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와 양해의 말씀:불초소생의 보잘 것 없는 글월을 많이 읽어 주시고 수 많은 격려
전화와 적지않은 댓글을 올려주시는 동문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우선 제 5 화
'김영삼과 나'를 보내드리오며 '제 6 화 김대중과 나'는 소생의 단기 미국Washington출장으로 인하여 잠시 지연됨을 양지 바랍니다. 소생의 글은 당분간 계속됩니다. 신 희 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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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화: 내가 본 김영삼: 신희석이가 소위 ‘한국적 출세’를 아니한 이유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을 취임하기전에 3~4회(제 1 기), 대통령재임 기간동안 청와대 2층 집무실에서 2회(제 2 기),청와대 퇴임 후(제 3 기) 상도동에서 3~4차례 모두 합하여 10 여차례 가족동반 식사초청을 받거나 직접 독대를 하였다.
*제 1 기: 내가 김영삼 대통령을 상도동자택에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89년 초겨울로 기억한다. 연세대행정대학원 재직당시 나의 제자인 이성헌비서관 (나중에 국회의원을 거쳐서 현재는 서대문구청장)의 적극적인 소개와 알선의 결과이었다. 그 당시 나를 소개한 이성헌군은 (그당시에 나는 그를 '이성헌군’이라고 불렀음) 내가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던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대학원생으로서 나의 이수과목인 “동북아국제관계론”과“일본정치외교론”을 진지하게 수강한 모범대학원생이었다.
나의 연세대 행정대학원 강좌에서는 미국정치외교의 원점과 일본정치외교의 원점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대학원생들과 함께 Field Survey의 일환으로 위싱턴과 도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성헌비서관 의 경우, 20 여명의 동료대학원생들과 함께 (당원의 김홍식연구위원동행) 일본여당인 자민당본부를 방문하여 Ozawa자민당간사장을 비롯한 일본국회의원들 그리고 동경대학대학원생 등의 일본지식인들과 동북아국제관계에 관한 적극적인 의견교환과 열띤 토론을 전개한 바 있기에 (1990년 가을) 이성헌비서관 을 통하여 김영삼 총재의 근황을 자연스럽게
듣고 접촉하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때의 김영삼 총재는 그다지 넓지 않은 거실에서 둥그스름한 석유난로를 피우면서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김총재와 나는 처음부터 한국정치의 현주소와 우리민족의 나갈 길에 관하여 진지한 의견교환을 하였다. 와인잔을 부딪쳐 건배하면서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하여 축배 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 여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이와같이 정의를 투합한 김영삼씨와 나는 그의 부름을 받고 마포의 서울 가든호텔 2층식당, 롯데 호텔 지하식당 벤케이 등지에서 가끔 식사회동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장래와 한미일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국제환경 등에 관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향후의 협조체제구축을 다짐하였다. 김 총재와 회동할때마다 앞서 말한 이성헌 비서관이 중간에서 여러차례 연락업무를 담당하여 주었다.
*제 2 기(대통령재임기간):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에 제 14 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외교통상부에서의 나의 오랜벗인 반기문 의전수석(당시)과 김석우 의전수석, 김기수 수행실장, 이성헌 공보비서관 등 여러 김영삼사람들의 도움으로 김대통령과의 연결은 계속 되었다. 또한 1997년 초가을(9월경?)에 나는 다시금 이해순 청와대의전수석 (前駐핀란드대사)으로부터 김대통령이 나를 부른다고 하는
연락을 다시금 받았다. 청와대 2 층 대통령집무실 넓은방에서 김대통령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약 1 시간가까이 독대하였다. “신교수 혹시 무슨 애로사항이라도 있나요?”라고 하는
김대통령의 질문에 대하여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라고 나는 답을 하였다.
그 당시 현직 대통령에게 내가 어떠한 부탁을 하였었더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던 분위기였지만 나는 김대통령에게 아무런 부탁도 요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통령이 최근의 미국정치와 일본정치에 관한 특별보고서의 제출을 요청하였기에 나는 기꺼이 작성하여 제출한 바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김대통령과 작별하고 청와대의 2 층계단을 서서히 밟고 귀가하였다.
*제 3 기(대통령 퇴임후): 김영삼 대통령의 퇴임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나는 20 년간
정들었던 외교통상부를 떠나서 오늘날 근무하고 있는 아태정책연구원(APPRI)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연세대행정대학원에서의 대학원수업과 강의는 더 계속되고 있었다.
2002년의 어느 늦은봄. 나는 아태정책연구원(APPRI)이 주최하는 제 92 차 외교통상
정책연구포럼에 김대통령을 연사로 초청하기 위하여 면담신청을 하였더니 즉시 상도동 김영삼 대통령 사저로부터 한 남성의 전화를 받았다. 김대통령의 충실한 만년부하인 김기수
비서실장이었다. 김대통령께서 연사초청을 쾌히 수락함과 동시에 오랜만에 “신교수 부부를 식사초청”하니 식사를 함께 하면서 상의하자고 하는 메시지이었다. 나는 집사람을 동반
하고 상도동을 방문하여 김대통령의 응접실에서 잠시 환담한 후 곧바로 옆방에 있는
다이닝키친에서 즐거운 식사를 함께 하였다. 김대통령의 부인 손명순여사가 함께 동석하여 맛있는 반찬도 손수 날라 주면서 오랜만에 오붓한 식사시간을 통하여 즐거운 대화를 만끽하였다.
김대통령은 내가 외교통상부를 떠나게 된 동기에 관하여 진지하게 묻기도 하였으며,
최근의 국제정세와 한미일관계 그리고 우리의 대응책 등에 관하여 폭넓은 의견교환을
하였다. 국내정치에 관한 부분에서 김영삼씨는 김대중씨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 얼마 뒤 내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아태정책연구원(APPRI)이 주최한 김영삼대통령
초청 제 92 차 외교안보통상정책연구포럼은 소공동롯데호텔 2층 별실에서 약 50 여명의 당원이사, 연구위원, 정책자문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비공개) 성공리에 개최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별첨사진참조).
지금 생각하면 왜 김대통령이 우리부부를 식사초청 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조용히 해
본다. 강연일정을 단순히 협의하기 위한 식사초청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단조롭다.
아마도 내가 부족한 사람이지만 마음속에 두었던 학자의 고독과 무엇인가의 아쉬움을 달래고 우리부부를 격려하기 위하여 불렀던 것으로 일방적으로 추측할 뿐이다(착각은 자유!).
앞서 말한바와 같이, 어느 특정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과 시각과 타이밍과
인조기준(Frame of Reference)에 따라서 사뭇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김영삼 정권이 등장한 직후 일반국민들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군부출신의 정권에
비하여 무엇인가의 변화를 기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순수한 한국정치구도의
핵심에서 만년 야당총재를 해왔던 김영삼씨가 어떠한 획기적인 무엇인가의 변화제시를
국민들은 고대 하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롭고 희망찬 정치문화의 시대적 창출이
요청 되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결과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도 없지는 않다. IMF에 의한 경제적 어려움, 아들 김씨에 의한 각종비리 등에 대한 국민적 실망도 컸으며, 특히 소수이었지만 친북인사를 주위에 두면서(예,H 前부총리등) 오늘날 소위 “종북”세력이 점진적으로 부상
하는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하는 측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수십년간 한국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담고 한국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하여 노력해 온 김영삼대통령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체재로 이어지는 소위 군부출신정권의 종지부를 찍고 군사문화를 종식시켰다고 하는 또 다른 시각에서 볼때, 한국정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는 상징적의미를 나는 높게 평가 하고 싶다(다음호에
계속.........⑥김대중과 나).
*비행기 속에서도 집필작업은 부단히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첫댓글 미국 잘 다녀 오시길
병만아! 불과 수일동안의 짦은 일정이지만 잘 다녀오겠다.항상 깊은 관심표명 감사드린다. 희석이가...
자식 ! 잘만했으면( 학문의 길 포기... ) 한자리 할뻔 했네 ? 비향기 속 글 기대해 볼까 ...
그래. 너말대로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정치와 고관대작의 길을 걸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내 인생 결코 후회는 없다. 나의 과거는 아름다웠고 앞길은 더욱 탄탄대로일 것이다. 철세야 힘내자..그리고 달리자..희석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