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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성 베네딕도회 수사 지음 / 추교윤 옮김 / 가톨릭 출판사
1. 작가소개
- 지은이 : 익명의 성 베네딕도회 수사
이 책은 특이하게도 지은 이의 이름이 없다. 아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기에 이 책 자체도 지은이의 공로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셨다.
- 옮긴이 : 추교윤 신부
추교윤 신부는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중곡동 · 청파동 · 창현 · 덕정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고,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장을 지냈다. 현재는 퇴계원 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역할」이 있고,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을 공동으로 저술했다. 옮긴 책으로는 「가톨릭 사회 사상의 이해」, 「교회와 경제 자유주의」와 「아르스 본당신부 성 요한 비안네의 가르침」이 있다.
2. 내 마음에 다가온 글귀
머리말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는 바로 ‘내적인 삶’입니다.(p11)
☞ 내적인 삶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must need). 그럼 ‘내적인 삶’이란 무엇이가?
내적인 삶이란 무엇입니까? 내적인 삶은 은총의 도움으로 신적인 거룩한 삶에 참여하고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초자연적인 삶입니다.(p14)
☞ 내적인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삶이다.
내적인 삶은 의식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여기 계시고, 행동하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p14)
☞ 그러기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내적인 삶은 하느님과 친숙해지는 삶,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 내적인 삶=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삶=영성생활→같은 말이다.
‘내적인 삶’은 우리 각자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의 소중한 씨앗을 꺼내는 일입니다. 또 내적인 삶은 백배의 열매를 맺는 씨앗들로 가득 채우진 땅이고, 복음에서 말하는 진주이며, 땅에 묻혀있는 보물입니다.(p16)
☞ 내적인 삶은 복음에 나오는 진주며, 땅에 묻혀있는 보물이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적인 삶 없이는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제1장 내적인 삶의 목적: 하느님 찾기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 존재의 근원은 무엇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P21)
☞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철학이 시작되고, 믿음이 시작된다. 우리 삶의 의미가 시작된다. 나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인간의 생명과 참된 삶은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영혼 안에 있으며, 하느님을 알고 있는 영혼에게 가장 친숙하고 가장 순수한 것 안에 있습니다.“
☞ 하느님도 밖이 아닌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지원자에게 오직 한 가지만을 요구했습니다. 성소를 판단할 때 한 가지 기준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원자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가였습니다.(p24)
☞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헛되다.
너는 네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너는 나를 밖에서 찾고 있다.(p25)
☞ 그러면 나는 정말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어떻게?
십자가의 요한 성인도 이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만일 영혼이 하느님을 찾는다면, 하느님께서 그 영혼을 무한한 사랑으로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p26)
☞ 내가 하느님을 찾는다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찾으신다. 내가 하느님께 응답할 때 나와 하느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요한 4,10참조) 우리가 물을 길으러 가는 우물가, 바로 그곳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놀랍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시려고 우물가로 나오신다. (p27)
☞ 내가 하느님을 만나러 우물가로 가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낙심하고 돌아가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나도 자주 우물가로 가지 않았고, 하느님은 그때마다 헛걸음을 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시려고 우물가로 나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시고, 마실 물을 달라고 우리에게 청하시는 분이시다.(p27)
☞ 내가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다. 예수님의 청은 우리를 갈망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목마름에서 나온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목말라하기를 갈망하신다.(p27)
☞ 기도=하느님의 목마름과 나의 목마름의 만남. 예수님은 나의 사랑에 목말라 하신다.
“우리는 멀리서 하느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애를 쓰면서 그분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도 그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찾으려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온전히 영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애써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찾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기만 합니다."(p28)
이 말은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데 우선권을 드리고, 자신은 온전히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p29)
☞ 내적인 삶의 주도권도 하느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내가 시간만 내어드린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것뿐이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징표도 없이 무엇을 찾고자 한다면, 게을러지거나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찾는 것에 대한 어떤 징표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부지런히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을 찾으면서 열기를 느낀다면, 우리는 행복해 하면서 기쁨과 여정을 다해 불을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게으르겠지만, 하느님의 감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찾게될 것입니다.(p29-30)
☞ 하느님을 사랑하는 연인처럼 찾아야 한다. 그럼 그 열기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베네딕토 성인은 회개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영적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이 같은 감미로움과 편안함을 약속하였습니다.(p30)
☞ 그것은 얻는 것이 아니다.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면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다.
"자신의 창조주와 그분의 선하심을 찾지 않는 사람은 굳은 영혼을 지닌 냉랭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을 따르려는 갈망으로 불타오르면, 그의 영혼은 사랑의 불 위로 흐르게 되고, 그 위를 뛰어다니게 됩니다. 갈망은 영혼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세상에서의 즐거움은 그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영혼은 창조주 말고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그레고리오 대교황) (p31)
☞ 오직 하느님만을 찾고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삶. 하느님을 갈망할 때 이 세상의 즐거움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하느님께 사로잡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계십니다. 그분의 자애로움과 진리, 선하심만이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거나 찾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폴 델라트) (p31)
☞ 하느님은 세상의 근원이시다. 세상의 끝은 하느님으로 귀결된다.
제2장 내적인 삶의 토대: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은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고, 그 존재들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즉 어디에나 계시고 안 계시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p35-36)
☞ 세상은 하느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다. 모든 것 안에 존재하지만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볼 수가 없는 것이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으로 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하느님 사랑의 결과입니다.(p36)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모든 것은 시작되고, 완성된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 향합니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중력이 있어서, 자신의 완전성과 목적인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p37)
☞ 연어가 모천으로 돌아가듯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지어졌다. 하느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느님께로 가는 것은 삶의 순리다.
“이 놀랍고 조화로운 창조는 하느님께서 오직 그대를 위해 이루신 일입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웅장하며, 다양하고 풍성하고, 유용하고 이로우며, 그대의 육체에 양분이 되고 그대의 영혼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창조하신 것은 바로 그대를 위한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 (p38)
☞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 수십 억의 사람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나만의 실존이라는 사실은 전율이며 진리다.
신학자이며 훌륭한 시인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적기 위해 사용하시는 단어들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위대한 시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새로운 눈으로 창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단순하며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p38)
☞ 창조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 진리여.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아우구스티노 성인) (p40-41)
"오, 내 아들이여! 하느님의 향내를 네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라. 너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너의 영혼을 바라보거라. 거기에 하느님이 계신다.“(아우구스티노 성인) (p42)
☞ 하느님은 내 안에 계신다.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합당한 본성(지성과 의지)에 따라,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만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것입니다.(p43)
☞ 인간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떤 짐승이 자신을 지어낸 창조주를 아는가?
“너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너는 하느님의 뜻을 꿰뚫어 볼 것이고, 하느님의 모상을 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머무시고, 인간은 그로써 하느님의 모상으로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통해 창조주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p44)
☞ 내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러니 너는 하느님 안에서 그저 머물면 된다.
“자신의 본래적인 선함을 회복한 모습보다 더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은 없다.”(베르나르도 성인) (p44)
☞ 우리는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다.
우리가 하느님 모상의 순수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더럽히는 모든 것과 하느님에게로 향한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장애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p44)
☞ 자신을 버려야 한다. 비워야 한다. 나를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워야 한다.
양파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껍질을 벗겨 내야 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p45)
☞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시련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덕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버려야 할 것을 생각하세요! 자신의 불완전함을 벗어 버리려고 하면, 예수님께서 언니의 영혼을 빛으로 채우실 것입니다.”(소화 데레사 성녀) (p45)
☞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예수님을 채우자. 채우기보다는 버려야 한다. 나를 비우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하느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더욱 하느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몬느 베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많은 악들은 우리가 완전히 순수한 것을 바라보면 없어집니다.”(p45)
☞ 하느님을 생각하면 하느님을 닮는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 만나고 있는가?
하느님의 권능이 그분의 외아드님을 통해 사람을 그분 안에 머물도록 부르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고 또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듯이, 사람도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서 아들과 함께 아버지께로 나아가, 마침내 아버지와 함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p50)
☞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하고 하느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 지성과 의지로부터 떨어져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어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삶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영적인 것들 즉, 은총, 덕, 은사 등을 주셨습니다. (p53-54)
☞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협력이 있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일단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우선으로 할애해야 한다.
제3장 내적인 삶의 환경: 초자연적인 것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들어와라!’(잠언 9,4 참조) 저를 하늘까지 오르게 할 승강기는 예수님의 팔이었습니다. 예수님, 저는 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작고 어리석은 이로 남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작은이가 되겠습니다.“(소화 데레사 성녀) (p60)
☞ 작고 어리석은 이가 되는 것. 작아져야 예수님의 팔에 꼭 안기어 하늘에 오를 수 있다.
‘어린아이의 정신’은 초자연적인 것에 이르게 하는 아주 훌륭하고 유일한 영혼의 태도로서, 이를 통하여 우리는 내적인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그렇습니다.(p60-61)
☞ 하느님께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완전히 신뢰한다는 것이다.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당신의 신앙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게 됩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되고 비현실적인 것이 됩니다.“(p62-63)
☞ 신앙은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단지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신앙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내적인 삶과 함께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빨리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p63)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은 내 작은 영혼 안에서 내 작음과 보잘것없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 (p64)
☞ 한없는 겸손. 하느님은 낮추어지고 부서어진 마음을 사랑하신다. 완전한 의탁을 어여삐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능력한 상태 혹은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되면,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p65)
☞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버리면 인간은 하느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 상태다. 자신은 없어지고 하느님 만 있는 상태다.
자기 자신을 통해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특히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더욱 큰 착각입니다.(p66)
☞ 바다 속에 한 바가지의 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줌의 물이나 한 바가지의 물이나 바다에게는 그게 그거다.
진정으로 내적인 영혼은 자신의 노력에 의한 발전과 완전성을 무시합니다. 떨어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무’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내적 영혼이 떨어진다는 것은 높은 받침대 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 안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p67)
☞ 하느님 안에서 사는 영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진정으로 내적인 영혼은 한없는 신뢰의 기쁨과 어린아이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영혼은 이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p67)
☞ 하느님의 손 안에 떨어진 상태→ 엄마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완전한 신뢰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드러내 보이는 완전한 가난이 그분의 자비로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p67)
☞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낼 수가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우리가 약하고 힘도 없고, 욕구도 덕도 없으면 없을수록, 우리는 불타오르고 변화시키는 하느님 사랑의 활동에 더욱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p67)
☞ 약하면 약할수록 하느님께 적합한 사람이 된다. 약함을 자랑하자.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다.
“나는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내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고통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나는 매일 나의 새로운 불완전함을 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소화 데레사 성녀) (p68)
☞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인가? 약함을 사랑한 성녀.
“내가 죽을 때에 좋으신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나 필요로 하는 것과 나의 부족함을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소화 데레사 성녀) (p68)
☞ 부족하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다. 복되어라, 부족함이여!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고 또한 용서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소리를 높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오너라. 보잘것없고 약한 술주정뱅이들아, 너희들도 오너라. 소심한 자들아. 너희도 오너라!’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염려 없이 갈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서) (p69)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아주 지혜롭게 이들을 받아들이고, 합리적인 영혼으로 이들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이러한 것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 내미실 것이고, 우리는 그 손에 입맞춤할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서) (p69)
☞ 자격이 없다고,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고개를 숙인 이를 주님은 받아 주실 것이다. 주님은 겸손의 주님, 위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께서 우리 있는 그대로를 좋게 바라봐 주신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였습니다. 즉 우리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p70)
☞ 그러면 지금 나의 이대로의 모습도 하느님이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제가 어떤 덕을 얻었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하면, 슬그머니 오만한 생각이 납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은 제 자신의 고유한 힘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심연으로 떨어질 위험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소화 데레사 성녀) (p72)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나 우리의 덕에 대해서 너무 확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상태에도 과거의 공적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p72)
☞ 구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그저 우리는 하느님께 겸손되이 의탁할 뿐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함에 깊은 감동을 )받은 어떤 젊은이가 프란치스코를 ‘성인’이라 부르며 달려갔습니다. 몹시 화가 난 프란치스코는 돌아서서 그 사람 앞으로 갔습니다. “왜 나를 성인이라 부릅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주지 않으면 오늘밤 나는 매춘녀와 잘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릅니까?”(p73)
☞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으면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활동에 협력하도록 요청하시고, 또 우리의 활동을 통해 은총에 응답하도록 요구하십니다.(p74)
☞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이 내적인 삶이다.
“공로라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많은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받아야 할 것과 많이 사랑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주님이 원하는 것을 주게 하십시오.”(p75)
☞ 받는 것도 사랑이다. 겸손되이 받고 사랑하며 살자.
성인들은 항상 그들의 공로가 순수한 은총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다.(p76)
☞ 그러기에 항상 겸손할 수가 있었다.
“세상의 귀양살이가 끝난 다음,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주님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를 위한 공로를 쌓기를 바라지 않고, 주님의 사랑만을 위해 힘쓰기를 바랍니다."(소화 데레사 성녀) (p76)
☞ 오직 주님만을 사랑할 뿐.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인데 나에게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오직 사랑뿐.
"이 생명이 끝날 때, 저는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 업적을 헤아려 주시기를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모든 의로움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서 바로 그 주님의 의로움으로 저를 꾸며 주시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주님을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합니다.”(p76-77)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해, 또 아주 간단하게는 그분 자체에 대해 감탄합니까?“ 여기에 순수한 마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p79)
☞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있는가! 남 앞에서 떳떳하게 성호도 긋지 못하고, 하느님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자부심이 없어서다.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감탄하면서 완전한 거룩함이신 그분을 있는 그대로 즐거워하게. 그분 자체를 감사하게. 바로 그것이 순수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네.(p80)
☞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감탄하자. 사랑의 시작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이 말씀은 복음에서 가장 명쾌한 말씀이고, 우리가 교만함을 낮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 즉 내적인 삶의 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겸손함 없이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p80-81)
☞ 겸손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천국의 열쇠다.
제4장 내적인 삶의 강렬한 힘: 신망애 삼덕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 옷을 사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묵시 3,7-18)
☞ 세상의 부유함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비참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불로 정련된 금, 흰 옷과 안약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삼덕을 생각합니다.(p86)
☞ 이 세상의 부유함보다 신망애 삼덕이 더 가치있다.
1. 신앙
신앙 없이는 내적인 삶의 목적도 없고, 존재의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인 삶을 비추는 커다란 태양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적인 삶은 하느님의 빛 자체, 즉 우리를 알아보고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는 빛 자체이기 때문입니다.(p87)
☞ 내적인 삶의 목적은 신앙, 즉 믿음이다.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것이다.
신앙은 순종의 덕도, 윤리적인 덕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알아 가는 것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고(계시하시는 진리), 신앙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그분의 존재 자체 안에 있는 진리). 신앙은 인간적인 탐구의 결과나 이성의 노력으로 얻게 된 신념이 아닙니다.(p88)
☞ 신앙은 단지 착하고 좋은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원인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은 은총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은총이고,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청하면서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은총입니다.(p88)
☞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이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은총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 활동이 끝날 무렵에 확고한 신념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신앙은 전투입니다. 매일 치러야 하는 전투입니다.(p92)
☞ 순교자들을 생각해보면 신앙은 전투임을 알 수 있다.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윗옷 안쪽에 자신의 피로 쓴 ‘신경’을 항상 지니고 다녔으며, 의심의 유혹이 몰려오면 손에 쥐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p92)
☞ 성인도 신앙에 의심이 생길 때가 있었구나!
2. 희망
“거룩한 희망은 우리를 세상의 재화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부드럽고 깊은 움직임입니다.
또한 우리를 매일매일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도록 이끌고, 우리의 진정한 조국인 하늘에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덕입니다.“(p95)
☞ 희망은 우리를 세상이 아닌 하늘을 보게 해 준다.
희망은 보호자이시고 전능한 조력자이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희망의 목적이며 동시에 원인이십니다.(p96)
"희망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희망합니다.“(카제탕 추기경) (p97)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은 희망으로 우리의 참된 조국이 되고, 보물이 됩니다. (p98)
이 점에 관해서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회칙 「구원의 희망」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에게 어떤 보상을 해 줍니까? 교황께서는 4000년전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1) (p98)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희망하며 살 때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받을 것이다.
3. 사랑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복됨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과 친밀한 삶을 나누도록 하십니다.(p101)
☞ 하느님과 친밀한 삶→내적인 삶→사랑하며 사는 삶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p102)
☞ 주님과 친밀한 삶을 살아갈 때 주님과 나는 친구가 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도록 하라고 합니다. “너는 내게 아주 조금 주지만,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준다. 네가 주는 것은 땅이지만, 나는 너에게 하늘을 준다. 너는 내게 하루살이의 삶을 주지만, 나는 너에게 영원한 삶을 준다.”(p102)
☞ 무한히 베푸시는 하느님,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하느님.
"나의 죄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습니다. 한순간에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불살라 버렸기 때문입니다.“(p10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이 말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가장 적은 요구에도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같은 자세는 성령의 영감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의 바람, 다른 이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일들을 통해 표면화됩니다.(p103)
☞ 하느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다. 응답하지 않는 믿음은 없다.
내적인 삶은 신망애 삼덕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보쉬에는 말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완전한 신앙과 가장 완벽하고 온전히 내어 맡기는 희망, 가장 순수하고 가장 충실한 사랑의 복합물입니다.”(p105)
☞ 내적인 삶은 나를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제5장 내적인 삶의 양식: 성체성사
우리 내적 삶의 양식이 되는 성사는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은총만이 아니라 은총의 주인 자체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통해 영혼과 신성을 드러내 보이시고,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십니다.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35참조) 예수님께서는 ‘살아있으며 살게 하는 빵’이십니다. 그래서 내적인 삶의 양식입니다.(p109-110)
☞ 성체는 내적인 삶을 살기위한 양식이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몸이다. 누가 자신의 몸을 양식으로 준단 말인가? 예수님은 나에게 몸을 양식으로 주셨다. 성체를 먹지 않으면 나의 영혼은 죽고말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맇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3-55)
☞ 성체를 영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다. 성체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또한 당신을 먹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초자연적인 삶에 연결시키고, 성숙시키십니다.(p111)
☞ 성체를 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생명이 없는 보통의 빵이 우리 육체의 생명을 유지한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경탄할생명을 살지 못하겠습니까? 살아있는 빵을 먹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식탁에서 생명을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생명이십니다. 그분을 먹는 사람은 생명을 먹는 것입니다.”(보쉬에) (p112)
성체성사는 은총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영혼은 냉담의 길로 떨어지고 은총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을 강화시키는 빵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p114)
우리는 자연적인 음식을 통해 성정하듯이 또 음식의 소비를 통해 영양을 얻듯이, 성체성사를 통해 영양을 얻고 성장하게 됩니다.(p114)
☞ 성체는 영혼을 양육하는 양식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믿음을 갖고 나를 먹어라. 그러나 네가 나를 먹는 것이 아니다. 바로 네가 내 안에서 변화되기 때문이다.”(p115)
☞ 성체를 먹음으로써 내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신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더욱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성체성사적인 영양은, 그것을 취하는 사람 안에서 변화되는 것과는 달리 그 사람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 성사의 진정한 효과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변화를 가져와 진심으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게 합니다.”(p115)
☞ 내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불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 속에서 나무는 점점 말라가면서 조금씩 형체를 잃게 되고, 완전히 불 자체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체성사도 우리를 변화시킵니다.(p116)
☞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오시는 분은, 생명 없는 양식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분 자신입니다. 인간이시고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초월해서 삼위일체 삶의 친밀성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성체성사는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교회와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그분 자신의 완전하고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당신을 주시는 것입니다.(p119)
☞ 성체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되는 것이다.
“카타리나 성녀는 영성체를 하자마자 자신의 영혼이 주님 안으로 들어가고 자신 안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물속을 다니는 물고기가 완전히 물속에 잠기는 것처럼 성녀는 완전히 하느님 안에 흡수되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레이몽) (p121)
☞ 주님과 하나되는 황홀한 일치.
“그러므로 좋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또 우리를 매일매일 일깨우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의 약함을 구하시기 위해 성체성사라는 감탄할 방법을 만드셨습니다.”(요한 13,1참조)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p123)
☞ 성체, 예수님 사랑의 절정!
“만일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머무르신다면, 그것은 언제나 오직 우리를 돕고 격려하고 보호하기 위함이고, 그렇게 하여 우리가 말하는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p123)
☞ 성체성사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 영혼에게 주신 예수님의 무한한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용서하도록 만듭니다.(p123)
☞ 영성체로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부터 조건 없는 용서를 받은 영혼이 자신에게 해를 입힌 다른 사람과 화해하지 않고, 즉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자신이 받은 기쁨과 은총을 기억하고, 거기에서 커다란 사랑의 표징들을 보고, 자신도 조금이나마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기뻐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p124)
☞ 오히려 용서할 기회를 주신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과분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의 증거입니다.(p124)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와 원한의 무게를 떨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우리의 상처를 치유시켜 주시도록 맡겨드리고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또한 우리가 마음을 누그러뜨려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p124)
☞ 용서는 힘들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힘들기에 예수님께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해야 한다.
우리의 내적인 삶을 튼튼하게 하는 올바른 영성체 자세는 먼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자세입니다. 영성체는 자신을 봉헌하는 순간이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 드리는 순간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와 성체성사에 당신 자신을 넘기신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넘기는 순간입니다.(p126)
☞ 영성체는 나를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시간이다. 나의 맡김과 예수님의 맡김이 만나는 순간. 그것이 영성체다.
“올바른 영성체 준비는, 하느님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도 어긋남 없이 하느님의 지배에 우리의 의지와 감정을 일치시키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살베시오 성인) (p126)
☞ 온전히 나를 드리는 순간의 체험이 영성체다.
올바른 영성체 자세를 질문하는 제르트루다 성녀에게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 너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p126)
☞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 예수님이 온전히 들어오실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메틸드 성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이여, 너는 영성체를 하기 전에 언제나 나를 위해 다른 영혼보다 더 큰 사랑을 너의 마음에 채우고자 원해야 한다. ” (p127)
☞ 주님, 사랑합니다.
올바른 영성체 자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이므로 이웃 사랑을 반드시 전제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의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그리스도와 진실한 일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p127)
☞ 형제를 미워하면서는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성체 후의 묵상 시간을 ‘은총이 펼쳐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잊은 채 이 소중한 시간을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시간은 황금 같은 시간입니다.(p128)
영성체 후 묵상 시간은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은총의 작용을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은총 속에서 아버지께로 데려가시도록 해야 합니다.(p129)
예수님께서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게 하신 것처럼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오, 영혼아!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나의 좋은 것을 너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 하늘에서 왔으니, 네가 원하는 것을 청하여라. 내가 분명하게 너의 청을 들어주리라.”(p129)
☞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셨을 때 간절히 청해야 한다. 얼마나 가까운 기회인가!
우리가 첫 번째로 청해야 할 것은, 아니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바라야 할 것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내적인 삶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켜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p129)
☞ 내적인 삶을 사는 것. 우리가 무엇보다 청해야 할 것이다.
제6장 내적인 삶의 숨결: 기도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고, 내적인 삶의 숨결입니다. 영적인 공기없이는 질식해서 조금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고 생명을 불어넣기를 계속하시는 창조주의 숨결에 우리 영혼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p133)
☞ 성체와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영혼은 죽고 만다. 곧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해서도 계속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기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기도와 합하여 끝없이 기도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께로 오르게하고 놀랄 만한 효과를 가져다주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같은 효과를 주시기 위해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기도를 붙잡기를 원하십니다.(p136)
☞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계신다. 나의 기도로 예수님의 기도에 함께 하여야 한다.
“이제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참조)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자녀의 몸짓으로 우리의 영혼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들어 올릴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 기도의 원인이며,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가는 힘입니다.(p139)
☞ 내가 기도할 때 예수님과 성령님도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신비다.
예수님께서는 플라치도 성인에게 “기도하는 것, 그것은 너의 생명을 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p142-143)
☞ 기도. 나의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하고, 모든 활동들을 봉헌하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p146)
☞ 기도를 하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없는 기도는 거짓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바람조차 그대의 기도가 되게 하십시오. 그대가 지속적으로 바랄수록 그대의 기도가 계속되고, 그대가 사랑하기를 멈추면 침묵해야 합니다.”(p146)
그다음으로 하루 동안의 모든 사건들을 하느님의 손길과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특히 불쾌한 일들과 곤란한 일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느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p146)
우리의 기도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없습니다.(p147)
☞ 기도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내가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우리의 모든 기도는 교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룰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로 구성된 신비체로서의 몸이신 전체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p150)
☞ 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며, 교회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로 확장된다.
묵상 기도는 내적인 삶을 성장시킬 목적으로 하느님을 활발하게 탐색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알도록 해 줍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앎이 없이는 진실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p156)
☞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묵상기도다.
영적독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보낸 편지인 성경을 깊은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성 그레고리오1세 대교황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자주 실행하면 덜 싫증이 나게 되고,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p156-157)
☞ 모든 것은 성경에서 시작하고 성경으로 마무리된다.
제7장 내적인 삶의 마음: 관상기도
“집중하려 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입니다.”(p165)
☞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함께 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도하는 방법에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접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잘하는 방법은 많이 기도하는 것입니다.“(p168)
☞ 기도가 어렵다고, 안된다고 하지 말자. 안 되도 그냥 기도하자. 머무르자.
"만일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기도일 수 있습니다.“(p168)
☞ 하느님께서는 나의 좌절까지도 알고 계신다.
파스칼은 ‘예수님의 신비’를 묵상한 훌륭한 글에서 “나는 임종하는 순간에도 너를 생각했고, 너를 위해 이 피를 흘렸다.”라고 썼습니다.(p170)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나를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내 삶을 통해 이룬 것은 하늘의 기쁨을 미리 맛본 것입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분이 낮과 밤의 모든 순간에 우리 안에 함께 사시는 것을 믿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살기를 요청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삼위일체의 엘리사벳 복녀) (p171)
☞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늘의 기쁨은 시작되었고 죽음으로 완성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서로 사랑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172)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즉 “나를 사랑하라!”입니다. 이 말이야말로 최상의 말입니다.(p173)
☞ 성경을 한 마디로 하면 ‘사랑하라’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뒤로 물러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의 손에 우리를 내어맡기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p173)
관상기도는 우리를 내적인 환경에로 다시 잠기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상 기도를 포기하게 되면, 내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p175)
그러면 관상 기도의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답은 관상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손수 우리를 관상 기도로 이끌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께 온전히 맡겨 드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의 거룩한 흐름이 우리를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p177)
☞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이 관상 기도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시간을 가지자. 관상 기도 역시 일단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이끌어 주실 것이다.
“관상 기도를 하는 때와 시간을 선택하는 일은 내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결연한 의지에 달려있다. 관상 기도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하는 기도가 아니다. 주님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을 정하고, 그 만남에 어떠한 시련이 따르고 아무리 마음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도중에 주님에게서 그 시간을 다시 빼앗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 (p178)
"마음은 가난과 신앙 안에서 주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가 된다.“(p178)
☞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내 마음은 감실이 된다.
그렇다면 관상 기도는 언제 해야 합니까? 관상 기도에 빠져들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자유로운 순간에 하면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루의 시작이나 끝에 하는 것을 더욱 선호합니다.(p178)
관상 기도는 얼마 동안 해야 합니까? 분명한 원칙이 없습니다. 각자 가능한 대로 하면 됩니다. 몇 분이라도 하느님과 친밀하게 대면하는 것은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언제나 유용할 것입니다. (p178)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관상 기도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집에서, 관상 기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p179)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결심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관상 기도 안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 드리고, 다시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p179)
☞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하느님께 잠시의 시간도 내어 드리는 것을 아까워한다.
관상 기도의 본질은 의지입니다. 즉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지에 일치를 이루기 위한 굳건한 의지입니다.(p183)
☞ 하느님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것으로 시작된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리지의 가르멜 수녀원의 병실에서 “당신은 주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말씀드립니까?”라는 누군가의 물음에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관상 기도의 순수한 모습입니다.(p184)
☞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사랑할 뿐.
우리는 언어들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한 침묵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침묵은 언어의 기교 없이 다른 이를 더욱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의 침묵을 생각한다면,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p187)
☞ 기도하기를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나에게 다가오는 말이다. ‘무엇을’ 생각하지 말고 일단 시간을 내어 드리도록 하자. 그렇게 애써보자.
하느님께서 손수 우리를 조금씩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영혼이 자신의 활동을 포기하면 할수록, 은총의 물이 영혼에 흐르게 됩니다. 영혼이 자신의 노력을 점점 줄여 가면 갈수록, 역설적으로 은총은 더욱 효과적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p190)
☞ 자신의 힘을 빼면 뺄수록 자유로워지듯이, 하느님께 의탁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다가올 수 있다.
처음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묵상하고 되새깁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우리 생각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의지가 하느님께로 고정됨을 느낍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께 집중되는 것입니다.(p190-191)
☞ 생각마저도 사라져 버려야 한다.
영성가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관상 기도에서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 사로잡히려 하는 대신 세상에 대한 애착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p192)
☞ 마지막에는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데까지 가야 한다. 완전한 의탁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묵상에 이르지 못하면 한가함과 심심함, 불충실함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우리가 묵상을 위해 노력하고 음성 기도를 계속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단순하게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타내는 수동적인 자세로 우리를 이끄십니다.(p193)
☞ 비록 생각만큼 묵상이 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자연스레 이끌어 주신다.
만일 하느님께서 영혼을 사로 잡으시면 묵상하려고 애쓰지 말고 침묵에 잠겨 있어야 합니다. 분심이 일어나도 그것을 떨쳐 버리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함정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의지를 당신에게 고정시키십니다.(p194)
카시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권고를 했습니다. “수도자가 기도하고 있다는 의식을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p194)
관상에 도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도, 이것이 오직 전문가들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이끄십니다.(p195)
"원칙은 간단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기도하십시오.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은 기도하지 마십시오.“(채프먼 신부) (p197)
☞ 중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제8장 내적인 삶의 지속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한 이 삶은 잠깐 동안일 뿐입니다. 악마도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우리가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도록 애쓰는 것입니다.”(p203)
☞ 나는 지금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즉 악마에게 넘어가 있지 않은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오늘날 내적인 삶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지고, 통신 소리와 소비문화에 질식될 위험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내적인 삶을 심각하게 위협합니다. 옳은 것에 대한 기준이 사라지고 있고, 잘못된 것이 당연한 것으로 둔갑하고,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따라야 할 가치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p204)
☞ 바로 오늘 날의 현실이다. 복음은 웃음꺼리가 되었다. 그래도 복음은 진리다.
내적인 삶은 지속성의 싸움입니다. 내적인 삶은 항구한 평화나 한 번에 완전히 얻게 되는 고요함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싸움입니다.(p204)
☞ 내적인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지속해야하는 싸움이다.
내적인 삶을 따르는 영혼은 장애물들과 대면하여 싸워야 하고, 시련들을 견디고 깨달아야 하며, 승리의 월계관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향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p205)
내적인 삶에서 더욱 무서운 것은 미지근한 영혼의 상태나 아주 사소한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심각성을 알지 못하게 하여 무의식적으로 점점 더 그러한 것들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일 고의로 사소한 잘못을 범한다면, 이 잘못들은 영혼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p206)
☞ 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을 각오로 해야 한다. 죽으면 살리라.
그래도 가벼운 잘못은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런 생각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새가 매여 있는 줄이 가는 줄이든지, 굵은 줄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줄이 가늘다고 해서 새가 그 줄을 끊을 수 없다면, 새는 언제나 매여 있게 되고 날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그것에 매여있는 영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p206)
☞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는 자위가 문제다. 조그만 것이 태산을 무너뜨린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영적 지도자의 선택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주 놀랄만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신심 생활을 지도하는 데 적격인 사람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사랑과 지혜가 풍부하고 현명한 사람이어야 하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 됩니다." (p207)
☞ 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줄 영적 지도자를 선택하자.
"먼저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느님께 그런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았으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십시오.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순박하고 겸손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기쁜 마음으로 그대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p207)
☞ 나도 영적 지도자를 찾을 것. 그리고 일생동안 겸손되이 순명하고 의탁할 것
내적인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특별한 형태의 영적 오만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의 영성 생활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p209)
☞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영성 생활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도우미가 되어야 한다.
채프먼 신부는 이같은 영적 오만을 경계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영성 생활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들에게도 집중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을 돌볼 때, 자신이 아이에게 준 사랑은 생각하지 않고 아이만을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드린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p209)
활동은 자기 자신에게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활동하도록 요청하시고, 우리가 활동할 때에 하느님께서도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도 자신이 맡은 소임을 하는 가운데 너무나 큰 은총을 자주 경험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오히려 활동하면서 묵상 기도의 연장을 이룰 수 있었노라고 했습니다. (p210)
☞ 기도하고 일하라.
“데레사 성녀가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묵상 기도를 거르지 않는 사람은 마침내 어떤 커다란 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사 우리가 무기력해지고 지쳐있다 하더라도 이 거룩한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p214)
☞ 기도를 꾸준히 하여야 한다. 기도를 하루라도 거르면 영혼도 시들어 버린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주님을 성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묵상 기도를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은 비록 그의 기도가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항상 간직해온 선 때문에 절대로 버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여러분에게 약속할 수 있습니다.“(장 요셉 슈랭 신부) (p214)
☞ 비록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려 있는 것이 기도다. 하느님은 열성을 보신다.
“신부님은 충분히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너무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의 피곤함을 이기기 위해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신부님이 기도할 수 없다면, 되풀이하여 뇌까리기라도 하십시오.”(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p218)
가장 좋은 기도는 가장 맛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민첩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과제에 더욱 겸손하고 자비롭고 충실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p219)
☞ 기도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묵상 기도 시간에 어떤 거룩한 수녀는 예수님께서 자기 동료 수녀들 중 한 수녀를 한없이 온유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거룩한 수녀가 그수녀에게 “그 시간에 무엇을 묵상했습니까?”하고 묻자 이 수녀가 대답했습니다. “45분동안이나 분심과 실망감, 슬픔과 싸우고 난 후에, 단순하게 하늘을 향하여 ‘하느님, 저를 자비로운 눈으로 보아 주십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p220)
☞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를 보신다.
영성 생활에서 불만족은 당연한 것입니다. 불만족은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공허감을 새겨 놓으신다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그분 말고는 어떤 것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영혼이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게 만드십니다. (p220-221)
☞ 공허할수록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영혼은 어중간한 상태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은 가득한 불안과 사랑의 열정으로 우리 욕망의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때까지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뵙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으로 흡족하리이다.”(시편 17,15) 그러므로 욕망의 불만족은 열성적인 영혼의 표시입니다.(p221)
성인이 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장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거슬러 싸울 의지를 계속 더해 갈 때 참된 열정이 됩니다. (채프먼 신부)(p221)
☞ 완전한 사람이 성인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성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달립니다.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더 빨리 달립니다. 나약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더디게 성장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아갈 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성인) (p222)
☞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달릴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만큼 성장한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필리 3,13)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성 생활에서 발전하지 않는 것은 퇴보하는 것입니다. 즉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는 것처럼 영성 생활도 같은 것입니다.(p223)
☞ 영성 생활은 쉼없이 꾸준해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불타오르는 장작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장작에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그을려지면서 타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작의 괴로움과 벌어진 틈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화의 과정입니다. 그다음에 불꽃들이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하면서 온기를 내뿜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굳건히 하는 빛의 은총이고, 마음을 비추는 과정입니다. 결국에 장작은 불 자체가 됩니다. 물론 잘 알겠지만,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참여하여 거룩하게 됩니다. 이것이 합일의 과정입니다.(p223)
☞ 장작이 불이 되듯, 내가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궁극의 목표다.
이러한 시도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것은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조금씩 정화하고, 빛나게 하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p224)
☞ 영성생활 즉 내적인 삶은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영성 생활의 진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단순히 성숙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덕에로 불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p224)
'하느님께서 그 순간에 허락하시는 것은 단순하게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영적인 진보는 하느님의 손에 내맡겨야 합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끄시고, 당신을 신뢰하라고 요구하십니다.(p224)
☞ 하느님에게 단순하게 내맡기면 된다.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책에서 읽은 바로는, 마치 대장장이가 철의 강도를 측정하기 위해 철 막대기를 사용하듯이 성인들을 시험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두 제화공이 가죽의 유연성을 평가하기 위해 자신의 손바닥 사이에 가죽 껍질을 넣고 시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매여, 자매 스스로를 그분의 손이 다루기 좋고 부드러운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베르나노스,「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p225-226)
☞ 결코 거기에 넘어져서는 안 된다.
내적인 삶의 성장은 언제 끝납니까? 언제 우리는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은총의 최종 단계에 도달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의 단계이고, 우리 영광의 단계입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참된 생명은 지복직관의 충만한 빛 안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p227)
☞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할 여정이 내적인 삶이다. 죽음으로서 영생의 문으로 들어선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것은 죽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속하는 것입니다. 은총의 삶, 내적인 삶은 영광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마치 꽃이 줄기로부터 나오고,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우리의 내적인 삶도 그렇습니다.(p227)
제라르 신부는 ‘내적인 삶이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삶’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삶은 지속되는 내적인 삶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p227)
☞ 영원한 삶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제9장: 내적인 삶의 광채
내적인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서 살게 하고, 또 단순하게 하는 빛 아래에 살게 해서 모든 것을 일치로 이끕니다. 이것이 오직 필요한 한 가지입니다. 즉, 귀한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p232-233)
☞ 귀한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파는 과장이 내적인 삶이다.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복녀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말과 편지들을 통해, 참된 행복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친밀함을 가져야 한다고 계속해서 알려 주었습니다.(p233)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을 통해서만 자신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이러한 성숙의 법칙은 자연 질서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질서에도 유효합니다.(p234)
☞ 움켜지는 삶이 아닌 내어주는 삶이 하늘나라의 삶의 방식이다.
내적인 삶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선물로 드리는 것이고, 그 결과로 자연적 성숙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 성숙을 얻는 것입니다.(p234)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얼굴에 슬픈 표정을 한 자기 동료 수녀들을 걱정했습니다.(p236)
☞ 내적인 삶은 엄숙한 삶이 아니다. 즐겁고 기쁜 여정이다. 웃자.
내적인 삶은 우리의 외적인 활동에 새로운 차원을 제공해 줍니다. 내적인 삶은 가장 먼저 목표를 고정시킵니다. 그래서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익을 우선적으로 찾지 않고, 하느님의 활동에 부합하고자 합니다.(p237)
☞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내적인 삶은 우리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눈을 마주보게 하는 것입니다.(p237)
☞ 하느님과 눈을 마주본다는 것,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모든 고상한 영혼은 세상을 향상시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리악은 이 말에 덧붙여서 ”당신이 사랑으로 불타오르지 않는 날은 다른 사람들이 냉정함 때문에 죽는 날입니다.“라고 했습니다.(p239)
☞ 나로 인하여 세상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 수 있다면. 연탄불처럼.
"서로 격려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경건한 부부의 일치보다 더 귀하고 유익한 일치는 없습니다.“(p242)
☞ 부부는 작은 교회이며, 천국을 미리 보여주는 삶이다.
"내 소명은 사랑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안에서, 나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소화 데레사 성녀) (p245)
☞ 결국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되어지는 것이다.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에 대해 내적인 삶은 초연한 가난과 침묵의 기다림으로 대답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도덕적 기준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조류에 대해, 내적인 삶인 하느님께로 향하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충분한 수익을 거두고자 하는 조류에 대해 내적인 삶은 거저 베풀어 주는 무상성의 정신을 제시합니다. (p251)
☞ 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날 만연한 만몬주의에 대항할 무기는 가난과 기다림이다.
제10장 내적인 삶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마리아의 겸손은 십자가에 봉헌되신 당신 아드님의 공로를 위해 특별하게 보호되어 얻게 된 피조물의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구원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p263)
마리아의 겸손은 완전한 순종 속에서 자신의 창조주와 대면하는 피조물의 겸손입니다.(p263)
☞ 성모 마리아는 피조물의 대표 선수가 아닐까!
마리아는 완전히 하느님 안에 잠겨서 생활하시는 분이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얼굴을 꾸준히 찾으시는 분입니다. 마리아께서 주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신 순간에, 자신 안에 사람이 되시는 하느님과 육화하시는 말씀이라는 유일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p264)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내적인 삶의 어머니이시기에 우리가 내적인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p269)
우리도 마리아 곁에 머물고, 우리 집 혹은 우리의 친밀함 안에, 즉 위 내적인 삶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p273)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내적인 삶의 어머니이시고, 피난처를 찾아 당신께 오는 모든 이들을 당신의 망토로 감싸주시는 자비의 어머니이십니다.(p281)
마리아는 여왕이시기보다 어머니이시기에, 우리에게 내적인 삶을 낳아 주시고,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우리를 더욱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십니다.(p281)
☞ 또 한 분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 그분이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가!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 자기 전 10분간은 무조건 하느님 안에 머물자
① 성무일도 끝기도 하기
② 침묵 중에 10분간 하느님께 의탁하기
첫댓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단순하며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단순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내내 묵상하고 있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명금당님!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느님께서 그 순간에 허락하시는 것은 단순하게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영적인 진보는 하느님의 손에 내맡겨야 합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끄시고, 당신을 신뢰하라고 요구하십니다.(p224)
얼마나 든든한 말씀이신지요. 모든 것 그분께 맡겨드리고 열심히 마음을 비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저 맡길 따름이죠...이루어주시는 분은 그분입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새해 아침에
내적 삶의 불씨 하나를 건네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움님...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바쁘신중에도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새해부터 성무일도 빠지지 않고 드리기를
다짐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새해 좋은 몫을 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