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자주요 백유개완(金 磁州窯 白釉蓋碗)
북송 백자개완(北宋 白磁蓋碗) 송 정요 장유개완(宋 定窯 醬釉蓋碗0
현재 우리나라의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의 차문화를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확산시키고 있다.
세계화된 차문화속에서 다른 나라의 차문화를 배척할 필요야 없겠지만 한번 이 땅에 발붙이게 된 차문화는 단순한 음용문화가 아니라 한 나라의 정신문화로 자리 잡게 되므로 새로운 차문화를 접할 때에는 반드시 그 문화의 역사적 연원을 잘 살펴야 하며 우리차문화의 정서에 맞게 재창출시켜 뿌리내리도록 하여야 후세에게 반듯하고 정결한 차문화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개완을 차생활 속에서 널리 사용하면서도 개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개완의 사용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개완을 이용한 음다문화의 태동과정과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남송 청백유개완(南宋 靑白釉 蓋碗)
남송 용천요 청자개완(南宋 龍泉窯 靑磁槪碗 )
금 자주요 흑유개완(金 磁州窯 黑釉蓋碗) 원 자주요 개완(元 磁州窯 蓋碗)
개완의 역사
[뚜껑이 있는 사발] 즉 개완의 역사를 유물에서 찾아본다면 그 최초의 시기는 전국시기(기원전3-4세기경)의 원시청자에서 그 시원을 찾아볼 수 있다.
약 2500여 년 전의 유물들로서 초기월주요(越州窯)에 해당하는 이 원시청자로 만들어진 개완 들은 많은 수가 전해져 오는데 그 용도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떠한 음식용기이거나 약탕완 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러한 개완들의 외형을 보면 후대 차를 마셨던 개완들과 비례감에서 매우 유사하지만 이외 전국시대 개완을 이용하여 차를 마셨다는 어떠한 증거나 정황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월주요(越州窯)에서 만들어진 초기의 청자 기물들은 일상적 용기라 볼 수 있는 흔한 모양들이 없으며 대부분 특별한 의식 용기이거나 귀족층의 부장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부장품은 당시 생활의 문화흔적들을 반영해주는 훌륭한 자료임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개완의 용도가 차와 관련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흥미로운 추측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차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당대(唐代)에는 당시 차문화의 실상을 말해주는 다구들이 전국의 많은 가마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당시 차문화사의 흔적들을 연구하는데 많은 해답을 전해준다.
명 말기 홍녹채개완(明 末期 紅綠彩蓋碗)
명 중기 청화개완(明 中期 靑花蓋碗)
그러나 특이한 점은 당대(唐代)의 전해져 오는 유물들 중에서는 차를 마셨던 개완이 전혀 보이지를 않는다.
문헌적 기록에서 뿐만 아니라 유물을 통해서 살펴봐도 당대에는 개완을 이용한 음다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찾아볼 수 가없다.
다경(茶經)의 기록에 추차(觕茶) 산차(散茶)등 잎차형태의 이름들이 보이지만 결국 이 차들은 가루차로 만들기 전의 원료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이었으며 잎차를 개완에 우려마시는 음다 형태는 아직은 없었다는 근거를 말해 주고 있다.
개완이 찻잔으로 시작되는 시기
청 건륭 청화개완(淸 乾隆 靑花蓋碗)
명. 청화개완의 다탕(茶湯청)이라는 명문
개완이 본격적인 차구로서 등장하는 시기는 송대(宋代)로서 이 시기 다구를 만들었던 가마에서는 빠짐없이 개완이 제작되었으며 전해져오는 개완은 그 숫자가 매우 많다.
하지만 송대 여요(汝窯), 균요(均窯), 남송관요(南宋官窯), 정요(定窯)등 관요(官窯)의 기물에서는 개완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저급한 민요수준의 개완도 잘 보이지 않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수요층이 최고 지배계층이나 서민층이 아닌 일정수준 이상의 사회적 신분계급에서 사용되었던 다구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개완을 이용해서 차를 마셨다는 것은 혼자 차를 마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대 사용되었던 개완은 철저하게 일인용 찻잔이며 혼자서 차를 마셨다는것은 선비나 수행의 의미도 들어있다.
청 강희 청화가채개완(淸 康熙 靑花加彩蓋碗)
청 청화개완(淸 靑花蓋碗)
청 건륭 분채개완(淸 乾隆 紛彩蓋碗)
청 가경 동태법랑채개완(淸 嘉慶 銅胎琺朗彩蓋碗)
바로 이러한 점들이 당시 과시적이고 예술적인 화려한 차문화의 전성기속에서 이처럼 개완을 사용했었던 수요층을 수행자 또는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계층으로 보는 이유이다.
물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다구유물들의 비율을 보면 개완 보다는 암다법(唵茶法)용 차호나 점다법(點茶法)에 사용되었던 다완들의 비중이 훨씬 크다.
이러한 정황들은 같은 시기 남방 북방을 구분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민족 통치 시기였던 요(遼),금(金), 원(元)등 북방 이민족의 차문화에서도 같은 양상을 나타낸다.
송대에는 대부분 암다법(唵茶法) 점다법(點茶法)을 이용하여 흥미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고차(硏膏茶)를 마셨는데 개완을 이용한 음다법에 대한 내용은 송대의 문헌에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잎을 비벼서 말린 녹차형태의 잎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것은 잎차를 마실 때 이러한 개완을 이용한 음다법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음다법이 전승되어 명대(明代)를 거쳐 청대(淸代)까지 이어져 왔음을 짐작할 수 가있다.
송대에 만들어진 차호들은 대부분 차호 안쪽면의 배출구에 거름구멍이 없는데 이러한 차호에는 차잎이 구멍을 막게 하므로 잎차를 우려 마시기에는 매우 부적합하며 당시 암다법을 이용한 가루차를 마시기 위한 차호였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과시적인 가루차문화가 성행했었던 시기에도 개완을 이용한 잎차의 음다법이 있었다는 것은 선비계층과 수행자들 사이에서 잎차를 정신음료로서 애용하는 문화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본격적 잎차문화의 시대
청 도광 투채개완(淸 道光鬪彩蓋碗)
청 도광 분채개완(淸 道光粉彩蓋碗)
청 도광 분채개완 (淸 道光粉彩蓋碗)
명대(明代) 최초의 황제였던 주원장(洪武帝)은 이전 시대까지 성행했었던 연고차를 이용한 가루차문화를 없애고 잎차문화로 전환하는 농업구조개혁을 단행한다.
왕조가 건립된 어려운 시기였고 농업생산의 비중이 가장 컸던 시대에 차즙을 짜내어 만드는 엉터리 연고차를 만드는데 많은 농업부분의 인력들이 소요되었기에 이러한 모순적 차농업 부분을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차문화로 전환하려는 정책을 제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단행했던 것이다.
홍무제의 이 정책은 동양 차문화에 있어서 대단한 진보였으며 차문화의 대 개혁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녹차문화가 이때 시작되었으며 과시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며 차의 본질은 사라진 채 오랜 시간동안을 이어져오던 연고차문화를 단절시키고 본질적인 차문화로 복귀시킨 중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때 폐지되는 가루차의 대안으로는 만들기 쉽고 실질적인 차마심에 적합한 차문화를 모색하면서 선정된 차가 바로 잎차(녹차)였으며 비로소 잎차문화의 시작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청 광서 장유 청화개완(淸 光緖 醬釉 靑花蓋碗)
청 동치 분채개완(淸 同治 粉彩蓋碗)
이전부터 선비계급층에서 오랫동안 음용해오던 개완을 이용한 잎차의 음용문화가 한 부분에 비중있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차문화의 전환이 가능했다.
하지만 명대초기 본격적인 잎차문화의 변환시기에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다구는 개완이 아닌 차호가 대신하게 되면서 각 요지에서는 잎차를 우릴 수 있는 차호가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의흥(宜興)에서도 자사차호(紫沙茶壺)가 이때 개발되었다.
그래서 개완의 사용비중은 급격하게 감소되며 잎차의 음용에는 대부분 차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하여 명대에 제작되어 전해져오는 개완은 매우 드물다.
전성기를 구사하는 개완의 시대
만주족(滿州族)이 중원에 진입하여 건립한 청(淸)왕조는 역사 속 최고의 화려한 차문화의 전성기를 구현한다.
명나라의 대군에 비교조차 될 수 없었던 30만이란 소규모 군대로 명조(明朝)의 정치적 혼란의 틈새를 활용하여 전쟁을 하지도 않고 중국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총명했던 만주족의 황제들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예술 등 각 방면에 탁월하고도 뛰어난 역량이 발휘되어 중국 역사 속 최고의 태평성세를 시현하면서 이민족 침략왕조의 황제였음에도 중국 한족들에게는 거부감 없이 역사 속 최고의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칭송받고 있다.
문학. 예술. 공예. 등 의 눈부신 발전은 차문화에도 이어져 명대의 단조로웠던 차문화의 틀에서 벗어나 각양각색의 화려한 차문화가 전개되었다.
전국의 각 차산지에서는 새로운 방법의 제다방식을 통해 색. 향. 미 를 위시한 다양한 차들이 었으며 음다법 또한 이러한 차에 어울리도록 변화했다.
새로운 차들의 개발은 또다시 알맞은 다구들의 수요를 창출 시켰고 이에 따라 개완의 형태도 청대(凊代)들어 이전 시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변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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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대의 개완과 청대의 개완에서 가장 변모된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청대 이전의 개완들은 뚜껑이 완의 바깥부분까지 덮여져 있는데 차를 마실 때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덮어놓는 음다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청대의 개완은 뚜껑부분이 완의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청대에는 차향을 중시했으므로 차향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차를 마실 때 뚜껑을 완전히 열지 않고 비스듬히 밀면서 열어 한 모금을 마신 뒤 당겨서 덮는 음다 방식이었다.
청 광서 백자개완(淸 光緖 白瓷蓋碗)
청조(淸朝)의 황실 관요 다기들 중 개완 들은 각종 화려한 채색도자기의 기법을 활용한 최고급 개완들이 제작되어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매우 높은 당시의 도자예술의 다기로 평가되어 전해지고 있다.
송대의 개완은 혼자서의 차마심에 사용되었던 단독기물로 사용되었던 반면 청대의 개완 들은 대부분 두 개 부터 다섯 개 등 세트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시기 개완은 기호음료로서 차를 마시던 시대풍습의 대중적 다구로서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대 차를 마셨던 사람들은 고도로 발달된 도자기술의 영향 속에서 차의 색. 향. 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흥미로움과 더불어 사용하는 다기에서도 추구하는 예술적 미의식이 적용되면서 최고조에 달해 개완에도 도자기에 구사할 수 있는 고도의 채색기법과 소성기술이 발휘되면서 다기의 황금시대를 열 수 있었다.
다음호에서는 잔탁(盞托)에 대하여 연재 합니다.
유물 소장자이자 글쓴이 김성태 님은 동양차문화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출처:월간 다도 (茶道) 2011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