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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자
김추자는 불세출의 여가수였다. 1951년 춘천에서 태어난 김추자는 공부도 잘했고, 강원도 기계체조 대표선수와 응원단장까지 맡아 할 정도로 성격이 활달했다고 한다. 그녀는 춘천향토제에서 ‘수심가’를 불러 입상한다. 이때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명창 이은관 씨로 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김추자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뒤, 교내 노래자랑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뒤 신중현을 찾아간다. 그리고 69년 ‘늦기 전에’로 데뷔한다. 신중현은 이때 사이키델릭 뮤직에 매료될 즈음이었고, 그런 음악적 탐구는 김추자를 통해 투영되어 나오게 된다.
김추자는 그때까지 여자가수라면 다소곳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게 표본인 줄 알았던 무대매너 흐름을 뒤바꾸었다. 터질듯 한 몸매(70년대 초 그녀의 몸매는 풍만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체가 길어 늘씬해보였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에 현란한 율동으로 관객들의 넋을 빼놓는다. 거짓말이야, 늦기 전에, 님은 먼 곳에 등등. 그 중 ‘거짓말이야’는 당시 혼란스러운 시국 상황으로 정부, 방송 고위층의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를 건드려 방송윤리위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아 금지곡이 되는 수난을 겪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71년 3선 개헌 뒤, 대선 유세장에서 `다시는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말을 1년 만에 유신정권 수립으로 뒤집었는데, 라디오에서 김추자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가사가 흘러나오니 졸지에 미운 털이 박히게 됐다는 게 당시 장안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김추자의 또 다른 노래인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확인된것은 아니지만 박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김추자는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신비감을 더해주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고 한다.
김추자가 70년대 중반, 활동이 뜸 하자 일각에서는 `김추자는 고정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무대 위에서 반지로 다른 간첩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지못할 코미디요 한편의 만화 같은 이야기였다. 김추자는 75년 대마초 가수 등 대대적인 마약 사범 검거 선풍으로 졸지에 무대에서 물러나야 하는 수난까지 겪게 된다. 김추자는 3년간의 공백 뒤, 78년 컴백 리사이틀을 한다. 그러나 당시 결별한 매니저가 깨진 소주병을 휘두르는 바람에 얼굴 등에 상처를 입는다. 며칠후 김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무대에 선다. 무대에서 그녀는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무대에 섰다" 라고 말했다. 이때 김추자의 재기 리사이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여왕벌의 마지막 비행’ 같은 것이었다. 김추자는 86년 KBS 백분쇼에 출연하고, 몇 차례 음반을 내기도 했지만 김추자의 시대는 75년이 끝으로 막을 내리는 듯 보였다. 음반케이스에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몸에 딱 붙는 알록달록한 판탈롱 바지를 입은 채 허리를 뒤로 한껏 제치고 춤을 추던 김추자도 지금은 쉰을 훨씬 넘은 중년의 여인이 됐을 것이다. 이후 김추자는 부산의 어느 대학 교수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 방송에서 전했다. 신중현은 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이라는 그룹사운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80년대 그룹사운드계에 큰 영향을 준 `사랑과 평화’의 멤버 이남이가 함께 한다. 신중현은 일종의 반항아였다. `엽전들’이라는 이름도 유신정권에 대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일반시민들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일설에 의하면, 신중현은 당시 청와대쪽으로부터 `정권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한 뒤, 이후 대마초 가수로 찍힌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확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당시 신중현이 정권의 요구를 거절하고, 만든 노래가 대곡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74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오랜 은둔생활을 거쳐 81년 `신중현과 뮤직파워’라는 그룹에 의해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본다. 이후 86년 가수 이선희에 의해 이 노래는 더욱 인기를 얻게 된다. 여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신중현의 노래는 지금 당장 들어도 전혀 옛날 구닥다리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걸물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록음악계의 대부다. 여러 갈래로 가지 뻗은 국내 록그룹을 거슬러 올라가면, 90년대 그룹들은 대부분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주도한 `시나위’로 모아지고, 시나위를 포함해 들국화, 사랑과평화, 송골매 등 80년대 그룹들의 원형질도 신중현으로 드러난다. 김추자, 신중현 이외에 70년대 초반 활약가수로는 한국의 `비치보이스’인 `키보이스’가 있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봐요’로 시작하는 ‘해변으로 가요‘가 대표곡이다. 한여름 바닷가에서 가장 많이 불려 지거나 스피커에서 틀어댄 노래로는 단연 ’해변으로 가요‘ 다.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물 위에 떠~있는 황혼의 종이배) 등이 단골 레퍼토리였다. 70년대는 남성 또는 여성중창단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서수남, 하청일은 70년대 초반 팔도유람 등의 히트곡을 남겼는데, 이들은 재치와 순발력이 뛰어나 쇼프로 단골멤버였다. 당시 MBC TV에서 변웅전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던 ’유쾌한 청백전‘(매주 수요일, 가족오락관의 원조) 등이 주 무대였다. 변웅전은 일요일 아침마다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졌던 명랑운동회의 장수 사회자이기도 했다. 흰 추리닝을 입고, 연예인들이 실수할 때마다 `허허허허허’ 하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웃곤 했다. ‘팔도유람‘은 한순간도 쉴 틈 없이 쏟아내는 속사포 가사로, 요즘의 랩에 필적할 만하다.(팔도유람에 앞서, 작고한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 서영춘씨의 ’시골영감‘이 있긴 했다) 요즘 일부 래퍼들은 말을 빨리하는 것을 랩으로 착각해 가사 전달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서수남, 하청일은 요즘의 랩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불러도 한 음절 한 음절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서수남, 하청일 콤비는 처음에는 둘 사이에 여성멤버가 하나 끼어 있었다. (이름이 한혜정, 현혜정?)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성멤버는 슬며시 빠졌다. 80년대 들어 서수남, 하청일의 인기가 쇠퇴하다가 기존 동요 ’과수원 길‘을 불러 재기하는 듯 했다. 이후 이들은 `한일 자동펌프’ 등의 광고 CM송을 부르거나 밤무대 활동 등에서 함께 하기도 했으나, 결국 각자의 삶을 찾아가게 된다. 서수남씨가 라디오 MC를 거쳐 이후 주부노래 강사(88년 시작된 주부가요열창 프로의 영향으로 아마추어 주부노래자랑 붐이 일었다), 아마추어 골퍼 등으로 또 다른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 반면 하청일씨는 사업을 하다 실패해 현재 LA에서 청소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서수남, 하청일 콤비 이후 7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편지의 어니언스, 처녀뱃사공의 금과은 등의 남성듀엣들이 활동한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어사용운동을 펼치면서 대중가수들의 영어식 표기를 우리말로 고치도록 한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어니언스’는 `양파들’,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바뀌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여성중창단은 60년대 마포종점을 부른 은방울 자매가 있긴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여성듀엣은 역시 신중현이 발굴한 펄 시스터즈가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배인순, 배인숙 자매로 구성된 이들은 <님아> <커피 한잔> <떠나야할 그 사람>(이들 노래는 지금 들어도 시대와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다. 펄 시스터즈는 70년대 초반 김추자와 함께 기존 여가수의 이미지를 바꾼 가수다. 늘씬한 몸매, 서구적 외모, 현란한 율동, 당시에는 생소한 소울 풍 가요 등(김추자와 펄 시스터즈 둘 다 신중현이 동시대에 한꺼번에 키워냈으니, 신중현의 위대성은 여기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펄 시스터즈는 76년 언니 배인순이 동아그룹 회장 아들 최원석씨와 결혼하면서 팀이 해체됐고, 동생 배인숙씨는 79년 솔로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라는 노래를 히트시키기도 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펄 시스터즈의 명성은 이후 쌍둥이 자매 바니걸즈가 이어가지만, 펄 시스터즈가 아티스트였다면, 바니걸즈는 엔터테이너 쪽이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펄 시스터즈가 무대를 휘어잡는카리스마가 있었다면, 음색이 약간 허스키한 바니걸즈는 당시 가요계의 귀염둥이였다. '그냥 갈 수 없잖아' 가 히트곡이었다. 바니걸즈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코미디언 뺨치는 말솜씨 덕분에 퀴즈, 오락프로그램 단골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고, 노래도 일반가요 뿐 아니라, 선배들의 트로트를 부르고, 색동저고리에 족두리까지 쓰고 나와 민요를 부르다가, 군부대 위문공연에는 군가 ‘육군 김일병’을 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등이 가슴이 깊게 패인 검정드레스를 입고 나와 ‘I can boogie‘등 팝송을 부르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 복장을 하고 캐롤을 부르기도 했다. 바니걸스는 8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귀여운’ 이미지에서 또 다른 변신을 하기가 힘들어 더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후 여성중창단은 국보자매, 희자매(`인순이’가 리더보컬, 10대의 김완선이 백댄서를 잠시 맡기도), 숙자매, 그리고 80년대 후반의 서울시스터즈(`방실이’가 리더보컬) 등으로 이어진다. 70년대를 이야기하면서 통기타 가수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송창식, 윤형주(트윈 폴리오), 김세환, 양희은, 박인희, 은희, 라나에로스포, 정종숙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통기타 가수들은 가수라고 하면 이전까지 딴따라 이미지가 강했던 개념을 바꿔놓았다. 대학생 시절부터 노래를 시작한 이들은 `학사가수’라는 별칭이 따라붙곤 했다. 당연히 이들의 노래는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엄혹한 유신 말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낭만’을 느끼게 해준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80년 송창식은 트윈 폴리오 해체 이후, 윤형주도 성공을 거둔다. 윤형주는 <별> <어제 내린 비> <바보> 등으로 70년대 후반까지 높은 인기를 누린다.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김세환은 아버님이 유명한 연극, 영화배우이자, 대학교수 였다. `가방을 둘러 멘/그 어깨가 아름다워/옆모습 보면서/정신없이 걷는데/활짝 핀 얼굴이 내 모습 가벼웁게/온 종일 걸어 다녀도/즐겁기만 하네/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 보네/랄랄라 랄라라 랄라라라라라~’ 김세환의 히트곡 ‘앉아서‘다,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유복하고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난 김세환은 부잣집 아들 분위기를 풍기며, 구김살 하나 없는 대학생 오빠 모습을 띄었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와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여유에서 배어나오는 유머 등도 그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양희은 여고를 졸업하던 71년 남산 숭의여고에서 친구들과 친지들을 모아놓고 첫 발표회를 열었던 양희은은 70년대 초반 `서강대가 낳은 3대 인물’(박근혜, 그리고 또 한 명이 남덕우?)로 불려지기도 했다. 양희은은 김민기를 쫓아다니며, 김민기로부터 많은 곡을 받았다. 요즘의 양희은은 50의 퉁퉁한 중년 아줌마지만, 70년대 가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양희은은 단발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씩씩한 대학생이었다. 양희은은 집이 가난해 텔레비전에 나올 때도 운동화를 신고 나온 적도 많았다. 양희은의 노래 상당수가 70~80년대에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이 때문에 70년대의 양희은은 대학가에서 불려지는 노래와 기성 가요계에서 불려지는 노래가 이중화 됐습니다. 먼저 대학가에서 불려지던 노래(금지곡 목록) <아침이슬> <서울로 가는 길> <작은 연못> <천리길> <늙은 군인(투사)의 노래> <알캉달캉> <아름다운 사람> <상록수> 등등. <작은 연못>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먼 옛날 그곳에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깊은 산 오솔길 옆./
<천리길>은 요즘 SK정유 광고에 어린아이 목소리로 나오고 있다. 80년대 캠퍼스에서도 애창됐다.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뚫고 솟아나’로 시작되는 양희은의 대부분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정치성을 배제한 노래만이 오롯이 남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내 님의 사랑은> <세노야>(고은의 시) <한사람> <백구> 등이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은 실연당한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내 님의 사랑은>도 마찬가지인데, 양희은의 노래는 정치성을 뺀 노래들도 참으로 처연한 곡들이 많았다. <내 님의 사랑은>의 가사를 보면, `~사랑하는 그대여, 내 품에 돌아오라/그대 없는 세상, 난 누굴 위해 사나~’라고 하는 등 70년대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 유행가들을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가지마, 돌아와’ 등 매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80년대로 접어들면 `갈테면 가라’는 식의 가사가 늘어난다. 양희은이 마지막으로 10대 가수에 올랐던 적이 79년이었다. 당시 송창식과 함께 통기타 가수 대표격으로 10대 가수에 뽑힌 양희은은 막판 가수왕 발표 직전 혜은이, 이은하, 조경수, 전영록 등이 조마조마해 할 때,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치마 입은 다리를 꼬고 앉아 좌우로 종아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장면이 슬로비디오 화면으로 잡혔다. 한번은 양희은씨를 직접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1997년 가을이었나, 젊은 시절 한때 팬인었던 가수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몹시 설레었다. 커피숍에서 만나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시원시원한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때 양희은씨는 `자기는 요즘도 늘 하루 4시간씩 연습한다. 방송 끝내고 집에 가면 밥하고, 연습하는 게 전부다. 연습을 며칠 안하면 금방 표가 난다’고 말했다. 양희은씨가 나이가 들어도 예전의 음색을 잃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밖에 통기타 가수로는 <목마와 숙녀> <모닥불 피워놓고>를 부른 박인희, <꽃반지 끼고>의 은희(어린소녀 같이 앳된 목소리), <사랑해 당신을>의 라나에레스포, <달구지>를 부른 정종숙, <시골길>을 부른 MC 임성훈(임성훈이 70년대 후반에 가수로도 활동했다는 사실. (연세대 응원단장 출신)도 통기타 세대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외 7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로는 `한국의 레이 찰스’ 이용복(맹인가수), <고향이 좋아>의 김상진, 콧수염 이장희, 최백호 등을 들 수 있다. 이용복은 나이가 들 때까지 미소년의 외모를 유지했다. 음색은 아주 가늘었는데, <약속> <아이스크림 사랑> 등을 부른 80년대 임병수와 음색이 비슷했던 것 같다.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로 유명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1943년 월 일생>을 비롯해 역시 자전적 노래인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 두 곡은 모두 번안곡이다. 이용복은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은 아니었고, 7살 때 마을에서 썰매를 타다 썰매 지치는 송곳에 찔려 맹인이 됐다고 한다.
이용복은 <그 얼굴에 햇살이>, <쥴리아> 등으로 70년대 후반까지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장희는 자유주의자였다.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등에서도 그런 분위기는 물씬 풍겨난다. 대마초 가수로 낙인찍힌 이장희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라디오 코리아> 사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이장희씨가 `이혼하고 대학생 아들과 사는데, 대학생 아들과 기숙사에 묵고 있었다. 최백호에게서는 바다 냄새가 난다. 부산토박이 최백호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유명한 하수영의 소개로 데뷔했다. 최백호의 데뷔곡은 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였는데, 이 노래는 77년 늦가을 김혜자, 박근형 등이 출연한 MBC 드라마 <후회합니다> 주제가로 쓰이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김수현씨가 극본을 쓴 이 드라마는 아마도 주말연속극의 시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토, 일 주말연속극은 없었다. MBC 일요일 프로그램을 보면, 7시 <웃으면 복이 와요>, 8시 <수사반장>, 9시 <뉴스데스크>, 10시 <챔피언 스카우트>(권 투 중계프로그램) 등으로 이어지는 인기 프로 중간에 다른 프로그램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 그런데 <수사반장>과 함께 토요일 날 하던 <113 수사본부>가 힘이 조금 빠지면서 그 틈을 주말연속극이 대신 채워나갔다. 아마도 77년 혜은이가 드라마에 출연한(혜은이는 연기도 곧잘 했다. 79년에는 이승현과 함께 영화 <제3한강교>에 주유원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러지>가 시초였던 것 같고, 후속 프로그램이 <후회합니다>였던 것 같다. <후회합니다>는 김수현이 극본을 쓴 것으로, 드라마 내용은 고부간의 갈등을 그린 것이다. 탤런트 김용림이 시어머니역, 김혜자가 며느리, 박근형이 전문직 남편이었다. 지금 보면 이야기도 안되는 것이지만 당시 시어머니는 편집증적으로 며느리를 미워했고, 이 때문에 박근형은 중간에서 갈등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박근형은 결국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어머니 때문에 별거하고. 여기에 김혜자의 친구이자, 김용림이 좋아하는 여자가 이 사이에 끼어들고. 김혜자는 강릉 내려가 혼자 지내고 있는데, 당시 남매인 손창민, 김민경(이름이 정확하지 않다.
이 아역탤런트는 <호랑이선생님> 등에 출연한 뒤, 연예계를 떠나 나중에 이화여대 정외과에 들어갔고, 이후 결혼하고 외국인 회사에 근무했다는 것이 `그 때 그 사람’ 프로에 잠깐 나온 적 있다)이 아빠와 함께 불쑥 엄마를 찾아온다.
바닷가에서 검은색 숄을 어깨에 두르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김혜자는 저쪽 편에서 손창민(아마 그때 초등학교 6학년쯤 됐을 것이다) 남매가 `엄마’하고 뛰어오자, 숄을 벗어버리고 슬로비디오 화면으로 활짝 웃으며 막 달려간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당시엔 시청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던 명장면이다.
당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싫어한 가장 결정적 이유는 김혜자가 아이를 못 낳기 때문인 것으로 기억난다. 손창민은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이고, 손창민의 여동생은 박근형의 여동생(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딸)이 결혼 전에 사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당시 결혼을 약속했는데, 공군 파일럿인 그 남자친구는 작전수행 중 비행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는 내용이었다. 김수현 특유의 `출생의 비밀’을 적절히 섞어놓은 것이다. 어쨌든 박근형(당시 박근형은 꽃미남탤런트의 전형)이 고부간 갈등에 괴로워하며 홀로 방안에서 담배를 피며 시름에 잠길 때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로 시작하는 <내마음 갈 곳을 잃어>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이 드라마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최백호는 이후 94년 내놓은 <낭만에 대하여>도 2년 뒤인 96년 김수현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한 남자탤런트가 중얼거리면서 뒤늦게 인기를 탔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김수현씨가 최백호 노래를 특별히 좋아한 것 같다. 최백호는 이후 <입영전야> <그쟈> <영일만 친구> 등을 히트시켰다.
여자가수로는 이은하, 장미화, 옥희 등이 10대 가수 단골멤버였다. 펄 시스터즈와 바니걸즈와의 상관관계는 김추자와 장미화의 상관관계와 같다는 공식을 적용해도 될 것 같다. 김추자가 파워 넘치는 율동과 시원한 가창력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았다면, 장미화는 온몸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대는(김추자가 하체 위주의 춤이었다면, 장미화는 어깨 등 상체 위주의 춤을 많이 췄다) 율동, 그리고 가창력은 김추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지만 늘 명랑하고 자신감 넘친 목소리, 무엇보다 내숭이 전혀 없이 솔직해 보이는 모습으로 입을 활짝 벌린 채 시원스럽게 노래하는 창법과 솔직한 무대 매너 등으로 장미화는 이전까지 얌전한 여자가수들을 압도하듯 왈가닥 가수의 대명사로 활약했다. 장미화는 당시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안녕하세요> <헬로아> 등의 히트곡이 있다. 장미화는 76년께 결혼하고 연예계를 떠난다며 고별 리사이틀을 가졌다.(당시만 해도 여자 연예인들은 결혼하면-굳이 재벌가와 아니더라도 연예계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리사이틀은 TV로 중계됐는데, 장미화는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던 것 같다. 고별 리사이틀이라고 해도, 장미화는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않고, 치렁치렁한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도 흰 캡을 쓰고, 손에는 커다란 반지를 낀 채 유쾌한 모습으로 마지막 팬서비스를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두 뺨에 짙은 화장을 한 장미화는 <안녕하세요>를 부르며, 몇 차례 팬들을 향해 완벽한 윙크를 했다. 옥희는 70년대 후반 미모의 인기 여가수. 권투선수 홍수환의 아내로 더 알려져 있다. 홍수환이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이던 시절(4전5기 신화), 홍수환의 인기는 아마 요즘의 안정환과 이승엽을 능가할 정도였다. 홍수환은 쇼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와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홍수환은 옥희와 스캔들을 일으킨다. 옥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명동시내를 걷는 모습이 우연히 사진에 찍힌 것.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 홍수환씨 부부는 강남에서 고깃집을 하게 된다. 옥희는 77년 <나는 몰라요>로 큰 인기를 누렸고, 80년대 초반 <..그러길래 이웃은 사촌이라 하지요~ 이웃사촌> 등을 내놓았다. 시원한 가창력이 일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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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