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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래피티의 역사 |
그래피티는 기본적으로 진술서를 작성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으로서와 거리의 갱들이 테라토리 (영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아직 어떠한 형태를 띤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쓰여지지 않는다. 필라델피아, 펜실바니아에서 1960년대 중반에서 후반사이에 시작된 언더그라운드 아트운동의 역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일반적으로 폭격이라는 어원을 가진 그래피티 운동이라고 일컷는다. 처음으로 그래피티 폭격을 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람은 CORNBREAD and COOL EARL이다. 그들은 지방신문과 공공단체로부터 주위를 끌기 위하여 TDHS 시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썼다. 이러한 개념이 뉴욕에 경유하여 왔는지 또는 발생이 그냥 그렇게 공표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CORNBREAD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맨하탄의 와싱톤 헤이츠 구역에서는 한명의 낙서가를 탄생시킨다. 1971년 뉴욕타임스지는 이 낙서가에 대한 기사를 발표하였다. TAKI 183 은 와싱턴 헤이츠에 사는 그의 주소였다. TAKI는 Demetrius라는 아이의 닉네임이었다. 그리고 183은 그가 살고있는 거리의 번호였다. 그는 a foot messenger로 고용 중에 있었고, 그래서 그는 지하철을 빈번하게 이용하였고, 지하철에 태그(Tag)를 해둠으로서 이익을 보고 있었다. |
이러한 잘 쓰이지 않는 이름과 숫자의 출현은 대중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르고 대중들의 호기심은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는 별 의미는 없지만 최초의 낙서가 또는 심지어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어찌되었든 그는 새로이 형성된 언더문화의 최초로 외부에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JULIO 204. FRANK 207 and JOE 136 등은 가장 널리 알려진 최초의 태그 낙서가 들이었다. 부룩크린에서의 운동은 잘 성장했다. 20여명의 태그 낙서가들이 활동했다. 지하철의 시스템은 이러한 분산된 낙서운동을 연합운동으로 하게 하고 조직화하는 라인이 되었다. 서로 알게된 5그룹의 사람들은 노력하였다. 서로 경쟁하는 기금을 설립했다. 낙서는 거리에서 지하철로 옮겨졌고 재빠르게 경쟁적으로 되었다. 그때의 낙서는 대게 태그로 구성되어있었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낙서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낙서가들은 가능한 한 많은 지하철차량을 타야만 낙서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얼마 안가서 그들이 보다 더 시간을 덜 들이고 또 잡힐 위험이 덜하면서 전철에 낙서를 할 수 있는 곳이 전동차 집결지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낙서의 방법과 개념이 형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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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낙서들을 하고, 그들은 명성을 얻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들이 필요했다.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의 태그를 유니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많은 스크립트와 칼라 그래픽스타일이 개발되었다. 낙서가들은 그들의 태그에 꽃, 별, 또는 다른 디자인을 붙이기 시작했다. 어떤 디자인들은 다른 디자인들이 의미를 포함하는데 반하여, 직접적으로 시각적 어필을 하였다. 예를 들어 왕관은 자신을 왕이라고 공언하는 낙서가에 의해 사용되었다. 아마도 그 문화역사에서의 가장 유명한 태그는 STAY HIGH 149였다. 그는 담배연기 조인트를 그의"H"자의 크로스바 대신에 사용했고, 그리고 텔레비젼 시리즈 The Saint 의 막대기 형상을 사용하였다. |
태그 스케일 다음으로 개발된 것이 태그 크기였다. 낙서가들은 그들의 태그를 큰스캐일로 랜더링하였다. 스프레이 페인트 캔의 표준 노즐 폭은 이 커진 태그들에게는 너무 좁았다. 때문에 드로잉 할 때 표준 태그 때보다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나, 시각적인 무게를 지니지 못하였다. 낙서가들은 그들의 글자의 두께를 증가해가고 그리고 글자의 외곽선에 색을 더하기 시작했다. 낙서가들은 다른 에어졸의 사용이 스프레이의 보다 넓은 선을 제공할 수 있다는 개념을 발견했다. 이러한 생각이 작품의 개발을 가져왔다. 누가 처음으로 작품을 제작했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브론스 지역의 SUPER KOOL 223과 부룩크린의 WAP이 일반적으로 제작되었다. 두꺼운 글자는 이름을 더 널리 알리는 기회를 제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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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가들은 소위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글자를 인테리어하고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물방울무늬에서, 나중에는 망막으로 음영을 표현하거나, 별, 서양장기판 등으로 확대되었다. 디자인은 오직 아티스트의 이미지에 의해 제한되었다. 낙서가는 결국 지하철차량의 전체 높이에 작품을 랜더링하는 것을 시작하였다.(처음-SUPER KOOL 223). 이 작품은 바닥에서 꼭데기까지 그려졌다. 칼라디자인과 스케일의 이작품은 드라마틱 모험물이었으나, 이작업은 아직 그들이 처음 했던 태그를 강하게 닮아있었다. |
몇몇 이시기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HONDO 1, JAPAN 1, MOSES 147, SNAKE 131, LEE 163d, STAR 3, PHASE 2, PRO-SOUL, TRACY 168, LIL HAWK, BARBARA 62, EVA 62, CAY 161, JUNIOR 161 and STAY HIGH 149. 이다. 경쟁적인 분위기는 태그 스타일의 작품들과는 분리된 보다 역동적인 스타일의 발달을 가져왔다. 브로드웨이의 스타일은 Philadelphia's TOPCAT 126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러한 글자들은 블록 레터스, 런닝레터스, 블록 버스터스를 방출시켰다. PHASE 2는 후에 보다 일반적인 Bubble letters의 영향을 받은 Softie letters를 개발했다. Bubble letters and Broadway 스타일은 역동적인 작품의 최초의 형태들이 되었고, 그리하여 많은 스타일의 원천이 되었다. 곧이어, 화살, 곱슬거림, 연결과 뒤틀림 등이 글자를 장식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복잡성을 증대 시켰고 그리고 메카니컬하고 야성적인 스타일의 글씨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PHASE의 작품을 섞은 것과 RIFF 140 and PEL같은 다른 스타일의 작품들의 경쟁은 발달을 가중시켰다. RIFF는 스타일 전쟁시기의 초창기 catalyst로 기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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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FF는 아마 다른 글자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개발하고 그것을 다른 레벨에 올려놓아을 것이다. FLINT 707 and PISTOL과 같은 낙서가들은 작품에 깊이를 주는, 앞으로 올 후대에게는 표준이 되는, 3차원적인 레터링을 개발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창작의 이러한 초기 시기는 알려지지 않을 수 없다. 시립대학 사회학부장인 Hugo Martinez 는 이세대의 합법적인 예술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Martinez는 United Graffiti Artists를 설립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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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GA(낙서화가 연합)은 도시의 모든 곳에서 최고의 지하철 화가를 뽑고 ,그들의 작품을 아트겔러리의 형식에 맞는 컨텍스트로 만들어 전시하였다. UGA(낙서화가 연합)은 한번 얻기 어려운 기회를 이들 아티스트에게 제공하였다. The Razor Gallery는 Mr. Martinez와 그로 대표되는 아티스트들에게 성공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
PHASE 2, MICO, COCO 144, PISTOL, FLINT 707, BAMA, SNAKE, and STICH등은 Martinez에 의해서 대표되었다. Richard Goldstein의 1973년 New York magazine에서의 "The Graffiti Hit Parade" 라는 제목의 기사는 지하철 작가들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깨인 공중의 인식이었다.1974년경 TRACY 168, CLIFF 159, BLADE ONE등의 낙서가들은 풍경,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만화의 캐릭터로 작품 주위를 작업하는 것을 창조했다. 이러한 형식은 차량 전체 면을 바탕으로 구성한다. 차량 전체면을 바탕으로하는 선구적 작품들은 AJ 161 and SILVER TIPS.등의 작가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
(1975-1977년) 1974년 이후에는 낙서화 혁명 대부분은 정체기를 맞이한다. 모든 표준은 확립되었고, 그리고 새로운 양식은 그 시대의 세대들의 예술적 원천 효과로 도약하기 위하여 막 시도되고 있었고, 그리고 도시는 제정 위기의 와중에 있었다. 뉴욕시티는 파업하였고 그리하여 교통제도는 거의 진술되지 않았다. 이것은 역사에서 가장 무거운 그래티피를 이끌어 내었다. 이시기에 낙서와 스타일은 점점 서로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전동차들은 새로운 이벤트보다는 표준화된 그림으로 되어갔고, 단순한 낙서를 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버블레터로부터 도입된 연결하는 스타일은 그만두었다. 단순하게 외관선을 지지하거나 단지 외관선 안에 채워지는 성급하게 랜더링 된 작품을 계속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대부분의 두 글자는 그만두어지고 the INDs and BMTs등처럼 전체를 덮는 이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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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3yb, BYB TC, TOP,등의 패거리들에 의해 대부분의 공헌이 이루어졌다. TEE, IZ, DY 167, PI, IN, LE, TO, OI, FI aka VINNY, TI 149, CY, PEO. 등을 포함하는 왕들도 그만두어졌다. 낙서가들은 매우 얌전하게 되었다. 그만두는 것을 보고 경주들은 파괴되었다. 거의 모든 차에서 1975년에서 1977년사이에 이러한 그만둠은 피크를 달했다. BUTCH, CASE, KINDO, BLADE, COMET, ALE 1, DOO2, JOHN 150, LEE, MONO, SLAVE, SLUG, DOC 109 CAINE ONE등의 낙서가들은 대부분의 전체 차량을 IRTs 로 범벅해 놓았고, TRACY and CLIFF같은 거인의 발자국같은 것이 뒤따랐다. |
스타일 리바이벌 1978-1981 1977년 말에 TDS, TMT, UA, MAFIA, TS5, CIA, RTW, TMB, TFP, TC5 and TF5 같은 패거리들에 의해 새로운 창작운동이 피어났다. 이는 교통당국의 낙서화를 지울 수 있는 권한이 제정되기 전에 일어난 마지막 그래피티 운동이었다. 브로드웨이에서, CHAIN 3, KOOL 131, PADRE, NOC 167 and PART 1 등은 PHASE 2, RIFF 140 and PEL.등이 확립한 양식을 확산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CHAIN나중에 TMT 패거리와 함께 2호선과 5호선에 갔다. 1980년에 짧은기간 동안에 실제적인 싸움은 시작되었다. 차량기지의 담은 고쳐졌고 보다 단단해 졌다. 낙서가들은 서서히 그만두거나 다른 창의적인 옵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많은 낙서가들은 도로의 차들에 패인팅하는 방법으로 관심을 돌렸다. 기존의 미술세계에서는 다시한번 낙서화에 대하여 수용적으로 되었다. 1970년대 초기부터 Razor Gallery에서는 긍정적인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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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 LEE QUINONES and FAB 5 FREDDIE 은 딜러인 Claudio Bruni.와 함께 로마에서 전시를 갖는다. 그리고 1980년 많은 낙서화가들이 그들의 지평을 펼치기 위해 ESSES studio, Stephan Eins' Fashion Moda and Patti Astor's Fun Gallery등의 장소에 집결하였다. 이러한 화랑과 그후의 화랑들은 그래피티를 바다건너까지 팽창시킨 중요한 인자로서 판명될 것이다. 유럽의 미술품수집가들은 이러한 운도에 대하여 알게되고 그리고 새로운 미술양식에 대하여 매우 수용적이 된다. DONDI, LEE, ZEPHYR, LADY PINK, DAZE, FUTURA 2000 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전시된 인기있는 그림들은 뉴욕젊은이들의 비밀스런 세계에 대하여 개방할 것을 제안하였다. |
적자생존(1982-1985) 198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낙서문화는 살아남기 요인들에 의해서 극적으로 타락하였다. 약간은 그래티피 문화 자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약간은 일반적으로 보다 큰 사회에 관련되어 있다. 크랙 코카인 유행은 도시 내부에서 그것의 서종을 울리는 것으로 이야기되어진다. 마약 거래 덕택으로 강력한 총포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리의 풍토는 점차 긴장감이 높아졌다. 법은 청소년에게 페인트를 파는 것을 제한하고, 스프레이 페인트를 잠궈진 금고에 보관하여 가게 좀도둑질을 더욱 어렵게 하도록 상인들에게 요구하였다. 법률은 그래피티 제작자에게 보다 더 엄한 벌을 내리도록 제정 중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운송당국의 안티 그래티피 예산의 증가는 커다란 변화였다. 열차 정류장과 계류장은 더욱 완벽하게 방어되었다. 많은 선호되었던 패인팅 장소들은 거의 접근할 수없게 되었다. 새롭고 많은 억지로 둘러댄 담은 똑바로 세워지고 그리고 데미지를 입었을때는 신속하게 복구되었다. 그래피티 제거는 어느때보다도 강력하고 지속적이었고, 많은 낙서가들은 몇일씩 아니면 한달씩 그들의 생활을 허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많은 낙서가들에게 그만두는 원인이 되게함으로써 그들을 타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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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쉽사리 낙담하지 않았고, 아직도 이들은 계속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을 도전으로 인지하였고, MTA에 의해 패배하지 않도록 결심하였다. 이러한 원천의 결핍으로 인하여 이들은 극단적으로 지역주의거나 지역에서의 패권을 외치거나 안주하는 것으로 되어갔다. 테라토리를 외치는 것은 낙서화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나, 그러나 이 당시 다른 점은 이러한 위협이 실행되었다. 만약 낙서가가 그의 구역을 무장하지 않고 벗어난다면 그는 두들겨 맞는다거나 그리고 그의 패인팅 도구를 강도 당할 것이 거의 확실하였다. 이시기에 물리적인 힘과 그리고 거리의 갱으로서의 연합은 그래티피 행위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었다. MTA의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낙서가들 사이의 전쟁은 퍼져나갔다. 가장 유명한 전쟁은 CAP MPC 대 그 세계와의 전쟁이다. 이시기의 높은 경력의 작가들은 SKEME, DEZ, TRAP, DELTA, SHARP, SEEN TC5, SHY 147, BOE, WEST, KAZE, SPADE 127, SAK, VULCAN, SHAME, BIO, MIN, DURO, KEL, T KID, MACK, NICER, BRIM, BG 183, KENN, CEM, FLIGHT, AIRBORN, RIZE, JON 156, KYLE 156.이다. |
THE DIE HARDS 1985-1989 어떤 지하철 노선에서는 그라피티 제거 작업이 심각하게 늦어졌는데 왜냐하면 그 차의 서비스 라인의 시작이 패기된 계류장으로 부터였다. 이는 낙서가들에게 마지막 샷을 제공하였다. 2호선과 5호선에서의 마지막 큰 파동은 WANE, WEN, DERO, WIPS, TKID, SENTO, CAVS, CLARK and M KAY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왔는데 그들은 5호선의 힌부분에 버너로 그렸다. 이 버너들은 태그하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번 손상되어 왔는데, 패인트를 흡수하였다. 개발된 경향은 낙서하기 위한 뒷 걸음을 분명하게 한다는 것이다. 페인트와 용기의 결핍 때문에 많은 낙서가들이 지하철 차량의 외부에 그들의 마크를 태깅하고 있는 동안에 그 태깅하는 시간을 연장을 위하여 자신의 구역에 머물렀다. 이러한 테그는 일반적으로 빈약한 예술적 노력이었다. 낙서가들이 그들의 손의 스타일인 싸인에 긍지를 지녔던 시기는 오래전에 가버렸다. 만약 앞에 진술한 낙서가들이나 몇 명의 다른 낙서가들이 없었더라면 뉴욕시에서의 그라피티아트 형식은 죽었다고 사무적으로 진술될 것이다. 86년도 중반까지 MTA는 승리를 얻었다. 많은 낙서가들은 그만두거나 격렬함은 잠잠해졌다. 대부분의 노선들은 완벽하게 낙서로부터 자유로웠다. Ds, Bs, LLs, Js, Ms 달리는 작품의 노선으로는 마지막에 속하였다. MAGOO, DOC TC5, DONDI, TRAK, DOME and DC 는 가장 눈이 띄이는 낙서가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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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은 높았고 그리고 교통당국의 새로운 작품제거반은 사기가 매우 높았다. 남은 것은 끝까지 저항하는 기술자들이었다. GHOST, SENTO, CAVS, KET, JA, VEN, REAS, SANE, SMITH 는 특출한 형상이었고 그리고 낙서화가 지속적으로 살아남게 할 것이다. 깨끗한 열차 운동 1989- present 1989년 5월 12일 MTA는 그라피티에 대하여 승리를 공포했다. MTA는 그래피티로 그려진운행중인 지하철 차량의 그림들을 제거하는 정책의 효과를 보았다. 이것이 깨끗한 열차운동이라고 알려진 것의 탄생이었다. 많은 낙서가들은 지하철 차량그림은 낙서가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담장, 화물열차, 조각들, 캔바스는 가짜 낙서가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낙서가들은 MTA에 대항하여 전쟁하는 것을 포기할 것을 거부하였다. 비록 작품은 달리지 못하거나 또는 오직 단 한번 밖에는 운행되지 못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낙서하고 있다. COPE2, SENTO TFP, POEM, YES2는 몇 명의 깨끗한 열차시대의 명단이다.1980년대 초에 힙합은 대중속으로 확산되었다. NYC 거리의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주는 뮤직비디오는 매우 어필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밤마다 모든 미국 십대들은 뉴욕의 B Boy가 되기를 원했다. MC와 브레이커들과 낙서가들은 모든 분야에서 튀어올랐다. 뉴욕시의 외곽에는 많은 대규모 도시 열차 시스템이 없었으나, 낙서가들은 강렬하게 그림그리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이름이 움직이기를 원했다. 접근하기 쉽고 최소한의 보안이 된 화물차량이 일반적인 그들의 목표가 되었다. 최근의 낙서가들은 미국전역과 그리고 카나다까지 화물차들에게 그래피티 폭격을 가하였다. 화물차에 대한 운동은 그 핀 포인트의 지형학적인 뿌리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서부해안의 현상이었음이 대체적인 생각이다. 화물차 낙서가를 바탕으로하는 활동적인 Active 들은 CAVS, SEIN 5, SENTO, CAVS, CASE2, ZEPHYR and MONE 였다. *Term coined by ZEPHYR |
전세계적 운동 1980년대초의 미국 낙서가들은 유럽의 아트ㅡ겔러리로 발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리고 힙합은 국제적인 대중성을 얻기 시작했다. 유럽의 젊은이들은 뉴욕시의 거리문화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Henry Chalfant and Martha Cooper의 책 《Subway Art》와 "Tony Silver and Henry Chalfant"의 영화 《Style Wars》그리고 'Charlie Ahern'의 《Wild Style》은 유럽의 야망의 원천이 되었다. 뉴욕거리 문화는 확산되고 모방되어지고 있다. "Henry Chalfant and James Prigoff"의 책 《Spray Can Art》에서 전세계를 관통하여 처음으로 시작된 운동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책은 전 세계의 스프레이 아트에 대한 전통 목록을 증명해 주었다. 1980년대 말의 유럽의 운동은 오래 지속되었고 힘이 넘쳐 있었다. 유럽의 제2 세대들은 미국 우상들에게 우정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그래피티 아트의 고향에서 그림 그려 볼 것을 갈망했다. 미국인들은 "Pilgrimages to Mecca"을 초대하였다. 많은 유럽 낙서가들은 효과적으로 뉴욕을 폭격(그래티피)하였고, 사람들은 그들이 뉴욕사람이라고 믿었다. 많은 뉴욕 낙서가들 또한 유럽으로 건너갔다. 어떤 유럽인들은 미국의 낙서가들의 욕구를 기꺼이 채워주기를 원했고, 비행기 요금, 숙박, 그리고 페인트 등을 제공하였다. 미국인에게는 패인팅에 대하여 자랑할 권리(그림그릴 권리)는 무료였다. 왜냐하면 약간의 미국인들에게는 이테리나 독일의 열차에 낙서하기위하여 가는 것은 마치 Brooklyn에서 Bronx까지 여행하는거와 같은 것이 되었다. |
SCRAPS 1980년대 말 MTA 는 3개 구역의 평 열차에 대하여 해고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열차들은 Brooklyn의 수집창 야드에 보내졌다. 비록 이차량들은 파괴되기 위한 쪽으로 방향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많은 낙서가들을 매혹하였다. 어떤이들은 그들의 차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 고물들에게 낙서를 해댔고, 어떤이들은 그들의 이름을 지하철 차량에 남기기 위한 사진을 얻기 위해서 , 또는 기억 속에 살아남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이 차량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MTA에서는 어떤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교통 경찰의 그라피티 제거반은 마침내 어쨋든 그들이 가장 원하는 리스트에 들어있는 인물을 잡기 위하여 그들을 사냥했다. 낙서 제거반들은 헌차나 깨끗한 차에 낙서하는 새로운 혹은 똑같은 작가들 모두 사냥했다. 아직도 많은 낙서가들이 수집차량에 공격을 가하고 있다. 대로 MTA의 압력이 가중됨에 따라 열차를 폭격(그래티피)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낙서가들은 유명해지기 위한 대리의 방법을 발견했다. 그러나 도로는 열차의 유동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매일 수백대의 자동차를 구성하여 이용하였다. 도로에서의 낙서하기의 시작은 태그와 검정과 은색을 섞어 올리거나 또는 직접적인 글자를 기초로 구성되었다. OE 와P13 이 NYC 도로를 조직적으로 처음으로 그래피티한 사람들이다. 다른 하이웨이 왕들은 COPE 2, PJ, TRAK, MED and FAYDE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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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거리운동 새로운 유파에 따라, 많은 지난 유파의 낙서가들은 벽에 일하는 일로부터 해고되어 떠났다. Crews 는 RTW, TDS, TFP 그리고 TMB와 같이 긴장감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5개조직의 모든 작품은 역동적이나, 그러나 Bronx 는 다시한번 FX, KD and TAT.같은 동료들의 정교함을 통하여 리드를 하였다. 높이 상승된 도로가에서 보일 수 있는 부분적으로 빌딩 위같은, 지붕 꼭데기는 또한 매혹적인 목표가 되어졌다. NATO는, Bronx에 있는 COPE 2 처럼, 퀸스에 있는 빈번한 터이다. |
프린트 몇 년 동안 모든 낙서의 기록은 외부의 원천에 의해 일어났다. 1980년대 PHASE 2는 또다른 첫 번째의 기록으로 그의 리스트를 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소위《International Graffiti Times》이라고 불리우는 낙서하는 첫 번째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때부터 일반과 그리고 수많은 출판물들의 수십배가 넘는 수많은 데스크탑 출판물들의 모험, 그리고 매일 늘어가는 애호가의 수에 의해 낙서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이 잡지의 가장 긍정적인 부분중의 하나는 이 잡지의 대부분을 낙서가들 스스로가 편집한다는 것이다. 많은 낙서가들은 이들 잡지들을 비평하면서' "진짜 낙서가는 열차에 폭격(낙서)한다: 잡지가 아니다."라고 진술하면서 잡지는 명성을 향한 불법적인 자동차이다라고 말한다. 비판이 있든 없든간에 이 잡지는, 항상 그들의 대화를 갈구하던 공동체를 위한, 낙서문화가 제공하는 또 다른 대화의 통로가 되었다. 비디오 1980년대 말 NYC 낙서가 SAN 2 aka Carl Weston은 폭파하는 씨리즈의 VideoGraf를 운동장에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낙서가에 의해서 제작된 낙서장면의 기록비디오의 최초의 기원이 되었다. 얼마지나지않아 많은 비슷한 씨리즈가 세계의 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사이버 스페이스 1994년에 설치되고 처음으로 조직되고 신용을 얻은 그레피티 아트의 기록물에 포커스를 맞춘 웹싸이트는 《Art Crimes》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전세계에 걸쳐 수백개의 낙서 싸이트가 생겨났다. 이들 사이트는 열차근처에는 결코 가본 적이 없고, 집에서 안전하게 인터넷 개임이나 즐기는 집에 있는 아이들에서부터 골수분자의 유럽 낙서가들까지 , 낙서가들에 의해 제작된 멀티미디어와 그래픽디자인 영화들, 웹 기술을 하나의 예술양식으로 사용하는 사이트들까지 분포되었다. 웹은 지하철시스템처럼 비슷한 열정에 의해서 이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커다란 바운다리에서 교차하며 서로 대화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그래피티한다는 것은 당신의 손을 더럽힐 걱정이 없지만, 명백하게 그래피티 아트의 작은 일면이 되었다 옵셋 인쇄보다 시작하는데 적은 비용이 들어가고 그리고 컴퓨터 가격이 떨어진다면 인터넷은 낙서라고 불리우는 예술을 생산하는 경제기반이 약한 그룹을 위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소통의 도구가 될 것이다. 위의 글은http://at149st.com/about.html 에 실린 내용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만 영어실력이 짧아 엉망이라고 생각되나 양해 바랍니다. |
그래피티의 의미 Graffiti의 초기 역사는 기원전 원시 동굴벽화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수 만년 전에 제작된 알타미라, 라스코 등의 동굴벽화에서 즐겨 찾아 볼 수 있는 원시인들의 삶의 흔적들은 특정한 표현 기교나 형식에 얽매이질 않는다. 그들은 삶의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몸짓으로 다양한 도구와 색채를 이용하여 거침없이 긁어 새기거나 채색을 하였다. 이러한 방식들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중국 등 세계 도처에서 기호나 상형문자로 표현된 흔적들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또 그러한 표현 욕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온몸에 치장을 하거나 문신을 새기는 것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래피토" (Graffito) 의 복수형 단어로서, 건물 벽에 아무렇게나 쓴 글씨나 조잡한 그림, 나무나 바위에 공들여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명 (inscription) 과는 다르다. 돌이나 회벽을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새기는 경우가 가장 많고 빨간 분필이나 검은 숯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런 그래피토는 어디서나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그래피토는 낙서, 조잡한 만화, 선거연설, 시의 한 구절 등을 내용으로 한다. 옛날에도 건물 소유자들은 건물 벽이 더럽혀지는데 골치를 앓았던 것이 분명하다. 로마의 포르타 포르테세 근처에서는 벽에 낙서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고대의 그래피토는 민중이 쓰던 여러 알파벳의 형태와 속어를 보여주기 때문에 고문서학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 고고학자가 이것을 보고 그 건물을 세운 연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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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낙서가 갖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음 두 가지에 있다. 첫째, 문헌에 쓰여진 언어보다 그 시대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의 실제 쓰던 '구어'에 가깝기 때문에 언어학자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용병들이 이집트의 스핑크스에 키프로스 방언과 음절문자로 이름을 낙서해놓은 경우나 팜필리아에서 온 그리스 관광객이 기자에 있는 유명한 피라미드에 이름을 새겨놓은 경우와 같이, 언어학자들이 다른 언어들에 대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그래피토는 1857년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도무스 젤로티아나 벽에서 발견한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서 현재 콜레조 로마노의 루이지 피고리니 선사시대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어떤 면으로 볼 때 그래피토는 민중예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20세기 예술가들이 우발적이거나 또 다른 무의식의 현시에 전념한 결과 이런 형태의 자기표현 방식에 대한 관심이 자극되었고, 그 결과 그래피토의 기법과 그 내용은 현대의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Graffiti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Sgraffito",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출발된다. 즉,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의미로서 고대미술의 동굴 벽화를 의미하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Graffiti는 산업의 발전과 함께 정밀한 대형 도장을 위한 "에어 스프레이" 즉, 분무방식의 도장이 자동차 부분 도색을 위한 소형 캔형의 스프레이가 시중에 나돌기 시작한 70년대에서부터 Spray Paint가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Modern Graffiti로 발전하게 된다. Modern Graffiti는 도시에 살고 있는 소외 계층으로부터 출현되며 특히 뉴욕, 할렘가의 브롱크스를 중으로 한 지역은 세계적인 시선을 받게 된다. 이들은 건물벽이나 지하철 차량, 열차 등에 스프레이로 거침없이 뿌려대고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거리의 Hip-hop문화를 생성하게 되고 점차 기성의 예술표현을 뒤집는 도시의 Street감각의 발상은 거대한 주류를 이루며 성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래피티가 뉴욕 할렘가에서 1970년대 시작되었다고 알고있으나 그것은 발전된 의미며 멕시코 거리미술을 살리자는 혁명운동이 있을 때 그것을 영향받은 미술가들에 의해 미국에까지 이어졌다는 말이 더 지배적입니다. 그래피티의 요소는 주로 3가지가 있으며(이미테이션, 쇼셜워드, 태그)우리나라에선 이미테이션 그래피티가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름표Tag'또는 서명이 그 주된 이미지인 낙서화 그래피티 의 입장에서 서명과 재산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낙서가 외양손상으로밖에는 인식되지 않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이는 풀뿌리 거리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같은 것을 '쓴다'는 행위는 공공재산에 이름을 붙이고 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수단입니다. 이는 발언권 이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수단으로, 도시의, 특히 소수민족의 청소년들에게 낙서화는 다양한 형태로 창조적 활동을 주장하는 수단이 되었지요. 낙서화는 또한 힙합Hip Hop 과 랩Rap 문화의 시각적 구성요소입니다. |
Graffiti를 이해하려면 Hip-hop문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Hip-hop문화의 구성 요소는 DJing, MCing, B-Boying 그리고 Graffiti로 나눌 수 있다. Hip-hop의 정의를 단순하게 결론 짓기란 어려우며 더구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의미의 전달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신비성, 즉흥성, 대중 생활에 근접하는 등, 기존의 형식과 틀 속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신비성에 매료된 것들은 Rap을 하는 DJing, MCing, B-Boying을 통해 억압받는 소외계층들의 사회적 참여의식을 강하게 담고 있다. Graffiti 역시 이러한 내용들을 시각화하고 있는 Hip-hop문화의 일부분으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에서 마주치는 즉흥적인 Free Style, 자동차 공업도색에서 사용되는 Spray Can을 이용한다는 것, 기존의 보수성을 탈피하여 현장에서 호흡하고 마주치는 대면예술로의 Graffiti는 흑인들 중심의 Hip-hop문화에서 발전되었다. 흑인들만의 Hip-hop문화는 기성문화의 지루함에 반발하는 젊은 층의 기대와 부합되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문화가 아닌 젊은 층의 공유물로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다. 뒷골목에서 낡고 일그러진 자동차와 같은 중고품을 치장하기 손쉬운 작업에서 시작되어 점차 본질적인 표현 욕구를 충족하는 전기를 맞게 된다. 즉, 대중화된 값싸고 사용이 편리한 Spray Can을 이용한 재생작업에서 급기야 암울한 그들의 내면세계를 거침없이 휘갈겨 버리는 Graffiti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스프레이와 페인트로 건물 벽에 그린 그림 (Mural painting) 또는 그려진 낙서같은 문자나 그림을 Spray Can Art, Aerosol Art라고 하는 새로운 예술의 장으로 생성시켜 이제는 도심 곳곳의 인공물이나 구조물 등에 편안한 정서로 시민과 함께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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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Hip-hop과 함께 하는 Graffiti는 창조성에 굶주린 전 세계 예술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문제 많은 뒷골목 범죄자들의 낙서'라는 초기 인식은,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대중과 친밀한 도시의 Street Art로 사랑받게 되었고 이제는 도시미관과 연계되어 세계 주요 어느 도시나 Graffiti가 없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도시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낙서 미술가들은 1980년대 한때 , 자신들의 창조물을 캔버스로 옮기면서 미술계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낙서 미술가들이 명성을 누리게 된 1984년 뉴욕시 교통국은 이러한 낙서를 제거하는 계획안을 만들었는데 1992 년 한해동안 뉴욕시는 전철역과 차량에서 낙서를 제거하는데 780만 불을 썼다.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지요. |
뉴욕 할렘가의 뒷골목에서는 건물 벽과 지하철 차량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큼지막하게 그린 가지각색의 정교한 그림으로서,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는데, 탐미주의자들은 그라피토가 혁신적인 예술형태라고 찬양한 반면 일반 대중들은 공해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것은 곧 'Hip Hop 문화'와 섞여 세계 각지에 뻗어 나가, 이제는 더 이상 공해행위가 아닌 새로운 예술 행위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낙서예술, 그래피티(Graffiti)는 전문적으로 Tagging이라고 칭하는데, Tagging은 Graffiti Artist들이 작품을 완성하고 자신들의 이름이나 별칭(initial)을 그리는 것을 말하며, 이들을tagger라고 부르기도 한다. Graffiti Art는 벽이나 전철 또는 다리교각 같은 곳에 에어스프레이와 페인트로 독특한 모양의 글자라던가 그림, 또는 문구를 그려 넣는 것을 가르키며, "범죄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의 형태이다. 오늘날에 와서 는 Graffiti Artist가 더 이상 범죄자가 아닌 예술가로서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실제 미국에서는 각 도시마다 대표적인 Graffiti Artist들이 작품전을 열기도 한다. '낙서예술'의 모태가 된 것이 바로 그래피티로 음악과 시와 춤과 그림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문화로써의 힙합의 단면을 잘 말해주는 예이다. 브룩클린의 초기그래피티들은 깨끗한 건물이나 벽, 지하철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경찰에게 적발되어 도망하다 총에 맞고 사망한 그래피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도시 미관상 욕설이나 현란한 그림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하지만 지금 젊은이들의 카운터컬처 한가운데 자리잡은 힙합 문화에 있어 '낙서예술'은 새로운 조류의 예술이며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쓸데없는 낙서'로 보지 않는다. 미스터 에코같은 그래피티는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옷에 로고를 찍어 팔기 시작해 그것이 선풍적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그래피티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잡게 되는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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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피티의 내용 분류 1. 모방화(Imitation painting) 모방, 모사나 임화를 뜻하는 내용으로 작가의 주변 환경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그대로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유명한 캐릭터나 인물, 사진 속 풍경, 자신이 디자인한 그림 등을 확대 복사하듯 그린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또 스타일과 더불어 Imitation의 발전은 현대 Graffiti에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으며, 스프레이의 정교성을 이용하여 정밀하고 섬세한 작업을 통해 실제와 가까울 정도의 사실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2. 사회적 언질(Social words) 사회적인 문제에 참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정치적인 발언을 뜻한다. 재개발,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의 소외계층의 불이익에 관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현대에 있어서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의 Social Word외에도 자기자신의 신변잡기에 관한 이야기, 간단한 Comment를 넣는 경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3. 꼬리표(Tagging) 작가를 나타내는 문자나 순수 의도를 포함하는 가차명 또는 실명을 작품화하는 것을 말한다. Tag 란 쉽게 얘기하면 작품에 남기는 싸인으로 초기에는 자신의 작품 모퉁이에'Graffiti by 아무개'라는 정도로 남기던 것이 근래에는 자신의 실명을 디자인하여 작품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 자신의, 혹은 팀의 Tag name을 작품화하는 것들도 같은 범주에 넣는다. Graffiti의 예술성은 ? 초기의 Graffiti는 지금과는 양상과는 매우 달랐다. "예술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낙서가 미술의 한 표현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2차대전 후부터 Modern Graffiti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70년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Graffiti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라멜지, 데이즈, 레이디 핑크 등의 초기 Writer에서 후기 장 미셀 바스키아의 세이모, 키이스 해링은 분명히 다른 성격을 갖는 넓은 의미의 Graffiti Artist이다. 다시말해 Graffiti는 대중 문화 속의 스타일로 얘기될 수 있을 뿐 '예술인가? 단순한 낙서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논점일 수 있으며 근자에서 도시미관과 맞물려 있어 대중 미술의 차원을 넘나들고 있다. 또 새로운 신구상 미술운동의 한 분류라고도 볼 수 있으며 폭넓은 문화수용이라는 차원에서의 Open mind일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사회 속의 문화구축 현상으로 볼 때 현재에도 진행 상태이며 그 속에서 Graffiti의 진취적인 노력을 통해 어떻게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그래피티의 이해 Tag 60-70년대를 거쳐 캔 스프레이와 마커, 유성 펜 등을 사용하여 열차나 벽면을 알아보기 힘든 Signature들로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이것을 'Tag'라 불렀다. 특히 뉴욕 브롱크스의 젊은이들은 MTA(the Metropolitan Train sit Authority)의 모든 지하철의 내부를 휘갈겨진 사인같은 이 Tag는 자신의 애칭이나 별명, 이름의 이니셜 등이 주를 이루었고, 몇 몇은 갱 멤버들에 의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그려지기도 했다. 이렇게 법에 도전하며 낙서를 즐기던 젊은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Writer'라 불렀다. 그래피티스트들에게 Tag란 자신들의 정체성이며 뿌리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으로 영문자를 확장하고 장식하며 새롭게 디자인해서 사용한다. 초기의 Tag란 자신들의 정체성이며 YORK303, BOBBY098등과 같은 영문자와 숫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앞의 영문자는 자신들의 애칭이고 뒤의 숫자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거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을 Writer 외에 태거(Tagger)라고도 부른다 지하철 차량의 내부를 가득 메운 Tag들은 이제 그들의 영역 확장과 강한 자신감으로 과감하게 법에 도전하며 도시 외벽으로 옮겨지게 되고, 수많은 Tag들 중 자신만의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크기와 색채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Graffiti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Writer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Tag를 남겼다. 그리고 이렇게 Tag를 남기는 활동을 'Tagging'이라 불렀다. 이후 발전하게 되는 모든 작품들의 뿌리가 되는 Tag를 통해 Writer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으로 영문자를 확장하고 장식하며 새롭게 디자인하여 창조적으로 스타일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그래피티의 재료와 과정 1. 끝 남기기(Throw-Up) Throw-Up은 Tag를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스프레이 캔을 이용해서 벽이나 Train의 외관에 빠르게 남기는 것을 지칭하기도 한다. Writer들은 2-3 내외의 글자나 Tag를 Bubble Letter로 남기면서 Throw-up을 발전시켰다. 빠른 시간내에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거친 형태의 Fill-in이나 단순한 Outline으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점차 큰 작업 위주의 Graffiti로 빠르게 발전되었다. 1) 거품 글(Bubble Letter)은 물방울 거품모양의 글자 형태로 초기 Tagging에서의Throw-up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로 유행화된다. 2) 색채우기(Fill-in)는 점차 Tag-scale이 대형화되면서 두꺼운 선을 이용해 색을 입히는 것으로 불법적으로 작업을 할 때 정확하고 빠르며 섬세한 채색이 강조된다. 3) 윤곽선(Outline)은 외곽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의 Tag 등이 바탕이 되는 벽면이나 기차차량 등에서 뚜렷한 표현을 갖고자 테두리의 외곽선이 이용된다. Tag는 Writing 세계에서 작가자신의 얼굴이며 정체성이므로 Writer에게는 단순한 서명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4) 초기의 Tag들은 TAKI 183, JULIO 204, FRANK 207, JOE 136 등과 같이 3-6개의 영문자들과 숫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앞의 영문자들은 자신이 만들었거나 다른 이들에 의해 불려지던 애칭들이며 뒤의 숫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거리나 영역을 의미한다. 2. 필체(Tag-Style) Writing의 역사가 태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Writer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그들은 그들 세계의 명예(Fame)를 얻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 첫번째 방법은 자신의 태그를 독특하게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Tag에서도 스타일이 고려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서체가 개발되었고 시각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장식적인 도안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도안들의 대표적인 것으로 별 모양, 왕관, 거품 모양 등이 있는데 이 중 왕관은 스스로를 Writing세계의 제왕(King)임을 공언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디자인적 시도로 자신만의 독특한 태그를 만들게 되었다. 3. 필적(Tag Scale) Tag는 스타일에 이어 크기면에서도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일반적인 태그들과의 변별성을 갖추는 면에서 스케일은 스타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Writer들은 필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며 자신의 Tag를 점점 크게 그려가기 시작했다. 필체의 두께를 주거나 외곽선(Outline)을 사용함으로써 일반적인 Tag와의 차등을 두었다. 이렇게 스케일의 변화는 넓은 면적의 분사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작가들로 하여금 노즐(Nozzle: 스프레이 꼭지)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만들었다. Writer들의 명예를 향한 경쟁이 Tag의 이러한 모든 부분의 발전을 가져왔고 지하철 챠량 내부에 조그맣게 끌적 거리던 낙서에서 출발한 태그가 차량 외벽 전체를 한 사람의 작품으로 가득 메워지는 Master Piece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4. 열차와 Graffiti Graffiti를 이야기할 때 Train을 빼놓을 수 없는데 Writer와 Train의 관계는 Graffiti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작용을 하게 되었다. Graffiti가 태동하게 된 배경으로의 뉴욕은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로 세계적인 도시모습을 보인다. 맨해튼의 뉴요커, 브루클린의 번잡한 극장가, 자유로운 사고의 SVA미대생들, 하지만 이러한 면모 뒤에는 브롱크스, 할렘의 도시빈민들과 마치 폐허처럼 버려진 건물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화려한 뉴욕의 이면으로는 대접받지 못한 자들과 평등치 못한 사회에의 불만을 품고 있는 계층들 속에서 Graffiti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태어났고, 이것은 뉴욕을 지나는 Train이나 Subway로 점차 이전되기 시작했다. 초기 Graffiti는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통한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Gang들의 영역을 표시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들이 작업장소로서 Subway, Train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태그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급속한 Graffiti 팽창시기에서부터이다. 이 시기에서는 남들과 차별적인 Tag가 필요했고, 좀더 주위의 인정을 받음으로 얻어지는 '명예'가 Writer들에게 필요했다. 위험을 무릅쓴 작업을 더 높은 명예로 여겼고 더욱이 시 교통당국(MTA)에의 도전행위 자체가 철길의 위험함, 밤에 남 모르게 Train에 그리는 것인 만큼 이들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Writer들은 처음부터 본격적인 Graffiti를 하는 것이 아니라 Tag를 이곳 저 곳 남기면서 앞으로의 작업활동을 공표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다른 Writer들은 이러한 새로운 Tag를 보게 되면서 자극을 받게 되고 더 나은 작업으로의 명예를 얻기 위해 주시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Train이나 Subway는 움직이는 벽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면서 Graffiti를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그러나 뒤늦게 받아들인 유럽에선 도시미관과 맞물려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대중과의 친밀함을 더하고 있다. 그래피티와 문자디자인 1. 필체와 낡은 생각(Style-Old School) Graffiti의 발전과정을 배우면서 이제부터는 Style로의 Old School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Old School은 Hip-hop에서 쓰는 용어와 같이 초창기의 스타일에 관한 지칭이다. Old School을 설명함에 있어 우선 기본적인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1) Top To Bottom : 지하철, 차량 등의 꼭대기에서 밑 부분까지의 외관을 Graffiti로 작업하는 것 2) End To End: 지하철, 차량 등의 끝에서 끝까지 덮은 Graffiti 3) Whole Car : 지하철, 차량 등의 E2e, T2b을 한 것으로 완전히 Graffiti로 뒤덮은 것을 말함 처음으로 Whole Car를 한 것은 1973년 Flint 707에 의해 시작되었다. 더욱이 3D디자인을 한 작품으로 더 놀랄만한 것이었다. Whole Car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0 feet의 길이와 12 feet의 높이이므로 스프레이만도 20통 정도와 8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런 이유로 Crew등의 조직적인 활동이 발전되었고 Crew들 간에도 실력에 의해 조직의 위치가 달라지게 되었다. 점점 Subway, Train의 작업이 많아지면서 Writer들은 좀더 많은 스프레이가 필요했고 심지어 스프레이까지 훔치는 현상도 성행하게 되었다. Whole Train: Whole Car와 마찬가지로 Train을 뒤덮은 Graffiti를 말하며 1976년 Cain, Mad 103에 의해 "The Freedom Train"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단 하루만에 지워지는 수모를 겪게 된다.두번째는 Lee, Mono, Doc, Slave의 The Fabulous Five에 의해 1977년 "The Christmas Train"에 그려졌다. 하지만 Whole Train은 드물며 대부분은 2-3칸의 작업이 많아지게 되었다. 2. 필체(Style) 제작자들의 활동이 많아지고 Graffiti가 점점 많아지면서 Writer들은 독특한 스타일과 색이 필요했다.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Writer들은 스타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뉴욕과 그 자치구들의 Writer들은 개성이 강한 스타일에 고심하게 되는데 Kool 223은 처음 Master Piece를 작업하고 Phase II 는 Bubble Letter를 처음 스타일화하였다. Graffiti의 스타일 전쟁이라 할 정도로 절정기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없었던 아이디어들이 Writer들에 의해 쏟아지고 서로의 작품들에 관심과 비판이 높아지게 되었다. 섬세한 선을 Outline으로, 글자가 뒤엉키는 복잡한 디자인 등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기술과 스타일의 발전은 거의 읽을 수 없는 글자의 디자인, 즉 Wild Style, 또 어두운 톤의 그림자를 사용한 입체효과, 글자가 갈라지거나 깨진 듯한 스타일, 컴퓨터의 여러 문양의 글자체 등의 스타일을 낳게 했다. 그래티피와 그림 1. 자생되는 필쳬(Wild Style) 많은 스타일을 발전시킨 이유 가운데 하나는 Writer들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과 불문율이다. 이것은 다른 Writer의 스타일과 디자인을 그대로 흉내 내는 'Bite'를 굉장히 경시하는 풍조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Crew들간에도 앞서 설명했듯이 다른 Crew와 스타일을 리드하는 현상으로 나타났고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해 많은 스타일이 등장하게 되었다. 초기의 스타일에서는 Block, Simple 등의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에서 Arrow, Bubble의 장식을 가미하였는데 장식적인 면과 스타일의 발전과 함께 Wild Style이 등장하게 된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복잡한 디자인의 Wild Style은 불법적으로 행해진 Tagger들의 생활방식과 많은 연관성을 갖게 한다. 단순한 스타일이 여기저기에서 쉽게 접해지면서 다른 느낌의 디자인이 요구되었고, 또한 이것은 Fame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Wild Style은 훌륭한 표현양식으로 자리잡는다. 초기의 Wild Style 작가로 Tracy 168은 마치 글자가 엉켜있는 듯한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시기에서는 작가들의 경향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있어 Wild Style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Trend가 되었으며 글자 디자인에서 국한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캐릭터를 내세워 스타일화하기도 하였다. 2.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 지금은 그래피티의 경향이 글자, 그림간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삽화(일러스트)가 익숙한데 초기에는 그렇지 못했다. 밋밋한 글자 디자인에서 Wild Style로, 또 귀여운, 때로는 괴기스럽기까지 한 캐릭터를 글자와 함께 사용하여 완전한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작가들은 이미지나 내용상의 영감을 얻기 위하여 싸구려 만화잡지나 TV 애니메이션 등에서 소재를 구하기도 했고, 유명한 캐릭터인 스누피, 미키 마우스, 스파이더맨, 수퍼맨 등을 패러디한 그림이 등장되기도 한다. 또한 이 시기에서는 작품의 주제가 글자와 그림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배경에 신경을 쓰게 되었으며 이것은 훗날 글자의 그림화(글자와 그림의 경계가 모호, 글자 속에 그림을 넣기도 하고 그림 속에 글자를 넣기도 하는)시키는 New School의 한 스타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티피의 창조성 New School Style 80년대가 시작되면서 그래피티의 경향이 새로와 지기 시작한다. 일찍이 뉴욕의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발생된 그래피티가 유럽으로 전파되고 제3국으로도 퍼져 나가면서 하나의 거리문화로 자리 매김을 한다. 다른 나라로 그래피티가 전파되면서 그 나라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기도 하고, 많은 작가들이 활동하면서 색다른 영역의 스타일을 키우기도 하였다 Old School과 New School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80년대를 기점으로 하는 시기의 변화도 있겠지만 사실 그래피티라는 Vandalism(기존 질서의 파괴, 공공 시설물의 파괴)이 초창기의 발생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과정이었고, 이것은 사람들(그래피티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일반인)에게 '낙서'로만 평가될 수밖에 없는 걸림 돌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작가주의적 성향의 그래피티 작가들과 대중의 문화인식에 대한 개방성은 New School의 작가들에게 힘이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전의 지하철이나 기차 안의 빽빽한 낙서와 Tagging에서 점차 POP Art의 한 쟝르로 갤러리전시와 퍼포먼스 행사를 통해 친숙한 도시 속의 그래피티로 전환되는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1. 사실주의(Realism) 초기의 그래피티는 단순화된 만화의 캐릭터를 과장하여 패러디하여 그림을 그린데 반해 근래에는 점차로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거나 이것을 3D와 더불어 그래피티의 새로운 경향을 낳게 된다. 신비성 문화의 접목을 꾀하는 젊은 작가들로 하여금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하기도 한다. 2. 모색(Separation) 그림이 대두되는 새로운 경향과 함께 글자의 변화는 Wild Style에서 글자의 획이 분절되어 색다른 느낌을 주게 되는 디자인이 선을 보인다. Wild Style이 Swing(선이 직선이 아니라 둥근 곡선을 이용한 것)중심이라면 근래에는 직선과 적절한 곡선이 어울린 분절된 디자인이 많이 보여진다. 또 슈퍼그래픽 차원의 도형 디자인이 결부되어 새로운 차원의 그래피티를 선보이기도 한다. 3. 입체화(3D) 그래피티가 대중성을 갖게 되고, 산업과 사회의 환경과 연계가 되면서 스프레이 캔의 색상이 다양화되고 산업용 도료의 발전으로 색상이 다양해지고 세밀한 디자인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되면서 작가들은 기존의 벽이라는 2차 평면의 개념을 흔드는 3차원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전에도 블록을 이용하여 3차원의 공간감을 살리는 작품도 있었지만 완전한 3D는 아니었고, 이후 환경 디자인의 역할이 가미되어 구도와 색을 모두 이용하여 실재감을 나타내는 작품들과 함께 예술성과 부합하는 그래피티로 발전하여 사회 속에 살아 숨쉬는 방향으로 진전된다. 4. 가상 공간 (Cyber, FX)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에 의해 사이버 스타일의 작품들은 현실적인 벽체를 이미지화하여 공간을 확장하거나 가상체를 그리는가 하면 우주와 같은 미래 공간을 연출하는 등의 미래지향적인 효과를 살린 방향으로 작품을 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