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 북한산 산행기(인왕산~탕춘대능선~비봉능선~남장대지~행궁지~대서문~북한산성입구)
□ 산행일시/ 2011년 02월 6일 일요일 흐림(오후에 가는 눈보라)
□ 참가인원/ 나 홀로
□ 산행진행상황
09시 30분 : 교하집 출발
09시 50분 : 일산 대화역
10시 40분 : 독립문역 2번출구/ 산행시작
11시 33분 : 인왕산(338.2m)
11시 45분 : 북악산 갈림길
12시 13분 : 용천옹달샘
12시 22분 : 홍지문 터널
12시 35분 : 탕춘대능선
13시 10분 : 탕춘대성곽 암문
13시 29분 : 구기동 갈림길
13시 33분 : 탕춘대공원지킴터
14시 05분 : 향로봉(535m)
14시 33분 : 진관공원지킴터 갈림길
14시 40분 : 비봉(560m)
14시 50분 : 사모바위
15시 00분 : 승가봉(576m)
15시 23분 : 문수봉(727m)
15시 36분 : 청수동암문(694m)
15시 44분 : 칠성봉(716m)
15시 57분 : 남장대지
16시 10분 : 상원봉
16시 20분 : 행궁지
16시 34분 : 대남문 갈림길
16시 50분 : 중성문
17시 13분 : 대서문
17시 23분 : 북한산 탐방지원센타
17시 35분 : 북한산입구 버스정류장/ 산행종료
(총 산행시간/ 6시간 55분)
□ 산행지도 및 개념도
인왕산 북한산 지도 및 개념도
□ 산행사진
독립문역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들머리에서 바라본 서울성곽의 모습
인왕산으로 오르는 성곽 들머리
이 "인왕산의 유래" 표지판 오른쪽 철문을 통과하여 성곽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서울성곽의 인왕산 구간의 성곽 복원공사가 여기서부터 범바위까지 진행되고 있어서
능선길로 오르지 못하고 우측 아래의 인왕산길로 우회하여
인왕천 약수터입구에서 범바위쪽으로 계곡길로 우회하여 올라가야한다.
인왕천 약수터쪽으로 올라가는 입구
흐리고 뿌연 안무상태에서 앞쪽으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인왕산
서울성곽 복원공사를 위하여 물자를 나르는 모노레일을 따라서 올라가고...
인왕산 정상 300m 전방에 설치되어있는 대삼각점과 이정목
서울성곽의 복원공사로 인하여 범바위쪽으로 정상적인 능선으로 오르지 못하고
인왕천 약수터 계곡으로 우회하여 범바위와 인왕산 정상 중간지점으로 올라서서 바라본 범바위와 전경초소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의 복원공사의 문제점
현재 복원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와있는 인왕산 구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있다.
첫째- 성곽의 높이가 안 맞는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때 개축할 당시 험지에는 16척(약5m), 평지에는 23척을 쌓았던것으로 되어있는데
인왕산 구간의 경우 최소한 16척(약5m)은 되어야 하는데 현재 3.5~4.5m의 높이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있다.
둘째- 성곽 안밖으로 탐방로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쪽으로만 되어있고, 폭이 너무 협소하고 계단으로 된 탐방로는
돌과 함께 황토로 이루어져 있는데 황토에 강회 배합이 제대로 안 되어 겨울철과 봄철에 질적거리는 문제를 일으키고있다.
서울성곽 탐방로에 황토를 까는것은 대 찬성이지만 황토에는 강회 내지는 모래를 배합하여야 질적거리지 않는다.
앞으로 복원되는 서울성곽의 구간에서는 시멘트 대신 강회를 사용할것을 적극 제안하여야 할 것이다.
원래 서울성곽을 축조하던 조선시대에는 시멘트가 없었다.
시공만 제대로 잘하면 시멘트로 공사하는것 보다는 강회가 빛깔도 좋고 견고하다.
1868년 고종 5년에 일어났던 오페르트 도굴사건 당시 도굴에 실패한 원인도 남연군 묘소에 강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셋째- 탕춘대성 갈림길에 위치한 군 초소의 모양이 성곽과는 전혀 어울리지않는다.
초소를 성곽과 어울리도록 다시 지어야하며 초소옆의 탕춘대 성곽으로 가는 길도 석문으로 바꾸고 돌계단으로 바꾸어야한다.
넷째- 창의문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약200m의 시멘트 계단은 균열과 파손이 심하므로 돌계단으로 바꾸어야한다.
다섯째- 무악동 방면 인왕산 순환도로 부근의 성곽과 탐방로 사이의 공간을 재 정비하여야한다.
여섯째- 서울성곽을 탐방할때 국사당과 선바위의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국사당과 선바위는 서울성곽을 일주하려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만큼 의미가 깊은곳이므로 이곳으로 탐방로를 만들어야한다.
일곱째- 인왕산 정상에는 조선 11대 중종의 비(妃)인 단경왕후 신씨가 중종을 그리며 치마를 널었던 치마바위가 유명하다.
이곳 치마바위에 단경왕후가 치마를 널고있는 모습의 석상을 만들어 모두가 볼수있게 한다면 의미있는 표석이 될것이다.
앞쪽으로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복원중인 서울성곽의 모습
뒤 돌아본 범바위에부터 이어져온 복원되어있는 서울성곽의 모습
바위에 인위적으로 홈을 파서 계단을 만들어놓은 인왕산 오름길
인왕산 정상 부위가 보이기 시작하고...
정상 50m전에 설치되어있는 이정목
잔뜩 흐린 뿌연 안무속에 안산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인왕산(仁王山)
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해발338.2m의 산으로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쪽에 위치한 내사산중의 한 산으로 전체 면적은 1,086,696.50㎡의 골산으로
기차바위, 치마바위, 매바위, 범바위, 이슬바위, 모자바위, 선바위, 등의 저마다 기이한 형상을 뽐내고있다.
조선초에 도성(都城)을 세울때 북쪽의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 남쪽의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동쪽의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중의 하나로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있다.
일제 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에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다.
이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서울성곽이 이어지며 동쪽 산허리로 북악산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 이후으로 1968년 1월 21일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1972년 11월 26일에 북악로로 이름 붙여졌으며, 1984년 11월 7일에
지리적 위치와 교통 흐름을 고려하여 창의문을 기준으로 북악산길과 인왕산길로 분리하였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229번지의 사직공원에서 종로구 옥인동을 거쳐서 종로구 부암동257번지의
창의문에 이르는 길이2,300m, 너비12m~15m의 2차선 도로로 산 허리와 능선을 따라 개설되어 경복궁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인왕산 정상의 4등 삼각점과 대 삼각점
복원되어있는 서울성곽의 모습과 뒤로 인왕산 정상부위의 모습
이정목 앞쪽으로 보이는 기차바위 능선
기차바위에서 뒤 돌아본 인왕산 정상부위의 모습과 우측으로 안산이 보인다.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희미한 안무속에 모습을 보이는 북악산
세검정 일대의 모습과 뒤로 형제봉이 보인다.
내부순환로 홍지문 터널로 내려서는 능선길에 설치되어있는 바람직한 표지판
실로 오랜만에 걸어보는 홍지문 터널쪽으로 내려서는 능선길
인왕산을 자주찾던 6~7년전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용천약수터
탕춘대능선으로 올라서면서 잠시 뒤 돌아본 내부순환도로 홍지문터널의 모습
탕춘대성곽이 서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오래된 고목사이에 걸려있는 "산 불조심" 플랭카드가 고목과 잘 어울려 보인다.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서
북한산 서남쪽의 향로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약 5.1km의 산성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한 산성으로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 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이 홍지문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26.72m, 폭6.8m, 높이5.23m,
수구 폭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현재 세검정초교)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 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놓았다.
북한산 둘레길 안내도
언제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이 북한산 둘레길을 한번 돌아볼 생각이다.
탕춘대성 암문
독립문역에서 이 탕춘대성곽 암문까지는 악재가 낀 유쾌하지못한 산행길이었다.
오늘의 인왕산을 경유하여 북한산 산행은 독립문역에서 세명이서 진행하기로 하였었다.
옛 고향 친우 구름산님과 평소 안면있는 은평구에 기거하는 계백님하고 셋이서 함께 산행을 약속하였었다.
그러나 집에서 출발하기전에 고향 친우 구름산이 급한 가정사로 참석을 못하겠다는 전갈이왔다.
계백과 둘이서 산행을 하기가 내키지않아서 산행을 취소하자고 하려다가 마음이 약하여 그러하지 못하고
약속했던 독립문 전철역에서 10시 30분이 조금지나서 미리 도착한 계백과 만나서 산행을 출발하였다.
목표는 인왕산으로 올라서 탕춘대능선으로 이어져서 향로봉에서 비봉능선을 거쳐서
문수봉에서 칠성봉을 거쳐 남장대지로 이어져서 중성문과 대서문으로해서 산성입구로 내려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왕산에서부터 유쾌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던 계백이 이 탕춘대암문 근처에서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 몇 분들이 디지탈 카메라가 작동이 잘 되지않는다고 살펴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여서
디지탈 카메라를 살펴보니 밧데리가 소모되어 깜박거리고 있어서 알려드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계백이
아무말도없이 능선 오른쪽 상명대쪽으로 내려가고 있어서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고 물으니
계백의 대답이 "난 이리로 내려가서 집으로 갈랍니다" 라고 하면서 뒤도 보지않고 상명대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 잠시 당황은 하였지만 납득이 가지않는 저속하고 몰상식할 행동에 당황할 수 밖에
무원마을이 지금까지 산행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독립문역에서 이 탕춘대 암문까지 세 시간 정도의 산행에 악재가 끼어서 신묘년 초부터 이런일이...
일대간 구정맥을 이어오면서 생각컨데 진정한 산꾼이라면 이런 옹졸하고 저속한 행동은 하지않게 될터인데...
집에서 출발하기전에 약속을 취소하지 못한 내 탓이라고 일축하고 모든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생각을 바꾸고 앞쪽으로 보이는 멋진 모습의 향로봉을 향하여 마음속에 어진 생각을 가지고 발길을 향로봉으로 향하였다.
탕춘대공원지킴터
지난번의 불곡산 처럼 이곳에서도 "탐방객 수를 조사중입니다" 는 계수대가 보인다.
족두리봉이 보이고...
잠시 탕춘대 성곽위로 진행을 하고...
중앙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인왕산에서부터 지나온 산줄기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능선 좌측으로 족두리봉이 보이고...
향로봉
고도 535m의 향로봉의 멋진 모습에 속 마음이 확 풀리고 여기서부터 상쾌한 기분으로 산행에 임하였다.
앞쪽으로 비봉의 모습이 보이고 뒤로 보현봉이 보인다.
호박돌로 잘 다듬어진 오름길
향로봉
여기서부터 흐리고 뿌연 안무속에 싸래기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비봉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있는 비봉과 뒤로 보이는 문수봉과 보현봉의 모습
비봉능선 좌측으로 진관공원지킴터와 우측으로 비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의 이정목
공원직원이 위험지역 오름길을 감시하는 우회길에서 바라본 비봉
사모바위
희뿌연 안무속에 가는 눈 발이 내리는 사모바위 앞에는 헬기장과 시원한 넓은 안부가 있어서
별로 춥지않은 날씨에 많은 산행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앉아서 쉬고있는 모습이 보이고있다.
앞쪽으로 승가봉이 보이고 뒤로 우측에서부터 보현봉, 문수봉, 칠성봉, 나한봉등의 모습이 보인다.
삼천탐방 지원센터 갈림길의 이정목
승가봉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 돌아본 지나온 비봉능선의 산줄기의 멋진 모습
정상부위가 운무에 휩싸인 보현봉, 문수봉, 칠성봉등의 모습
눈이 조금씩 내려서 조금은 미끄러운 암릉길
비봉능선의 명물 통천문
잠시 안무가 걷히고 모습을 보여주는 좌측부터 나한봉, 칠성봉, 문수봉
뒤 돌아본 승가봉의 모습
청수동 암문
여기서 부터는 녹지않고 쌓여있는 눈으로 미끄러운 산행이 이어진다.
문수봉
산과 여자는 조금 멀리서 바라보아야 멋지고 아름답다고 하더니 역시...
칠성봉 오름길에서 바라본 지나온 비봉능선의 모습
칠성봉
해발 716m의 칠성봉의 넓은 안부에는 삼각점과 이정목이 설치되어있다.
이곳에서 남장대지를 지나 상원봉 아래로 행궁지의 흔적이있는 산성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진행을 하였다.
칠성봉에서 바라본 의상능선의 시원한 모습
정상에 뽀족뽀족한 나무가 특징으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나한봉
의상능선의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의 모습
남장대지 가기전의 보이는 삼각점
우측의 문수봉과 보현봉 그리고 그 사이에 대남문이 보인다.
북한산성(北漢山城)
1968년 12월 5일 사적 제162호로 지정된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서울시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일원에 걸쳐있는 유역면적543,795㎡의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때 백제 개로왕 5년에 세워진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때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오기도 하였고,
그 후로 고려 고종19년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으며,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년)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재 축성하였다.
북한산성의 규모는 대서문, 북문등 13곳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으며
북한산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곳의 사찰과 99개소의 우물과 26곳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곳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있기는 하지만 대개 조선 숙종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졌고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쟁탈전을 벌이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 복원사업
서울시는 북한산성 대남문을 시작으로 1990년부터 1994년까지 450m, 1995년부터 2002년까지 2,015m 구간을
보수 복원한데 이어 2003년부터 시작한 1,085m 구간에 대한 복원을 오는 12월 마치게 된다고 밝혔다.
1990년∼1994년에 걸친 1단계 공사는 종로구에 위치한 대남문을 시작으로 동쪽 방면의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 등 성문4개소를 복원하고 성곽 450m를 보수 복원하였다.
2단계 공사는 1995년에 시작하여 2002년까지 7년에 걸쳐 용암문과 청수동암문 등 2개소의 암문과
동장대 1개소를 복원하고, 성곽 및 여장 2,015m를 보수 복원하였다.
2003년부터 시작, 2011년을 완공 목표로 한 3단계 공사는 동장대∼용암문∼용암봉까지 1,295m의 성곽을 보수 복원하는 사업이다.
이미 복원을 마친 곳은 이미 개방돼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이번에 새로 개방되는 곳은 용암문 일대 210m 구간이다.
이번에 완료되는 1,085m 구간은 동장대부터 용암문 부분, 그리고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등 2개소의 암문이다.
이로써 북한산성 서울지역 총 5.5Km 중 동쪽 방향으로 총 3,550m 구간이 복원되게 된다.
오는 2011년까지 복원 예정인 용암문∼용암봉 일대 210m 구간까지 복원되면 종로구∼성북구∼강북구에 걸쳐있는
산성 동측부분 3,760m(대남문∼동장대∼용암문∼용암봉)는 옛 모습을 모두 되찾게 된다고 시는 밝혔다.
1990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한지 21년 만이다.
2012년∼2020년, 대남문∼대서문 잇는 서측방향 1,688m도 복원 계획
서울시는 오는 2012년부터 종로구 대남문에서 출발, 은평구 대서문에 이르는
북한산성 서측부분 1,688m에 대한 복원공사에 들어가 2020년까지 마치는 것이 목표다.
성곽 복원에 쓰이는 석재, 1990년부터 20년 동안 헬기로 운반
북한산성 복원정비에 쓰이는 석재는 경기도 포천에있는 석산의 화강석으로,
서울까지 트럭으로 운반해 오면 북한산성까지는 지형 특성상 헬기로 운반하였다.
복원사업을 시작한 1990년부터 20년 동안 헬기는 왕복 1만여 회 넘게 석재를 운반하였다.
올해 용암문 일대 210m구간을 복원하는 데만 약 600톤의 석재가 사용됐다.
복원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대부분의 석공들은 1990년 대남문 복원 당시부터
지금까지 20여년을 북한산성과 함께한 산 증인이다.
한편, 복원되는 동측 북한산성은 다양한 코스를 통해 성곽을 볼 수 있다.
북한산 종로구 구기분소를 통해 오르면 볼 수 있는 대남문을 시작으로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을 만나 볼 수 있으며,
강북구 수유동 수유분소를 통해선 대동문을 시작점으로, 강북구 우이동 도선사를 통해 오르면
용암문을 시작으로 복원된 북한산성을 만날 수 있다.
정병일 서울시 건축부장은 "북한산성 및 각종 성문들이 보수 복원되면 문화재로서 역사 문화적 의미뿐만 아니라
시민과 관광객이 안전하게 등산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남장대지(南將臺址)
이곳은 삼군문(三軍門)의 하나인 어영청(御營廳)의 장수가 주둔하여
행궁(行宮)과 북한산성내의 시설물을 안전하게 지휘 관리하기 위한 관측장소로
북한산성 내에는 시단봉(柴丹峰)에 동장대(東將臺), 기린봉(麒麟峰)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으나
혼돈기인 19세기 말에 소멸된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시단봉에 동장대만이 복원되어있다.
남장대지에서 행궁지로 내려서는 녹지않은 눈으로 미끄러운 내리막길
행궁지(行宮址)
상원봉(上元峰) 아래에 위치한 행궁지는 국가 전란시 왕이 임시로 거쳐하기 위하여 건립한
북한행궁(北漢行宮)이 있던 곳으로 북한산성 축성시인 숙종37년(1711년) 5월 착수하여
이듬해 5월 완공되었으며 내전(內殿)과 외전(外殿)을 합하여 124칸에 이르렀다.
내전은 좌우 상방 각 2칸, 대청 6칸, 사면퇴18칸을 합하여 28칸의 정전외에도 부속건물이 35칸이 었으며,
외전은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과 33칸의 부속 건물로 구성된 비교적 웅장한 규모의 모습이었다.
평상시에는 북한산 문고(文庫)를 마련하여 실록등 고문헌을 비밀리에 보관하여 왔으며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찾은 기록이 전해지고있다.
행궁은 전란에 대비하여 구한말까지 관리가 계속되었으나 그 후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후 방치되어 오다가 1915년 8월 집중호우시에 무너져 소멸되었다.
아래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같이 주춧돌만이 옛 행궁의 흔적을 보이고있다.
행궁지 아래 대남문 갈림길의 이정목에서 내려서는 미끄러운 눈 길
산영루로 내려서기전의 약수터
산영루(山映樓)
북한산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산영루라는 정자가 있었다.
수 많은 조선 시인들이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있는 이 정자를 찾았다.
다산 정약용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산영루를 노래한 시)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것 같구나
십여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온 산의 누런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꽃을 피우는데
구름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지자 흐릿한 구름 산 빛을 가뒀는데
앵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왔는데
산영루는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의 1번지 중흥사 아래 비석거리 앞
절벽위에 세워진 누각으로 1755년 발간된 "고양군 지" 등을
통해서 알려져 왔으나 그 모습이 확인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에 192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영루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실체 모습이 확인되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에는 시회(時會)가 자주 열린것으로 알려진
이 누각은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아래 사진의 모습과 같이 주춧돌 13개 만이 남아있다.
중성문으로 내려서는 계곡길
중성문(中城門)
중성문 좌우의 성곽인 중성(中城)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해인 숙종38년(1712년)에
북한산성 수비보완 대책의 일환으로 축조한 중성이다.
당시 별도의 중성을 축조한 이유는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의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 유영, 창고등 성내의 시설물과 인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곽의 규모는 영취봉과 증봉 방향으로 약 200m에 달하여 성문으로는 홍예형태의 중성문과 그 외에 시구문, 수문을 건립하였다.
중성문의 단층 문루는 19세기말에 수문은 1915년 8월의 대홍수로 소멸된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여 석축을 쌓은 모습인데...
이곳을 지날때마다 느끼는 느낌이 꼭 사람의 옆 얼굴 형상을 닮아 보인다.
최근에 새로 만들어놓은 나무계단길
철거되고있는 북한산 국립공원내의 음식점들...
2000년도 초에 외국의 환경단체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북한산국립공원을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그 환경단체의 일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나라의 수도안에 이런 멋진 산이 있는것을 무척이나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 북한산국립공원안의 북한동 일대에 무질서하게 산재하여 자연을 훼손하며 영업을 하고있는 음식점들을 보면서
국립공원내에서 이러한 음식과 술을 파는 음식점들이 영업을하고 있는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이 음식점들을 공원 매표소 밖으로 이전 시킨다는 소문만 여러해 전부터 들은 기억이난다.
그 후 소문뿐이고 음식점들은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고 음식과 술을 팔면서 청정지역 북한산성 계곡을 오염시켜왔다.
그런데 오늘 실제로 건물을 허물고있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감회가 깊고 이제야 제대로 되어가는 현실을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지저분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던것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이렇게 산뜻한 모습으로 변한 이곳에 앞으로 북한산을 찾는 산행인들의 안락한 휴식공간으로 멋지게 변모하기를 기대하고있다.
대서문(大西門)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분소 이제 서서히 정비가 되어가는 북한산국립공원입구 일대의 모습과 뒤로 의상봉이 보인다. 북한산 국립공원(北漢山國立公園)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