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vws.or.kr/theme/basic/html/about/location.php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 ‘월남파병용사 만남의 장’이란 곳이 있다. 사실 그 곳은 월남전 당시 ‘강원도 화천군’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도 ‘오음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정도인 곳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연병력 324,864명중 대부분이 거쳐간 곳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원도에서도 오지마을에 속했던 오음리가 파월장병교육대가 생겨서 월남으로 가는 출입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장병 면회는 자유롭게 허용했지만, 군사 지역으로 언론이나 매체 등에 일체 등장하지를 않는 곳이어서 오음리 교육대는 공식화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참전병들은 이 곳에서 4주 동안 실전 교육을 받고 월남으로 출정을 했다. 그런데 모든 군대의 내무생활의 분위기라는 것은 딱딱하고 건조하고 심지어는 폭력적일 수 있지만 오음리 교육대의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실질적으로는 돈 벌러 가는 것이었지만 죽으러(형식적으로는) 갈 수도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럴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부대에서 병사들을 힘들게 했던 내무반 군기가 세지 않아 비교적 헐렁한 분위기에서 내무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교육생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군에서는 오음리에 영사병과 운전병을 합쳐 10여 명의 운영 요원으로 372석 규모의 군인극장을 운영했다. 당시는 농사짓는 사람이 극장 구경을 가기 힘든 시절이 였지만 극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영화가 하나 들어오면 한 달씩 돌리는” 통에 사람들이 외면해 영사기를 못 돌리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파월장병의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오음리 군인극장은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연극, 각종 공연을 해서 극장이 활성화되면서 군에서 마을을 돌며 영화 관람을 희망하는 주민들을 트럭으로 수송해 관람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오음리 공동묘지 한 쪽 구석에 만들어진 야외공연장에서는 위문공연이 벌어졌는데 월 1회 공연에 공연장을 개방해 마을 주민들이 다 같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쇼에는 당시 유명 가수와 코미디언이 출연했고 시골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도 볼 수 없는 스트립쇼도 등장했다. 야외극장의 주목적이 “파월장병을 위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변을 통제하지 않아서 도시의 아이들도 볼 수 없었던 스트립 쇼를 산골의 아이들도 볼 수 있는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자연히 오음리 군인극장이나 위문공연은 강원도 산골마을의 문화 지형도를 바꿔 놓았다.
교육대가 들어서면서 오음리는 ‘한국 속의 월남붐’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면회가 있는 날이면 “춘천에 있는 택시가 다 오음리에 와 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파월장병을 따라 외지인들이 몰려들면서, 오음리의 ‘경관’은 빠르게 변했다. 오음리 중심가에는 파월 분위기를 반영해 ‘사이공’, ‘야자수’, ‘승리’와 같은 다방 이름이 등장했고, 밴드가 있는 술집, 식당 등 각종 요식업체와 숙박업소, 금은방까지 생겼다. 또한 오음리 도로변, 부대가 주둔했던 산골짜기마다 3~4 명의 접대부를 둔 간판도 이름도 없는 술집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과 민이 위화감이 전혀 없이 “부대를 빙 둘러싸고 있는 술집”은 군과 민간의 거리뿐만 아니라 경계도 희미하게 만들어서 오음리는 “다른 부대에서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담 너머에 몸 파는 사람들”, ‘모포부대’가 있었고, “부대 주변에 여자가 넘쳤다.”는 전설이 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교육·훈련 과정이 모두 끝나면 한국에서의 1년치 월급을 한꺼번에 지급한다는 현지사정(?) 탓이기도 했다. 교육대는 지역상인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 음주나 성매매를 단속하기보다는 외면해서 적당히 관리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파월교육대 덕분에 강원도 오지인 오음리는 “땅에 들어가면 굴러다니는 게 돈”이라고 할 정도로 ‘번창’했다. 월남전 시기 6년여 동안 번 돈이 “평생 벌어도 못 벌 만큼” 이었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출정을 할 때 정글복과 정글화, 수첩과 인식표 2개를 수령하고, 유언장을 쓰고 작은 봉투에 손톱·발톱, 머리카락을 넣어 겉봉에 수신인을 적고 전사할 때 보상금을 수령할 사람을 적는 찬바람 도는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을 해야 했다..
춘천역이 수송선이 출항하는 부산으로 향하는 군용열차의 첫 기차역이었지만 오음리는 그야말로 첫 출발지였다. 떠나는 날 얇은 흑록색 정글복을 갈아있으면 막연하기만 했던 월남이란 나라가 비로소 조금씩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새벽녘에 장병들을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지금도 터널로 10 분이면 통과하지만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한다. 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 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 글은 오음리의 베트남전쟁(윤충로.역사비평 148호)에 근거해서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