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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청파동의 어느 작은 골목,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자 사랑나눔터의 아담한 건물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작은 공간에서는 다섯 명 남짓한 농아인들이 기자를 반겨 주었고, 자막이 있는 텔레비전과 말소리 하나 없이 수화로만 대화하는 모습 등 우리의 일상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없는 사랑이 있는 곳, 사랑나눔터에서 이승원(건공·79) 원장을 만나봤다. “왜 건축을 전공했냐고요? 간단해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영… 철이 없지만.” 그는 시종일관 환하게 미소지었다. 건축공학이라는 전공, 그리고 돈을 많이 벌겠다던 꿈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작은 사무실에서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수입의 거의 전부를 그들을 위해 쓰는 전도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특별했노라며 자신 있게 말하는 이승원 원장의 어린 시절은 과연 남달랐다. “제 이름이 이승원인데, 거꾸로 하면 원숭이가 돼요. 그게 항상 별명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싫었던지……. 괴롭힘을 당해서 3개월 동안 학교를 안 갔어요. 정말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동네 들어오는 초입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날 불렀어요, 이름을 물어보더니 제게 이 다음에 참 큰일 할 사람 같다고 하지 뭐예요. 왜 그랬는지 지금도 궁금해요. 그리고 나서 이제 고등학교를 가야하는데 우리 때는 인문계는 고등학교로 쳐주지도 않았어요. 명문고등학교는 꿈도 못 꾸고, 대학가기 좋은 수산계 고등학교를 가라고 해서 그 곳에서 어업을 전공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보니까 배는 저하고 너무 적성이 안 맞더라고요(웃음). 결국 어업 쪽으로 가진 않았지만 공부는 열심히 해서, 들어갈 땐 꼴찌였지만 수석으로 졸업했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직장을 다니다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그에게 강렬한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졌다. “군대 행정병을 하는 중이었는데 폭행으로 사람이 한 명 죽는 사고가 있었어요. 제가 보는 앞에서 어떤 고참이 명치를 한 대 쳤는데 일자로 쭉 뻗어 죽어버린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서 항상 괴로웠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질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거기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폭력 없는 세상이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는 제가 군대를 제대할 때쯤에 경기공업개방대학이 생겨서 간신히 입학했어요, 저는 그다지 성적이 높지 않았지만 다행히 합격을 했으니 저는 아주 행운아였죠.” 어렵게 들어간 학교였지만 이 원장은 성실하고 학점 좋은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교명을 개방대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개명하자고 매일 데모가 일어나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죠. 그러고 나서 졸업을 하려고 보니까 준비도 안 되어 있지, 기사자격증을 딸 만한 실력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교수님들이 이제 절 미워하시죠. 날마다 결석하지, 리포트도 안 내지…(웃음) 하여튼 그런 상황이어서 ‘건축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졸업하고 나서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전도사가 되었죠.” 그는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중에 우연히 청각장애인들과 만나게 되었다. “하루는 구청에 갔다가 우연히 농아인이 수화를 하는 것을 보게 됐어요. 이야기하는 것을 봤는데 자신들이 사무실이 하나 필요하다고 청원을 하러 왔더라고요. 그 때는 제가 레크레이션 강사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보통 때의 수입보다는 서너 배를 벌었어요. 행사에 가서 사회를 한 번 보면 그 때는 5만원 벌기도 힘든 시절인데, 50만원까지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러던 시절이라서 사무실 문제는 내가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명함을 줬는데 그게 인연이 된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사무실이 필요해서 그들이 구하는 중이었는데, 그들을 담당하던 수화통역사가 보증금 삼천만원을 빼앗아서 도망갔다지 뭐예요. 사무실을 구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수화도 배우고, 사무실을 구해서 청각장애인들과 함께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사랑나눔터의 시작이었죠.”
“구청에서 본 수화가 인생 바꿔 도가니 사건 통역 맡기도 이제 부당한 현실에 도망치지 않을 것…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
장애인들과 가장 가까이 지내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뛰면서 그 안타까운 상황들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을 그다. 특별히 청각장애인들의 실태에 대한 이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본격적으로 장애인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입에 담을 수 없는 참혹한 일이 너무너무 많았어요. 우리 장애인들이 앵벌이에 끌려 다니고… 앵벌이 하는 사람들의 수화를 직접 통역해보니까 비리도 너무 많았어요. 그 이후에 사정이 어려운 장애인들이 전국에서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광주에서 농아인들이 나를 찾아왔어요. 도가니 사건 아시죠? 도가니 사건이 일어났던 광주 인화학교의 피해자들이 수화로 하는 증언을 통역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통역을 하러 갔죠.” 사랑나눔터에 속해 있는 청각장애인들은 약 3,000여 명, 이 원장은 그들을 봉사 받는 대상자들로만 내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봉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저는 저를 찾아오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저는 상담을 할 때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요. 무료로 상담해주는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봉사에 참여하는 봉사단원이 되어라, 이것이 조건이에요. 저는 장애인들에게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문화와 봉사를 가르칩니다. ‘사랑의 빵 나누기’라고 해서 호떡을 구워 나눠주는 봉사사업과 수화 뮤지컬을 해요. 10년 동안 교도소나 양로원, 군부대나 노숙자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봉사를 했어요. 교도소를 가서 ‘농아인들도 이렇게 당신들 도와주러 왔는데 느끼는 것이 없느냐’고 하면 그 범죄자들이 막 울죠. 저는 이것이 정말 진정한 사회복지의 개혁이라고 생각을 해요. 정말 이 사회는 사람이 사람다워야 해요. 헌법에 사람의 기본권 보장이 명시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기본권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이 세상에 너무 만연하게 존재해요. 그것이 바로 농아인 사회예요.” 마지막으로, 그가 우리대학 후배들이게 해주고픈 말을 들어봤다. “학생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우리 개방대학 교명을 개명하자고 했을 때 함께 데모에 참여했었어요. 5.18 세대인데 그 때는 데모가 일상이었죠. 그런데 경찰들이 정문 앞에서 수류탄을 쏘면 저는 도망가기 바빴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참 너무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부끄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광주 인화학교 사건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죠. 그래서 지금 제가 이런 부당한 현실에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겁니다. 우리 후배님들도 4년 동안, 취업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봉사문화도 경험하고 소신 있는 일들을 했으면 해요. 사랑은 받을수록 행복하다기보다는 나눌수록 행복한 겁니다. 왜냐면요, 내가 행복하니까. 저는 오늘 당장 죽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원장은 길었던 말을 끝맺었다. 당당한 그의 표정에서는 30년 전 최루탄이 터지던 과기대 정문에서의, 부끄러웠던 뒷걸음질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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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내내 이 원장의 핸드폰에서는 진동이 울렸다. 그는 그 날에도 재판이 있다고 했다. 고위계층의 많은 사람들과 지도자들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윗자리에서 끊임없이 공약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천 마디 말보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현실의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작은 섬김과 발걸음이다. 앞으로도 귀한 사랑을 베풀어 갈 사랑나눔터 원장 이승원, 그의 외롭지만 행복한 싸움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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