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불교이야기 : 불교(佛敎)란 무엇인가?
불교(佛敎)란 '석가모니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을 말합니다. 우리말(한글) '부처'는 중국어(한문) 불타(佛陀)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불타(佛陀, 줄임말로 불佛)는 고대인도어(산스크리트어 & 빠알리어) 붓다(Buddh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음역)한 것입니다.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를 뜻하는 고대인도어로 일반명사로 쓰이기도 하고 '고타마 싯달타(Gautama Siddhartha) 붓다(Buddha)'(이른바 석가모니불)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불교(佛敎;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는 진리(眞理; 진실한 이치)를 터득하는 행위에 대한 가르침이므로 신앙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나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진실한 이치)에 접근하려는 스스로의 노력(배우고 이해함)과 실천(닦고 익힘)을 중시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불교(佛敎;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正) 가르침(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수행)하여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바른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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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절(사찰), 수행과 기도, 스님(비구와 비구니)이란?
법(法)[註1]이란 석가모니 부처님(佛, 佛陀)이 설(설명)한 진리(진실한 이치)를, 승(僧, 승가)은 그 진리를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이해하여 바르게 실천(수행)하고 익히는 수행자들의 모임, 집단을 말합니다. 삼보(三寶)는 '세 가지 보배로움(보물)'이라는 뜻입니다.
<각주 [註1] : 법(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한 고대인도어 담마(Dhamma, 다르마Dharm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법法을 설명함)에서 담마(다르마)는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실상(실제 상태/모습),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佛法), 지혜(智慧), 인식의 대상인 모든 것,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 현상' 등을 지칭하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물 수(水) + 갈 거(去)'의 합성어인 법(法)은 '물 흐르듯 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물이 자연의 법칙(질서, 이치)에 따라 흘러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글자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가되 거기에는 일정한 길(질서, 이치, 법칙)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법(法)은 '자연의 질서, 자연의 이치/법칙'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담마(다르마)를 법(法)으로 한역한 것은 비교적 잘된 번역입니다만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참고로, 지혜(智慧)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한 고대인도어 빤냐(Pann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반야般若는 빤냐Panna의 한문 음사). 빤냐(반야)는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존재의 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법; 연기의 진리)를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이자, '우리가 괴로움의 굴레에 어떻게 빠져드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진리(진실한 이치)를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입니다.>
절(사찰)이란 불법승 삼보가 있는 곳을 일컫습니다. 절의 기원으로는 죽림정사가 최초인데 광의적인 의미로 보면 절 아닌 곳이 없지만 오늘날에는 의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곳을 절이라 칭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신 부다가야에서 최초의 설법(법을 설명함)을 하기위해 250Km나 떨어진 베나레스까지 맨발로 걸어가신 것은 오직 바른(正) 진리(法)를 전하기 위한 자비심의 의지였습니다. 그후 입멸하실 때까지 45년 동안 매일같이 맨발로 걷고 걸식(탁발)하시면서 사람들(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진리(法)를 설하셨습니다. 우리가 절에 가는 것은 그 고귀한 진리(法)를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이해하여, 바르게 실천하고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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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사찰)에서 이루어지는 행(行) 중에 이른바 수행과 기도가 있습니다.
'수행(修行)'[註2]은 ‘몸과 마음의 행(行)을 닦는다(修),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셨던 것처럼 몸과 마음의 행(行)을 닦고 습득(習得; 익혀서 득) 했을 때 성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부처님이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註3]를 실천하여 부지런히 몸과 마음의 행을 닦고 길들이는 것이 수행입니다.
<각주 [註2] : '수행(修行)'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한, '경작하다.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다'라는 뜻을 지닌 고대인도어 '바와나(bhavan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닦을 수(修) + 행할 행(行)'의 합성어인 수행(修行)을 한문 그대로 해석을 하면 ‘행을 닦는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거울을 닦는다, 방바닥을 닦는다'라고 할 때처럼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닦는다는 말은 나쁜 것을 좋게 만든다, 더러운 것을 깨끗이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닦는다(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탐욕스러운 마음, 괴로운 마음,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는 마음, 미운 마음들이 궁극에는 완전히 청정(맑고 깨끗)한 상태 -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의 마음 상태,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와 평화의 상태가 되도록 닦는다'는 뜻입니다.>
<각주 [註3] :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는 '정각으로 가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을 바와나하는(계발하는, 닦는) 수행'을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팔정도(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정견·정사유)를 '수행(바와나;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계(戒, 실라; 정어·정업·정명), 정(定, 사마디; 정정진·정념·정정), 혜(慧, 빤냐;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시고, 설법(법을 설명) 시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이셨습니다. '실라(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그냥 실라.
팔정도 바와나는 '실라(정어·정업·정명)-사마디(정정진·정념·정정)-빤냐(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줄임말로 '실라-사마타-위빠사나', 다른 표현으로 '계(戒; 실라)-정(定; 사마디/삼매/선정)-혜(慧; 빤냐/반야)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라(실라 바와나)는 정어(바른 말/언어)·정업(바른 업/행위)·정명(바른 삶/생활)을 닦는/계발하는 수행입니다.
사마타는 사마디 바와나의 줄임말로,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선정)을 닦는/계발하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는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의 줄임말로, 사마타 수행으로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었다 나온 직후에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마음챙겨/전념하여 알아차림) 능력을 사용하여 신수심법(身受心法, 달리 표현하면 자신과 세상)을 깊이 정견(바른 봄/관찰/통찰)하고 깊이 정견한 것을 깊이 정사유(바른 생각/사유/분석)하여 깊은 빤냐(반야; 통찰지혜)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입니다.
요컨대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수행(팔정도 바와나)은 계(戒; 실라)-정(定; 사마디)-혜(慧; 빤냐) 바와나(계발 수행) 또는 계-정-혜 삼학(三學)의 단계로 이루어진 수행입니다. 즉, 계행(실라 바와나)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어느정도 청정하게 하고, 계행을 바탕으로 한 사마타 수행으로 삼매(사마디)를 이룸으로써 마음을 고요히 집중되게 한 후 위빠사나 수행으로 깊은 빤냐(반야; 통찰지혜)를 계발함으로써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팔정도 바와나를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구르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실라(정어·정업·정명 바와나)-사마타(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정사유 바와나)가 서로 상호의존하여 바퀴처럼 구르면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향해 굴러갑니다.
훗날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을 상징하는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佛敎;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심볼(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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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요청(빎)이나 기복(祈福; 복을 빎)이 아니라 진리에 바르게 접근해 가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즉 기도란 부처님이 세운 원과 내가 세운 원이 일치되기를 바라며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실천의지를 다지는 행위입니다. 복은 비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짓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이나 절대자에게 기대고 의지하여 복과 구원을 비는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님(비구와 비구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수행)하기 위해 출가한 남성 수행자와 여성 수행자를 말합니다. 즉 스님(비구와 비구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반야)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註4]의 경지(상태)를 이루기 위해 출가하여 수행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다른 종교처럼 신과 사람 사이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스님(비구와 비구니)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신(신격화된 부처)에게 복을 빌거나 재앙을 없애주기를 빌거나, 또는 신(신격화된 부처)을 대신해서 복을 내려주고 죄를 사해주는 행위 따위는 절대로 해서도 안 되고, 또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각주 [註4] : 열반(涅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한 고대인도어 니르바나(Nirvana, 닙비나Nibbāna)를 한문으로 음사한 것입니다. 닙바나(산스트리트어로 니르바나)의 번역어인 열반은 오늘날 죽음이라는 의미로까지 통용되고 있어서 혼란이 생깁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한 원어 닙바나(또는 니르바나)를 그대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불교(佛敎;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가 지향하는 목표인 닙바나(니르바나; 열반)의 의미는 죽음이 아니라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 즉 '모든 탐진치와 번뇌(괴로움)가 완전히 소멸되어 더 이상 조건지어지지 않는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우빽카), 완전히 지혜(빤냐, 반야)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에 도달한 상태', 달리 표현하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열반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살아서는 열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허나 이것은 상당한 착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많은 제자 아라한들이 그러했듯이 닙바나(니르바나; 열반)는 살아서 도달하는 경지(상태)입니다. 죽어서는 닙바나(니르바나; 열반)를 증득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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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바꾸는 가르침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견하시고 가르치신 실상(존재의 실제 상태/모습; 연기의 실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실상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견하시고 가르치신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실천법(수행법; 팔정도 바와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실천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와 같이 개인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곧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며, 동시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곧 개인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소위 대승, 소승의 분열이나, 무슨 종, 무슨 파 따위의 분열과 대립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실천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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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의 본질은 올바른 삶에 대한 근원적인 접근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종교인의 자세는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실천적인 자세이어야 합니다. 종교는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망라하는 세상 모든 영역에 대해서 「진실한 모습과 진리는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적 수행을 중요시 하면서도 사회적 모순과 모든 인간문제의 해결에 대해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적인 사명이기도 합니다.
단 주의할 점은 그 해결방법이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하는 등의 여타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반드시 종교 본연의 바른 목적과 그 목적에 맞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훌륭한 올바른 방법'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의 변질은 궁극의 목적을 위한다는 허울 뿐인 명목과 그 추구방법에 대한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욕망과 사리사욕이 개입된 교묘한 변질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자충'[註5]은 많이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욕망(탐욕과 집착; 탐진치)이 개입된 것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 또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최면을 거는 사자충들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욕망(탐욕과 집착과 어리석음; 탐진치)을 이용해서 스승(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묘히 변질시키고 개인적 집단적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각주 [註5] : 백수의 제왕인 사자를 서서히 죽이는 것은 사자의 몸 속에서 사자의 살을 파먹으며 자라는 벌레인 '사자충'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정법(正法;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키고 파괴시키는 자를 사자충에 비유하며 경고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자신이 사자충인 줄 알기도 하고, 또는 모르기도 한, 또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최면을 거는 여러 종류의 사자충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욕망(갈애, 갈망과 혐오, 탐욕과 집착과 어리석음; 탐진치)이 개입된 것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사자충들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욕망(예컨대,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죽기 싫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믿는 존재가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 존재가 나와 내가 속한 집단에게 복과 구원을 주면 좋겠다.. 등등)을 이용해서 불선한 의도로 스승(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교묘히 변질시키고 개인적 집단적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수행)하는 출가 수행자를 수행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수행승이 변질된 스님들.. 수도승(法이 노장사상화된 道를 닦는 출가 수행자)..구도승(그 道마져도 닦는 게 아니라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구하기만 하는 출가 수행자)..철학승..문학승..땡중도 있습니다.
매우 슬픈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스님(비구, 비구니)들 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수행)하는 수행승(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정한 참 제자)이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출가 수행자이든 재가 수행자이든 바른(正) 진리(法)를 가르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매우 죄송스럽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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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불교(佛敎;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는 '조건 지어지지 않는(조건 없는, un·conditioned; a·saṅkhāra)'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완전히 지혜(반야)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이르는 바른 길(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佛)의 가르침(敎, 法)을 바르게 실천한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더라도(어떤 조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바른 수행(팔정도를 닦는 수행, 팔정도 바와나)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그리고 완전히 지혜(반야)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를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당시의 인구 추정치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한 학자들의 추정치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활동했던 갠지스 강 중북부지역에서 사문(재가, 출가를 포함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수효가 약 십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중에서 약 천 명(백 명당 한 명꼴) 이상을 자신과 같은 아라한(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입니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바른 수행(팔정도를 닦는 수행, 팔정도 바와나)을 완성하여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개인의 근기, 즉 경험과 경험으로부터 형성되는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 가지 능력(예컨대, 지적능력, 이치를 이해하는 능력,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능력 등) 그리고 현재 수행 상태 등의 개인차에 따라 7년~7일 정도라고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을 당시에는 바보라 불릴 정도로 일반인에 비해 지적능력이 매우 부족했던 쫄라빤따까(주리반특)도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수년간 수행하여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사리뿟따(사리자, 사리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15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고, 이미 선정의 자유자재와 네 단계의 무색계 삼매를 모두 이룬 수행 상태였다고 추정되는 바히야 따루찌리야는 탁발하러 가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여 듣고 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펼쳐 놓으신 바른 수행(팔정도를 닦는 수행, 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바른 가르침(正法)이 오늘날에도 바르게 전승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정각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안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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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진정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a Dhamma
really be liberated.. be peaceful.. b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