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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은 고사에 의하면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일부라는 설이 있으나 삼한에 속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신라 35대 경덕왕 이전에는 마산항을 '骨浦', 마산을 '骨浦縣'이라 불러 '屈自郡'에 영속시켰는데 골포현 당시의 성지는 지금도 시내 환주산(추산동 정수장 부근)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여 전국의 지명을 고치고 행정구역을 새로이 정할 때 굴자군은 '義安郡'으로 하고 골포를 '合浦' 또는 '合浦縣'으로 고쳐서 의안군에 영속시켰으며 동남도병마절도사를 두었다.
그 후 고려 때에 즉, 1274년 25대 충렬왕시대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려던 동정군의 근거지가 되고 나서 의안을 '義昌縣'으로, 합포현을 '會原縣'으로 독립시켰으며 정동행성을 현 합성동에 축성하여 설치하고 창원포(현 창원시)에 의창현을 분치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3대 태종 때(1400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쳐서 '昌原郡'을 설치하고 도호부를 두었다. 부성은 고려 정동영이 자리 잡고 있던 현재의 합성동에 있었으나 그 후 11대 중종 때 부성을 오늘날의 창원시 의창동으로 옮겼다.
오늘의 마산포가 출현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의 일이다. 18대 현종 4년 1663년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낙동강 하류 유역 13군의 조공미를 서울로 조운하는 격납고인 조창(현 남성동 제일은행 지점자리)이 설치됨으로써 공관과 민가가 순식간에 형성되었고, 그 결과 이 일대에 중성리·동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등 6개리가 형성되면서 오늘날의 마산의 기반이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종래의 마산포는 '昌原港' 또는 '舊江'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조창 설치 이후 공관과 민가가 번성을 이루어 '山湖浦' (일명 '午山津'이라 불리웠다 함) 그 당시 한때 전염병이 만연되어 희생이 많았던 관계로 이 재해를 면하기 위하여 午山의 '午'자는 '馬'자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다 하여 마산이라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馬山'의 유래라 하기도 한다.
또한 마산이란 명칭은 고려시대에는 보이지 않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조에 합포와 아울러 마산포란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현 마산시 지명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그후 조선말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일 마산포는 개항장으로 발족되고 창원감리서가 설치되어 외교사무와 지방행정을 관장하고 또한 각국 거류지제가 설치됨에 따라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1906년 영사관은 이사청으로 개편되고 1914년 부제실시로 마산부가 되었으며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지정되고 그 해 8월 15일 부를 시로 개편한 이래 오늘의 마산시가 되었다.
마산시 북쪽에 위치한다. 내서읍은 고종 32년 창원군에 소속되었으며, 1910년 마산부에 예속되었다가 1914년 다시 창원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외서면 구역인 회원, 교방, 산호 등 5개 리와 함안군 산인면 일부가 병합되어 19개의 리로 되었다. 1943년 10월 1일 부로 양덕, 산호, 교방, 회원, 석전리가 다시 마산부로 편입되어 나갔고 1973년 7월 1일자로 다시 구암, 회원, 합성, 두척 등 4개 리가 마산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창원군이 폐지되면서 중리, 평성, 호계, 용담, 상곡, 원계, 삼계, 신감, 감천 등 10개 리의 내서면이 마산시에 통합되었고, 1995년 3월 2일자로 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산면은 신라때 성법부곡이라 불렀으며, 고려에 와서 구산현으로 승격하였다.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산세가 대체적으로 거북이 같은 형태를 하고 흡사 거북이가 바다에 들어가는 형국이므로 거북이 구, 뫼 산이라 이름 지어졌다
그 뒤 웅신현 웅천에 영속되었고 다시 금주에 이관되고 뒤에 칠원현에 편입 되었다.
조선 고종 32년(1895년) 칠원군 구산면이라 칭하였으나, 1908년 칙령 제69호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10년 다시 마산부에 편입되고 1914년 다시 창원군에 이속되었다.
1973년 군면폐합시 대통령령 제6542호로 예곡, 우산, 현동, 덕동 4개리를 마산시에 분할하고 수정, 유산, 마전, 석곡, 옥계, 반동, 구복, 심리, 남포, 내포등의 10개리를 관할에 두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鎭東面(진동면)은 조선시대 러시아가 현재의 마산을 租借(조차)해서 해군 극동함대 기지로 사용할 시점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길목을 잡기 위해 군항지를 진동(당시 : 진해만)에서 웅천(現 진해)으로 옮긴 후, 당시 鎭海縣(진해현) 관할의 동면, 북면, 서면 중 동면을 "鎭東" (진동)으로 이름지어 선포함에 따라 "鎭東" (진동)이라고 불리워지게 됐다.
이후, 鎭東面(진동면)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산면과 진북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昌原府(창원부)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창원부의 승격으로 의창군에 통합된 후,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북이란 본래 진해부의 북면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마산시 남서에 위치하며 동쪽은 진동면, 서쪽은 함안군, 남쪽은 진전면, 북쪽은 내서읍과 함안군에 각각 접한다.
본래 진해부의 지역으로서 1908년 함안군에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진동면의 일부와 함안군 병곡면 야현리를 병합하여 다시 창원군에 편입. 1980년 창원시의 승격으로 의창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 산업은 농업으로 미작 이 성한 곳으로, 마산∼통영간 국도가 관통하고 있다.
본래 진해부의 서면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마산시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진동면, 서쪽은 고성군과 함안군,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진북면과 함안군에 각각 접한다. 1908년 창원군에 편입되면서 진서면이 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양전면, 함안군의 비곡면, 고성군의 구만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진서와 양전면의 이름을 따라서 진전면이라 하여 창원군에 편입. 1980년 창원시의 승격으로 의창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폐합에 따라 마산시에 편입,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주 산업은 농업이며, 연안에서는 홍합의 양식이 성하다.
마산시의 서남단에 위치하며, 시의 중심지로부터 7.5㎞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현동리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창원군 구산면에 편입 되었다가 1973년 마산시에 편입되는 동시에 리에서 동으로 되었다. 산업은 주로 농업으로서 비닐하우스에 의한 고등채소의 재배가 성하며, 덕동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안에서는 홍합의 양식도 성하다. 취락은 청량산(323m)과 당마산(218m)간의 하곡에 따라 발달한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밤구미 또는 율구미로 불리었는데, 이는 고려 원종때 조근필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밤씨를 얻어다가 청양산 일대에 심게 된데서 비롯되었으며, 또 앞에는 포구가 있는데서 가포로 불리게 되었다. 해안선을 따라 취락이 형성된 농업과 어업 및 상업이 공존하는 복합지역으로 바다와 산림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쾌적한 환경의 도시근교지역으로, 최근 마산항 개발사업으로 율구만 지역에 새로운 항구가 건설중이며, 가포본동마을에는 주택공사에서 국민임대주택건설계획으로 신도시 건설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음
무학산 서쪽 산록에 위치.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월영대가 있었으므로 월영리라 하였는데, 조선 태종 때에는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의 외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해 리에서 동으로 고쳤으며, 현재 월영동과 대내동, 해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산시의 서쪽 해안 저지대에 위치.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조선 태종때에는 창원부에 편입. 1889년(광무2년)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되면서 '本町' 이라 불리웠다.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해 월남동 1, 2, 3, 4, 5 가로 고치고, 1958년 시조례에 의해 월남동 1, 2가, 두월동 1, 2가, 평화동, 문화동, 신창동을 합하여 월남동회가 되었다. 가로는 계획된 격자상으로서 일제시대의 상가 및 유흥가가 아직도 남아 있고, 신마산의 상업의 중심지이며, 구한말에서 일제시대까지 러시아 영사관 및 일본 영사관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97년 5월 12일 구 창포동, 월남동, 월영1동 3개동을 통합하여 행정동을 문화동 변경하였으며, 현재 법정동은 월영동, 화영동, 대창동, 창포동1,2,3가, 유록동, 청계동, 대외동, 홍문동, 문화동, 평화동, 신창동, 두월동 1,2,3가, 월남동 1,2,3,4,5가 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산시청으로부터 서쪽 1.6㎞ 지점에 위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조선 태종때 창원군으로 편입. 1910년 마산부제의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해 신월리 일부를 갈라서 왜식으로 '扇町' 이라 하였다가 1947년 왜식 동명변경에 의해 반월동으로 고쳤으며 1958년 시조례에 의하여 반월동, 신월동, 월포동, 대성동 1가, 장군동 1가, 중앙동 1,2가 일부를 합하여 반월동회로 되었다.
가로는 격자상으로 일제시대에 건설된 주택지로서, 과거 신마산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마산시의 중앙에 위치, 본래 합포현 지역으로
조선 태종때 창원부에 편입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서면에 편입
1958.8.15 : 시조례 제126호로 동의 명칭 및 구역확정
1990.7.1 : 시조례 제1590호(1990.6.9)로 마산시 합포구 중앙동으로 변경
2001.1.1 : 시조례 제452호(2001.12.11)로 마산시 중앙동으로 변경
마산시의 중앙. 무학산 산록에 위치.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 완월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조선 태종 때에는 창원부에 편입.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의 서면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일부는 '慂町' 과 '道町' 으로 되고, 나머지와 신월리 일부를 병합하여 완월동, 장군동 4, 5가를 합쳐 완월동회로 되었다.
마산고등학교를 비롯한 중,고등학교가 이곳에 집중하고 있으며, 취락은 중앙동, 월남동 등 격자사의 가로와는 달리, 무학산의 산록선을 따라 발달한 자연부락의 성격을 띠고 있다.
동의 동쪽, 장군천에는 고려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왜구와 홀로 싸우다 전사한 장장군묘가 있다.
완월동의 동쪽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무학산의 산록에 위치.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고개가 있는 산밑이 되므로 자산(玆山) 또는 척산이라고 불렸다. 조선 태종 때에는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의 외서면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리에서 동으로 되었다.
마산시의 전형적인 주택 지역으로서, 취락은 무학산의 산록선을 따라 발달한다.
연혁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 편입
1949. 8. 15 : 법률 제32호로 마산시 자산동으로 개칭
1971. 10. 25 : 동 청사 신축으로 마산시 자산동 115-4번지 이전
1990. 8. 25 : 동 청사 신축으로 마산시 자산동 25-3번지 이전
1997. 10. 20 : 시조례 제285호로 행정구역 변경으로 교방동 170-2(거북선), 170-3(대림하이츠빌라)번지 자산동 편입
2005. 6. 13 : 동 청사 개청 (자산동 140-3번지)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구마산항의 일대이며 중앙동의 동남쪽 마산만의 해안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동서동은 조선 태종 때에 창원부로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의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동성동은 동성리, 오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왜식으로 '萬町'이라 하였고, 부림동은 숲이 많은 거리 즉 숲거리 또는 쑥거리에서 유래하였으며 서성리 일부 를 갈라서 '富町'이라 하였고, 서성동은 성호리, 성산리의 각 부분을 병합하여 '幸町'이라 하였다가,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동성동, 부림동, 서성동으로 고쳤으며, 1958년 시 조례에 의하여 동성동 남성동을 합하여 동성동회가 되었고, 부림동과 창동을 합하여 부림동회가 되었으며, 서성동은 1963년 마산시 구역 재정비에 의하여 서성동, 수성동을 합쳐 서성동회가 되었다가 1997년 5월 동통합에 의해 동성동, 부림동 서성동을 합쳐 동서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동서동은 재래시장인 어시장을 비롯하여 부림시장이라는 상설시장이 있으며, 대우백화점이라는 대형 백화점이 위치하고 있어 중부 경남의 중심적 시장기능을 갖고 있으며, 중심에는 신마산, 북마산, 구마산의 3방향으로 갈리는 옛 서성로타리를 중심으로 뻗어 있으며, 서성로타리 북쪽에는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한 시민 학생들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3.15 의거탑이 있다.
본래 합포현 지역으로 조선 태종때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으로 왜식으로 신정, 석정의 일부에 속했다가 1946년 성호동과 추산동으로 고쳐져 불러오다가 1997년 5월 12일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추산동과 성호동을 통합 '성호동'으로 개편하고 현재 구 추산동사무소를 정점으로 동정을 펼치고 있다.
무학산의 사면에 있는 독립구릉인 추산의 산록을 따라 발달하고 있고 자산동과의 경계지점에는 고려 원종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군대를 합포에 주둔시키고 식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팠던 몽고정이 있다.
(경상남도 지정 문화 재 자료 제82호)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 회원현의 향교가 있었으므로 교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무학산의 남쪽 완사면에 위치하며, 시청으로부터 동쪽으로 2.2㎞ 떨어져 있다. 조선 태종 때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창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043년 마산부 구역 확장에 따라 다시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취락은 무학산에서 발원하는 서원천의 상류인 서원골에 따라 발달하며, 서원골에는 백운사, 원각사, 서학사 등 사찰과 고운 최치원이 수도하던 고운대와 조선 선조 때 문공정술이 시서를 강론하던 관해정 등 놀이터가 많다.
구마산의 중앙에 위치하며, 시청으로부터 동쪽으로 2.1㎞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상남이라 하고, 조선 태종 때에는 창원부에 편입되었으며, 1910년 마산부제의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상남동이라 하여 마산시에 편입되었다.
상남동은 일제시대 한국인의 거주지였으며, 취락은 상남천과 구마산역을 중심으로 발달. 동의 서쪽에 있는 제비산에는 고려 원종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몽고병 4,500명이 머물렀던 절도사구영터가 있다. 또한 1997년 5월 12일 교원동을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원동의 유래는 마산시의 동쪽 무학산의 남쪽 산록에 위치하며, 시청으로 부터 2.1㎞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조선 태종 때 창원부로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의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의 통합에 의하여 교방동과 회원동 일부를 병합하여 교원동이 되었다.
취락은 본래 무학산에서 발원하는 계획된 주택지대로 알려져 있다.
구마산의 중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상남동과 접하고 남으로는 마산만에 면한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조선 태종 때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동성동, 오산리, 상남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오산과 동성의 이름을 따라 오동리라하여 다시 마산부에 편입되었다.
오동동은 상남동 및 중성동과 함께 일제시대에는 한국인의 거주지였으며, 현재 상남천을 따라 발달한 밀집된 지역으로, 북마산과 오동동으로 뻗은 간선도로변에는 보석, 시계, 양품점과 같은 중심지이다. 1997년 5월 12일 중성동을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7년 5월 12일 시 조례제263호에의거 상남2동과 산호2동을 통합하여 합포동이 되었다. 마산만으로 유입되는 근주천 하구해안(河口海岸)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좌측에는 용마산이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앞에는 합호(合湖)의 바다가 있어 산호라고 하였다. 조선조 태종 때 창원부로, 1910년 마산부제의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마산시에 편입되었다.
본래 논,밭으로 이용되었으나 마산시의 인구증가와 특히 인근에 수출자유지역(현 자유무역지역)이 입지 하면서부터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어 현재는 마산시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산호동은 산호1,2동으로 나뉘었으나, 산호2동은 합포동으로 편입되고, 산호1동은 산호동으로 바뀌었다.
상남동은 구마산역이 있던 지역으로 상남1,2동으로 나뉘었으나, 상남1동은 노산동으로, 상남2동은 합포동으로 편입되었다.
마산만으로 유입하는 근주천의 하구 좌안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의 중앙에는 용마산이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뒤에는 용마산, 앞에는 합호(合湖)의 바다가 있어 산호라고 하였는데 조선 태종 때 창원부로 편입되고, 1910년 마산 부제의 실시에 따라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마산시에 편입되었다.
산호동은 본래 마산만의 해안 저지대로 논으로 이용되었으나 마산시의 인구증가와 특히 인근에 수출자유지역이 입지하면서부터 신주택지로개발, 현재는 마산시의 가장 잘 정비된 주택가로 되었다.
마산시 북동 무학산의 산록 완사면에 위치하며 시청으로부터 2.8km 떨어져 있으며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 조선 태종때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 외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회원리라해서 창원군에 속했다가 1943년 10월 1일로 다시 마산부에 편입되었고 1958년 8월 15일 마산시 회원동(마산시조례 제126호) 및 1963년 6월 24일 회원1동 회원2동으로 분동(마산시조례 제221호)되었으며 1969년 12월 23일 ~ 1975년 3월 27일 기간동안 도시구획 정리사업을 시행하여 현재 5,173세대에 14,620명의 인구를 가진 중앙로, 북성로의 간선도로가 관통하는 주택 밀집지역입니다.
마산시 북동 무학산의 산록 완산면에 위치하며 마산시청으로 부터 2.8km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 조선 태종때 창선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회원리로 칭하고 창원군에 속했다가 다시 마산부에 편입, 현재 회원 1,2동이 있고 무학산에서 발원하는 회원천 하곡을 따라 발달하였다
- 1943. 10. 1 (부령 제242호): 창원군 내서면에서 분리
- 1947. 7. 20 (마산시 고시): 회원동으로 개칭
- 1970. 1. 1 (마산시 조례 제393호): 회원1, 2동으로 분동
- 회원천 : 회원동 앵지밭골 골짜기에서 오동동 해안로로 흐르는 연장3Km의 하천
- 봉화산 : 회원2동에 위치하며 무학산 동북쪽으로 뻗어나온 능선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해발259m의 산, 통신시설이 발달되지 않았던 옛날 외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사항을 중앙에 알리는 수단으로 연기로서 전하는 릴레이식 봉화대가 있었다고 하여 봉화산으로 불리기도 함.
- 앵지밭골 : 회원동 서쪽 현재 마산여중 뒷쪽의 계곡. 지금은 이골짜기 일대가 한 마을로 되어 버렸다. 옛날 앤지닭이 울었다고 하여 앵지밭골이라 불리운다.
마산시 동북 근주천의 선상지에 위치하며, 시청으로부터 3.8km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돌이 많아 돌밭 또는 석전이라 하였는데 조선 태종때 창원군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다시 마산부에 속했다. 현재 석전1,2동이 있다. 취락은, 본래 근주천의 선상지 말단에 발달하였으나,
마산시의 인구증가로 인해 지금은 새로운 주택지로서 개발되었으며, 남해고속도로로 통하는 서부관문의 교통 요충지를 형성하고 있다.
마산시 동북 근주천의 선상지에 위치하며, 시청으로부터 3.8km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돌이 많아 돌밭 또는 석전이라 하였는데 조선 태종때 창원군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다시 마산부에 속했다. 현재 석전1,2동이 있다. 취락은, 본래 근주천의 선상지 말단에 발달하였으나, 마산시의 인구증가로 인해 지금은 새로운 주택지로서 개발되었으며, 남해고속도로로 통하는 서부관문의 교통 요충지를 형성하고 있다.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 구 의창군 합포현 (신라초기) → 경덕왕 16년, 757년
□ 고려시대
- 의안, 합포를 합하여 전주(김해)에 강촉(현종9년 1018년) → 의창현 회원현으로 분리(충열왕 8년 1048년)
□ 조선시대
- 창원부(태종8년 1048년) → 고종 광무 2년(1898년)에 개항과 함께 명국거답유지 제도실시
- 1914년 3월 1일 마산부 → 1949년 8월 15일 마산시
마산시는 舞鶴山을 등지고 있는데 무학산을 일명(斗尺山) 이라고도 하며 두척산은 세말재(세자매)라 부르고 이 산하의 두척리를 마재(말재)라 부르고 우리말로(斗)를 (말)이라고 (尺)을 (자)라고 하는데 이것이 변하여 마재(말재)로 되었다.
따라서 마산은 (斗尺-말자), (마재)(말재)가 변하여 생긴 지명으로 사독문자로 표기하여 (馬)도 되고 (牛)도 되는데 馬山(牛山-馬山의 옛 지명을 우산이라고 함) 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회성동은 일명 살구정 이라고 불러 왔는데 그 유래는 1820~1930년대 초반 마산의 모든 경제권은 일본인들의 손에 쥐어졌을 때 현재철로가 있는쪽 비탈진산은 거의가 동석회사(일본인회사) 또는 일본인 개인소유자로서 기후가 온화하고 토질이 기름져서 이곳에 살구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살구정이라고 하였다.
그 후 창원군 내서면 회성리에서 1973. 7. 1부로 행정구역개편으로 마산시 회성동 으로 되었다.
마산시 동쪽 근주천의 하구 우안에 위치. 시청으로부터 5㎞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양동 또는 양덕이라 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창원부에 편입.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사율리 일부와 외서면의 산호리 일부, 그리고 부내면의 봉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양리라 해서 창원군에 편입. 1943년 마산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마산시에 편입되고 리에서 동으로 고쳤다. 양덕 1, 2, 3 동회가 있다. 양덕동은 본래 벼농사가 성했던 곳이었으나 수출자유지역의 각종 공장이 입지하면서부터 일약 공업지역으로 변모했다. 합성동과 함께 마산시의 신개발지로서, 가로는 격자상으로 되어있다.
마산시 동쪽 근주천의 하구 우안에 위치. 시청으로부터 5㎞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양동 또는 양덕이라 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창원부에 편입.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사율리 일부와 외서면의 산호리 일부, 그리고 부내면의 봉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양리라 해서 창원군에 편입. 1943년 마산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마산시에 편입되고 리에서 동으로 고쳤다.
양덕 1, 2, 3 동회가 있다. 양덕동은 본래 벼농사가 성했던 곳이었으나 수출자유지역의 각종 공장이 입지하면서부터 일약 공업지역으로 변모했다. 합성동과 함께 마산시의 신개발지로서, 가로는 격자상으로 되어있다.
1997년 5월 12일 양덕3동을 통합하였다.
마산시 동북에 위치한 합성동은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합포성이 있었으므로 합성이라 하였고, 조선 태종 때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의성리, 석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합성리라 해서 창원군에 내서읍 편입. 1973년 마산시의 구역확장에 따라 다시 마산시에 편입되고 리에서 동으로 고쳤다.
지금의 합성1동은 1979. 5. 1일자로 분동되었다.
마산시 동북에 위치한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합포성이 있었으므로 합성이라 하였고, 조선 태종 때 창원부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의성리, 석전리이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합성리라 해서 창원군 내서면에 편입. 1973년 마산시의 구역확장에 따라 다시 마산시에 편입되고 리에서 동으로 고쳤다. 본래 이곳은 수박, 참외, 토마토의 재배가 성햇던 근교농업지대였음. 현재 합성1,2동은 1982.9.1 분동되었음.
1570(선조3년):진주 정氏가 처음으로 입동(入洞)하여 당시 마을 명칭을 구연이라 불렀음.
- 구한말:구암리
- 한일합방이후 : 창원군 내서면 구암리
- 1973. 07. 01 대통령령 제6542호(1973.3.12공포)로 창원군 내서면 구암리에서 마산시로 편입
- 1979. 05. 01 시조례 제816호(1979.5.1공포)로 마산시 합성동을 합성1,2동으로 분동
- 1981. 02. 15 시조례 제938호(81.1.20공포)로 합성1동은 합성동으로 , 합성2동은 구암동으로 개칭
- 1985. 10. 21 시조례 제1310호(85.10.공포)로 구암동을 구암1,2동으로 분동하여 현재에 이름
< 지명 유례 >
국립 3.15묘지 위에 있는 애기봉 정상에 위치한 거북모양 바위를 소계천변에서 올려다 보면 거북이 상천(上天)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龜岩이라 명칭(口傳) 하였다.
동북쪽으로 천주산이 위치하고 그아래 3.15 의열께서 안장되어 있는 애기봉 정상에는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소계천변에서 올려다보면 거북이 상천(上天)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거북구(龜)자에 바위암(岩)자를 붙여 구암(龜岩)이라는 마을 명칭이 유래 되었다는 것이 주민 대다수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다.
- 1570(선조3년) : 진주 정씨가 처음으로 입동(入洞)하여 당시 마을 명칭을 구연이라 불렀음.
- 구한말 : 구암리
- 한일합방이후 : 창원군 내서면 구암리
- 1973. 07. 01 대통령령 제6542호 (1973.3.12공포)로 창원군 내서면 구암리에서 마산시에 편입
- 1979. 05. 01 시조례 제816호 (1979.5.1공포)로 마산시 합성동을 합성1,2동으로 분동
- 1981. 02. 15 시조례 제938호(81.1.20공포)로 합성1동을 합성동으로 합성2동을 구암동으로 개칭
- 1985. 10. 21 시조례 제1310호(85.10.공포)로 구암동을 구암1,2동으로 분동하여 현재에 이른다
마산시 동쪽, 남산천의 하구에 위치. 시청으로부터5.1km 떨어져 있다. 본래 합포현의 지역으로서, 봉암이라 하였는데 이는 동의 뒤에 있는 산봉우리가 봉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태종때 창원군에 편입되고, 1910년 마산부제 실시에 따라 마산부 내서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의하여 봉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암리라해서 창원군 내서 면에 편입되었다가,
1943년 마산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마산시에 편입되었다. 봉암동은 본래 연안어업을 위한 어촌이었으나, 마산 자유무역지역이 이곳에 입지하면 서부터 공업지대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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