는 세대』(1990), 『협궤 열차』(1992) 『삼국유사 읽는 호텔』(2005)등이 있으며, 그외 산문집 『이 몹쓸 그립은 것아』(1990), 『꽃』(2003), 장편동화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1994)가 있다.
이 중 단편 「둔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사막의 여자」 등이 각각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된 바 있다.
1980년대에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한 그의 작품세계는 80년대의 일반적인 소설 경향과는 뚜렷이 구별되어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직접적인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시적인 문체와 독특한 서술방식으로 환상과 주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비상하는 그의 소설은 1980년대의 시대적 부채감에서 자유로웠다.
또한 1990년대 들어서는 자전적 색채가 짙은 여로형 소설을 발표하여 삶의 본질적인 쓸쓸함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1995년 작품인 「하얀 배」는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과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정서적인 격조를 잘 살려낸 서사 기법으로, 전통적인 플롯의 규범에서 벗어나 정밀한 묘사를 통해 특유의 비유와 상징을 살려내면서 소설적 공간을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간의 일정한 간격과 정감의 흐름에 따라 도달하게 되는 이 소설의 결말은, 인간의 삶과 그 삶의 가치를 규정해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귀결된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모든 대상은 단순한 물리적 사실을 넘어서는 의미를 시사하고, 그 의미의 중첩에 의해 주제의 통합을 가능케 했다.
그런 소설적 기법은 이야기의 서술에서 미학적 거리의 조절에 성공하고 있는 이 작가의 탁월한 솜씨를 말해주는 것으로서 한국 소설 문학이 새로운 기법, 새로운 주제, 새로운 언어, 새로운 구조에 의해 그 지평이 더욱 넓혀질 수 있게 하였음을 확신하며, 섬세한 언어와 서정적 격조로 자기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1983년 『돈황의 사랑』으로 제3회 녹원문학상, 1984년 『누란』으로 제3회 소설문학작품상, 1986년 제18회 한국창작문학상, 1994년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로 제39회 현대문학상, 1995년 『하얀 배』로 제19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에는 제10회 김동리 문학상을 받았다.
현재는 창작에 전념하면서 문학비단길 고문과 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의 한마디 말씀..
유독 `나`에 집중했던 이유는 정작 우리 사회에는 그것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가치관을 뚜렷하게 지닌 사람이 없죠.
누군가 어떤 사실을 부르짖으면 우르르 그곳으로 쏠리는 경향도 강합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을 통해서라도 `자아`의 중요성을 계속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도 이 주제를 계속 파고들 생각이고요.
[YES24제공]
[책속의 글]
가을이면 그저 가슴앓이를 하는 수밖에 없는 시절이 있다. 어려운 시절, 뒹구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날리며 방황하는 발걸음이 있다.
절망이 지나쳐 캄캄하기만 한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뒤돌아보는 가운데, 뉘우치는 가운데 깃들인 새로운 삶을 놓쳐서는 안된다.
새로운 삶의 낌새조차 놓쳐서는 안된다.
가을꽃을 보며 그 아름다움의 뒤에 있는 철리(哲理)를 엿본다.
인생은 드디어 가을과 함께 자연의 철리를 배워간다.
보라. 시멘트 담벼락 뒤 티끌 흙에 뿌리를 얹고 간당거리면서도 기어코 꽃을 피우고 있는 저 여뀌 한 줄기에서. [알라딘 제공]
[독자 리뷰]
꼬물꼬물 식물들이 기지개켜고 활동을 시작할 이른봄에 읽었더라면 더더욱 좋을뻔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읽어서 좋지만, 작년에 책이 처음 나왔을땐 많이 망설였던 책이라서 그런지 빌려보고도 맘에 들어서 구입해버렸다.
학창시절 문예반이 아니라 원예반 소속이었고, 시인·소설가가 아닌 식물학자를 꿈꾸었던 분이라서 그런지 꽃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글로 표현해 놓았다고 해야할까?
봄을 시작으로 사계절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봄에는 산수유·영춘화·제비꽃·수선화·미나리아재비, 여름에는 작약·능소화·원추리·도라지꽃·옥잠화, 가을에는 국화·구절초·쑥부쟁이·쪽·감나무, 겨울에는 풍란·유자·제라늄·베고니아·동백….
향기 짙은 화려한 꽃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산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꽃들...
이름도 들었듯 모를 듯 그런 꽃들도 있고 꽃에 얽힌 전설이나 꽃을 노래한 시들도 곳곳에서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경험했던 얘기들도 재미있었다.
그림이나 사진은 단 한 점도 없었지만, 아쉽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언젠가 읽었던 야생초편지에서의 볼펜으로 그린 그림만으로도 참 만족스러웠던 나는 이번엔 그림조차 없어도 좋았다.
글맛을 보면서 꽃을 떠올리는 재미와 내 어린시절의 추억과 풋풋한 향을 그려보면서 읽는 동안내내 들판에 산속에 핀 꽃들을 발견해내고 기쁜것처럼 흐뭇했다.
[인상깊은구절]
양달개비 물망초의 뜻 6월 들어서 덩굴장미가 시들 무렵이면 새로 피어나는 꽃들도 문득 줄어든다.
아침마다 보랏빛 청초함을 뽐내던 양달개비도 갑자기 꽃 피기를 멈춘다.
양달개비라고는 하지만, 막상 식물책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옆은 보랏빛 꽃도 있고 짙은 자주보랏빛 꽃도 있는데, 고물거리는 듯한 노란 꽃술이 대비되어 아름답다.
최근에는 흰 꽃도 선을 보여서 반가웠다. 멘델이 유전법칙을 만드는 데 실험용으로 쓰여 큰 기여를 했던 이 꽃을 사람들은 흔히 물망초(勿忘草)라고도 부른다.
해가 들면 그 청초함도 속절없이 그만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나를 잊지 마세요' 하고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물망초는 우리 꽃으로 정해진 이름이 아니다.
산유화(山有花)가 그저 산에 있는 꽃에 지나지 않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풀들이 물망초가 아닐 수 없듯이.
모든 사랑이 물망(物望)이 아닐 수 없듯이 [yes24제공]
[작가가 이야기하는 추천의 글]
꽃의 빛깔, 향기, 모습에 황홀하다. 아울러 생명의 신비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이 원초적인 느낌이야말로 우리의 태어남의 의미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본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우리들 사랑이 우주에 닿아야만 완성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꽃은 우리를 뇌쇄시키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눈물겨운 몸짓이다.
그 몸짓에서 삶을 얻고 위안을 얻는 우리는 꽃을 최상에 두고 경배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함으로써 식물에 진 빚을 티끌만치라도 갚을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 윤후명(소설가,국민대문창대학원겸임교수) [알라딘 제공]
덧붙여, 이 책에 대한 좋은 기사 한편 소개합니다.
《지인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그 병원 앞 화단에 영춘화 가지가 버려져 있는 걸 주워 가지고 와서 물에 담가 뿌리를 내렸다. 그것이 해를 넘기고 4월 초가 되자 꽃을 피웠다.―본문 중에서》
“본질을 잃을 위기감에 빠질 때 나는 꽃의 세계로 간다.”
식물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가 가득한 ‘꽃-윤후명의 식물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저자의 의식이 어떻게 꽃과 더불어 깊어졌는지 읽어내는 재미도 적지 않다.
그가 살아낸 삶의 편린들과 꽃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가 조화롭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토종 식물과 희귀식물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꽃에 관한 잘못된 지식도 수정할 수 있다.
나 자신만 해도 해마다 봄이면 들뜬 마음으로 모란을 보러 집을 나서곤 하는데, 언젠가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잘못된 정보가 머릿속에 입력된 후로는 한 번도 모란꽃 향기에 취해 보지 못했다.
이 책에 따르면 모란꽃이야말로 무척이나 향기가 강하다고 하는데, 관념이란 능동적으로 마주하는 대상의 그 강한 향기도 맡지 못할 만큼 무서운 것이다.
또한 이 책에 따르면, 우리의 제비꽃 하나만도 무려 44종이나 되고 전 세계적으로는 400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절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자의 무딘 시선이 부끄러울 뿐이다.
지금도 집 뜰에다 온갖 종류의 식물을 구해 심어 놓고 정성껏 키우고 있는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끼니를 거르면서도 꽃에 대한 순정을 지켜 왔다.
생활이 힘들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야만 했던 고된 삶의 수많은 순간에도 구황식물의 뿌리를 몸에 지니고 다녔을 정도로 꽃을 향한 그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아직도 그는 마당이 좀 더 있으면 감자밭을 일궈 감자꽃을 통해 고향을 보고 싶다고 한다.
이 책이야 말로 그 열망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말했다지 않은가.
“빵 두 조각을 가진 자는, 하나는 수선화와 바꾸어라. 빵은 육체의 양식이지만 수선화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내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동물적 욕망의 회오리가 느껴질 때, 식물적 세계로 근접하며 뿌리를 튼튼히 하라’는 등의 잔잔한 메시지를 간직한 ‘꽃’으로 인해 독자의 메말랐던 마음에도 순식간에 봄꽃의 에너지가 번져 나간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치르며 저자가 얻어낸 값진 결과물을 가장 쉽게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언젠가부터 세워 놓은 공식에 따르면 그리움이란 외로움에서 움트는 감정이다. 외로움이 없으면 그리움도 없다.
외로움은 자기 존재의 밑바닥까지 가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은 없다. 삶이 적막하다 못해 무섭기조차 하다. 누구를 향해 구원의 손을 뻗쳐야 한다. 그리움이 움트는 순간이다.”
극한의 외로움과 대면하는 자의 깨어 있는 의식처럼 꽃도 지고지순한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피어난다.
그 존재가치를 아는 자에게 꽃은 단순히 인간의 삶을 장식하는 데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성찰을 위한 대상이다.
저자가 꽃을 통해 자신의 삶까지도 진솔하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동물성에 절망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조은 시인
[출처] http://news.donga.com/3/all/20060401/8291060/1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 작가의 또 다른 책 《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라는 제목의 책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2010년 5월 발간된 산문집입니다.
이 책을 소개하면..
[책소개]
작가 윤후명의 삶이 담긴 이야기
삶에 물어보고 삶에 묻어두었던 사색의 결정들
시인이자 소설가 윤후명의 새로운 산문집으로, 자아를 찾는 여행과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의 겸허한 반성, 숱한 허무와 무의미들 속에서도 꽃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인생의 순간들을 정아(靜雅)한 언어로 담아냈다.
자신의 삶을 무엇에 바쳐왔고, 자신의 삶에 무엇을 찾아왔는지,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글 속에 담아냈다.
이 책은 윤후명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전쟁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이십대에 청상이 되었던 어머니와 속 깊은 사랑으로 인생의 은인이 되어주었던 양아버지에 대한 회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화가 김점선, 이인, 민정기, 사진작가 이광호, 김영갑, 김수남, 문우 박영한, 그리고 문학의 스승으로 존경했던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황순원 선생 등 소중한 인연들과의 스침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그리고 숲과 꽃과 나무에서 얻은 성찰을 담은 글을 통해 삶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전한다.[yes24제공]
이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찾아왔는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 윤후명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은 숲과 꽃 그리고 나무에게 얻은 가르침을 통해 자아를 찾는 여행과, 삶에 대한 반성,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들을 그려내고 있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애틋한 이야기부터 화가 김전선, 사진작가 이광호, 문학적 스승인 김동리, 박두신, 박목월, 황순원 등 윤후명의 삶과 함께한 예술가들과의 추억담, 일상과 인생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시인이자 소설가 윤후명의 산문집. <꽃―윤후명의 식물 이야기> 이후 7년 만에 묶어내는 이번 산문집에는 자아를 찾는 여행과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의 겸허한 반성, 숱한 허무와 무의미들 속에서도 꽃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인생의 순간들이 정아(靜雅)한 언어로 담겨 있다.
전쟁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이십대에 청상이 되었던 어머니와 속 깊은 사랑으로 인생의 은인이 되어주었던 양아버지에 대한 회상, 화가 김점선, 이인, 민정기, 사진작가 이광호, 김영갑, 김수남, 문우 박영한, 한창기, 그리고 문학의 스승으로 존경했던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황순원 선생 등 소중한 인연들과의 스침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등단한 뒤 44년 동안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려주는 짤막한 문학 강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시인 윤후명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는 시들, 예컨대 '사랑의 먼 길' '강릉 가는 길' '자작나무 숲' '사랑 푸르름' '희망' '빈자의 자장가' 등과 화가로서의 윤후명을 보여주는 아크릴화 다섯 점(2009년작)도 만나볼 수 있다.[알라딘제공]
한국문학의 거목 윤후명이 삶에 물어보고 삶에 묻어두었던 사색의 결정들
삶에 묻는다
이 삶에 무엇을 바쳐왔는가
이 삶에 무엇을 찾아왔는가
시인이자 소설가 윤후명의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가 출간되었다. [꽃―윤후명의 식물 이야기](2003년 문학동네 발행) 이후 7년 만에 묶어내는 이번 산문집에는 자아를 찾는 여행과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의 겸허한 반성, 숱한 허무와 무의미들 속에서도 꽃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인생의 순간들이 정아(靜雅)한 언어로담겼다.
전쟁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이십대에 청상이 되었던 어머니(흐릿하고 또렷하게, 비밀 속으로/덩굴식물의 뜻)와 속 깊은 사랑으로 인생의 은인이 되어주었던 양아버지(장다리꽃밭 풍경)에 대한 회상 속에는 일찍이 문학에 마음을 빼앗겼던 시인의 젊은 날 열병이 겹쳐진다.
화가 김점선, 이인, 민정기, 사진작가 이광호, 김영갑, 김수남, 문우 박영한(처서의 이별), 한창기(푸른 입술의 반중), 그리고 문학의 스승으로 존경했던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황순원 선생 등 소중한 인연들과의 스침에 대한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시인으로, 소설가로, 나아가 화가로 인생을 '많이'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이 은은하게 스며 있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향수
문단 안팎에서 벗 삼았던 예술가들과의 추억담
꽃과 나무에서 찾은 배움과 위안들
잊을 수 없는 인연이 불러일으키는 아련함들
숲과 꽃과 나무에서 얻은 성찰들은 산문집의 백미다.
"식물과 함께함은 내게는 철학 선생을, 스승을 만나는 일과 같다. 때때로 인간으로 하여 실의에 빠질 때면 식물의 가르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철학 선생이 된 작은 나무)
강건한 야생의 모습을 한 마름에서 천년의 아름다움을 품은 요조숙녀를 떠올리고 노인장대, 서리소나무 앞에서는 삶을 고결하는 사는 법을 생각한다.
박쥐나무를 바라보며 떳떳하게 살아오지 못한 삶을 반성하고 며느리밑씻개를 만났을 때는 지난한 삶에서도 위로받는 법을 깨닫는다.
겨울에도 푸른 인동잎은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에 대한 단상을 낳는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함부로 아무 꿈이나 꾸지 말라고 내게도, 남에게도 타이르곤 했다.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이 많음은 나이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어쩌면 삶이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을 안고 살다 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인동덩굴 아래서)
고광나무, 때죽나무, 박쥐나무, 생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며 나무를 진정으로 알아가는 기쁨에 황홀해하고 파드득나물의 이름을 읊조릴 때는 마음이 행복하게 파드득거린다고 느낀다.
산문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물들, 예컨대 엉겅퀴, 개머루, 부용화, 풍접초, 어리연꽃, 벌노랑이, 비비추 벌개미취, 양지꽃, 민들레, 바위솔, 들국화, 원추리, 연꽃, 달맞이꽃, 한삼덩굴, 돼지풀, 백량금, 참나리, 능소화의 이름은 시간의 기억이자 삶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피며 맞이한 봄이 가고, 마가목의 흰 꽃이 피는 초여름을 맞이한다.
짧은 봄, 지독한 황사에 얼룩진 서울의 봄이었다. 누구는 이제 봄이 없다고도 머리를 흔들지만, 나는 꽃과 함께 계절을 정돈한다.
꽃과 나무에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과 함께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기억하고 정리한다. 또박또박 삶의 이름을 적어놓는다."(나무의 이름)
젊음은 필요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에는 등단한 뒤 44년 동안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려주는 짤막한 문학 강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문학에 깊이 병들어' 목숨을 걸고 글을 썼던 젊은 날, 20년 넘게 소설 창작 강의를 하는 동안 쌓았던 가르침들, 글을 써가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함께 증강되어가는 문학에 대한 신념들이 꾸밈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전해진다.
"지구와 함께 끓는 숨을 쉬지 못하면 문학은 죽는다."(바다로 난 길)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시의 구절은 소설로 와서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갈루와 벌레처럼 동굴 속에, 토굴 속에 들어 쓴 소설의 당선으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
글이란 홀로 있음을 깨달아 세상에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이다. 그것은 순수를 회복하고, 그 힘으로 세상의 어떤 악의와 오해와 부조리도 승화시킬 수 있기를 비는 일이다."(갈루와 벌레처럼) "
우리나라 문학 풍토에서 조로(早老)는 늘 지적되어왔던 상황이었다.
경험에 따르면 조로가 아니라중년의 도중하차라고 할 정도였다. 이른바 트렌드를 좇아다니느라 허덕이다가 그만 주저앉는 젊음도 있었다.
특히 우스꽝스러운 것은 현실적으로 얼마쯤 성취감을 가질 만하다 싶으면 글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쳐놓는 처세술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글은 명확히 도구였음을 증명한 꼴이었다.
지금도 소설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때로 글을 방편으로 여기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낯빛이 흐려진다.
그런 사람이 가련하게 보여 가슴이 아픈 것은 물론 우리 글의 위의에 나 자신 어긋난 듯하여 자괴감을 갖는다. 글은 삶인데, 삶을 어찌 도구화하랴! 삶은 문자 그대로 생(生)일 뿐이지, 삶는 게 아니다!"(늙도록 젊어 있는 삶)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에서는 시인 윤후명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는 시들, 예컨대 [사랑의 먼 길] [강릉 가는 길] [자작나무 숲] [사랑 푸르름] [희망] [빈자의 자장가] 등과 화가로서의 윤후명을 보여주는 아크릴화 다섯 점(2009년작)도 만나볼 수 있다. [인터파크도서제공]
한국문학의 거목 윤후명이 삶에 물어보고 삶에 묻어두었던 사색의 결정들
‘꽃’에서 ‘시간이 흘린 눈물’까지는 먼 길이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내 삶의 섬, 혹은 다리 역할을 해서
나는 깊은 심연을 건너왔다는 생각이다.
삶을 찾아 떠난 이 순례여행에서 나는 많은 허무와 무의미를 만난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어딘가 꽃은 피어 있다.
삶이란 그리움의 야적장 같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버려져 있는 저 폐품들을 보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폐품은 유품이 되어 달려든다.
버려야지 하면서 내놓았다가 다시 하는 수 없이
간직하곤 하는, 이젠 못 쓰는 낡은 물건들 속에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리움들……
많은 그리움을 뒤에 두고
우리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시인이자 소설가 윤후명의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가 출간되었다. 〈꽃―윤후명의 식물 이야기〉(2003년 문학동네 발행) 이후 7년 만에 묶어내는 이번 산문집에는 자아를 찾는 여행과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의 겸허한 반성, 숱한 허무와 무의미들 속에서도 꽃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인생의 순간들이 정아(靜雅)한 언어로 담겼다.
전쟁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이십대에 청상이 되었던 어머니(흐릿하고 또렷하게, 비밀 속으로/덩굴식물의 뜻)와 속 깊은 사랑으로 인생의 은인이 되어주었던 양아버지(장다리꽃밭 풍경)에 대한 회상 속에는 일찍이 문학에 마음을 빼앗겼던 시인의 젊은 날 열병이 겹쳐진다.
화가 김점선, 이인, 민정기, 사진작가 이광호, 김영갑, 김수남, 문우 박영한(처서의 이별), 한창기(푸른 입술의 반중), 그리고 문학의 스승으로 존경했던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황순원 선생 등 소중한 인연들과의 스침에 대한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시인으로, 소설가로, 나아가 화가로 인생을 ‘많이’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이 은은하게 스며 있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향수
문단 안팎에서 벗 삼았던 예술가들과의 추억담
꽃과 나무에서 찾은 배움과 위안들
잊을 수 없는 인연이 불러일으키는 아련함들
숲과 꽃과 나무에서 얻은 성찰들은 산문집의 백미다.
“식물과 함께함은 내게는 철학 선생을, 스승을 만나는 일과 같다. 때때로 인간으로 하여 실의에 빠질 때면 식물의 가르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철학 선생이 된 작은 나무)
강건한 야생의 모습을 한 마름에서 천년의 아름다움을 품은 요조숙녀를 떠올리고 노인장대, 서리소나무 앞에서는 삶을 고결하는 사는 법을 생각한다. 박
쥐나무를 바라보며 떳떳하게 살아오지 못한 삶을 반성하고 며느리밑씻개를 만났을 때는 지난한 삶에서도 위로받는 법을 깨닫는다.
겨울에도 푸른 인동잎은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에 대한 단상을 낳는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함부로 아무 꿈이나 꾸지 말라고 내게도, 남에게도 타이르곤 했다.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이 많음은 나이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어쩌면 삶이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을 안고 살다 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인동덩굴 아래서)
고광나무, 때죽나무, 박쥐나무, 생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며 나무를 진정으로 알아가는 기쁨에 황홀해하고 파드득나물의 이름을 읊조릴 때는 마음이 행복하게 파드득거린다고 느낀다.
산문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물들, 예컨대 엉겅퀴, 개머루, 부용화, 풍접초, 어리연꽃, 벌노랑이, 비비추 벌개미취, 양지꽃, 민들레, 바위솔, 들국화, 원추리, 연꽃, 달맞이꽃, 한삼덩굴, 돼지풀, 백량금, 참나리, 능소화의 이름은 시간의 기억이자 삶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피며 맞이한 봄이 가고, 마가목의 흰 꽃이 피는 초여름을 맞이한다. 짧은 봄, 지독한 황사에 얼룩진 서울의 봄이었다. 누구는 이제 봄이 없다고도 머리를 흔들지만, 나는 꽃과 함께 계절을 정돈한다.
꽃과 나무에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과 함께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기억하고 정리한다. 또박또박 삶의 이름을 적어놓는다.”(나무의 이름)
젊음은 필요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에는 등단한 뒤 44년 동안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려주는 짤막한 문학 강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문학에 깊이 병들어’ 목숨을 걸고 글을 썼던 젊은 날, 20년 넘게 소설 창작 강의를 하는 동안 쌓았던 가르침들, 글을 써가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함께 증강되어가는 문학에 대한 신념들이 꾸밈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전해진다.
“지구와 함께 끓는 숨을 쉬지 못하면 문학은 죽는다.”(바다로 난 길)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시의 구절은 소설로 와서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갈루와 벌레처럼 동굴 속에, 토굴 속에 들어 쓴 소설의 당선으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
글이란 홀로 있음을 깨달아 세상에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이다. 그것은 순수를 회복하고, 그 힘으로 세상의 어떤 악의와 오해와 부조리도 승화시킬 수 있기를 비는 일이다.”(갈루와 벌레처럼)
“우리나라 문학 풍토에서 조로(早老)는 늘 지적되어왔던 상황이었다.
경험에 따르면 조로가 아니라 중년의 도중하차라고 할 정도였다. 이른바 트렌드를 좇아다니느라 허덕이다가 그만 주저앉는 젊음도 있었다.
특히 우스꽝스러운 것은 현실적으로 얼마쯤 성취감을 가질 만하다 싶으면 글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쳐놓는 처세술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글은 명확히 도구였음을 증명한 꼴이었다.
지금도 소설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때로 글을 방편으로 여기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낯빛이 흐려진다. 그런 사람이 가련하게 보여 가슴이 아픈 것은 물론 우리 글의 위의에 나 자신 어긋난 듯하여 자괴감을 갖는다. 글은 삶인데, 삶을 어찌 도구화하랴! 삶은 문자 그대로 생(生)일 뿐이지, 삶는 게 아니다!”(늙도록 젊어 있는 삶)
[저자의 추천글]
‘꽃’에서 ‘시간이 흘린 눈물’까지는 먼 길이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내 삶의 섬, 혹은 다리 역할을 해서 나는 깊은 심연을 건너왔다는 생각이다.
삶을 찾아 떠난 이 순례여행에서 나는 많은 허무와 무의미를 만난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어딘가 꽃은 피어 있다.
꽃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삶의 원초적 물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인 것이다.
책 이후로 나는 여전히 꽃을 대상으로 삼는다.
지게에 가득 짊어진 나뭇단에 꽃을 꽂고 가는 젊은이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옛날이야기에서처럼 꽃을 꺾어달라는 여인을 위해 바위 옆에 소를 놓아두고 벼랑을 오르는 늙은이라고 해도 좋다.
꽃은 단순히 꽃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정을 향하여 쉬지 않고 올라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절정이란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룩하고 있는 그것, 그곳임을 알고 놀란다. 놀라지 않기로 한다.
다만 자기의 안을 향하여 놀라움을 이룩해야 하는 이 인생이라는 것!
그것이 글쓰며 이룩하는 보람과 행복임을 안다는 것!
늘 고독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자처럼 산다고 해왔다. 파행과 만행이란 고독의 벽쌓기였다는 말도 실상 부질없다.
오로지 나는 글씀으로써 나를 지키며 살아왔고, 살아가겠다는 말만이 필요하다.
그 길에 꽃들은 피고 지고 나를 지켜주었다. 그것으로써 이미 신비와 신화였다.
어떤 삶일지라도 거기에 신비와 신화의 세계가 있다.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워서 심원하다. 그래서 삶과 글과 꽃은 같은 선상에 있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꽃피었는지, 또 꽃필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식물의 생명이 물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는 눈물이 요구된다. 흘린 눈물의 양이 사람을 승화시킨다. 그 눈물을 받은 양재기를 부어 설산(雪山)의 크레바스에 내 나무를 키운다.
고독과 고행이 자기 안에서 자라나 동충하초처럼 되려는 꿈속의 나를 본다.
언어도단, 어불성설. 그러나 나는 살아온 나날을 그렇게 바라본다.
지난 시간이 흘린 많은 눈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그 눈물이 말라가며 남긴 얼룩이 내 삶의 무늬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꽃과 눈물 사이 이 책을 바치며, 나를 글의 제단(祭壇) 위에 놓으려 한다.
--- 윤후명(소설가,국민대문창대학원겸임교수) [알라딘 제공]
[책속의 글들]
겨우살이는 마치 초록 까치집처럼 보인다.
어릴 적 살던 집 앞의 밤나무에 붙어 있던 그 초록 까치집이 아직도 머리에 선명한 걸 보면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 묶음 사다놓았더니, 곧 시커멓게 암녹색으로 변하며 마디마디 툭툭 끊어져 쌓인다.
이렇게 마지막을 맞는 식물도 없으리라 했다.
예전에, 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진 한 아이의 이름을 겨우살이라고 지었었다. 그 아이가 아직 생명이 붙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이름이나마 지어준 것이었다.
어쩐 일인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성장이 멈추고 만 아이.
그 아이의 모습이 겹쳐지며, 삶의 마디마디가 툭툭 끊어지는 느낌. 봄이 올 무렵에 아이의 천도재를 지내러 동해 바닷가에 갔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거기 어디 앙증맞은 봄맞이꽃이 아이의 혼령인 양 하얗게 피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봄맞이꽃뿐이겠는가.
아픔이 클수록, 어둠이 깊을수록 봄꽃은 환하게 피어난다. 그러니까 환한 꽃이 그냥 환하기만 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꽃이 진다고 해도 한번 핀 꽃은 어디엔가 피어 있다고 믿으려 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사랑이/꽃이 피고 지는 사이를 오간’ 때문에 그러하다고, 나는 사랑의 뜻을 아로새긴 시 한 구절을 지어 봄꽃에 바친다.
‘겨우살이’의 천도에 바친다. 내 삶에 바친다. --- pp.36~37
식물과 함께함은 내게는 철학 선생을, 스승을 만나는 일과 같다.
때때로 인간으로 하여 실의에 빠질 때면 식물의 가르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하늘 끝 모르고 치솟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분을 나타내다 보면 또한 내 이기심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삶의 딜레마를 이겨내는 길이다.
안의 광기와 밖의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간, 삶을 미워하기보다는 식물에 몸을 맡겨야 한다.
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려고 있는 존재이기에 앞서서, 우리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스스로 그런’ 모습이기에 위대한 것이다.
--- p.115
나는 그 무인도가 아직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리 포구도 없어졌고, 옛 풍경들도 모두 변했다.
내가 헤매 다니던 그곳이라고 여기기 힘들었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젊음을 보냈다.
그리고 험난한 술 속에서도 글을 놓지 않았었다.
내가 썼던 글을 빌미로 찾아가본 그곳의 변화를 직접 보고 확인하는 일은 서글프고도 어지러운 노릇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볼 만한 근거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 무인도, 시화호 호수 가운데 아직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놀랐다.
상전벽해의 변화 속에 외로운 섬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내가 그곳에 살았던 사실을 섬의 원추리꽃은 증명해줄 것이었다.
언제 섬에 다시 한 번 가서 원추리 가득 핀 풍경 속에 서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어디쯤일까 눈을 들어보았으나,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시화호 언저리에서 공룡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하여 보존하고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섬이 다시금 신비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나는 원추리싹을 뜯는다. 그리고 한여름의 주황색 꽃을 보며 가을의 갈무리를 생각한다.
8월 하순의 처서 절기를 지나며 가을은 또다시 우리에게 다가온다.
처서는 내게 보랏빛으로 다가오는 절기이다.
가을을 타는 내게는 매우 어려운 시간이기도 하다. 보라색 꽃들이 하늘거리고 또 머지않아 서해안의 나문재들이 짙게 짙게 붉었다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면 사라진 협궤열차가 어디선가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리라 믿는다.
이 세상에 한 번 있었던 것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이 우리들 일회성(一回性)의 삶의 특징이기에.
--- pp.146~147
어느덧 내 젊음은 사라져버렸구나, 나는 봄둔덕에 앉아 새삼 탄식했다. 쫓기며 순간순간 숨 막히는 젊음이야 어서 지나가라고, 왜 이리 더디냐고 조바심을 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다시 돌아가라면 그러고는 싶지 않은 시절, 일컬어 ‘악마의 계절.’ 그런 가운데 일찍이 나는 시로써 내 인생의 좌우명을 새겨놓은 적이 있었다.
‘늙도록 젊어 있는 삶.’
그냥 ‘젊은’이라고 써도 될 것을 ‘젊어 있는’이라고 굳이 ‘있는’을 강조해놓기까지 했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20대에 쓴 것이었다.
그랬는데, 때가 이르고 말았다.
젊음의 사라짐을 탄식하고 있던 나는 예전에 내가 쓴 시 한 구절, 그 약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사실 서너 해 전 독일 어느 도시에 한국 공원을 만들고 정자를 세워 편액을 걸어놓기로 했을 때도 나는 이 구절을 써준 적이 있었다.
‘작년하고 다르다’는 이제, 그때만 해도 옛날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젊음과 늙음이 교차하는 느낌, 이것은 기필코 ‘불혹’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올봄에 심은 어리고 젊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들의 미래, 즉 고목을 바라보는 나를 알게 된 것이다.
마침내 탄식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젊음이 갔다고 하나도 억을한 심사는 없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아니었던가.
젊음의 질풍노도, 인사불성이 징그러워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파행을 일삼았던가. 재가 되지 않으면 못 견딜 수많은 물구나무들, 그걸 끌고 갔던 소각장이 지난 세월에 널려 있는 것이다.
고목이라도 봄마다 피어나는 꽃, 여름마다 우거지는 녹음에도 ‘고(古)’가 들어갈 리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로인 소년의 첫 모습이다.
초경(初經)의 꽃, 초발심(初發心)의 잎사귀, 나는 고목으로 파릇파릇 젊은 새순이 돋는 나무를 내 안에 새겨넣는다.
새 꽃눈과 잎눈으로 고목은 새 생명을 노래한다.
--- pp.187-189, ‘늙도록 젊어 있는 삶.’ 중에서
네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써라. 나는 이 금언을 뒷전에 놓고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자 하지 않았던가.
소설가는 소설을 쓰려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실을 쓰려 해야 한다.
교훈은 충분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곰곰 뒤져보았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역정 속에 있을 것이었다.
좁게는 내 개인 이야기, 혹은 넓게는 내 집안 이야기. 여기에 소설가는 추억을 파먹고 산다는 말이 적용된다 하겠다.
그러므로 소설가에게 경험이란 금맥이다.
일찍이 전쟁이 있었고, 살아남은 어린 내가 있었다.
배경은 고향인 바닷가 도시. 나는 토막토막 끊어진 채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필름의 흐릿한 음화를 복원하는 심정으로 하나의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한 작품이 ‘성립’되었다.
지금도 그것은 〈높새의 집〉이라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벌써 10월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언덕길을 내려가 오랫동안 참고 있던 술, 막걸리 한 병을 앞에 놓았다.
그 초원식당의 눈물겨운 자축은 늘 기억에 남는다.
알량한 단편 한 편의 희망으로 앞날을 격려하던 막걸리 한 잔. --- p.222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다.
그림은 심상을 그리는데, 실제의 나는 피안을 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나에게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내 실상을 곧이곧대로 파악하고 노출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내가 그리는 나는 애초에 내가 아닌 것이다.
관념으로서의 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실패가 아니라 이미 마음먹은 그대로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내 일인칭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문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게 아닌가.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상상의 동물은 실은 나였다.
나는 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닌 나. 그러므로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나를 쓰고 그린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게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멀어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내가 다가간 만큼 물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밀어내는 자성(磁性)을 가진 나일 수밖에 없다. --- p.231 [YES24제공]
[독자리뷰]
세월의 더깨가 내 어깨에 쌓일수록 산문집을 손에 잘 잡지 않는다.
삶이 주는 무게를 어느 정도 견디고 나니 저자의 울타리에서 설익은 감정(경험과 지식의 한계)을 풀어내는 에세이류에는 더이상의 울림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이 메말랐다기 보다는 정화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방어의 관점이리라.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논어의 이야기처럼 어디라도 본받을 만한 것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활자의 홍수 속에 건질 것보다는 버릴 것이 더 많은 책들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간간히 영성과 지성을 갖추신 분들의 사념이나, 한 분야 전문가의 경지에 오른 분들의 깨달음이 엿보이는 책을 읽으면 오랫동안 잘 숙성된 포도주의 맛처럼 달콤하며 마음의 빗장을 풀어 마음껏 나의 미혹함을 깨우는 잣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윤후명 선생의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글이 아니라 영상이었다.
이제는 희미하지만 8-90년대에 TV문학관이나 베스트셀러극장에서 팔색조인가 새의 초상인가를 보면서 관심을 가졌다.
남도 출신이고 지심도를 잘 알기에 서정적인 사랑이 그려지는 영상 속의 동백꽃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윤선생의 이후 소설 속에서도 시적 언어가 잘 갈무리된 표현이 살아있어 '표현의 서정성'이 특징인 소설가로 나에겐 기억되고 있다.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는 윤후명 선생의 산문집이다.
시인이었던 작가의 감각이 도처에서 피어오르는 감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에게 꽃은 단순히 꽃이 아니라 마음이다.
꽃에서 삶의 원초적 물음을 찾는 윤선생의 삶과 글이 고독을 넘어 관조할 줄 아는 감성으로 전해져온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꽃 피었는지 또한 피어날 지를 알기는 쉽지 않지만, 식물의 생명이 물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는 눈물이 요구된다며 흘린 눈물의 양이 사람을 승화시킨다는 말에 공감을 한다.
'사랑의 먼 길'을 읽으면서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본다면(若見諸相非相) 바로 참모습을 보리라(卽見如來)'에서 잠시 숨을 멈춘다. 이는 금강경에 나오는말이다.
좀 더 쉽게 생각해보면 형체만 보는 것도 아니고 형체 아닌 것도 잘 볼 수 있다면 자기가 어디서 온 것도 알고 어디로 갈 것도 아니까 자신이 즉 여래(如來)라는 뜻이다.
내가 늘상 쓰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란 말과 상통한다.
옛날 효봉스님의 오도송에서 가슴을 꿰뚫은 '꽃 지는 땅에서 향취가 나고'란 말씀도 이 금강경의 약견과 즉견을 두고 하신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던 소싯적 상념을 깨운다.
그와 함께 소개하는 그의 시 '사랑의 길'도 아름답다.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덩굴식물의 뜻'에서도 잠시 미소를 띄운다.
"요즘 젊은이들이 박 속의 '맛없는 맛'을 어찌 알랴"는 말이 내 아이와 겹쳐진다. 아마도 묵광이 유광보다 더 나은 것을 알게되는 나이 쯤 되야 이 말이 가슴에 와닿은 것을 알 수 있을까?
윤선생에게 있어 꽃은 결국 삶의 집약이며 생명의 문화를 상징한다(157쪽).
윤상규 시인에서 윤후명 이란 소설가로 거듭나기까지 11년이 걸린 뒷담화도 '꽃'에서 '시간이 흘린 눈물'까지는 먼 길이다는 그의 말의 뜻을 생각해 보게 한다.
내게 황새기젓 같은 꽃을 다오/곤쟁이젓 같은,꼴뚜기젓같은 /사랑을 다오 /젊음은 필요 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169쪽)
보이는 자신이 아니라 그 이면의 자신을 볼 수 있는 이의 글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윤후명 선생의 자전적 삶의 내력이 꽃과 나무와 숲으로 스며들어 활자로 피어오른 성찰이 원초적 삶에 대한 사랑으로 전해진다.
격정적이었을 젊은 시절이 잘 갈무리되고 난 뒤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이의 마음을 엿본 책읽기였다.
마치 조용한 시골집 울타리가에 핀 이름모를 꽃 한송이를 보는거와 같은...
[출처] http://blog.yes24.com/document/2637004
영어를 공부하면서 외워도 외워도 늘 어렵기만 했던 단어들은 동식물의 이름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어려서부터 늘 곁에 두고 익혀도 세월이 가면 잊혀지는 것이 그들의 이름이거늘 제 나라 말이 아닌 외국어로 어찌 그들의 이름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매일 아침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풀과 나무의 이름을 우리말로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의 산문집에는 식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작가의 이력 탓에 많은 식물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별난 식물 사랑이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리던 어느 봄날. 내가 알지 못하던 식물의 이름을 익히고자 화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필기도구를 챙겨 들고 방문한 화원에서 그 생감새를 눈과 머리로 기억하고 이름을 하나하나 빼곡히 적어가던 중 나는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두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었다.
종류의 많음도 그랬지만 이름을 적고 지나쳤던 식물을 다시 대하면 번번이 다른 이름과 뒤섞여 가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일 아침이면 산을 찾는다.
이름도 모르는 나무와 풀과 꽃. 그 속에서 나는 온전한 평화를 누리곤 한다.
세상에 나고(生) 사라질(滅) 때 모든 동물은 본의 아니게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다.
인간은 어미라 불리우는 한 여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남는 자에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을 남겨둔 채로 죽는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죄를 보상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것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원죄에 대한 작은 죄씻음이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스스로 나고 자라 고통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식물 말고 또 있을까.
그 선(善)함과 드러내지 않는 겸손이 작가를 그토록 매료시키지 않았을까?
자신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글, 수사(修辭)만을 앞세운 글, 뭔가 보여주겠다는 글만의 글이 내게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자연을 교재로, 역사를 부교재로'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 마음이 들꽃 한 송이로 내 안에 피어나기를 비는 마음이다. 한 송이 하늘하늘 피어난 너도바람꽃이 이 지구를, 우주를 대변하는 모습임을 내 글이 당당하게 읊을 때, 내 문학도 비로소 우주를 유영(遊泳)할 수 있으리니.(P.105)
그렇게 꽃과 함께 한 그의 인생에 꽃처럼 아름다운 지인들과 문우들에 대한 추억 그리고 전쟁통에 재혼한 어머니와 그의 계부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문학에 대한 소신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 등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와 삶의 진지한 성찰이 묻어나는 글은 꽃처럼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듯하다. 때로는 젓갈처럼 곰삭은 맛이 난다.
세월을 건너뛰는 돌다리처럼 이어지지 않는 추억의 편린이 애잔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잘 살게나'하고 말하는 그의 덕담이 들리는 듯하다.
내 등을 토닥이는 투박한 손길의 촉감마저...
[출처] http://blog.yes24.com/document/245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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