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소리꾼 나훈아
본 명 : 최홍기
출 생 : 1947년 2월 11일 (66세) 부산광역시
활동 영역 : 가수, 작곡가, 작사가
활동 기간 : 1966년 ~ 2008년 (잠정)
대표작(곡) : 고향역
데뷔일 : 1966년
데뷔작(곡) : 1집 앨범 <천리길>
소속사 : 아라기획
웹사이트: http://www.a-risu.com/
대표곡
1968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
1971년 가지마오, 찻집의 고독
1972년 머나먼 고향, 고향역, 해변의 여인
1976년 물레방아 도는데
1981년 대동강 편지, 이슬비 나그네
1983년 사랑, 18세 순이
1984년 울긴 왜 울어, 잡초
1989년 건배, 무시로
1990년 갈무리, 영영
1993년 어매
1999년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2003년 모르고, 아리수, 공
2005년 홍시, 사내, 고장난 벽시계
생애
1947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자 무역상이셨던 아버지와 전업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나훈아는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쳤다. 이 후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었던 자신의 형을 따라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해 서라벌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66년, 당시 19세였던 나훈아는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천리길> 을 취입해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독특한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나훈아는 1968년에 데뷔 이래 처음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라는 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가지마오>라는 정통 트로트곡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1972년에는 <고향역>과 <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민가수로 불리며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선배 가수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뤄 한국가요계를 주름잡았다. 특히 남진과 나훈아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경쟁을 벌여 가수왕을 독점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사 기록을 보면 남진이 줄곳 1등과 동시에 가수왕상을 수상하였으며 나훈아는 2등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그 어느 가수라도 전성기를 맞이한 남진과 나훈아를 꺾을 수 없었다.
전성기를 한창 누비고 있었던 나훈아는 1972년에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다. 나훈아가 공연중에 피습당해 몇 개월 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의 팬들이 나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루머를 듣고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나훈아는 이 시기에 백마부대 명예정훈대위가 돼 한달간 파월 위문공연을 갔다가 1973년, 공군에 자원입대해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것도 잠시, 최무룡과 이혼 한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와 1976년 결혼 하여 국민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훈아의 방송 출연이 점차 줄어들고 남진도 신군부의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2인 체제가 사라졌다. 1977년에는 심수봉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노래 실력에 감탄한 나훈아는 심수봉을 가수로서의 데뷔에 힘을 실어주었다.
결혼과 동시에 방송에서 좀처럼 출연하지 않고 잠잠했던 나훈아는 1981년에 <대동강 편지> 라는 곡으로 가요계에 복귀하였으며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을 수상하고 1984년에 조용필의 뒤를 이어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 데이지쿠 레코드와 계약해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1986년에는 아라기획을 설립하여 개인 소속사를 만들며 기회를 노렸지만 조용필이라는 거대한 후배가수의 파력으로 상당히 위축되고 타격을 많이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훈아는 끈기를 가지고 음악작업을 하였으며 결국 1989년에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 <무시로>라는 곡이 많은 인기를 얻어 중년층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나훈아는 한국 가요계의 1인자로 우뚝서게 되었다.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로맨스틱한 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1990), <영영> (1990),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1999) 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스타일의 신인 가수들의 등장으로 이전만큼 보다는 활동이 뜸했으나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한국의 대표가수로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과 더불어 작곡과 작사 능력으로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로 자리매김했으며 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나훈아가 작사, 작곡한 음악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잡초>, <사랑>, <울긴 왜 울어>, <무시로>, <갈무리>, <사내> 가 있으며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이자연의 <당신의 의미>, 인순이의 <잠깐>, 강진 (가수)의 <땡벌> 등이 있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음반 작업을 해오며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활동해오던 나훈아는 2008년 1월, 나훈아 잠적과 동시에 일본의 야쿠자가 나훈아를 폭행했다는 등 각종 루머가 퍼졌다. 나훈아는 기자회견을 통해 루머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는 콘서트, 공연, 무대 등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현재 나훈아의 근황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부인 정수경씨와 현재 이혼 소송을 제기 중에 있으며, 지난 여름 뇌경색 증세를 보여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칩거중에 있다.
학력
부산 초량초등학교
부산 대동중학교
서라벌예술고등학교 (현 서라벌고등학교)
정규 음반
2005년 19집 <홍시/ 사내>
2005년 18집 <어느 한 여자에게/ 예전 그대로>
2003년 17집 <공(空)>
2001년 16집 <아담과 이브처럼>
1999년 15집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지금의 나였더라면>
1995년 14집 <아내라는 여자/ 보통여자>
1993년 13집 <어매/ 또 너를 사랑할거야>
1992년 12집 <외로운 주말/ 남천동부르스>
1988년 11집 <포켓 속의 추억/ 무시로사랑>
1984년 10집 <울긴 왜 울어/ 잡초>
1983년 9집 <사랑/ 18세 순이>
1981년 8집 <대동강 편지/ 이슬비는 나그네>
1977년 7집 <님 찾아 가는 길/ 두 손을 잡아요>
1973년 6집 <감나무골/ 최진사댁 셋째딸>
1972년 5집 <고향역/ 꿈속의 고향>
1972년 4집 <흰 구름 가는 길/ 해변의 여인>
1971년 3집 <가지마오/ 후회>
1969년 2집 <사랑 흘러 강물 흘러/ 임 그리워>
1966년 1집 <천리길>
영화 출연작
1983년 <3일낮 3일밤>
1983년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73년 <동반자>
1973년 <어머니의 영광>
1973년 <우정>
1973년 <어머님 생전에>
1973년 <나 혼자 못간다>
1972년 <친구>
1972년 <미움이 변하여>
1971년 <인생 유학생>
1971년 <풋사랑>
수상경력
1967년 10대 가수상 수상(MBC, TBC, KBS)
1968년 10대 가수상 수상(MBC, TBC, KBS)
1969년 10대 가수상 수상(MBC, KBS) TBC 최고가요대상 수상
1970년 10대가수상 수상(MBC, KBS) TBC 가요대상 수상
1971년 10대 가수상 수상(MBC, TBC, KBS)
1972년 10대 가수상 수상(MBC, TBC, KBS)
1976년 공군제대 / 국방부장관 표창
1981년 MBC 10대가수 특별상 수상
1982년 KBS 가요대상 (울긴 왜 울어)
1983년 제1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주제가상
1987년 제1회 고복수 가요제 최우수 남자가수상 수상
1989년 KBS 가요 대상 수상(갈무리)
1996년 제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특별상 수상
1998년 MBC 가요제전 본상
2001년 제2회 MBC 명예의 전당 선정(가수부문) 수상
2007년 제5회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 가수상
일화1
1976년 7월 9일, 나훈아는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던 톱 여배우 김지미와 결혼하여 사회적 이슈를 낳았다. 하지만 각종 루머에 휩쓸려 7년만에 이혼하였고 이혼 당시, 나훈아는 이 한마디를 남기면서 자신의 전재산을 몽땅 위자료로 김지미에게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 남자는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일화2
실제로 나훈아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이 자주 초대를 받는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 단 한 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보통 다른 가수들이 그런 류의 파티에서 2~3곡을 부르고 3,000만원 가량을 받는다는 것인데, 나훈아는 실제로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이런 말을 하고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했을 정도라고 한다.
“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이 에피소드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등장하며, 김용철은 이 일화를 얘기하며 나훈아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사건
1972년 7월 4일, 나훈아는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공연 도중 무대에 뛰어오른 한 청년이 깨진 유리병 파편으로 공격해 얼굴에 크게 부상을 입었다. 나훈아 측은 청년이 단독 범행이 아니고 계획된 테러라고 주장했다.
2008년 1월, 모 스포츠 기자가 블로그에 '중견가수가 가슴 큰 젊은 여배우와 스캔들이 나서 야쿠자에게 보복당했다.'는 글을 올렸고 이것이 부풀려져 나훈아 쪽으로 몰아갔고 결국 나훈아가 직접 기자회견을 마련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으며 이 사건 이후로 현재 약 4년간 잠적한 상태이다. 당시 기자회견 때 " 벗어야 믿겠습니까? " 라는 말과 함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벗으려는 행동을 보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아리랑 소리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 가요 이름을 뽕짝이나 트로트라는 비속어나 외래어를 쓰지 말고 아리랑이라고 하자고 주장하고, 스스로 전통 가요를 부르는 가수라는 뜻으로 아리랑 가수, 아리랑 소리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