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1552-1610)
* 사회적 배경:
마테오 리치가 태어났을 당시의 서구 세계는 종교개혁의 불길에 휩싸여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가 대립하여, 이미 북부 유럽은 신교로, 남부 유럽은 구교로 지형도가 그려진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 성인에 의해 1539년에 설립된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일어난 가톨릭 내부에서의 혁신운동으로, 로욜라 성인에 의해 1948년 저술된 <영성수련>을 기본 신앙수행지침서로 삼고 이를 통한 영성 체험을 바탕으로 인재양성과 선교활동, 신앙심의 확립과 외교력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 등을 꾀했다. 이 예수회가 당시의 첨단과학(관측 천문학 등)으로 무장한 예수회 소속 최고 엘리트 성직자들(마테오 리치 포함)을 선교를 위해 중국으로 파견한다.
* 과학적 배경: 관측천문학 발달
지동설과 천구회전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
육안 관측의 천문학 대가였던 티코 브라헤(1546-1601),
시간 개념의 도입 및 1609년 고성능 망원경을 만든 갈릴레오(1564-1642),
브라헤의 방대한 관측 자료로부터 케플러 법칙을 발견한 케플러(1571-1630).
<마테오 리치 연보>
* 1552년 이탈리아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태어남.
* 1571년(19세)에 예수회에 입회한 마테오 리치는 외지 선교를 희망하여 로마를 떠나 인도의 고아에서 4년간 머물며 교육을 받음.
* 1580년에 사제 서품을 받음.
* 1582년 8월(30세)에 중국의 마카오에 첫발을 내딛는다. 중국을 하나의 자기완결된 세계로 여기는 중국인들의 견고한 중화中華 사상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고 판단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심도 있게 공부함.
* 1582년 말 예수회 선교사들이 해안에서 400리 정도 떨어진 당시 총독이 집무하던 자오칭을 방문해 귀한 시계를 선물하는 등 총독의 환심을 사, 몇 개월 머물다 마카오로 돌아감.
==> 귀환시 사용하던 제단을 입교희망 중국청년에게 맡겨 놓았었는데 다시 가보니 제단위에 ‘천주天主’를 써붙여 놓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천주님으로 부르기로 함.
* 1583년 여름 지역 행정책임자인 왕반이 선교사 초청.
==> 예수회 신부들에게 선교의 문을 열어줌.
==> 중국과 유럽의 두 문화가 만나는 중요한 계기 마련.
* 1583년 9월 마테오 리치가 불교 승려 복장으로 자오칭에 도착해 왕반이 마련한 대지 위에 사제관과 성당 건립.
*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명(明; 1368-1644)의 수도 베이징(1417년 이후)의 궁궐에 입성하기까지 십여 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아닌 이마두(利瑪竇)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
* 명의 멸망: 농민 출신의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키고 13일간 황제 노릇을 했으나 그 측근들의 횡포가 심해, 오삼계가 만리장성을 개방하여 청이 무혈 입성함.
* 한문 저술을 통한 선교가 중국을 위시한 조선과 일본 등의 한자문화권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게 됨.
* 1594년 11월 예수회원의 복장을 승복에서 유학자의 옷으로 바꿈.
* 1595년 11월 친분을 나누게 된 중국인 관료에게 우정과 사교에 대한 서양의 금언을 모아 <교우론>을 저술하여 선물: <교우론>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선비와 관료 계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 중국 사회에서 마테오 리치의 입지를 크게 넓혀줌.
* 1597년 8월 예수회 중국 전교단의 책임자로 임명됨.
* 1598년 베이징에 입성하지만 거주허가를 받지 못함.
* 1601년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마테오 리치가 이미 명성을 얻게 된 이유:
서양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호기심,
그가 보여주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뛰어난 기억력,
사서오경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풀이해준 놀라운 지적 능력,
자연과학자이며 동시에 인문학자로서의 탁월한 능력 등.
* 중국 밖의 세계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알리고 은연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계적 보편성을 전하고자,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적,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세계전도인 ‘곤여만국전도’를 제작.
* 1601년 베이징에 재입성하고 거주허가도 받음.
* 1603년 가을 한문으로 된 최초의 교리문답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인간과 인생에 대한 윤리적 고찰인 <25언>, 1607년 기하학을 소개하는 <기하원본>, 1608년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기인십편> 등의 저작을 연달아 출간.
* <천주실의>의 서문은 ‘천주란 무엇인가, 곧 상제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천주실의』를 통하여 마테오 리치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초기 유교의 상제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천주 신앙의 동일성임.
* 쥐타이쑤라는 연금술에 빠져있던 엘리트 청년과의 만남: 이 청년은 수학, 과학, 천주교 교리를 교육 후, 그리고 두 아들 출산 후 1605년 확신 속에 영세 받음.
* 1610년 베이징에서 입적(入寂)함.
* 동서문명의 빗장을 연 이마두 大聖師
기독교적 이상을 동양에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젊은 나이에 구도의 이상을 따라 험난한 여정을 마다 않고 1582년 중국 땅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서양 제국주의 침략 시대였던 지난 19세기를 살았던 여타 서양선교사와는 큰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정신계의 정복자’ 임을 자임하며 무력과 자문화 중심적인 교만함으로 군림하여 제국의 첨병 역할을 했던 선교사들의 선교와는 판이하게 다른 행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길을 돌아 이국 땅에 상륙한 그는 서구와는 전혀 다른 신세계와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 있는 거대한 문명과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하나의 다른 문명권을 발견하게 된 놀라움을 이렇게 적고 있다.
“중국은 하나의 왕국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은 실로 세계 그 자체입니다.”
* 中華思想: 한족(漢族)이 품고 있는 자기 민족 중심의 사상. 중화의 배후에는 항상 이적(夷狄)이라 하여 이민족을 천시하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고도 한다. 중(中)은 ‘중앙’이라는 뜻이며, 화(華)는 문화라는 뜻.
* <동서양의 정중한 만남: 마테오 리치>, 소현수 지음 (서강대출판부, 1996년)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조너선 D. 스펜스/주원준 옮김 (이산,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