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과협 회원 2023년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당시 민주화가 전 국민의 소망으로 등장했으나, 민주화 투쟁의 두 거두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먼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로 다투어 한국에서 혼란 사태가 일어났다.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일부 학생 세력과 노동자 세력을 이끌어 온 반정부 세력을 결집해 ‘국민 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일부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라도 푸대접이라는 구호로 전라도 민심을 잡았다. 김대중을 지지 집단은 5월 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 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 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5월17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 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월 17 자정을 기해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 음모자를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전라도 푸대접’이라는 기치를 내걸어 호남 민심을 잡는데 성공하여 이를 토대로 세를 확장했는데 전라도 주민의 김대중에 지지도는 대단하여 시세를 올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우리가 남이 가’라는 기치를 내 세워 경남 지역 민심을 사로잡아 이 세력은 근거로 두 민주화 거두가 한 치의 양보 없이 다투면서 급기야 부마사태 그리고 광주사태로 이어졌다. 호남 푸대접이라는 구호는 개발 자원이 일본으로부터 들여 와 개발 입지가 경남이 유리한 것을 간과(看過)한 호남 민심 잡기 위한 정치구호였다. 최규하 정부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김대중을 감옥에 넣자 이에 항거하는 세력이 반정부 투쟁을 하여 광주사태는 폭동으로 이어져 한국 안보는 바람 앞에 등불(風前燈火)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 정치를 하기에는 여전히 미개하다고 보았다. 차제에 전두환 장군이 급부상했다. 여기에 한국 민주주의 정치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John A. Wickham)은 1980년 8월 8일에 <LA 타임스>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Lemming; 나그네쥐)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하여 한국 민주주의 정치의 앞날이 어두움을 내비쳤다. 비상시국으로 전두환은 1980년 8월 장충단 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1987년까지 7년 집권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장충단 대통령으로 비하(卑下)를 받으며 국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의욕은 대단했다. 그리고 인재를 영입하는데 탁월한 점이 있었다. 김재익 경제 장관을 영입하여 “네가 경제 대통령이다.”라고 하며 경제를 맡겼다.
김재익은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은 인물로 경제 기획원에 몸담고 있을 때 전두환의 눈에 들어 1980년 9월 경제수석으로 발탁됐다. 당시 전두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제를 모른다. 앞으로 경제 대통령은 당신 김재익이다 하였으며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에 관한 업무는 김재익에게 일임했다. 당시에 경제 성장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김재익은 달랐다. 인플레이션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했다. 김재익은 1982년 대내외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국민이 달갑지 않은 긴축정책을 펴서 물가를 한 자리 수로 잡았으며 OECD에 가입하였고 –3.7% 경제를 1983년 12% 성장경제로 전환했으며 수입 자유화정책과 안정 자율정책으로 연 100억 달러 이상 흑자를 낸 쾌거를 이루었다 자동차 반도체 기틀을 만들었고 정보통신 산업의 초석을 놓았으며 포니 자동차가 처녀 수출되었다. 남덕우는 김재익을 가리켜서 역사의 꽃이라 격찬한 바 있다. 이런 나라 중요 인재들 즉, 서석준, 이범석, 김동휘, 서상철, 함병춘, 김재익 등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에서 잃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사심 없이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들을 등용했었다.
결론적으로 군사정권은 민주투사들보다 더 인사에 합리적이고 진보적이었고, 당시 관료들은 평하고 있다, 전두환 시대 총리를 지낸 노신영은 전두환 대통령은 엘리트 관료에 대한 신임이 컸으며,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배울 줄 아는 진정한 유식자였고 겸허한 지도자였고, 경상도, 전라도로 치우치지 않고. 지역주의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교했다고 평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전두환 정권과 노신영 밑에서 자란 인물이다.
평화의 댐 건설도 사심이 없는 공사였으나 민주화 투사들이 전두환 정권이 북한 금강산댐 수공(水攻) 위협을 과장했다고 하여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평화의 댐 현장에서 알아본 바로는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은 할 일을 했다. 김대중 정부가 2002년 평화의 댐 확장 및 증설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그 점을 인정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7년간 재임 중 업적을 나열하면,
1, 한일 자유 무역 협정,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수출과 경제발전을 촉진
2. 수출 산업화 방향을 설정하고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한국의 산업화와 수출 확대를 촉진
3. 농업 경영체제 개혁이고 산업 기반을, 개발을 추진
4, 한강 고수부지 추진으로 한강 수질 개선
5. 야간통행금지 폐지
6. 88 서울 올립픽 유치
7. IT산업육성
8. 중소기업육성
9. 의료보험제도
10, 1987년 6월 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결론적으로 전두환 시대에 박정희 때 닦아 놓은 경제개발을 계속 발전시켜 한국 경제가 제2도약을 하여 오늘날 우리는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여 후진국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 후 민주 투사들이 집권하여 김영삼 시대에 IMF를 맞았고, 1994년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선제 북한 핵시설 초토화 의지를 중단시켰다. 뒤이어 김대중 노무현을 북한 주민의 인권은 도외시하고 평화유지 명목으로 북한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어 북한의 핵무기개발을 도와 오늘날 한국은 북한의 핵 위협의 처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민주화 투쟁은 미국 소 광우병 등으로 거짓으로 발전하여 급기야 더불어민주당은 종북세력이 정권을 잡아 한국 경제가 파틴 직전에 이르렀다, 앞으로 한국 자유민주주의는 부정선거를 방지하고 종북세력들이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어야 진정한 자유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