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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太宰府)]
10월 26일 잠을 깨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길을 따라 개울이 흐르고 있고, 개울 건너편은 삼림이 울창한 산록을 따라 호텔과 일본식 가옥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여기저기 온천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나고, 상쾌하면서도 매캐한 유황냄새가 섞인 공기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산중턱에는 이미 성급한 나무들이 단풍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다.
욕탕으로 내려가서 욕탕과 노천탕을 드나들며 온천욕을 하고 면도를 하고 나니 기분이 산뜻하다. 노천탕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 자동으로 냉수샤워가 되었다. 1km쯤 저 너머로 활처럼 굽은 만곡의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어제의 그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사실 나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음식을 집어 와서 먹는 뷔페식은 싫다.
벳푸에서 약 2시간 10분 걸려 큐슈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한 끝에 11시 45분경 후쿠오카의 이사카야(居酒屋)식당에 도착하여 그곳 2층 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다자이후(太宰府)로 출발하였다.
그 사이에 비는 그쳤다. 후쿠오카는 원래 다자이후의 직할령으로 내려오다가 에도(江戶)시대 이후 임진왜란의 원흉중 하나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의 영지로서 후쿠오카번(福岡藩)이 되었다.
다자이후는 663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공격을 당한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이 금강(錦江)하구인 백촌강(百村江)으로 27,000명의 군대를 보내었으나 크게 패하여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지원군은 처참한 모습으로 후퇴하면서 나당연합군이 일본에까지 침략해올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후쿠오카에 다자이후(太宰府)를 건립하고 그 주변에 백제식 토성을 쌓고 수공(水攻)에 대비한 수성(水城)을 만들었다.
그 규모는 길이 1.2km, 기저부의 폭 80m, 높이 14m의 매우 큰 토성이며, 또 뒷산에는 백제 망명세력의 지도하에 산성을 모방하여 축성한 길이 약 8km의 토담과 석벽으로 산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고, 그 내부에는 식량과 무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으며, 그 유적지인 오오노죠오 유적지(大野城跡)에는 현재도 창고의 유적으로 보이는 기둥의 주춧돌(礎石)이 약 70개 점재해 있다.
이 시기는 백제계의 정권인 야마토정권(大和政權)과 백제로부터의 망명세력이 집권을 위해 다투었던 야마토정권의 혼란기이다.
가이드는 버스가 지나가는 우측에 보이는 땅이 모두 옛 다자이후의 땅이라고 하는데 나무가 많고 집들이 나지막하여 전원도시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15분쯤 달려서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오다가 그쳐있다.
[다자이후텐만궁(太宰府天滿宮)]
약 10분을 걸어서 다자이후텐만궁 입구에 도착하였다. 텐만궁(天滿宮)은 901년 중앙정부에서 우대신(右大臣)으로 있다가 돌연 다자이후 관리로 좌천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제사지내기 위해서 세웠는데 현재의 본전(本殿)은 1591년에 건축된 것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18세에 진사(進士)시험, 23세에 수재(秀才)시험에 합격하여 문장박사(文章博士)가 되었고, 55세에 학자출신으로는 드물게 우대신에 오르는 등 고속승진을 하다가 당시 좌대신 후지와라노 토키하라(藤原時平)의 강력한 견제를 받아 다자이후 권수(權帥)로 좌천되었는데 유배생활 2년만인 903년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스가와라(菅原)는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입시철이면 수험생들과 그 부모들이 텐만궁에 찾아와 자녀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바람에 이곳은 늘 붐비고 있다고 한다.
텐만궁 입구에서 3번째 도리이를 지나 왼쪽 10여m 지점에 있는 도리이는 다른 것과는 특이하게 상하 2개의 횡석(橫石)이 기둥부분 안쪽의 좌우에서 각각 연결된 모양이 전체로는 3부분으로 나뉘어 연결되어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양식은 백제식이라고 한다.
심(心)자 모양의 연못(心字池)에는 그 위로 궁형(弓形)의 다리와 평편한 다리가 놓여있고 궁형의 다리를 지나 바로 우측에 무로마치(室町)시대의 건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시가샤(志賀社)라는 건물이 서있다.
심자지를 지나고 마지막 도리이를 지나서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도랑위로 놓인 돌다리를 건너 정문을 지나서 본전이 있다. 본전 앞에는 동전함이 놓여있고 그 안에는 동전이 가득 담겨있다.
일본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돌잔치를 못하면 남아는 3 또는 5세 때 여아는 5 또는 7세 때 ‘시치고상’행사를 하는데 작게는 10만엔에서 100만엔까지 헌납금을 낸다고 한다. 마침 오늘이 그런 날이라서 부모들이 아이에게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 입혀서 데리고 왔다.
본전은 가운데 거울, 좌우에 잡귀를 털어내는 먼지털이 비슷한 기구와 북이 각 1개씩 3종의 신물(神物)이 비치되어있었다. 바닥에는 신도(神徒)들이, 그 좌측에는 무녀(巫女)가 꿇어앉아 있으며, 신관(神官)은 신도들의 앞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신사의 구성이나 행사의 내용 등이 우리나라의 무속(巫俗)과 비슷하다. 하기야 신도(神道)라는 것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무속의 변형이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자이후의 관세음사(觀世音寺)]
텐만궁에서 14시경 버스를 타고 10여분 달려서 관세음사(觀世音寺)에 도착하였다.
관세음사는 사이메이(齊明)천황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큐슈로 떠났으나 출병하기 2년전인 661년 아사쿠라노다치바나노히로니와노미야(朝倉橋廣庭宮)에서 붕어(崩御)하자 그녀의 아들 텐지(天智)천황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다자이후에 관세음사의 건축을 발원하고 약 80년의 세월이 지난 746년에 완공되어 <府의 大寺>로 불리고 있는 큐슈의 중심적 사원이다.
현재의 강당과 금당은 에도시대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현지정문화재이다.
가람배치가 백제식으로 되어있는데 나라(奈良)의 흥복사(興福寺), 동대사(東大寺), 약사사(藥師寺) 등도 이 시기에 건축된 것이다.
백제식 가람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백제에서 금강(金剛)이라는 목수를 초빙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한 것이 효시인데 이어서 법륭사(法隆寺)를 건축하였고 이때부터 큼직큼직한 규모의 사찰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사천왕사는 금강이 중심이 된 ‘공고구미(金剛組)’라는 회사로 조직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수리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엔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관세음사는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중국 산동반도의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과 밀접한 관계에 있어 장보고의 선단도 2회나 이곳에 와서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금당 앞 좌측에는 5층탑이 서있던 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현재 국보인 범종이 들어있는 종각이 있고, 종각 우측에는 우물터가 있고 우물 뚜껑부분의 돌이 5각형으로 걸쳐져 있는데 이런 양식은 백제식이라고 한다.
[다자이후세이쵸오유적지(太宰府政廳跡)]
다자이후세이쵸오유적지로 가다보면 우측에 계단원터(戒壇院跡)가 있다.일본에는 천하삼계단(天下三戒壇)이라고 하여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시모츠케(下野)의 약사사(藥師寺)와 더불어 관세음사에도 계단원(戒壇院)이 설치되어있었으나 에도시대에 분리되어 현재는 선사(禪寺)다. 선사의 본존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은 헤이안(平安)시대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중요문화재이다.
다자이후학교원적(太宰府學校院跡)을 지나 혼자서 다자이후전시관(太宰府展示館)에 들렀다가 나오니 일행들은 다자이후세이쵸오유적지(太宰府政廳跡)에 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곳 다자이후세이쵸오(太宰府政廳)는 7세기 후반부터 나라(奈良)・헤이안(平安)시대에 걸쳐서 큐슈 전체를 다스리던 곳인데 큐슈 서부의 방위와 외국과의 교섭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도 세이쵸오유적지(政廳跡)의 중심부에는 대규모의 건물임을 짐작케 하는 주춧돌(礎石)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큐슈에서의 마지막 밤]
다자이후세이쵸오유적지 관람을 끝으로 버스에 올라 15시 20분경 하카타 항에 가까운 후쿠오카 하이야트 레전시 호텔에 도착하여 922호실에서 여장을 풀었다.
방은 작지만 깨끗하고 침대 위에는 그림도 1장 걸려있다. 이 호텔은 13층 원형으로 되어있고 1층에서 6층 지붕까지는 가운데가 피라밋 형으로 뻥 뚫려있다.
캐널시티(CANAL CITY;일종의 쇼핑센터)를 잠시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할 식당으로 출발하니 토요일이라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어서인지 날은 저물어서 캄캄한데 거리는 한산하다.
18시 15분경 소로소로야(徐徐屋)라는 한(韓)식당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돼지고기・소혀・쇠고기 등을 구워서 진로소주(일본의 진로소주는 25도이고 맛이 달지 않고 쓰다)로 과음을 하여 식사도 못한 채 호텔로 돌아와서 잠에 떨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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