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의 왕정시대
김 수 복
1. 왕국 건설의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의 부족동맹은 약 200년간 존속한 끝에 불레셋족의 침입으로 마침내 붕괴되었다. 강력한 군사적 전통과 우세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불레셋 전사들은 이스라엘에게 전례없이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과거의 적들과는 달리, 그들은 인근한 몇몇 부족들에게만 관계되는 한정된 위협이나 몇 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일격에 물리쳐 버릴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불레셋족의 팽창정책은 팔레스티나 전역을 정복 목표로 삼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처참한 곤경에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공동으로 대처해야 했다. 이 처참한 곤경을 알려주는 전승은 꽤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일명 '계약의 궤' 설화로 전승되는 이 부분은 '계약의 궤'가 불레셋족에 의해 약탈됨으로써 이스라엘의 치욕이 시작된다.
불레셋족의 도시들은 그들이 본래 차지했던 영토의 최북단에 있는 아벡이라는 곳에서 그들 모두의 세력을 규합해서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지를 향하여 돌격해 갔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중심지를 향하여 돌격해 갔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상비 군대가 지닌 무장과
전술을 격파할 만한 아무런 준비와 여력이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없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적군의 손에는 우리를 구해내실' 야훼의 계약뿐
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실로에 가서 야훼의 계약의 퀘를 싸움터로 옮겨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은 나타나지 않았고 승리 대신에 그들에게 온 것은 처참한 패배였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리멸렬하고 '계약의 궤'를
모시고 있던 엘리가는 망하였으며 '계약의 궤'도 블레셋족에게 노획되었다.
뒤이어 실로도 점령되었으며 부족동맹의 성소는 파괴되었다.
블레셋족과 암몬족은 에집트를 대신해서 근동에서의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하였으며 그들은 이것을 끌고갈 만한 정치적, 제도적, 경제적 장치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군대를 쉽게 결집시킬 수 있는 중앙집권적 왕정이 시작되었으며 강력한 군사장이 최고의 통치자롤 자주 뽑혔다. 그들은 또한 강력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를 생산하는 데 능숙했다. 무기는 철의 특성에 의해 그 성능이 뛰어났으며 지세가 허용하는 곳에서는 이미 병거도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철제 생산은 불레셋의 군사적인 우월성뿐만 아니라 경제와 상업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을 마비시킨 우월성을 의미하였다.
이같은 곤혹스런 시기에 부족들을 다스리고 있던 판관들은 이 상황에 대처할 만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들의 단결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훈련도 안되어 있고 장비도 보잘것없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적과 정면으로 맞서 전투를 벌일 가망은 거의 없엇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족동맹의 조직은 두드러지게 표면화된 원심작용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 조직은 순수한 야훼 신앙을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또 한번도 전이스라엘을 설득하여 일치된 공동행동을 취하지 못했으며, 또 내란을 유발하지 않도록 부족들 사이의 과열경쟁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부족동맹은 거의 200년이나 존속되었다. 그 이유의 일부는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위급한 사태들이 대부분 국지적 성격을 띤 것이어서 소규모의 몇몇 부족들의 결집으로써도 그러한 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또한 그 동맹이 분명하게 정의된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지파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그밖의 분약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이 동맹조직을 창설케 했던 야훼와 맺은 계약의 정신을 더할 나위 없이 잘 구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판관시대의 전기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의 통일국가를 창건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가나안의 도시국가체제를 모방하려는 수단을 쓰지 않았다. 실상 기드온이 왕정을 거절한 이야기와 요담의 풍속적 만화(판관 9:7-21)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왕정을 머리 속에 떠올려 생각하는 것조차 저주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불레셋족의 침략으로 결정적인 위기가 닥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상태는 무한정으로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각 지파들의 결집으로써도 대처할 수 없는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웃 민족들의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동부 요르단의 에돔인들, 모압인들, 그리고 암몬인들은 벌써 지파의 군주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왕이 다스리는 국가로 결합되어 있었다. 불레셋 사람들 또한 그들의 도시군주를 가졌는데, 이러한 통치자들은 에게 민족들과 비슷한 유의 독재정치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도시국가들은 강력한 동맹을 맺었다. 페티키아인들은 연합하지 못한 도시국가들을 결속시켰다.
그러나, 띠로와 시론과 비블로스는 이방 통치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경제교역을 신장시켰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들이 되었으며, 중심권력은 왕들에게 있었다. 이웃 나라들의 이러한 실례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자신이 이러한 국가들의 힘을 피부로 느겼을 때,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결국 실로에서 야훼의 거룩한 '계약의 궤'를 불레셋족에 빼앗김으로써 부족동맹은 깨지고 정치적 세력이 결집하고 민중을 다스리는 기술이 세련되며, 일가를 향한 충성심이 강요되기도 하는 시대에-이것은 일면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상당힐 배치되기도 함-접근하게 된 것이다.
2. 통일왕국시대
(1) 사울 통치시대(B.C. 1030-1010년)
1) 사울의 선출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왕정의
첫번째 통치자는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이었다. 달갑지 않았으면서도 왕정으로의 이행 자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엇던 것은 순전히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공통적으로 처했던 처참한 고통에서부터 출발한 것 같다.
급격히 강성해진 인근 부족들의 잦은 팔레스티나 위협은, 현실적으로 그에 맞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카리스마적 인물을 자연히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염원으로부터 출발한 왕국 초기에 관한 서술은 의외로 사제이며 판관이었던 사무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세속적인 우두머리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토이자)로 나타나며, 또 판관으로 여겨졌다. 그에 대한 전승은 꽤 상세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야훼로부터 물려받은 거룩한 전통을 지키려는 일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또한 야훼의 명에 의해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조금 후에 사울의 반대편의 중심을 이룬 후기의 사무엘로서는 - 출발부터가 그러한 귀결은 -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무엘은 기도를 통해 불레셋을 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늙었을 때 두 아들을 판관으로 임명하고 백성을 다스리게 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 사무엘과는 달리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올바르게 내리지 않아 곧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되었다. 강한 군사력과 통치권일 없는 판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백성들의 요구에 사무엘은 분노하고 왕정의 폐해를 들며 반론하였지만, 곧 야훼의 명에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왕을 세웠으니 그가 사울이다.
역사적인 정세에 의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왕정의 초기 형태의 담당자였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방법으로 적드러의 곤경에서 벗어나야 하는 정치적인 필요성은 너무나 급박했다. 또한 달갑지 않으면서도 왕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야훼로부터 거룩한 계약의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노예살이를 한다는 것은 백성의 신앙과 야훼의 명예와도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2) 사울 왕권의 성격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 사건과 여러 가지 사정에 대해서 전승이 알려주는 부분은 상당히 미약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 왕권과 사울의 국가형성이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는 데 있다.
사울의 국가는 최소한 이념적으로는 군사적인 우두머리로 구성된 고대 종족동맹이었다, 거기에 따라 사울의 왕권은 카리스마적 지휘권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중의 찬성을 통하여서만 항구적인 제도로 견고해질 수가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야훼로부터 기름부음받는 자로서 합당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사울 왕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통해서, 그리고 적들을 방어함으로써 세워지고 결성된 군사왕국이었다. 그 왕국은 이스라엘으 군대를 통일된 지휘 아래에서 통괄하고 이스라엘 지역을 소유하여 종주권을 요구하는 이웃 나라들을 방어해야 했다.
사울 왕정은 독특한 점이 많았다. 그것은 확실히 가나안이나 블레셋의 봉건적 도시국가의 체제를 모방하지 않았다. 비록 에돔이나 모압 또는 암몬의 민족적 왕국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빌려 왔을지는 몰라도 그 왕정은 여전히 이스라엘다운 특징을 지닌 독특한 체제였고, 처음에는 가급적 옛 질서를 벗어난 변화는 피하려고 하였다.
사울 왕국은 부분적으로 초기 지파 통수권을 승계했으며, 부분적으로는 가나안과 고대 중동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대 중동의 주변 세계에서는 왕에게 기름붓는 종교적인 예식뿐만 아니라 신적 생명력과 권위, 그리고 천부의 직능에 대해 사상도 유래하고 있다. 사울의 자질은 다른 유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도 역시 야훼의 기름부음을 통해 전권자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전권은 통치자를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만들었다.
사울 왕국은 그래서 매우 왕조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합법성을 인정했으며 누구도 그를 반역하지 못하였다. 그에 반해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사울 왕가의 배신자로서 권력을 찬탈했다고 생각하였다(2 사무 16:8).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의 내부 구조를 별로 변화 시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어쩌면 그는 그런 변화를 바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부족동맹 체제는 과거와 다름없이 남아 있었고 행정기구나 관료제도는 전려 발달하지 않았다. 사울 이후의 왕들에 비해서 그는 왕궁을 짓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죽을 때까지 자기 천막(요새)을 지켰다.
물론 젊은 군인들을 모아 직속으로 장기복무를 시킨 듯한 사울의 예외적 조치에서 상비군제도와 군사적 귀족정치의 발단을 엿볼 수는 있으나 사울의 경우, 이러한 조치는 단지 그 시대가 요했을 군사적 필요성에서 취했을 뿐 그 이상의 뜻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울이 수행하였던 최초의 전투는 암몬인들과의 전투였다. 이 전쟁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는 토대가 되었다.
길르앗과 야베스에서 전령자들이 상황이 위급함을 알려왔을 때 사울은 야훼의 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독 황소의 각을 떠서 각 지방에 돌려군사를 동원했다. 군대 소집은 성공적이었고, 암몬의 군대는 참패당하여 흩어졌다. 그럼으로써 정세는 근본적으로 달라졌고 동부 요르단의 이스라엘의 모든 소유는 다시 복구되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가 자기를 따랐기 때문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잘 훈련된 군대로, 언제나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중무장을 갖춘 보병으로 형성되었으며, 게다가 주로 용병들로 이루어진 불레셋군에 비해 이스라엘의 군대는 아직도 새로운 철제 무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무기 사정이 형편없이 나빴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며 농부들과 목동들이 일시적으로 모여 전투 주비를 하는 실정이었다.
사울은 항상 전투 준비가 되어 있는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상비군을 만들었으며, 군사적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모색하였다.
3) 다윗의 등장과 사울의 종말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됨으로써 자신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멍에를 지게 되었다. 그의
지위는 카리스마적 자질을 극적으로 한번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무서운 긴장으로 그를 짓눌렀다.
불레셋족의 위협은 사울의 평생 동안 따라다녔다. 사울은 이따금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 위협을 종식시키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각 지파들이 이스라엘 전통 속으로 다시 회귀하고자 했고, 그들은 독립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제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큰 타격은 사무엘과이 결별이었다. 잦은 외침과 내부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던 사울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고립감 때문에 사울의 노년은 거의 광적이었다. 그의 종반기에 접어든 시기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영웅을 맞아 환호하게 되어, 사울은 그 영웅을 이방의 적보다도 더욱 증오하고 배척하였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고, 반대세력 또한 늘어 갔다. 상대적으로 그의 강한 적수(?) 다윗은 영웅의 자리를 굳혀갔다.
결국 사울의 일생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종결되었으며 평생 동안 전투에서 얻은 영토들은 그 집권 초기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어쩌면 헛되어 살고 싸웠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어찌 헛되이 흘러가겠는가. 그가 시작한 왕정은 그 뒤를 이은 다른 왕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스라엘인을 통치하는 데 유효했으며 발전했다.
(2) 다윗 통치시대(B.C.1010-790년)
1)다윗의
출현
사울의 실패가 커지면 커질수록 다윗의 성공은 더욱 찬란해졌다. <사무엘상> 31장의 전승은 다윗에게 왕으로의 길을 열어
주는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무엘과의 결별 이후(곧 왕위 실각 이후) 성서의 전승은 내내 다윗 편이었다.
한편, 사울의 영광과 곧이은 퇴락의 과정에 참여하고, 사울의 퇴락을 더욱 앞당긴 역할을 했던 다윗은 곧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한 터전을 넓혀갔다.
2) 다윗의 집권
유다의 백성들도 틀림없이 다윗을 환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다윗은 그들과 같은 지파 사람으로서 여러
모로 마음을 써서 그들의 땅을 방위할 수 있었던 강력한 지도자고 또 그들과 불레셋인과의 관계를 조정한 지도자고 또한 그들과 불레셋인과의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래서 백성의 동의를 얻어 왕으로 받들어지고 헤브론의 유서 깊은 성소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다윗도 사울의 경우와 같이 왕으로 선출된 군사적 영웅이었는데, 그의 집권에는 몇 가지 새로운 특징들이 따랐다. 다윗은 많은 경우 그 명성을 그의 개인적인 군대 덕분에 얻은 역전의 노련한 무인으로서 이미 사유영지를 가진 봉건영주였고, 한 이방 강국의 봉신으로서 왕좌를 차지했던 것이다. 더구나 유다는 그를 환호하며 억지로 왕으로 추대하였을 때 다른 지파들에는 상관치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울 가문에 남아서 그 왕권을 주장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모여들어, 장엄한
계약의식을 거행하고 환호하며 다윗을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새 왕국은 옛 질서, 곧 사울에 비하여 크게 다른 특색을
보여주었다. 다윗은 단지 과거의 고전적인 관례를 따라 집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세력기반은 결코 부족동맹체제는 아니었다. 더욱 자세히
서술하면, 남부에서 이미 다윗에 의해 통치되던 유다 왕국과 북부에서 에스바알에 의해 정통성을 주장하던 지역이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군합국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를 창건한 이 통일은 깨어지기 쉬운 다소의 약점도 안고 있었다. 사울 가문과 다윗의 경쟁은 두 지역을 더욱 소원하게 갈라놓았음에 틀림없다. 다윗은 확식히 이것을 의식하고서 그 분열의 간격을 넓히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아마 이러한 것 때문에 그는 에스바알에 대하여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았고 또한 자기가 사울이나 압네르, 그리고 에스바알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을 것이다. 또한 그가 사울의 딸 미갈을 자신에게 돌려보낼 것을 요구한 이유도 그와 미갈과의 후손에 의해 사울 가문과의 소원과 갈들을 화합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겠지만 결국 이것도 헛된 희망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다윗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불평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사울 가문의 여전한 권리 주장과 지방적인 시샘은 불시를 안은 채 지속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정이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고질적 난제였으며 나중에는 이스라엘 분열의 큰 원인이 되었다.
3) 통치권의 안정과 확장
<사무엘 하>7장의 나단의 예언에는 다윗 왕조의 안녕과 번영을 약소하는 야훼의 음성이
들린다. "내가 일찌거이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도 그처럼 내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의 약속은 다음과 같은 다윗의 활약으로 이스라엘은 안정과 평화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민중의 자발성과 권리를 일정하게 양보한 결과였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강력하였다. 다윗은 불레셋족을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격파하였고 그들을 본래의 지역에까지 추격하여 몰아냈다. 이 사건의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가 불레셋족의 위협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다윗의 세력 확장을 촉진하였다. 불레셋족이 굴복한 한에는, 그들이 다윗왕 개인에게 속한 봉신관계에 처함을 의미했다. 또한 가나안 땅 전체에 결정적인 세력 변화를 일으켰다.
그 다음 단계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아 단계는 다윗이 품었던 새로운 개척들과 관계 되었던 것 같다. 팔레스티나 땅 전부를 그의 손아귀에 넣는 일이다. 양 이스라엘 국가들 사이에 있었던 도시국가 예루살렘이 적의 수중에 있는 한 전체 이스라엘을 통일적으로 다스리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북과 남을 이어 주는 주요 간선도로가 예루살렘 때문에 매번 차단당했다. 다윗은 공격을 가했다. 용병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밀고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성벽을 강화하였고 페니키아 건축공들의 힘을 빌려 궁전을 세웠으며 그 장소를 '다윗의 도성'이라고 명명하여 자기의 관저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나이 삼십에 왕위에 올라 사십년을 다스렸는데, 그것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는 33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4-5).
4) 제국의 건설
"그뒤 다윗은 불레셋을 쳐서 굴복시키고, 모압을 쳐서 이기고, 하다데젤을, 에돔을 쳐 이기고,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야훼께서는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2사무 8장 참조).
다윗은 이제 전체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국경지역의 커다란 부분도 자기 수중에 넣어서 단기간에 대국을 성립하였다. 이렇게 급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여건과 실로 그런 가능성마저 제공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환경이었다. 그 당시에는 계속하여 동, 서사이에 세력의 공백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 왕국 건설에 다윗이라는 정치, 군사적 천재의 개인적인 업적도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5) 국가제도
다윗이 세력을 확장시킨 결과는 의심할 나위 없이 하나의 대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국은
통일국가가 아니라 매우 복잡해진 구조와 종족들의 결합이었다. 다윗은 여러 왕국들을 자기의 인격 연합안에 합일시켰으며, 다른 지역들을 자신의 개인
소유로 하였다. 또다른 지역들은 속국들로 존재하였다. 그의 존속은 근본적으로 국가 건립자의 결합에 의한 개인적인 통치력의 연속성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위계승을 규정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당연히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진력하였다.
다윗은 국법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과 솔로몬이 인격연합을 통해서 2개의 국가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물론 그 국가들은 솔로몬이 죽었을 때 분단되었다. 다윗 왕조는 대국의 건설뿐만 아니라 국가 분열의 씨앗도 가지고 있었다.
6) 군사제도, 관료기구
다윗의 군인은 그에게 충성을 서약한 용병들이 핵심이었다. 600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이타이(Itai)의 부대와 케레티와 펠레티(Kereti and Peleti)라고 불리는 호위병, 또한 다윗의 작은 영웅들이라고 불리는 30명의
작은 정예부대로 구성되었다.
다윗의 행정기구에 관해 전승은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으므로 다너지 추론한 따름이다. 당연히 다윗을 수장으로 하는 강력한 왕정이었으리라. 이스라엘 자체에서는 관료제도의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의 관료제도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에집트의 의식을 모방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성서의 기록에 보면 "각 지파에서 소집한 군대의 지휘관과 야전군 최고지휘관 요압, 그리고 외국인 용병부대의 지휘관, 왕실 전령관, 왕실 비서실장겸 국무장관, 2명의 제관장 사독과 에비아달 등이다"(2사무 9:15-18). 또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 '강제노역'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자도 고위 관리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복된 영지나 그밖의 다른 지방들에는 지방장관과 그보다 하위의 관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수와 기능과 조직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궁중의 지출과 국가적이며 군사적인 지출에 대해 재정적인 수요와 생활양식은 주로 전리품과 봉신국가들의 정기적인 조세로 지급된 것 같다.
7) 다윗의 말년
다윗 왕국의 약점은 그의 복잡한 구조와 융합을 위한 불균등한 국가의 분배에 있었다. 그가 늙자 이러한
불균등과 복잡한 구조는 시정을 요구했고, 왕실 내부에서는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최초의 반란은 그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꾸며졌다. 압살롬은 그의 누이인 다말이 이복동생인 암논에 의해 강제로 욕을 당하자 암논을 죽여버린다. 암논의 살해로 인해 그는 다윗의 분노를 샀고 모욕적인 조치를 당했다. 그들 부자의 관계는 분노와 원망으로 점점 소원해졌고 결국, 다윗에게 불만을 가졌던 유다인 지파들에 다가가 담판을 벌였다. 또한 압살롬은 와야할 순간이 왔다고 깨달은 순간에 자신을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붓게 하였다. 이 사건은 압살롬이 다윗의 야전군사령관 요압에 의해 굴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일단 종결되었지만, 다윗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지파간의 알력과 아들들 사이의 경쟁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왕위계승에 있어 압살롬을 꺾은 뒤에는 두 사람의 유력한 후계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솔로몬과 아도니야다.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군대가 중요하였다. 자연히 후계자들은 군대의 여러 부류들에 의해서 서로 지원을 받았다. 대개 친위대와 용병들은 솔로몬 편에 있었고 군사령과 요압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결국 다윗의 지명이 솔로몬에게 내려져 왕위계승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아도니야가 거절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얼마든지 추론은 가능하다.
왕위계승은 명백히 궁중 음모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자기 세력의 존속과 화거대를 위해서는 왕권의 계승은 절대로 필요할 거서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세력쪽에 있는 이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큰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드디어 결정의 시기는 왔고 거기에 아도니야의 쿠데타 시도는 그 결정에 구체적인 계기를 주었다. 결국 다윗이 친위대의 보호 아래 솔로몬을
키드론 골짜기에 있던 법궤의 장막 안에서 왕으로의 기름부음을 명함으로써 계승자는 명백해졌다. 그럼으로써 솔로몬의 통치는 시작되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의 크나큰 전통을 손실했다. 그것은 지도자 선택에 있어서 민중의 손으로 뽑아 거기에 환호하고 '야훼의 계심'을 믿었던 바로
그것이다.
(3) 솔로몬 왕정시대(B.C.961-922년)
1) 솔로몬의 통치
다윗의 죽음 이후 솔로몬이
취한 첫번째 조치는 통치권의 안정이었다.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한 정적들은 아직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상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늙은 다윗의 후궁이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 싶다고 아도니야가 청하던 날
좌절되었다. 솔로몬은 그의 정적을 제거해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느꼈다. 곧 그는 아도니야를 죽이게 했으며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요압도 브나야를
시켜 똑같이 죽였다. 또한 사울의 후손이며 압살롬의 반란에 개입했던 시므이도 제거했다. 왕국은 솔로몬의 손으로 인해 굳건히 자리가 잡혀갔고
그것은 솔로몬이 국내정치의 정적은 외국의 원수들보다 더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가능했다.
2) 외교정책
이스라엘 왕조의 최고 절정기를 누렸던 솔로몬은 아버지인 다윗왕과는 달리 이방국들과의 관계를 침략으로 굴복시키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또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300명의 아내와 700명의 첩을 거느리는 규방을 소유한 것과 같이 현명치 못한 요소가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솔로몬만이 할 수 있었던 외교적 동맹관계의 결과였다.
솔로몬은 더 이상 최대의 넓이에 매달랐던 다윗의 치세를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밖으로는 이방인들과, 안으로는 자신의 봉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평온 속에 그 잠재적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할 참이었다. 그는 슬기로운 동맹정책을 통해 이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다.
솔로몬은 외교정잭의 중점을 무역과 상업에 두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가는 주요 통로를 장악했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메소포타미아에서 에집트로 가는 길에 걸터않아 있게 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 띠로와의 동맹이었다. 이 동맹으로 서로 이로운 교역을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띠로에는 밀과 올리브유를 수출하고 레바논으로부터는 솔로몬의 건설사업에 필요한 목재를 수입했다. 이것으로 봐서 수출표본 상품들을 가지고 솔로몬을 방문하 '세바의 여왕'이야기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인 것 같다.
3) 교역과 경제적 번영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위대한 외교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상인이었던 솔로몬은 그 자신이 무역 및
공업의 독접과 왕실 재산에서 얻은 수입으로 부유해져 굉장한 부호가 되었다. 나라 전체의 생활수준도 역시 급격히 상승하였다. 거기에 따라 도시가
발전했고 또 새로운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경제적인 향상은 항상 새로운 사회적 계층과 변동을 수반했다. 비록 무역이 왕실 독점이었지만 가난했던 팔레스티나로서는 비교적 커다란 재부가 그 나라로 들어옴으로써 점차로 풍요해졌다. 무역을 담당했던 상인들과 도시들은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토지와 부동산들을 소유하게 된 대지주가 생겨났다. 점차로 부유해진 주요 도시들은 그들의 부로 가난하여진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얻은 광대한 땅에 커다란 가축 사육장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급격히 번져갔으며 마침내 축복받은 팔레스티나 농부들과 목축업자들은 자유로운 백성의 신분에서 토지와 가축과 자유를 잃어버린 초라한 소작인들과 목동들로 변해버렸다. 점차로 여러 도시들에서는 무산자 계층이 늘어갔다. 이것은 결국 부유층과 가난한 도시빈민, 예루살렘 사람들과 지방 주민들 사이의 불행한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같은 대립은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4) 건축사업
솔로몬은 또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페티키아에서 수입한 목재로 그는 방대한 성전 짓기를 좋아했는데 그것은 대단히
사치스럽고 복합적인 건물이었으며, 주거지로서가 아니라 국가관청으로 사용되었다. 훨씬 규모는 작으나 정치와 종교적으로 의의를 가진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세운 '야훼께 바친 신전'이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 이후 종교적 중심지며 동시에 정치적 중심지였다.
성전 부근에는 복잡한 다른 궁전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 가운데에는 바로 솔로몬의 궁도 있었는데 - 그것은 건축하는 데만 무려 13년이 걸린 굉장히 호화로운 궁이었다 - 굵고 육중한 송백나무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수풀궁'이라 불리었다.
5) 교육제도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어떤 사람도 따를 수 없었고 지혜있다는 에집
트의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1열왕
4:30).
솔로몬의 지혜가 특별히 유명했다면 이것은 원칙적으로 의심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당시에는 일종의 학문으로서 소위 지혜론을
중요하게 생까하던 결과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것만 아니라, 예루살렘이나 궁중에는 지혜를 가르치는 장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솔로몬이 국가행정을 확대시키자마자, 그것을 지원해 주는 관리로 일할 수 있는 그러한 계층이 필요했다. 그 당시 외교적이며 경제적인 활동과 관련해 솔로몬 시대에는 정신적, 문화적인 류가 성행하였다. 따라서 솔로몬은 그의 교육정책과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학교가 필요하였으며 이전에는 이스라엘 밖에서만 존재하였던 학교가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그 학교에서는 에집트의 문화에 대한 지식과 히브리어와 친속성이 있던 나라들의 언어에 대한 지식, 법률지식들도 가르쳤다. 교육은 연령적으로 10세나 혹은 12세에 시작되었으며, 8년 또는 10년 동안의 과정을 가르쳤다.
6) 솔로몬 왕정의 특색과 위기
이스라엘에는 왕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상기 할 수 있는 사람들, 또 왕정이 생기게 된
경위를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정은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거리로 말썽이 되었다. 특히 북부 사람들은
옛 체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왕조 계승의 원칙을 받아들이기는 거절했다. 더구나 다윗 가문이 영구히 통치한다는 주장은
생각만 해도 기분나빳다. 따라서 그런 주장들은 배격했다. 그들 중에는 특히 솔로몬의 전제정치에 격노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방종교를 마구잡이로
끌어들여 이스라엘에 악신이 들끓게 만든 점을 비난하였다. 또한 부유해짐이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어 확장되어 가고, 그 부를 뽐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솔로몬을 왕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든 악의 표양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를 지탱하고 있는 왕정을 축복받은 제도로
여기기는커녕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거기서부터 전승은 솔로몬 치하의 내부적인 위기를 끄러낸다. 그 첫번째 것은 이스라엘인 대부분으로부터 원성을 산 부역노동과 관련하여,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던 여로보암의 반란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솔로몬의 형벌을 피하여 에집트로 도망해야만 했으나 그것은 멀지 않은 훗날 돌발적인 악천후를 예고하는 번갯불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통치를 하는 동안 내내 불신의 근본원인들은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져 그의 사후에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그의 후계자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았고, 훗날 여러보암이 북왕국의 왕으로 추대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분열은 점차 가속화되었다.
솔로몬의 상비군, 그의 건축계획들, 그의 정치적 체제, 그의 아내들, 이 모든 것들은 정말 값비싼 것이었다. 부산한 무역, 성고억인
상업적 모험, 그러나 그 결과에 따른 대가는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 그 나머지 역사는
솔로몬왕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은 예루사렘에서 사십 년간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 그의 선왕 다윗의 성에
안장되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1열왕 11:41-43).
그러나 그가 죽자 곧 반란과 분열의 씨앗이 싹틀
준비를 하고 있었다.
3. 왕국 분열시대(북왕국과 남왕국)
(1) 정치적 종교적 분열
솔로몬의 아들이며 왕위계승자인 르호보암이 국민에게 정부에 대한 의무의 짐을 덜어주기를 거절했을때
왕국의 북부가 갈라져 나갔고, 르호보암 자신도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 솔로몬의 죽음 이후, 전에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안전을 찾기
위해 도망하였던 여로보암이 에집트에서 귀국하였다. 백성들은 선왕에 대한 거부와 르호보암에 대한 거부가 관련성을 가졌던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망명생활에서 귀국한 여로보암을 주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권을 맡김으로써 북이스라엘이 다윗왕가를 확실히 거절했음을 보여주었다. 또하나의
좋지 않은 상황들이 계속하여 있었다. 바로 아시리아의 세력이 위협을 주는 커다란 적수로 등장했다. 그와 함께 르호보암은 새로운 세계적인 사건에
직면하여 무방비 상태였다.
사람들은 점차 다윗 왕가의 르호보암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악의 근원은 예루살렘이 조상들의 신앙에서부터 떠난 것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요셉이 야곱으로부터 받았던 고대의 약속들을 자랑하였다. 이제 솔로몬 시대에 있었던 치명적인 과오로 -- 이방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난 종교적 혼탁 -- 종교의 순수성 또한 사라졌던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작은 전쟁들을 끊임없이 치르게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200년간 계속되었다.
(2) 북왕조(아합에서 예후까지)
북왕조 이스라엘은 생산성이 풍부한 평원과 띠로와 시돈과 같은 가까운 시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인구가 많았으며 더욱 번창하였다. 북이스라엘은 그후 계속된 내정에서, 정력적이고 정치적인 안목을 가졌던 통치자들의 지휘 아래
공고하게 되었으며, 밖으로는 유다를 근본적으로 능가할 수 있었다.
특히 오므리 왕조는 내정적으로는 자기 국가의 단합을 촉구하였으며, 민족간에는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평화적인 공존을 추구하였고, 종교적으로는 바알과 야훼의 공존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은 내정과 종교정책은 자연히 다시금 외정에도 좋은 결과를 주었다. 시리아와 아시리아를 극복하는 것이 당면문제였던 이스라엘은 우선 유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페니키아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하였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여인 이세벨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페니키아 지방에 있는 시돈의 에드바알왕의 딸이었다. 부유하고 근동에서의 세력권을 갖고 있었던 이 결혼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교역의 관계가 맺어졌다.
그 외에 이스라엘은 점차로 강하게 다가오는 다마스커스의 아람인들을 대항하여 동맹자를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일정한 양보를 통해 해결하였다. 이스라엘의 모압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였고 유다 왕 여호사밧의 통치시대에 에돔은 다시 유다 지방이 되었으며, 이것도 유다와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제휴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러가지 압박에도 불구하고 오므리 왕조의 정책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님에도 오므리 왕조는 백성에게서 소외되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의 특정한 계층뿐만 아니라 수도와 군대의 권위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파급되고 있었다.
왕비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신을 섬기기를 강요하였는데 나중에 탄압도 곁들어져 야훼 종교신앙의 전통이 무섭게 흔들리었다. 각 지파
세력들은 이에 반하여 결집되기 시작했고, 곧 혁명의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예후의 혁명이 오므리 왕조를 피로 물들여 버렸을 때
오랫동안 무서운 전쟁이 벌어졌던 라못과 길르앗은 다시 이스라엘 지배하에 들어왔다.
(3) 예후(B.C.842 815) 왕조시대
예후는 종국에 왕권을 잡고 아합의 모든 혈족들을 죽인 후 야훼 종교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아합의 치세에 있었던 만큼 강력해 질 수가 없었다. 예후는 아시라아에 조공을 바침으로써 아람 족속으로부터
보호를 구걸했다. 당연히 띠로와의 동맹결합은 파괴되었다. 따라서 유다와의 동맹도 즉시 중단되었다. 유다의 왕 아하지야는 요람의 아들이며
여호사밧의 손자인데, 그의 어머니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리야로서 아합의 전통을 받았다.
상당히 평온한 시대가 거의 800년에서 750년에 이르는 두 세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후 왕조의 여호아스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였다. 여호아스는 아람족에게 빼앗겼던 요르단강 동쪽의 도성들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들을 회복하여 국토를 안전하게 할 수가 있었다. 유다도 이시대에 번영하여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4) 북와조의 멸망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결하고 자기의 세력형성에 몰두하여 스스로 쇠약해져 가는 결과가 여러
가지 면에서 나타났다.
미천한 백성의 신세는 터무니없이 고달팠고, 국가는 그런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별로 애쓰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예언자 아모스가 알려 주듯이,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병폐는 극심한 부정부패와 극단적인 빈부의 차이였다. 체제 자체가 가혹했지만 가난한 자들의 구제책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재산을 강탈당하고 토지에서 쫓겨나는 가난한 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갔다. 이스라엘 사회의 사회적 분해는 여로보암 2세에 들어서 급격히 심화되었다.
사회적 분해는 종교적 부패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큰 신당들은 예배자들이 모여들어 분잡했고 또 아낌없는 물량지급도 받았지만, 순수한 고유의 야훼 신앙은 이미 유지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대에 부패한 사회에 야훼의 정의를 지킬 칼날을 예고하는 예언자 아모스와 호세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함은 의미심장하다.
(5) 남부왕조(히즈키야, 요시야)
유다 왕국은 조만간에 독립된 실체로서 B.C.587년까지 지탱하였다. 이스라엘의 몰락 때에
유다는 아시라아와 동맹하였고, 아시라아인들은 유다를 그들 제국의 작은 부분국가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수년이 지난 후 히즈키야왕
아래서 유다인들은 아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유다는 재기하는 에집트인들에 의해 격려되고 아시리아 제국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반란에 힘을
얻었으며, 아시리아인들이 고양시키고 있는 종교적 영향에 도피하기를 예언자들에게 고무되었다.
B.C.612년 아시라아의 수도 니느웨가 바빌론 사람들과 메데인들에게 함락당하였을 때 유다인들은 환희에 차 있었다. 그러나 605년 아시라아와 에집트에 대한 승리가 유다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예루살렘은 바빌론 사람들에게 탈취되었고, B.C.597년과 B.C.587년의 반란은 그들의 폭력적인 억압을 받았다. 두 번에 걸쳐 많은 상부계층의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붙잡혀 갔다. B.C.587년 마지막 시드키야왕은 그의 아들들의 처형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역시 소경이 되어 바빌론에 포로로 보내졌다. 이 유명한 바빌론 유배의 치욕을 당한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노략질로 분탕질당하여, 왕궁과 신전과 성벽은 폐허가 되었다.