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금양정사(榮州 錦陽精舍)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88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풍기읍 금계리 38번지
금양정사는 정사와 그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바 건물의 구성은 좌측에 온돌방을, 우측에
대청을 설치하고 전면과 좌측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건축 양식과 평면구성에서 지방
사림과 사대부 건축의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진은 금양정사 본 건물이며 부속건물은 사진 왼쪽편에 있다.
금양정사는 16세기 중엽 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건축한 곳이다. 금계 황준량 선생은 젊어서 부터 학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 '풍유금계 영유소고'라는 말이 생겼다. 풍기에는 금계선생이 있고 영주에는
소고(소고 박승임)선생이 있다는 말이었다.
금계 황준량 선생은 중앙의 벼슬을 사양하고 백성을 직접 대하는 지방 무대에서 백성을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학교(당시 향교와 서당)를 세워 인재의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책을 편찬 배포하였다. 금계 황준량 선생은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 보다 세상을 먼저
뜨니 스승인 퇴계 선생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한다. 퇴계 선생은 제자인 금계
선생의 행장(행장이란 죽은이의 이력과 행적을 기록한 글)을 직접 지어 그 애통함을 대신하고
금계의 덕을 기렸다.
퇴계 이황 선생은 수 많은 글을 지었으나 그가 지은 행장은 얼마 되지 않는다.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은 금계 황준량 선생 외에 이상적 개혁가로 이름이 높았던 정암 조광조 선생, 명종
임금, 퇴계 선생의 선친 등 총 8명에 불과하다. 행장은 인물을 평가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글이다. 그 집안 사람이나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는 글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객관적인 글이다. 그런 이유로 행장은 같은 집안 인사보다는 명망이 있는 외부 인사에게
맡겨 짓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준량은 본관은 평해(平海), 자(字)는 중거(仲擧), 호(號)는 금계이다. 중종 35년(1540) 문과
(文科)에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할 당시의 나이는 24세로 당시로서 매우 이른
나이였다. 참고로 경북 북부 지역 선배 중엔 농암 이현보가 32세, 충재 권벌이 30세,
퇴계 이황이 34세, 학봉 김성일이 31세에 급제했다.
황준량은 후대 사람들이 그 공덕과 인격을 추모하여 신령 백학서원(白鶴書院)과 욱양단소
(郁陽壇所)에서 배향(配享)하고 있다. 단양에는 그의 공덕비가 있다. 2002년 단양 출신의 농민
소설가 조순호씨는 금계 황준량이 단양에 끼친 덕을 기려 [목민관 항준량]이라는 소설을
내기도 하였다.
다음 글은 퇴계 선생이 그의 제자 금계 황준량 선생에 대해 지은 행장의 일부이다.
(선략) 나 황(滉)이 공(公)을 농암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부터 서로 함께 놀로 따르기를
가장 오래하며 친밀히 하였는데 우둔하여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 공을 얻어서 깨우친 점이 많았다.
공이 물러 나서 돌아오면 실로 서로 내왕하며 옛날의 정을 다시 가꾸자는 언약(言約)이 있었으나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이 들어 몸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아 있고 오히려 강건한 나이에 있던 공을 곡(哭)할 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은 기록할 것이
많으나 정중히 다 감히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그 큰 것만을 위와 같이 추려서 서술한다.(하략)
다음 시는 금계 황준량이 퇴계 이황의 초옥을 방문했을 때 퇴계 이황이 지은 시이다.
시냇가에서 님을 만나 의심난 것 토로하다
막걸리 한 사발을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조물주가 매화꽃 더디 피운 것을 아쉬워해
일부러 잠깐 동안 가지에 눈꽃 피게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