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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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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강강술래(강강술래) |
분 류 | 무형유산 / 전통연행/ 놀이/ 세시놀이 |
수량/면적 | |
지 정 일 | 1966.02.15 |
소 재 지 | 전남 전남전역 |
시 대 | |
소 유 자 | |
관 리 자 | |
일반설명 | 전문설명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주로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우리의 병사가 많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의병술로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 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을 돌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원시시대부터 1년중 가장 달이 밝은 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며 둥근 원을 그려나간다. 목청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하며 받는 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늦은 가락으로 나아가다 노랫소리도 빨라지고 춤도 빨라져서 나중에는 뛰는 것처럼 동작이 빨라진다. 일반적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원무(圓舞)를 추다가 흥이 나면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가 춤을 추는 남생이놀이를 비롯해서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밟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강강술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구성지고 활기찬 한마당을 이룬다. 놀이는 늦은강강술래로 시작하여 중강강술래, 잦은강강술래로 변화하면서 발놀림이 빨라지고 흥이 절정에 이르는데, 이중 가장 아름답고 여성놀이다운 멋이 깃들여 있는 것이 늦은강강술래이고, 중강강술래는 해남과 진도지방에서만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강강술래는 여성의 놀이가 적었던 때에 활달한 여성의 기상을 보여준 민속놀이의 하나로 민족정서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부녀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가무일체(歌舞一體)의 놀이이다. 추석날은 일년 중에서 가장 달이 밝은 날이어서 원시시대부터 명절로 전해 내려왔다. 달은 어두운 밤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맹수의 접근이나 적의 내습도 알 수 있게 해주므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밤인 추석에는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또 추석 무렵이면 농사일도 거의 끝나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시기이기도 하여 농경민족들은 이때에 마냥 즐겁고 기쁘기만 했다. 그래서 새 곡식으로 밥하고 떡하고 술을 빚고 마음껏 한바탕 놀게 되었다. 강강술래는 달의 명절을 축하하고 즐겨 노는 민속놀이로 성장하여왔다. 추석을 전후해서 전라남도 해남(海南), 진도(珍島), 무안(務安), 완도(莞島)지방을 비롯하여 그 일대에서는 강강술래가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저녁이 되면 일찍 부엌일을 마친 젊은 아낙네와 소녀들은 한 마당에 모여 달뜨기를 기다린다.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손과 손을 서로 잡고 둥근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한다. 맨 앞사람이 선소리로 노래를 메기면 뒤에 따라오는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를 받음소리로 합창하면서 소리에 발을 맞추어 춤을 춘다. 처음에는 늦은 가락으로 나아가다가 차츰 노래소리도 빨라지고 춤도 빨라져서 나중에는 뛰는 것처럼 동작이 빨라진다. 그러다가 지쳐서 힘이 빠지면 놀이를 끝내고 쉬게 된다. 강강술래에는 남성은 참여하지 않고 오직 젊은 여성들만으로 하는데 밝은 달빛 아래 추석빔으로 곱게 단장하고 노래부르며 뛰고 노는 모습은 활달하고 아름답다. 일반적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원무(圓舞)를 하는데, 놀이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남생이놀이,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덕석몰이 등의 여러 놀이를 섞어서 한층 흥을 돋운다. 이 때 노래의 가사와 가락도 달라진다. 강강술래놀이의 유래에 대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우리의 병졸이 많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의병술로 마을 부녀자를 남장시켜 옥매산(玉埋山)을 돌게 한 데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믿고 있다. 그러나 강강술래는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달의 명절 놀이이고 원시인들이 흥겹게 원무하던 습속이 오늘날에도 전승되어 강강술래로 남아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다만 옛날부터 내려오던 강강술래 놀이를 이순신 장군이 의병술로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성의 놀이가 적은 한국에 있어 강강술래는 활달한 여성의 기상을 보여준 원무의 하나로 민족정서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
[ 강강술래 ]
「강강술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민속놀이 가운데 여성놀이의 대표격이 된다.
정서적이며 율동적인 놀이로서 한가위 달밝은 밤에 바닷가 모래밭이나 산기슭 넓은 언덕 또는 들판에서 벌이는 큰 애기들이 펼치는 약동하는 젊음과 건강한 생명력의 표상이라
하겠다.
강강술래는 전라남도의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널리 분포 ․ 전승되고 있는 집단놀이로서 주로 8월 한가위에 세시풍속의 하나로 놀아오나 때로는 정월 대보름에도 행하여 진다.
현재로는 전국적으로 이 놀이는 확산되어 구태어 전라남도지방의 민속놀이라기 보다 전국으로 확산 ․ 전승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에는 전라남도 중에도 해남, 완도, 무안, 진도
등지에서 주로 놀아졌다.
강강술래가 어느 때 어떻게 하여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하여는 이렇다 하여 밝혀볼 수 없고 다만 이 놀이가 꽤
오래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증되고 있을뿐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공동체의 또는 축제 등에서,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뛰어놓던 단순한 형태의 춤이 오늘에 보이는 강강술래의
시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주 옛날 봉건적인 구시대에(남존여비 시절) 집안에서만
년 중있었고 바깟 구경을 못해 오던 시절에 정월 대보름날
이나 추석날 밤 달 밝은 밤에 여자들이 한을 풀고 친구를
사귀며 밤을 세워가며 해방된 기분으로 손에 손을 잡고 뛰고 또 뛰며 놀 든것이 그 유래의 한가지가 아닌가 한다.
진수 ․ 삼국지, 동이전 마한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5월에 씨를 다 뿌리고 귀신을 제한다. 떼를 지어 한데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 낮 쉬지를 않고 수 십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어 손 발을 맞추며 몸을 낮췄다 높였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 같이 탁무와 같은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다시 춘다.」
위의 기록에서 이미 마한의 습속가운데 파종을 끝낸 5월과 추수를 끝낸 10월에 여러사람이 모여 술을 마셔가며 밤낮으로 춤추며 노래 부르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원무의 형식은 비단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상 오랜 연원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에 손을 잡고 한 마음으로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뛰노는 이 놀이가 집단적 민중의 축제에서 크게 높아졌음은 그 놀이의 짜임새나 뜻으로 보아 바람직한 것이라 하겠다.
강강술래 또는 강강수월래 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하여는 확증할만한 기록은 없으나 일단은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원시 공동체 사회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추측하는 바이다.
그러나 훨씬 후,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술이 결부된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① 명량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를 때, 충무공이 거느린 전선은 불과 12척 밖에 없었고 이에 비해 왜선은 350여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중과부적으로 왜적과 맞서기 어렵게 되자 충무공은 아낙네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수 십명씩 무리를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왜적에게 마치 수만의 대군이 산봉우리를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은 의병술을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때 아낙네들이 산봉우리를 돌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던 것이 바로 강강술래의 시작이라는 설이다.
② 이와는 달리 산봉우리를 돈것이 아니라 갯마을에서 아낙네들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면서 왜적의 눈을 속였다는 설도 있다. 이 떄 의병술로 쓰였던 것이 그 후 놀이화되어 오늘의 강강술래로 되었다는 의견이다.
③ 충무공은 용맹하게도 옥동 앞바다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왜적의 피로 바닷물이 물들어 붉은 바다로 변하니 이곳을「파바다」라 일컫게 되었다. 또 우수영 앞에 있는 울도섬에다 쇠줄을 매달아 왜선이 지나갈 때, 쇠줄을 당기어 격침시켰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의 어린이들은「울도」소리만 들어도 우는 소리를 그쳤다고 한다. 이처럼 처절한 싸움을 할 때, 병력이 모자란 이충무공은 왜적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진도 둔절리 뒷산에 곡창을 의장하여 군량이 많음을 과시하고 한편 아낙네들을 동원하여 각기 색옷을 입혀 산 둘레를 돌게 하였다. 이를 끝없는 군사의, 행렬로 착각한 왜적은 크게 놀래어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의장되나 군사 행렬이 강강술래의 기원이라는 설이다.
④ 임진왜란 때, 남자는 모두 전쟁에 동원되어 전지로 나가게 되니 마을에는 아낙네들만이 남게 되었다. 이 때 이충무공은 아낙네들에게 남자의 옷을 입히고 우수영 동쪽 옥매산과 진도의 만금산에 올려보내 강강술래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충무공의 의병술로 창안된 강강술래가 민속놀이화 되어 그 후 계속하여 전승되었다고 하며 강강술래라는 말은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 온다는 뜻의 강강수월래일 것이라는 의견이다.
위의 몇몇 속설에 따른다면 강강술래는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의병술에서 연유되었고, 그 후 이충무공의 전승을 기리기 위하여 연례행사로 놀아져 오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다. 이는 강강술래가 놀아지는 지방이 주로 옛날 이충무공이 왜적과 싸웠던 남해안 일대라는데서 자연 이 놀이가 이충무공의 전술에 유추되어 위에서 본바와 같은 속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농경시대의 파종과 수확때의 공동축제에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던 놀이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면서 점차 오늘의 강강술래 놀이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이 이 놀이를 의병술로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친 후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져 당시의 격전지였던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에서 더욱 성행되어 온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이 놀이는 주로 한가위 밤에 놀아왔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 밥을 비롯하여 봄, 여름, 가을 어느 때던지 달밝은 밤에 수시로 놀아왔다.
또한 놀이꾼들도 반드시 여인네에 국한하지 않고 남자들도 함께 어울려 놀기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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